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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2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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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슬립 워크는 정해둔 15분이되기도 전에 끝났다. 잠이 깬 셋은 급하게 옷차림을 정리하고 침대를 나섰다. 소란 탓에 깼는지 양호교사가 책상에서 고개를 들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미안, 온 줄 몰랐어. 무슨 일이니?"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지 고개를 흔들며 양호교사가 물었다. 그 뒤에 유령처럼 들러붙은 수수를 사야는 보았다. 아까 히츠지의 몸에서 나타난 개체와 많이 닮았다.
양호교사가 하품을 하곤 흐리멍텅한 음색으로 말했다.
"어디 안 좋니? 한 숨 잘 거면 침대──"
"앗, 아뇨, 벌써."
사야가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자 양호교사는 다시금 크게 하품했다.
"……하으. 미안. 선생님도 뭔가 좀 기운이 없네."
"괜찮으세요……?"
사야가 쭈뼛쭈뼛 묻자 양호교사가 말했다.
"그냥 갈 거면 선생님은 한숨 자야겠다."
셋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호교사가 칸막이 커튼을 치고 그 너머로 사라졌다.
"정말…… 선생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한숨 잔거야? 시트가 주름투성이네."
멍한 목소리가 커튼 너머에서 들려왔다.
"상관은, 없는데…… 일어났으면, 정리쯤은 해 둬……"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묵직한 털썩 소리가 났다.
"……선생님?"
셋이 커튼을 슬쩍 당기고 엿보자 양호교사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이불도 놔두고, 옷이며 신발, 안경조차 안 벗고 잠들었다.
사야의 눈에는 양호교사 위에 들러붙은 수수의 형태가 희미하게 보였다. 인간의 수면 상태를 어떠한 형태로 반영하는지 호흡이나 눈꺼풀의 떨림과 함께 수수의 형태도 미묘하게 변화한다. 그 모양새는 수수라기 보단 반투명 도시 미니어처가 인간 위에서 살아 숨쉬는 듯했다.
"수수가 기생했어── 둘은, 보여요?"
사야의 물음에 란과 히츠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안 보여."
"나도."
"역시 나한테만 보이는구나……."
"그런가보네. 어쩔래? 다시 한 번 슬립 워크 할래?"
히츠지가 물었다. 사야는 란과 눈을 마주치고서 말했다.
"놔두자. 이 녀석들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를 먼저 알아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
"그러게요. 수수잡이는 그 다음에 하죠. 방과 후에 침구점에서 봐요."
"알겠어."
잠든 양호교사를 뒤로하고 셋은 양호실 밖으로 나섰다. 한창인 점심시간, 학교는 소란과 활기로 가득차있다. 그런 학교를 걸어가던 사야의 낯빛은 점점 새파래졌다.
"왜 그래 사야."
낌새를 느꼈는지 히츠지가 말했다. 침을 꿀꺽 삼킨 사야가 말했다.
"이건, 위험할지도."
"뭐가요?"
란도 사야를 주목했다.
"늘어났어요──수수가."
사야의 눈에는 여러 수수들이 오가는 학생 사이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의 몸에 박혀 있거나, 머리와 어깨에 올라탄 개체도 있었다. 개중에는 많은 수수에게 기생당해 이형의 구조물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학생도 보였다.
30분 전까진 이렇게 많진 않았는데.
변화의 계기는 명확했다. 세 사람이 슬립 워크를 했기 때문이다.
나이트랜드의 광경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 수수들은 세 사람의 잠에 다리를 세워 데이랜드로 건너온 것이다.

수수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다──.
사카이모리 침구점에 모인 다섯은 이 무시무시한 사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어."
란이 분한 듯 말했다.
"지금까진 이런 적 없었어요? 한 번도?"
사야의 물음에 넷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없었어요. 달리 들어본 적도 없구요."
미도리가 대답했다.
"아이조메 선배네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건 없어요? 비전서나 뭐 그런 거."
"적어도 내가 물려받은 부분에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사카이모리양 집안에서도 그런 건 없는 거죠?"
"네. 전혀요."
"그럼 새로운 현상이란 뜻이 되는데……."
사야의 말에 미도리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도움이 안 되서 죄송해요."
"괜찮아 미도리. 다 같이 생각해보자, 응?"
카에데가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정리해보죠. 일어나는 사건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사야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선, 수수가 데이랜드로 오고 있어요. 이건 저한테만 보이지만, 절 믿는다면 틀림없는 사실이예요."
"믿어."
말 한 마디 없던 히츠지가 툭 대답했다. 다른 셋도 끄덕인다.
"고마워요. 다음으로, 어떻게 왔느냐에 대해선데, 이건 저랑 아이조메 선배가 봤어요. 수수는 저희의 꿈을 타고 나이트랜드에서 데이랜드로 이동해요."
란이 끄덕이며 보충설명을 했다.
"큰 다리 같은 수수였어요. 그런 게 수없이, 우리를 받침대 삼아 데이랜드와 통하는 통로를 만들어서…… 그보다 작은 수수들이 그걸 타고 건너왔어요."
"제가 알아챈 건 나이트랜드에서, 잠든 히츠지 위에 다리가 세워진 것을 봤기 때문이예요. 하지만 히츠지뿐만이 아니었어요. 아이조메 선배도 저도, 명석한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샌가 받침대가 돼 있었어요. 중간에 알아채긴 했어도 그러는 동안에 이미 많은 수수가 데이랜드에 들어왔어요."
미도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얘기, 엄청 무섭네요. 몰랐으면 더 큰 일로 번졌을 거란 얘기죠."
"그렇다고 봐. 아니, 지금까지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던게 아닌가 해서……"
"진짜……?"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내뱉은 카에데에게 사야가 말했다.
"요즘 우리가 꿈 속 통제권을 많이 잃었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수수가 벌인 짓이라고 봐요."
"실험했던 걸지도."
미도리가 끼어들었다.
"실험?"
"수수에게 지성이 있다, 는 전제를 깔아야 하는데──. 잠들었을 때 우리가 명석하다고 믿게 하고선 실제론 통제권을 빼앗아 받침대로 삼는다. 꽤 수준 높은 작전같지 않아요?"
"컴퓨터 바이러스 같네요……."
고민에 빠져드는 란 옆에서 카에데가 말했다.
"그치만 바이러스는 지성이 없잖아. 그치? 지성이 있든 없든 수준 높은 짓을 할 수 있는거 아냐? 우와, 나 금방 엄청 똑똑하게 얘기했어, 대단하지 않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을 마친 카에데의 머리를 쓰다듬던 미도리가 말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어찌 됐건 수수들이 우리를 찾는 건 틀림없다고 봐요."
"우리를 이용해서 데이랜드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기생하고…… 근데 굳이 데이랜드로 나올 이유가 있을까요?"
"나이트랜드에선 슬립 워커가 방해하니까 우리의 의표를 찌른 건 아닐까요……? 추측이긴 하지만."
"귀찮게 됐네요. 이대론 저희를 중심으로 데이랜드에 수수 아웃브레이크(폭발적 감염)가 터지겠어요."
란이 한숨을 폭 쉬고 말했다.
"우린 데이랜드에서 수수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렇다고 슬립 워크를 하면 통제권을 뺏겨서 감염을 확대하게 돼."
"그럼…… 앞뒤가 막힌 건가요?"
사야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미도리가 말했다.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실제로 호카게양 일행은 수수가 손쓴 걸 잠 속에서 알아챘으니까요. 여태까진 컨디션이 안 좋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젠 아니예요. 다 같이 경계하면 알아챈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명석 상태로 만들 수 있어요."
"응. 우리를 속이려 하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으니까."
사야가 끄덕이자 카에데는 열기를 품은 어투로 말했다.
"해 보자고. 당하기만 하는 건 분하잖아."
사야 일행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히츠지는 앉아서 쿠션을 안은 상태로 사야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어색함을 버티지 못한 사야가 반응했다.
"히츠지는 할 말 있어?"
"에."
수업 중에 졸다가 들킨 것처럼 히츠지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 음~, 딱히 없으려나."
"콘파루양 괜찮아요?"
란이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히츠지를 자세히 본다.
"미안, 좀 벙벙해서."
"정신 차려야지 히츠지."
사야의 말에 란이 미소 지었다.
"호카게양, 어느 샌가 콘파루양이랑 많이 친해졌네요."
"엥?"
"이름."
란이 말했다.
"전엔 굳이 성으로 불렀잖아요. 언제부터 이름으로 부르게 됐어요?"
"어……"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사야는 당황했다.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히츠지를 보자 고개를 휙 돌렸다. 나만 친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처음 보는데 잠에 취해서 갑자기 키스를 했다는 악행을 아직 용서받지 못한 모양이다.
어색해하는 사야의 등을 카에데가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친해지는 건 좋은 거잖아. 사야찌는 그동안 내내 거리를 두려고 했잖아. 그치, 히츠지찌"
"……그럴지도."
히츠지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란은 자기 차를 다 마시곤 일어섰다.
"좋아, 그럼 가 볼까. 지금 오시면 수수 무한사냥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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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19.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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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한 것은 9시가 넘어서였다. '낮잠 동호회' 활동이라는 명목이 있다지만 너무 늦었다. 혼나지 않을까 각오하며 살포시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살살 닫았다.
"다녀왔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현관 복도 할 것 없이 불이 꺼진 상태로 거실의 불빛만이 반쯤 열린 문에서 흘러나왔다.
신발을 벗다가 자기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뇌리에 아까 꾼 꿈이 떠오른 것이다. 어두운 복도와 거실 불빛. 미도리가 동생이라는, 꿈이기에 가능한 말도 안 되는 전개에 정신이 팔렸었지만 저 광경은 낯익은 본가 그 자체였다.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가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음소거 상태로 켜진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실내엔 아무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부모님과 언니 모두 있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거실에도, 부엌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창문가에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꿈과 달리 그곳에는 넓은 마당이 아니라 코앞에 세워진 담과 건너편 주차장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밖에 곰은 없었다.
창문 걸쇠를 확인하고 원래대로 커튼을 닫았다. 뒤로 돈 순간 누군가 서있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비명을 질었다.
"아악!?"
"뭐, 뭐야!? 깜짝 놀랐네~"
"어, 언니?"
벽에 손을 대고 불을 켠 것은 아야였다. 형광등 빛을 받은 언니는 어이가 없을 만큼 평소와 같았다.
"어두운 데서 뭐 한 거야? 아니, 언제 온 건데."
"금방……. 엄마 아빠는?"
"거래처 사람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 갔다고 메시지 보내놨잖아."
"아, 미안, 몰랐어."
"사야 저녁 안 먹었지? 뭐 먹을래?"
"아니…… 괜찮아. 나중에 대충 때울게,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방에 가려 한 순간 불이 꺼졌다.
놀랄 틈도 없이 누군가가 등 뒤에 철썩 들러붙었다.
"왜 날 두고 간 거야 사야."
시커먼 실내에서, 누군가 귓전에 속삭였다.



사야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자기 방이다. 아직 어둡다──시계를 보자 새벽 4시였다.
"──꿈이였구나."
정신이 들자 한 손이 누군가를 찾듯 침대 위를 더듬고 있었다. 살짝 찜찜함을 느끼며 팔을 당겼다. 악몽의 충격과 함께 곁에 아무도 없는 침대가 너무 넓게 느껴져 불안함마저 느껴졌다.
불안해하며 손가락을 얽어 잡아당기자 명확한 반응이 느껴졌다. 여기는 데이랜드가 분명한 모양이다.
어두운 천장을 올려보며 안정을 찾으려 하자 시야를 가로지르는 것이 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며 공중을 걷는, 자기 발로 움직이기 시작한 별자리 같은 그것은 사야 위를 지나쳐 베란다와 이어진 창문을 빠져나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수수다.
튕기듯 일어나 창문에 달려가선 베란다로 나간다.
수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수수가 데이랜드에서 활동한다──.

한 번 알아채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사야는 그 날 점심까지 수수 12개체를 목격했다.
꼭 요정을 보는 눈이 생긴 것처럼 수수들은 차례차례 사야의 시야에 뛰어들었다.
집 안. 등굣길. 학교 여기저기. 생물이라고도, 인공물이라고도 하기 힘든 이형의 개체들은 누구 눈에도 띄지 않고 태양 아래를 활보했다.
수수들은 목적 없이 떠돌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애초에 그 진의를 알 수는 없다. 알았대도 슬립 워크상태가 아닌 사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수수도 사야에게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수업중인 교실의 책상 사이를 느긋하게 떠다니는, 해마와 백파이프를 더해 반으로 나눈 것처럼 생긴 수수를 시야 한구석으로 쫓으며 사야는 복잡한 심경으로 생각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수수는 어디까지나 나이트랜드 내부의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애들한테 들은 말도 그랬고 본인의 경험으로 비추어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데이랜드에 나오게 되면 슬립 워커의 전제가 무너진다── 잠의 안팎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아니──그러고 보니.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히츠지와 두 번째로 만나기 직전. 히츠지를 찾아 학교를 떠돌던 사야는 몽롱한 의식 상태로 옥상에 가는 수수를 발견했었다.
그 때, 사야의 불면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환각을 봐도 납득이 갈 만큼. 그러나 지금 사야는 수면장애때문에 고생하는 게 아니다.
일행에게는 이미 메시지를 보내뒀다. 수수가 보이는 건 역시 사야뿐이었지만 다급한 분위기는 전해진 모양이다.

사야 [방과 후엔 창고에 모이고, 일단 긴급 슬립워크해보지 않을래요?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을 하고 싶어요.]
란  [찬성]
히츠지[언제 어디?]
사야 [점심에 양호실]
란  [알겠습니다]
히츠지[ㅇ. 먼저 가서 침대 챙겨놓을게.]

4교시 끝을 알리는 종이 쳤다. 소란스러워질 반을 뒤로하며 사야는 서둘러 양호실에 갔다.
노크하고 문을 열자 양호교사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이 보였다. 살금살금 침대에 다가가 칸막이 커튼을 걷자 히츠지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기다렸지."
말을 걸었지만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았다.
"아…… 벌써 자는 거구나."
사야가 침대에 앉아도 히츠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보드라운 머리칼을 침대 위에 흩뿌리곤 색색 숨소리를 내는 히츠지를 내려다보며 사야가 생각했다.
이렇게 히츠지가 자는 걸 가만히 보는 건 어쩐지 신선하다. 어쩌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슬립워크할 때는 금세 잠에 끌려들어가고, 처음 봤을 땐 정말 순식간이었다.
지금 이렇게 깨 있는 건, 일단은 잠을 제대로 잤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니 히츠지의 블랭킷 능력이란 것도 대단한 녀석이다.
흐암, 큰 하품이 나왔다. 슬슬 옆에 누워볼까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 틈으로 내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란이 들어와 있었다. 몰래 문을 잠그고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제가 늦었죠. 얼른──"
말을 하다 만 란은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했다.
"아흐…… 실례. 얼른 처리하죠. 여길 오랫동안 차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양호 선생님의 점심시간을 뺏으면 미안하구요."
사야의 뒤를 이어 란도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왔다. 역시 보건실 싱글침대는 셋이 자긴 좁다.
"아이조메 선배, 괜찮겠어요? 안 떨어져요?"
"시끄럽게. 일단은 컴플렉스거든……."
"걱정되서 그래요, 근데……."
하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히츠지가 발하는 순수한 졸음이 양 옆에 누운 둘을 무자비하게 감쌌다.



고층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 여기저기에 불길이 일어났다. 총성이 산발적으로 터지고, 빌딩 벽에서 메아리친다.
전투 헬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간다. 사무실이 밀집한 곳에 장갑차와 병사들이 뛰어다니고, 전차가 포를 쏘면 건물들이 차례로 폐허가 된다.
나는 아래의 광경을 보고 떨었다.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집이나 학교는 무사할까──.
학교 하면, 그래, 히츠지는 무사할까. 그 애는 멍한 구석이 있어서 걱정된다. 얼른 데리러 가야한다. 하지면 여기서 어떻게 가야하지?
그 때, 옥상에 있는 전화가 울었다. 박물관에 있을법한 낡은, 빨간 전화.
"사야, 꿈이야."
"물론 알고 있어, 히츠지."
"정말로?"
"히츠지랑 얘기했더니 의식이 명확해졌어."
전화기 저편에서 히츠지가 의심스레 갸웃하는 모양이 보일 것 같았다.
코트를 흩날리며 란이 옥상에 뛰어내렸다.
"선배."
"호카게양, 명석한가요?"
"명석해요, 명석명석."
"정말인가요? 아니 됐어요, 저걸 봐요."
가리키는 곳을 보니 도시 저편에 빌딩보다 훨씬 높게 선 거대 수수가 걸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나아가는 원기둥 다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구름 속에 희미한 교각 같은 게 비쳐보였다.
"크다."
"네. 그리고 하나가 아니예요."
나는 란과 함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도시와 주변 황야에 장대한 크기의 수수가 떼로 걸어가고 있었다. 큰 강에 세워진 다리가 그대로 걸어 나가는 것 같았다.
"……수수, 점점 늘어나지 않아요?"
"틀림없이 그래 보이네요."
내가 란이랑 얘기하자 아직 들고 있던 수화기에서 히츠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한텐 잘 안 보이는데 뭐 하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다리 모양 거대 수수 위에 보다 작은 수수가 득실댔다.
다리 양 끝은 구름 탓에 희미하게 보인다. 한 쪽에서 슬금슬금 새로운 수수가 나타나 반대편을 향해 간다.
제각각에 꼴불견인 행진의 목적지를 보기 위해 나와 란은 걸어가는 다리에 다가섰다. 구름이 걷히자 다리가 바다 위에 걸쳐진 게 보였다. 완만하게 솟은 섬 위를 교각이 넘어가더니 더 앞을 향해 나아간다.
"바다 냄새가 나기 시작하네."
수화기에서 히츠지가 말했다.
"바다에 나왔으니까. 히츠지는 어디서 보고 있어?"
"그걸 잘 모르겠어. 여긴 어딜까?"
갑자기 란이 헉 소리를 냈다.
"설마. 말도 안 돼."
"왜 그러세요?"
"저 녀석들의 목적지. 어딘지 알 것 같아."
"어딘데요?"
"호카게양, 저 섬을 자세히 봐. 뭔가로 보이지 않아?"
교각이 건너가는 섬에 의식을 집중했다. 기묘한 섬이었다.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바위도 아니다. 섬의 윤곽은 섹시하다고 해도 될 만큼, 예를 들자면 그건 꼭 사람──.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히츠지?"
"왜에? 내가 뭐 했어?"
수화기가 손에서 미끄러지더니 아득히 먼 바다에 떨어진다.
섬이 아니었다. 히츠지였다. 콘파루 히츠지. 소중한 내 애인. 누워서 자는 히츠지의 몸을 넘어 수수들이 행진한다. 주위에 퍼진 바다는 어느새 물이 아니라 넓게 펴진 시트였다.
나와 란도 히츠지 양 옆에, 시트 위에 누워있었다. 로프로 묶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눈을 돌리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위에도 다리가 세워져 있었고, 그 무게가 나를 시트의 바다에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기력을 쥐어짜자 겨우겨우 몸이 움찔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났다. 몸 위에 세워진 다리가 기울어지고, 뒤집어지고, 대량의 수수와 함께 떨어진다.
소리쳤다.
"히츠지! 일어나! 이 녀석들 데이랜드에──"



사야는 몸을 잠에서 쥐어뜯듯 각성했다.
소리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앓는 소리만 난 모양이다. 강제로 눈을 떴을 때 특유의 몽롱한 생각과 온 몸에 뭔가가 들러붙어있는 듯 한 감각. 정신을 차리려 시도하면서 사야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콘파루양, 일어나."
쉰 소리로 말하며 잠든 히츠지의 어깨를 흔든다.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표정을 찡그리고 신음했다.
"으응……"
눈을 뜨려 하는 히츠지의 몸에서 연기 같은 것이 살며시 올라왔다. 고개를 든 사야의 시야엔 침대 위에 펼쳐진 반투명 구조물이 보였다. 고치에서 우화하는 벌레처럼, 히츠지의 몸에서 나온 수수가 낮의 세계의 빛에 녹아든다. 모습은 금세 안 보이게 됐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 강한 기척이 사야에겐 아직 느껴졌다.
눈을 비비는 히츠지 건너편에서 란도 일어났다.
"호카게양…… 방금 뭐였어?"
"수수예요, 또 나왔어요."
사야의 말에 히츠지가 갸웃했다.
"나한테는 안 보였어. 어디서 나왔는데?"
"……콘파루양, 몸에서."
"내 몸?"
사야는 끄덕였다.
"수수가 데이랜드로 건너오고 있어── 우리의 잠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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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자취방을 구했던 건 소설가로 데뷔하고 몇 년 지났을 무렵이다.

디자인 전문대를 졸업하고 어째선지 소설가가 되서 단행본도 그럭저럭 정기적으로 내게 됐다. 몇 년 지나자 혼자서도 살 수 있겠다 싶어 의외로 계획 없이 본가를 나와 상경했다.
본가는 사이타마에 있어서 한 시간이면 도쿄에 갈 수 있었고, 회의 자체도 전화가 메인이었다. 원고는 퀵서비스와 메일로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편집자와 굳이 만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집을 나오고 싶었던 건 소설가라는 직업을 아버지가 전혀 이해해주지 않은데다, 엄청난 이웃집 소음 탓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동인활동을 하기 때문에 코미케에 가기 편하면 좋다는 이유였다.
가장 큰 이유는 친한 친구 집이 도쿄에 있어서 허구헌 날 놀러갔다가 자고 오는데, 집에 오기가 귀찮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친구 집 근처로 가기로 했다.
친구는 고쿠분지역 근처에서 룸쉐어 하고 살았다. 근처에서 자취하기엔 집세를 타협하기 어려워서 자전거로 왕복할 수 있는 거리 기준으로 찾았다.

다른 역에서 도보 14분 걸리는 목조 2층 맨션.
월세 6만 5천 엔인 원룸이었다.
사이타마였다면 6만 엔으로 꽤 큰 자취방을 구할 수 있었는데 원룸밖에 안되나 하면서도 애초에 '집' 자체에 집착이 없었기 때문에 첫 자취방으로 고른 곳에 불만은 없었다.

일본식 단칸방에 욕실과 화장실은 따로 있었고 채광도 좋았다.
근처에 슈퍼랑 편의점, 패밀리 레스토랑. 역 근처에는 책방과 문방구. 한 정거장 가면 고쿠분지고, 백화점이 있어서 뭐든 살 수 있었다.
본가에 살적엔 자전거 없이는 편의점도 못 가고, 역에 가려면 부모님한테 차로 데려다 달라고 해야 할 만큼 걸어 다닐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입지는 꽤 좋았다.

중개해준 부동산업자는 예전에 살던 사람이 8년이나 살았다고 했다. 
난 어릴 때 이사가 잦아서 8년씩 산 적이 없었다. '대단하네, 엄청 살기 좋겠네.' 그렇게 생각했다.

사다리 침대와 컴퓨터 책상 그리고 책장을 넣자 단칸방은 삽시간에 복잡해졌다. 오타쿠라서 일단 책이 많았다.
하지만 첫 자취가 기뻐서 친구들도 막 불렀다.
고쿠분지 친구는 물론 신주쿠에 있는 학교 다닐 적 친구들하고도 자주 놀았다.
동인활동을 하려고 월 한 두 번 도쿄 빅사이트에 갔다.
인디 밴드 팬 활동을 시작하고 주 한 두 번 라이브 하우스에 갔다.
친구의 소개로 인쇄소 아르바이트도 했다. 지각에 조퇴를 밥 먹듯 하고 인쇄 일이나 동인지 입고시기가 코앞인데도 갑자기 쉬는, 끔찍한 근태였지만 인쇄소라는 업무 특성도 있고 사장님도 이해해줬기 때문에 잘리지도 않고 편하게 일했다.

늘 외출 중이었지만 우리 집이 정말 좋았다.
아주 편하고, 집에 있을 땐 '아무 데도 안 가고 계속 집에 있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전에 살던 사람이 8년이나 산 것도 이해가 된다. 일단 편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적지근한 늪에 잠겨가는 편안함과 비슷하다.

바쁘고 즐겁게 살다가 내 몸과 마음이 아프다는 걸 깨달은 건 그 집에 산지 딱 1년쯤 됐을 무렵이었다.
아니, 나중에 생각하다가 '그 때였나' 싶었던 것뿐이지 당시엔 전혀 자각이 없었다.

이사한지 1년이 넘었는데 전문대 시절 친구가 '이사 선물'이라며 예쁜 하늘색 부엌 매트를 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왜 지금? 그리고 왜 이렇게 눈 아픈 파란색?'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맙게 받아 부엌에 깔았다.

그 무렵, 사이타마의 애인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한참 지났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정신에 문제가 있었다.
우울증 약 부작용으로 살이 찌고, 웃으면서 부정적인 말만 하니 말이 안 통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다가 실제로 연락을 끊었다. 다행히 이사한 곳과 하는 일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

일할 때도 그랬다. 편집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듣기 싫은 소리를 쏟아 부었다. 어떻게든 참고 웃어넘기려고 하다 보니 전화가 무서워졌다.
내 이야기를 고의로 비비 꼬아 인터넷에 올리고 '이런 소릴 들었어요.' 라며 이르려고 일부러 전화를 해서 정말 무서웠다.
편집자는 곧잘 웃으면서 죽으라고 했다. 엄마는 '남한테 죽으라고 하면 안 돼'라고 교육해서 매번 괴로웠다. 나 자신에게 별 것 아니라고 인식시키려고 일부러 죽으라는 말을 하게 됐다. 금세 말버릇이 됐다. 아직도 툭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매번 마음이 아파진다.

즐겁고 괴롭고 안 괴로운 척을 하며 정신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노골적으로 건강이 안 좋아졌다.
내내 37도가량 미열이 나고, 가끔 38도를 넘어 39도에 가까운 고열이 났다가, 이유 없는 복통에 시달리는 등, 말 그대로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심할 때는 너무 아파서 기절할 정도였다.
어느 병원을 가도 어째선지 제대로 진찰해주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구급차를 불러도 '이정도로 구급차 부르지 마세요!' 라는 간호사에게 혼나고. 그래도 너무 아파서 다른 병원에도 갔지만 정말 어째서인지 거의 모든 병원에서 검사는커녕 약도 안 줬다. 어쩔 수 없이 약국 진통제를 계속 먹었다.

심할 때는 하루에 10개 넘게 먹었었다.
나중 이야기지만 영수증 정리할 때 진통제 48개 들이를 주에 2개씩 샀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통증과 열 때문에 일도 안 풀리고, 좋아하는 라이브나 동인 이벤트를 가다가도 몇 번씩 길바닥에 주저앉곤 했다. 때로는 앉는 것도 고통스러워 바닥에 널부러지기도 했는데 주위 사람은 딱히 걱정해주지 않았다. 별 희한한 짓을 한다고 혼나거나, 무시당하거나, 혐오 당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이지, 왜 아무도 안 도와줬는지 이해가 안 된다.
병원에 갔다는 얘기, 제대로 진찰 안 해줬다는 설명을 해도 믿기는 커녕 '네 잘못이겠지'라고 혼났다.
틀림없이 당시의 내 상태가 어지간히 안 좋아서 그냥 미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당시의 기억이 흐릿해서 사실은 걱정해준 사람이 있었던 걸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 일들은 기억에서 꽤 많이 사라져있다.

심신 모두 만신창이라 식욕도 전혀 없어서 매일 푸딩 하나만 먹었다.
저녁 즈음에 근처 편의점에 가서 하나 사고, 토하지 않게 하루 종일 천천히 먹었다.
더 이상 의자에 앉을 기력도 없어서 개복치라는 큼직한 앉은뱅이 의자를 사서 거의 눕듯이 지냈다. 무릎에 노트북을 대고 소설을 쓰기도 했다.
개복치 주변에 빈 푸딩 껍데기가 굴러다녔다.

역시 미친 걸로밖에 안 보이네.

침대에서도 못 자게 돼서 개복치 위에서 큰 수건을 이불삼아 잤다.
사다리 침대를 못 올라갈 만큼 기운이 없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또 하나의 큰 이유는 붙박이 벽장의 문이 침대에 있어서 내가 누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른다. 나는 벽장문이 거슬린다는 생각에 그걸 뗐다. 하지만 너무 커서 둘 곳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대 위에 얹은 것이다.

쓰는 나도 이해가 안 된다. 당시엔 아주 당연했다고 해야 하나, 아주 이성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우면 웬 남자가 귓전에서 뭐라고 하는데 그게 시끄러워 잘 수가 없었다.
누가 있는 느낌은 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베개에 머리를 대면 남자의 말소리가 귓전에 들린다.
내 집인데 누가 있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네, 그런 생각과 함께 침대에서 안 자게 됐다.

그렇게 살다가 열은 38도를 넘고선 내려가지 않고, 통증이 멎질 않아 계속 토하게 됐다.
어느 날 밤, 너무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 고통이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전신에서 쿵쿵대는 욱신거림만이 이어졌다. 아, 이거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의외로 명확하게 죽음을 예감했다.
어렸을 때는 죽는 것, 혹은 죽음 그 자체가 무서워서 잠 못 드는 아이였는데 그 때만큼은 이 통증과 몸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참을, 몇 달째 자고 싶은데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고 싶었다. 그냥 자고 싶었다. 푹 자고 싶다. 지금 자면 두 번 다시 못 일어나도 되니까 일단 의식을 잃고 싶다. 자게 해줘.

그렇게 바라다가 잠들었다.
잠들었다기보단 기절했다.
깼다가 또 기절하기를 밤새 반복했다.
부엌에 벌러덩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해 뜰 무렵이었다. 아, 안 죽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기듯 밖에 나갔다.
사실은 구급차를 부르고 싶었지만 또 무서운 간호사한테 혼날까봐 열심히 집을 나서고 큰길로 갔다. 끙끙대며 택시를 잡았다.

택시 운전사가 몇 년간 만난 사람 중 가장 다정했다.
나도 모르게 계속 끙끙거렸는지 괜찮냐고, 천천히 갈지 몇 번이나 물어봤다.
차가 응급실 입구 근처에 도착하고서도 같이 가줄지 물어봤는데 어째선지 헤죽헤죽 웃으며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답하곤 혼자 걸어갔다.

아픈 건지 괴로운 건지도 모를 상태로 정말 기듯이 느릿느릿 복도를 걸어 접수처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나가던 의사와 간호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거기 있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나도 어째선지 의사 같은 사람들한테 '도와주지 않으려나' 하고 마음속으로만 바라고 말을 하진 않았다.
한참 걸려서 겨우 창구에 도착했다. 접수하고선 로비에서 또 기절했다.
간호사가 귀찮은 듯 여기서 자지 말라며 몇 번이고 깨웠다. 하지만 또 기절했다.

겨우 내 차례가 와서 진찰을 받았다.
더 이상 말할 기력이 없었지만 어찌어찌 상태를 말하자 의사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복부 초음파인지 뭔지를 보던 의사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안색이 변했다.(아마도)
"보호자분 불러주세요."
라기에
"없어요."
라고 하자
"혼자 왔어!?"
비명처럼 소리 지른 건 묘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간호사 두 명이 휠체어를 가져왔다.
"걸을 수 있어요" 내가 말했지만 "일단 앉아!" 라며 강제로 휠체어에 앉혔다. 그리곤 중환자를 다루듯 천천히 검사실로 옮겨가선 더 자세히 검사했다.
다시 진료실에 가자 의사는 '바로 수술할 겁니다.'라고 했다.
무슨 일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뱃속에서 큰 종양이 터져 복막염이 됐다고 한다.

"당장 가족분 불러서 동의서를 써 주세요."
그래서 집에 전화했다.
내가 말을 제대로 못 했는지 엄마는
"집에 와서 이쪽 병원에서 수술할 순 없니?"
라고 했다.
아마 그 때 본가쪽 병원까지 갔다면 중간에 죽었을 것이다.

알바 하는 날이라 인쇄소에도 전화했다.
지금 수술해서 알바 못 간다고 했더니 사장님은 '에이~ 거짓말~' 이라며 믿어주지 않았다. 당연하다.

연락을 돌리자 이번엔 휠체어가 아니라 수술대에 눕혔다.
정말로 바로 수술 안 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뒷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중간 중간에 옷을 갈아입은 것, 수술실에 간 것, 수술이 끝났다는 말과 함께 어디 갈 때 덜덜 떨며 헛소리처럼 춥다는 말만 반복한 기억이 난다.

어느 정도 의식이 돌아온 건 병실이었다.
몸이 이상하게 무겁고, 시야는 어둡고,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팔에 링거가 달리고 배에는 농을 뺄 드레인이 꽂혔다. 소변관과 함께 등판에 진통제인 모르핀이 투여됐다. 고 한다.
아마 모르핀 때문인지 수술 후 며칠간 기억이 없다.

입원생활은 굉장히 힘들었다.
병원은 낡은데다 어둡고 냄새나고. 배는 아프지 다리는 붓지 등은 가렵지, 죽을 만큼 목이 말라도 물을 안 주고. 아빠가 왔나 했더니 '당신은 엄마가 돼서 딸이 아픈 것도 몰라!' 엄마한테 그렇게 말을 하지 않나. 뒤척이지도 못하는 게 괴로운데다 병실에 있을게 진절머리가 났다. 어찌됐건 매일같이 빨리 퇴원할 수 있기를, 내 방에 혼자 있을 수 있기만을 바랐다.
이따금 이유 모를 발작이 일어나서 고열이 나는데도 온몸이 차갑고, 춥고 또 추워서 떨림이 멈추지 않는 공포에 공황이 온 게 제일 힘들었다.
좌약을 많이 맞았다.

한 달 가까이 입원했을 것이다.
그동안 엄마와 할머니가 내 방을 정리해줬다고 한다.
내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는데, 군데군데 토사물 흔적이 있고,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해서 빨래가 쌓여 있었는데, 다행히 푸딩 말고 음식을 먹은 적 없던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비정상적으로 청결한 걸 좋아하는 할머니가 치웠다니 엉망인 방에서 맘대로 뭘 많이 버려서 텅텅 비어있을 것이다.
각오를 한 나는 퇴원하고 오랜만에 내 집에 갔다.

택시가 집 앞에 서고 차에서 내렸다. 문득 건물을 본 나는 헉 하고 놀랐다.

"어… 나 왜 이런데 사는 거지…?"

건물이 기억하던 것과 달랐다.
자취는 굉장한 해방감과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했고, 집은 그 상징이었다.
목조집이지만 지붕은 어쩐지 멋지고 깔끔한, 좋은 건물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초라했다.
판잣집 같았다.
그리고 어딘가, 어둡다.

이상하다, 아직 몸이 안 좋아서 마음까지 같이 어두운 탓에 그래 보인 건가.
다 나아서 퇴원한 게 아니라 통원치료를 하는 단계였던 나는 갸웃거리며 집에 들어갔다.
뭐든지 버려버리는, 깔끔한 걸 좋아하는 할머니 손에 걸려서 어떻게 변했을지 조심조심 들어간 집은 변함없다고 해도 될 만큼 어지러웠다.

책장에 다 안 들어가 근처에 흩어진 산더미 같은 책은 깔끔하게 쌓여있었고, 그 많던 빨래거리는 의류 정리함에 다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뭔가, 두서가 없었다.
가구, 커튼, 식기를 비롯한 모든 게 통일감이 없었다. 전부 '왜 이게 여깄지?' 하는 엄청난 위화감을 뿜고 있었다.

아니, 난 왜 여기가 편한 집이라고 생각했지?
공기는 텁텁하고 어둡고.
전부 엉망에다가 춥기까지 하다.

엄마와 할머니도 나를 걱정하긴 했지만 바로 본가로 돌아가셨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여길 뜨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안좋아 부동산에 갈 수도 없었다.
병원에서 괴롭혔던 수수께끼의 발작도 이어져 밤은 고통 그 자체였다.
침대 위의 벽장문을 어떡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던 것 같은데…?

몇 달 후에 마침내 새 집으로 이사했다.

이사한 후에 하늘색 키친 매트를 준 친구를 만나 이사했다고 하자 친구가 말했다.
"왜 내가 누구한테 선물 잘 안하잖아."
맞아 안 하지. 쫌생이라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원래 선물을 주고받질 않잖아.
"근데 나오 방이 너무 무서웠어. 특히 욕실이나 부엌이 엄청나게 어둡고 추워서 밝은색 소품이라도 있으면 밝아질까 했거든…"

뭐야, 무서워져서 다른 친구들한테도 물어봤다.
"그게, 신경 안 쓰는 것 같아서 말 안 했는데 그 방 엄청 어두워서 무서웠어."
"맞아 놀러갔다가 오면서 그런 얘기 많이 했지."

뭐, 뭐야….

또 다른 지인과도 얘기했다. 멀리 사느라 우리 집에 온 적은 없지만 밖에서 몇 번 얼굴 보고 놀러간 적은 있는 사이였다.
이사하고 또 만났을 때 날 보고 굉장히 밝게 웃었다.
"아 다행이다, 오늘은 아무 것도 안 붙였네."
라고 했다.
어라, 화장 제대로 하고 왔을 텐데… 고개를 갸웃하자
"전에 봤을 때 남자가 두 명 붙어있었어요."
날씨 얘기라도 하듯 덧붙였다.
"둘 다 없어졌어요. 잘 됐네요."
난 심령현상을 믿지 않는다. 절대, 믿지 않는다.
"그래서 말해봤자 안 믿겠다 싶어서 아무 말 안 했는데."
…지금으로선 말해줬으면 좋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남자가 두 명 붙었으니 이사하래도 갑자기 이사할 순 없잖아요?"
거야 그렇지만.

본가를 나와 자취할 계기가 된 친한 친구도 한참 뒤에 그 얘기를 했다.
친구도 심령현상은 전혀 안 믿고, 자칭 영능력자 얘기가 나오면 슬쩍 웃으며 흐름을 바꾸는 타입이라 웃어넘기리라 믿었다.
실제로 웃어넘기긴 했다.
"그럴 리가 있나. 아 그래도 부엌이랑 욕실은 어두웠지. 아파트가 낡아서 전구도 낡은 거 아냐?"
이사할 때 전구가 없어서 전부 새것으로 끼웠어….
자주 고장 나서 생각보다 훨씬 자주 새걸로 바꿨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 그 집에 왔던 친구들 모두, 100%가 어두웠다고 했다.
입을 모아 욕실이나 부엌이 어두웠다고 했다.
남자가 붙었느니 하는 소리는 당연히 빼고. 어두웠냐고 묻자 어둡고 무서웠다고들 답했다.
유도심문인가 싶어 저번 방 어땠냐고 물어본 사람들은 편하긴 했지만 빛이 잘 안 들었다고 했다.

코앞이 대로변이고 빛을 막을 것도 없는, 아주 빛이 잘 드는 집이었는데.

몇 년 전 근처에 갈 일이 생겨서 그냥 그 집 근처를 가 봤다.
아파트는 아직 그곳에 있었고, 전혀 무섭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집은 '굉장히 살기 좋았던 집'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구글 맵으로 집 주소를 검색하고 로드뷰로 봤다.
이상하다. 외관이 기억과 다르다.
파란 지붕에 진한 크림색 현관이었을 텐데, 전혀 다르다.
이사하고 꽤 지났으니 다시 칠했을 수도 있겠지만 몇 년 전 기억과도 다르다.
중개업자 이름이 들어간 판만 기억과 완전 같았다.

난 정말 그 아파트에 살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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