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소설'에 해당되는 글 2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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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11.12 2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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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0.11.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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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0.11.12 14
  9. 2019.12.24 13
  10. 2019.12.19 12

내일 세상에 별은 빛난다
stars twinkle in tomorrow world
츠카사 저
뭇슈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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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유키

아버지가 남긴 마술을 쓰는 소녀.

작다.

 

사카키 호노카

목적이 있어 여행하는 소녀.

몸매가 좋다.

 

페라

유키의 아버지가 남긴 펭귄형 사역마

12월 찬바람을 견디며 꼭 붙어서 잡담을──


목차

서장
제 1장 위치 라이프
제 2장 유키와 호노카
제 3장 펭귄 비박
제 4장 종말의 마녀
종장


서장
세계가 멸망했습니다.
뭐 오늘도 변함없이 하늘은 푸르고, 귀엽게 생긴 구름이 떠다니고, 따스함과 서늘함이 섞인 5월 바람은 기분 좋고, 강변에 피는 들꽃은 예쁘지만.
하지만 역시 이 도시──내가 혐오하는 세계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

기분 좋은 햇살 아래 타박타박 차도 중간을 걷는다.
차는 없으니 문제없다. 도로엔 까맣게 탄 오토바이나 연쇄 충돌 탓에 박살난 승용차만 방치된 상태.
평일 대낮부터 교복을 입고 차도를 활보하는 여고생에게 잔소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고생의 패션에서 탈선한 '예스러운 나무 지팡이'를 든 내게 호기심 담긴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없다.
이 도시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 하나.
죽은 인간이라면 수없이 많다. 그것도 아주 우글우글.
지금도 도로변──빌딩 그림자 속에 득실득실.
흔들흔들, 휘청휘청.
허술한 발걸음으로 배회하는 시인(屍人)들.
다들 옷은 넝마짝. 창백한 피부가 얼룩지듯 벗겨져 검붉은 살점과 하얀 뼈가 드러난 상태다.
──아무리 봐도, 역겹습니다. 움직이는 시체란 건.
햇빛을 싫어하는 저들은 낮이면 저렇게 그늘진 곳을 서성인다.
다만, 싫어할 뿐이지 딱히 약점은 아니다.
먹잇감이 보이면 양지로도 나온다.
지금도 한 마리씩 슬금슬금 나를 향해──.
"쀼이쀼이!"
그 때 어깨에 걸친 학교 가방에서 북슬북슬한 회색 조류──아기 펭귄이 고개를 빼고 높은 소리로 우짖는다.
"페라, 조용히 하세요. 알고 있으니까."
꽈악.
나는 '사역마'를 억지로 가방 속에 들여보낸 다음 손에 들고 있던 긴 나무 지팡이를 반 바퀴 빙그르 돌렸다.
빨간 돌이 박힌 지팡이 끝을 발밑에 굴러다니던 파편에 콕 찍었다.
그리고 염원하며 속삭였다.
"움직여줘."
왈칵 하고 몸에서 힘이──체온이 빨리는 감각.
지팡이를 통해 내 '열'이 전해지자 무게가 10킬로는 됨직한 파편이 두둥실 떠올랐다.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 파편을 내 머리위에서 돌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붕붕대며 퍼지는 와중에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늘에서 나온 시인들 탓에 앞뒤 할 것 없이 막혔다.
바람에 섞여 생물이 썩어가는 냄새가 퍼져온다.
나는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옆으로 휘둘렀다.
부앙!
원심력이 더해진 파편이 지팡이의 움직임을 따라──난다.
콰앙!
파편이 직격한 시인의 머리가 비산했다.
나는 그대로 몸까지 돌려 날아다니는 파편으로 다른 시인까지 떨쳐낸다.
퍼퍼퍽 철퍽 와장창 쿵쾅──!
연이어서 터지는 소리. 흩날리는 검붉은 혈액. 누르스름한 뇌수.
파편은 기세를 살려 하늘로.
──마지막 하나.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시인을 향해 파편을 힘차게 떨어트렸다.
우직!
머리가 정수리부터 박살나고 몸엔 파편이 박힌 시인이 무릎부터 바닥에 기우뚱 너부러진다.
머리를 잃은 다른 시인들도 실이 끊긴 듯이 털썩털썩 쓰러졌다.
시인은 머리──뇌를 파괴당하면 움직일 수 없다. 단순한 시체가 된다.
──그럼 이 틈에.
나는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여기서 나가면 주위에 높은 건물은 없다. 정오인 지금 시인이 밀집할 그늘은 적다.
머릿속으로 비교적 안전할 루트를 그리며 나는 죽은 도시를 거닌다.
이 멸망한 세계에 내가 아직 살아있을 수 있는 건 시인들을 물리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얼마 전까진 나 자신도 몰랐지만…… 난 보통 인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쀼이?"
다시 가방에서 고개를 내민 아기 펭귄형 사역마──페라에게 나는 웃어 보인다.
"이제 괜찮아요. 얼른 볼일만 보고 저택으로 돌아가요."
이번엔 페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쁜지 미소 짓는 페라를 보자 내 표정도 풀린다.

이 도시에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인 나는── 마녀.
오늘도 그럭저럭, 재밌게 삽니다.


제 1장 위치 라이프

4월 7일 화요일.
자 오늘부터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고등학생의 삶이 시작됩니다.
중학교 때보다 불쾌한 나날이 되겠습니다.
아침에 출발하며 본 일기예보를 패러디해서 나──미나토 유키는 인생예보를 가슴속에서 말해본다.
하나도 재미없다. 웃어넘길 수도 없다.
4월 하늘은 이렇게 푸르고 벚꽃은 아름다운데 심경은 전혀 밝아지지 않는다.
아빠, 전 언제까지 참으면 되나요?
다른 학군 학교에 입학하는 걸 완강히 거부한 아버지──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무뚝뚝한 표정을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물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
아빠에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약한 부분을 보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빠랑은 5년 넘게 불화상태니까.
입학 때문에 얘기한 게 오랜만에 나눈 대화다.
'……아빠, 나 가능하면…… 요코하마 …… 기숙 사립 고등학교──'
'안 돼. 이 집을 떠나선 안 된다.'
대화라고 해봤자 이게 전부다.
이유를 말할 틈도 없었다. 이유를 물을 틈도 없었다.
결론이 나온 이상 무슨 말을 더 해봤자 비참해질 뿐이다.
아빠에게 동정당하는 건 싫다. 아빠 앞에서 센 척 하는 게 내게 남은 유일한 자존심. 그래서 그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역시 후회된다.
다른 학생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지각 직전에 등교했지만── 교문을 지나, 건물에 들어서고, 교실과 가까워질수록 다리가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오늘은 시업식.
하지만 지난 입학식 때 내가 앞으로 누구와 고등학교 생활을 보낼지는 이미 알았다.
초, 중학교 때와 거의 똑같은 면면.
나를 비웃어온 사람들.
변한 건 없다. 모든 게 그대로 최악──.
"……정말, 발전이 없네요."
교실 앞에 도착한 나는 복도에 떡하니 놓인 책상과 의자를 보고 작게 투덜댔다.
책상에 이름이 적히진 않았다.
하지만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 교실에 들어가 보면 분명 내 책상만 없을 것이다.
문이 닫힌 교실에선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틀림없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며 들떠있을 것이다.
──책상에 낙서라도 해주면 알기 쉬울 텐데.
저들은 증거를 남기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도저히 성장이라곤 하지 않는 얼간이들인데, 이런 부분에서만 영리해지는 것이다.
드라마나 만화처럼 알기 쉬운 왕따는 '여기'에 없다. 왜냐하면 왕따는 나쁜 짓이니까. 누구든 자기가 악당이 되긴 싫은 법이니까──.
모두들 '일반인'인 채로 나를 비웃는다.
──……정말, 최악입니다.
딩-동-댕-동.
책상 앞에 서 있자니 종이 쳤다.
"왜, 무슨 일 있냐?"
뒤에서 말을 걸기에 돌아보자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 선생님이 서 있었다.
──분명 담임선생님…….
"저, 이게── 아마 제 책상 같은데요……"
용기를 낸 나는 아주 자그마한 기대를 담아 책상을 가리켰다.
이제 전해졌을 것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어른이니까,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 빨리 안에 들여놔. 벌써 종 쳤다."
그는 모르는 척, 귀찮은 표정으로 말한다.
그저 책상과 의자가 교실 밖에 나온 것뿐이다. 구체적인 악의의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선생님도 '저쪽'에 가담한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는 셈이니까…….
──역시, 똑같다. 내 일상은 변함없다.
대단한 희망을 품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낙담한 나는 뒤로 돌아 걸어 나간다. 교실에서 멀어진다.
"어, 야! 어디 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조퇴할게요."
온갖 것을 '진지하게' 대하는 게 갑자기 멍청하게 느껴진 나는 대충 변명했다.
선생님은 쫓아오지 않았다. 뭐라 말을 더 하지도 않았다.
내 변명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게 덜 귀찮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면 그런 대로 나한테도 편하다.
오늘은 시업식이랑 HR뿐이라 성적에 영향은 없다.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일부러 웃음거리가 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는 합리적으로 선택했다고 내게 핑계를 댔다.
하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얼굴이, 눈가가 뜨거워진다.
──왜 나는,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까요.
나는 '강한'선택을 한 걸 텐데…… 가슴 속에 점점 후회가 들어찬다.
어떻게 변명한들 내 자신에게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허세를 부리고, 달관한 척을 해도, 나는 안다. 내가──도망쳤다는 사실을.
도망치는 건 나쁜 짓이 아니라고, 부드럽고 달디단 말을 흔히 듣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도망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도망치면 '패배'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혐오하는 것들에게 지기 싫었다. 하지만──.
시야가 울렁이고, 뜨거운 물방울이 뺨에 흐른다.
──분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우는 모습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고개를 처박고 걷다, 걷다, 걷다보니── 어느새 우리 집 앞이었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서양식 저택. 훌륭한 석조 건물이지만, 담쟁이덩굴이 벽을 뒤덮고, 금간 창문은 안에서 나무 판자로 막아── 밖에서는 어떻게 봐도 귀신의 집이다.
이런 집에 사는 탓에 초등학교 때부터 내 별명은 '마녀'였다.
게다가 아빠는 '마술사'를 자칭하며 오컬트쪽 의뢰를 비싼 값에 해결하는, 수상한 직업의 소유자다.
근처 어른들은 아빠를 사기꾼이라 불렀다. 학교에서는 나를 마녀라며 놀렸다.
놀림 받고, 괴롭힘 당하는 매일.
나는 아빠에게 이상한 일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포기했고, 아빠와의 대화도 멈췄다.
그러고부터 한동안 나는 아빠와 달리 '정상'이라고, 마녀 같은 게 아니라고 열심히 어필 해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를 '비웃고 싶은'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유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 연장선상에 현재가 존재한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진 않게, 버텨내는 매일.
중학교 2학년 2학기──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 아이'와 즐겁게 보내기도 했다.
'유키~! 또 보자~!'


뇌리를 스치는 건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소녀와…… 작별 인사.
그녀와 보낸 시간은 꿈처럼 스쳐갔고, 빛을 잃은 매일이 다시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오늘, 나는 마침내 도망쳤다. 절대 지기 싫은 것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면 아빠한테 더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전부 솔직히 얘기하자. 더는 싸울 수 없다고. 이제는 무리라고, 다 말해버리자.
그렇게 결심하고 집에 들어갔지만, 눈에 띈 것은 거실 테이블 위의 쪽지.
"……일 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란 말이죠."
이 얼마나 최악의 타이밍인가.
늘 아귀가 맞질 않는다며 한숨을 쉬고, 쪽지 옆에 놓인 것을 쳐다본다.
그것은 '입학 선물'이라고 적힌 선물 봉투. 내용물은 돈이 아닌지, 부자연스럽게 빵빵했다.
"오늘은 입학식이 아니라 시업식이지만요."
쓴웃음과 함께 선물봉투를 들고 뒤집었다.
손바닥에 톡 떨어진 것은 작은 아기펭귄 인형이 달린 스트랩.
"──와, 귀엽다."
회색 털이 몽실몽실하게 귀여운 아기 펭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왔다.
"펭귄…… 인가요."
휴대전화도 안 사주면서 스트랩이라니──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근질대는 감정이 솟구친다.
──펭귄이 좋다고 했던 건 유치원 때잖아요.
아직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 온 가족이 함께 간 수족관에서 본 황제 펭귄. 그게 너무 맘에 들어서 한 때는 펭귄 그림이 있는 것만 사 달라 했었다.
아빠에게 있어서 나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받아 드릴 테니까…… 돌아오시면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나는 어디 멀리 있을 아버지에게 말하고, 휴대폰이 없는지라 학교 가방에 펭귄 스트랩을 달았다.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도 못하고──.

*

4월 8일 수요일.
나는 결국 오늘도 학교에 간다.
이미 도망친 탓에 어제보다 발걸음이 무겁다.
하지만 아직 어떻게든 싸워야 할 이유가 있다.
난 가방에 달아놓은 펭귄 스트랩을 살며시 잡았다.
이건 '입학 축하'선물로 받은 스트랩. 그러니까 이 펭귄과 함께 하루쯤은 학교에 가야지만 아빠의 선물을 제대로 받은 실감이 날 것 같아서다.
등굣길은 평소와 똑같다. 강변길에 핀 벚꽃이 아침 해에 반짝인다.
──하지만 아마도, 그 때 이미 시작됐던 것 같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나는 게 들렸지만 어디서 사고가 났나보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다행히 교실 밖에 내 책상과 의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게 '다행'인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눈에 안 띄게, 최대한 조용히 교실 문을 연다.
어제처럼 웃음소리가 나질 않고 웅성임의 파도만이 나를 둘러쌌다.
교실엔 벌써 학생들 태반이 있었지만 저들은 패거리별로 모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거 실화냐……?"
"주작 빳다죠 쉬바."
"동영상이 있는데──"
한 마디씩 들려오는 말소리. 혼자 자리에 앉은 학생들도 휴대폰 화면을 집어삼킬 듯 쳐다본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걸까요.
하지만 휴대폰도, 친구도 없는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등교 전에 늘 보는 아침 방송은 특별한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창가에 모인 여자들 중 하나가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앗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저 애는 내가 혐오하는 것 중 하나. 초등학교 때부터 곧잘 같은 반에 배정되는 요네지마 양.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를 비웃는 사람. 비웃을 이유가 없으면 만드는 사람. 아마 어제 책상을 꺼낸 것도 요네지마 양이 한 짓.
"──아, 미나토 양도 우리 반이었구나~ 어제 없어서 몰랐네~"
입가에 역겨운 미소를 띄우며 부자연스럽게 말한다.
"…………"
나는 말없이 눈을 돌리고 복도 맨 뒤쪽 자리에 앉았다.
표정과 말, 모든 것이 비웃을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진저리가 날 만큼 잘 안다.
"에~!? 무시해~!? 너무해앵~ 그러다 친구 없는 찐따 고딩되면 어떡해?"
큰 소리로 피해자 흉내를 내는 그녀였지만, 근처에 있던 애가 휴대폰을 보며 "와 미쳤네!? 이거좀 봐!"라고 하자 "뭔데 뭔데~?" 라며 그리로 갔다.
역시 무슨 큰 사건이 난 모양이다.
앞으로도 매일 나 같은 건 잊어버릴 만한 사건이 일어나면 좋을 텐데.
이뤄질리 없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이 좀 지나 수업 종이 치고, 담임선생님이 왔다. 나를 슬쩍 보더니 바로 눈길을 돌렸다. 반응은 이게 끝.
"자 다들 앉아~"
시치미를 떼는 표정으로 잘난 척 명령하는 선생.
소란이 사라지고, 아침 HR이 시작됐다. 출석 확인과 전달사항 몇 가지를 말하고는 더 이상 나를 보려고도 않고 교실을 나섰다.
이 다음은 1교시인 수학.
교실 구석에 앉은 내겐 교실 분위기가 잘 보인다.
많은 애들이 수업을 듣는 척 휴대폰을 만진다.
"어이, 수업 중에──"
그걸 깨달은 선생이 주의를 주려고 한 순간──.
콰앙!!
굉음이 나기에 나는 깜짝 놀라 쪼그라들었다.
──깜짝…… 놀랐어요. 뭐지……?
심장이 쿵쾅대는 걸 느끼며 소리가 난 창문 쪽을 쳐다봤다.
우리 교실은 1층에 있고, 창밖으로는 교문과 이어진 길, 그리고 운동장이 보인다.
언뜻 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쳐다보고 깨달았다. 꽉 닫힌 철제 교문 옆에서 연기가 난다. 자세히 보니 교문 옆에 기울어진 자동차가 조금 보였다.
"사고……?"
누가 그렇게 내뱉자 침묵이 깨지고, 소란이 커졌다.
"조용히들 해! 일어서지 말고!"
수학 선생이 일어나려는 학생들을 막고 창가로 간다.
조금만 늦었다면 다들 창가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앉은 채 목을 빼서 창문 너머를 쳐다보고, 옆자리와 소곤소곤 떠들었다.
잠시 후에 교문으로 선생 두 명이 달리듯 다가간다. 트레이닝복을 입었으니 체육 선생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교문이 아니라 옆의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
무슨 '목소리'같은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라 단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의 나열이었기 때문이다.
교실의 소란이 커진다.
창밖으로 상태를 보던 수학선생의 안색이 변했다.
그 때 출입문에서 트레이닝복을 입은 선생이 혼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트레이닝복의 한쪽이 빨간색으로 물든 상태였다.
소란이 사그라진다. 교실이 적막에 휩싸인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를 못 한 것이다. 나도 모른다. 그러니 입을 열 수가 없다.
또 한 명, 이번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 선생이 교문으로 달려간다.
"어, 담임 쌤이다……"
학생 중 누군가가 내뱉었다.
분명 그는 아까 HR때 봤던 담임선생. 뒷모습이지만 착각할 거리는 아니다.
그는 휘청대는 트레이닝 복 선생에게 달려가 부축하려 했지만…….
"────!!"
또 그 소리다.
나는 안다. 아까 들은 것은…… 남자가 지른 비명이라는 것을.
담임선생이 절규한다. 트레이닝 복 선생에게 잡히고, 그대로 바닥에 깔려 버둥버둥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직후에 담임선생의 목 근처에서 빨간 체액이 안개처럼 솟아올랐다.
두쿵, 두쿵, 두쿵──.
심장 소리가 시끄럽다. 손이 떨려 들고 있던 샤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휘청, 어색한 움직임으로 빨간색 범벅이 된 트레이닝복 선생이 일어섰다.
잠시 후에 쓰러져있던 담임선생도 비칠대며 일어선다.
무사해서 다행이다──라 할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멀리서도 확연히 창백한 안색이라 도무지 무사해보이진…… 살/아/있/다/곤/볼/수/없/었/으/니/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교실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마 다른 교실에서도 일제히.
다들 동시에 지른 비명과 일어나는 소리가 합쳐져 학교가 흔들렸다.
다른 반 학생들이 복도를 달려가는 걸 보고 몇 명이 따라서 교실을 뛰쳐나갔다. 이번엔 수학 선생의 제지도 효과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태반의 학생은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교문 옆 출입문에서 온 몸에 피범벅을 한──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걸 본 순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내 자리는 복도쪽 맨 뒷자리. 정확히 문 옆.
난생 처음 보는 필사적인 표정을 지은 요네지마 양이 멍하니 서있던 나를 짜증에 가득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꺼져!"
힘에 나가떨어진다.
다리가 접질린 나는 넘어졌다. 무릎과 팔꿈치가 아프더니, 그 직후에── 등을 밟혀서 숨이 턱 막혔다. 수많은 신발이 나를 차고, 짓밟는다. 피하려는 사람은 없다.
비상사태니까, 나니까 상관없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리라.
변명을 할 수 있다면, 올바르게 보일 이유만 있다면 이 사람들은 더없이 끔찍한 짓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아파, 아파, 아파──제발 그만해.
몸을 옹송그리고 폭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린다.
짓밟는 발이 사라지고, 사위가 고요해져도 통증 탓에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서, 이대로 있다간 위험하다는 위기감이 몸을 움직였다.
"으윽……"
팔다리와 배에서 느껴지는 둔통을 참으며 나는 책상에 매달려 일어선다.
아무 소리가 안 나서 알곤 있었지만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수학 선생도 애들을 따라 나선 모양이다.
두쿵, 두쿵──.
심장은 아직 크게 뛴다. 창문을 보자 '움직이는 시체'는 건물 코앞까지 몰려온 상태였다.
저건 뭐야? 누구? 현실인가? 꿈이 아니라면 잘못된 거야. 하지만 아파.
온 몸이 너무 아프다. 등이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팔이 아프다. 무서워. 무서워무서워무서워. 아파무서워괴로워──.
아, 또 누군가 잡혔다. 교복을 안 입었으니 아마…… 선생.
왜 막아주지 않는 걸까. 선생인데. 어른인데. 저 사람들은 언제든지 날 구해주지 않는다. 물렸다── 피다. 피, 피, 피── 정말로 붉은──.
"아…… 아……"
말이 잘 안 나온다. 떨리는 손길로 가방에 교과서를 허겁지겁 채워넣는다.
──나, 뭐 하는 거지…… 왜 돌아갈 준비를…… 맞아요, 돌아가야…… 빨리 도망쳐야…….
돌아가자, 돌아가자돌아가자돌아가자── 도망쳐야해도망쳐야해도망쳐야해──!
제대로 생각을 못 하는 상태로 묵직해진 가방을 걸쳤다. 아기 펭귄 스트랩이 살짝 흔들렸다.
──돌아가……도망쳐? 아니 어디서? 교문엔 저 사람들이…….
교실을 나서려던 순간 걸음이 멎었다.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갈 수 없어? 그럼 어떻게어떻게어떻게──.
밖은 위험해. 1층도 위험해. 이제 곧 저게 들어와. 도망쳐야해── 그럼 위? 빨리 도망쳐야해── 하지만 아마 다른 애들도──.
밖이 안 된다면 일단 위로. 안 된다면 더 먼 건물로── 어찌 됐건 여기 머무르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하지만…… 도망친 곳엔 분명 '모두'가 있다. 요네지마 양이 있다. 날 계속 비웃고, 무시하고, 짓밟아온 사람들이 있다──.
무섭다. 저 움직이는 시체만큼, 나를 비웃는 학생들이.
그래서 움직일 수 없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복도에서 난 소리에 몸을 깜짝 움츠렸다.
가깝다── 움직이는 시체는 이미 건물 안에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 오지 마!
"윽……"
나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교실 문은 안쪽에서 잠글 수 없다.
대신 책상을 문 앞으로 옮기고 2층으로 쌓아 쉽사리 못 들어오게 만들었다.
목덜미를 살며시 스쳐간 바람에 창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사적으로 창문을 죄다 닫고, 잠가 두었다.
"헉…… 헉…… 헉……"
왜…… 왜 이런 일이──.
거칠고 빠르게 헐떡대며, 나는 교실 창가 제일 뒤쪽에 주저앉았다.
안고 있던 가방에 고개를 처박고 두 손으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달리 지금 가능한 행동이 떠오르질 않았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멀리서 비명이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꿈이라면 당장 깼으면 좋겠다. 깨라 깨라, 깨 줘──.
제아무리 빌어도 깨어나질 않는다. 애원하다 지친 나머지, 나는 아마 이대로 죽을 거라고 머리 한구석에서 생각했다.
하지만── 꽉 눌린 귀가 아파져도, 끝은 찾아오지 않는다.
귀가 너무 아파서 힘을 살짝 뺐다.
"────!!"
각오는 했지만 비명이 갑작스레 손가락 틈새로 쏟아져서, 더 쪼그렸다.
가깝다── 아마, 창밖이다.
들린 이상 무서워도 확인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창 밑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살펴봤다.
"헉……!?"
비명이 터지려 하기에 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건물 바로 앞, 화단 건넛길에서 여학생이 공격당한다. 시뻘게진 교복을 입은, 창백한 낯빛의 남학생에게 잡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요네지마 양.
여학생이, 내가 혐오하는 인물임을 깨달았다.
이런 광경을 바란 적도 있었으리라. 혐오하는 모든 것이 붕괴하는 꿈. 나를 비웃는 이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망상──.
그럼 역시 이건 내 꿈인 걸까. 하지만 깨질 않는다. 몸은 아직도 아프다.
그리고…… 전혀 기쁘지 않다.
꿈이 이뤄졌는데도 전혀 가슴 벅차지 않다.
그저, 무섭고 무섭고 무섭고── 두려울 뿐.
남학생이 요네지마 양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안돼애애애애앳! 하지── 꺄아아아아아아악!!"
절규하는 그녀의 눈알이 바쁘게 구른다.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뛰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나는 아직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가 떨어졌을 때의 공포와 고통이 되살아난다.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보지마보지마보지말아주세요……!
그녀의 목에서 피가 힘차게 터져 나오더니 창문에 쏟아졌다.
붉게 문든 광경 저편에서 그녀는 눈을 휘꺼덕 까뒤집고── 움직임이 멎었다.
안심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무서운데, 더 이상 그녀가 비웃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남학생이 휘청대며 일어섰다. 어색한 움직임으로 나를 향해 온다.
얼굴은 긁힌 자국 투성이에, 뺨의 살점이 큼직하게 떨어져 나갔다. 백탁색 눈과 새파란 살갗은 시체 그 자체다.
그는 입가로 붉은 피를 흘리며 창문을 향해 다가왔다.
"힉──"
엉덩방아를 쿵 찧고, 그대로 뒤로 기었다.
싫어. 싫어싫어싫어──.
하지만 뒤에서 난 큰 소리에 나는 굳었다.
뒤를 보자 책상으로 막아둔 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복도에도 틀림없이── 움직이는 시체가 있다.
퍽── 피투성이 창문을 창백한 손이 두들긴다.
도망칠 곳이 없다. 심지어 다리도 풀려 일어날 수도 없다.
쨍그랑!!
두 번째 공격에 유리가 깨졌다. 파편을 맞으면서도, 남은 유리에 살점이 긁혀나가는데도 움직이는 시체는 교실로 밀고 들어온다.
뒤에는 아까 죽은 요네지마 양도 보인다── 경직된 표정 그대로, 마치 웃는 듯 한 표정으로 '죽었으면서 움직이는' 그녀를 본 나는 쉰 소리를 내뱉었다.
"아직도…… 절 비웃는 거군요."
분했다. 죽을 때까지 비웃음 당하는 나 자신이.
하지만, 손 쓸 도리가 없다.
그렇게 포기한 순간, 내 이해를 더 뛰어넘은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느낀 것은 눈부심.
왜 그런가 하고 눈길을 돌리자 가방에 메여있던 펭귄 스트랩이 눈부신 빛을 떨치고 있었다.
"어……?"
빛이 점점 커지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쿵…… 뭔가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머리 위로 자잘한 파편 같은 것이 후두둑 떨어졌다.
조심조심 눈을 떴다.


"하?"
눈앞에, 거/대/한/황/제/펭/귄/이/서/있/었/다.
황제 펭귄은 원래 큰 편이지만 내 앞에 선 것은 그 몇 배는 컸다. 머리가 1층 천장을 뚫고 나가서, 떨어지는 파편 사이로 검고 맑은 눈망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뭐람── 저,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요?
환각인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펭귄은 사라지지 않았다. 
"푸~"
약간 낮은 소리로 거대 펭귄이 울었다.
바로 옆엔 창문으로 들어온 움직이는 시체.
상황이 너무 정신 나가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뭐예요! 시체가 움직이고, 거대 펭귄이 나타나는데 역시 이건 꿈 아니예요!? 꿈이면 빨리 끝나주세요! 빨리 빨리 빨리──.
상황 그 자체에게 화를 내며 손등을 꼬집었다.
하지만 그저 아플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이 짓밟힌 몸은 아직도 욱신대며 아팠다.
고통으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엉망진창인 현실은 끝나지 않는다.
"푸~"
펭귄은 내게 말하듯 울더니 커다란 부리를 열었다. 그리곤 그대로 숙이며 내게 머리를 들이댄다.
"어? 어……?"
──뭘 하려는…….
큰 입이 머리 위로 다가오고, 나는 의아해했다.
가방 째로 온 몸이 펭귄의 부리에 끼었다.
"어어? 잠──"
잠깐만. 잠깐잠깐잠깐──!
몸이 힘차게 들린다. 목에선 으햐악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머리 한편에서 문득 펭귄이 생선을 집어삼키는 이미지가 스쳤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그만──"
펭귄은 나를 물고 위를 쳐다봤다. 그곳은 2층 교실. 나도 거꾸로 뒤집어진다.
"아."
아래엔 거대한 황제 펭귄의 검고 깊은 식도가──.
꿀꺽.

그렇게 저는 거대 펭귄에게 통째로 먹히고 말았습니다.


2

차닥, 차닥──.
움직이는 시체가 득실대는 도시를 거대한 황제 펭귄 한 마리가 걸어간다.
잘딱잘딱 짧은 걸음으로 천천히── 그러면서도 착실히 목적지라도 있는 양 거침없이 걸어간다.
그것은 너무나 비정상적인 광경.
하지만 생존자를 찾아 배회하는 시체들은 펭귄이 안 보이는 것처럼, 옆을 지나도 반응하지 않았다.
펭귄은 곳곳에서 차가 불타는 대로변을 지나 벚꽃이 핀 강변을 통해, 고급 주택이 늘어선 언덕길을 올라, 부지가 한 층 더 큰 낡은 저택 앞에 멈췄다.
주변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움직이는 시체가 없었다.
"푸~"
펭귄이 낮은 소리로 울었다.
그러자 닫혀 있던 철문이 저절로 끼이이익 열렸다.
펭귄은 차닥차닥 걸어 저택 부지에 들어갔다. 그러자 문은 또 저절로 움직이더니 철컹 소리를 내며 닫히곤 잠겼다.
현관 앞으로 온 황제펭귄은 위를 보고 목을 꿀렁대더니 배를 흔들었다.
그리고 힘차게 숙이더니── 입에서 한 소녀를 내뱉었다.


3

──저, 죽었었죠? 죽은 거죠?
어둡고 미적지근한 어둠 속에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죽었으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여긴 아마 거대 펭귄의 뱃속. 그런데 어째선지 숨이 쉬어지고, 오히려 편하기까지 하다.
아까부터 주기적으로 흔들린 데다, 나를 감싼 온기가 합쳐져 졸음을 불렀다.
"흐암……"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한 순간, 주변의 어둠이 요동쳤다.
"어?"
몸이 뒤집히는 감각.

철퍽!

어렸을 때 워터 슬라이더를 탄 기억이 스쳤다.
그 순간을 연상시키는 가속도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는 어둠 속에서 한 바퀴 돌았다.
엉덩이에 꿍 하는 충격.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빛.
갑자기 밝은 곳에 던져진 나는 눈이 부셔 인상을 썼다.
빛 속에 보이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음침한 저택. 혐오스러운 우리 집.
살아 있어? 저, 살아 있나요? 정말?
"푸~"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거대한 황제 펭귄이 서 있었다.
"히익──"
아까 '먹힌' 기억이 떠올라 나는 깜짝 움츠렸다.
그런 내 앞에서 황제 펭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단순한 수축이 아니다. 온 몸이 줄어듦과 동시에 성체成體가 '젊어'진다.
"뭐, 뭐에요……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 나는 읊조린다.
"쀼이쀼이!"
겨우 몇 초 만에 조그매진 아기 황제 펭귄은 커다랬을 때와는 다른, 높고 귀여운 소리로 울었다.
그걸 본 나는 황제 펭귄이 나타난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때…… 펭귄 스트랩이……"
설마 아빠에게 받은 스트랩에 달린 펭귄이 '이것'인 걸까.
"쀼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30센티쯤 되는 아기 펭귄이 긍정하듯 울었다.
날개를 파닥대더니 몸을 양 옆으로 흔드는 펭귄.
"……귀여워."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털과 짧은 날개, 맑고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힘껏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하지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뻗은 내 손을 피하듯 펭귄이 현관을 향해 차닥차닥 걸어갔다.
그러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현관이 저절로 열리더니 펭귄이 저택 안에 들어갔다.
"아…… 자, 잠깐만요!"
나도 퍼뜩 일어나 펭귄을 쫓아갔다.
오래된 저택이라 현관은 홀 형태고, 커다란 골동품 추시계가 지금도 추를 흔들며 시간을 알린다.
아기 펭귄은 그 추시계 앞에 탁 멈춰 섰다.
"저, 저기……"
떠듬떠듬 말을 걸었다.
그러자 펭귄은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짧은 부리로 추시계 받침 부분을 콕 쪼았다.
대앵─…….
그러자 정시도 아닌데 추시계가 울리더니── 추가 들어있는 자리 앞판이 벌컥 열렸다.
"쀼이쀼이!"
그 안을 가리키듯 펭귄이 울었다.
"……뭔가 있나요?"
펭귄에게 질문하는 나는 아직 제정신인가 생각하며, 몸을 굽혀 추시계 안을 들여다봤다.
"아."
흔들리는 추 너머에 막대기 같은 것이 걸려 있다. 그리고 바닥판 위엔 새하얀 봉투가 있었다.

그것은 아빠가 남긴 편지.
막대기로 보인 것은 예스러운 나무 지팡이.

'유키, 네가 이 편지를 읽었다는 건, 사방에 시인이 넘쳐나는 상황이겠지. 나는 그 때를 대비해 네게 '마술'을 남긴다.'

이 날, 세상은 멸망했고── 나는 진짜 마녀가 됐습니다.


4

"벌써 한 달인가요……"
강변길을 걸으며 마음을 담아 말했다.
시업식 다음 날, 이 도시는── 인간의 세계는 치명상을 입고, 조금씩 죽어갔다.
첫 날 밤엔 아직 TV가 나왔지만 모든 방송국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라고 적힌 화면만 표시됐다. 아빠 방에 있던 낡은 라디오를 처음 써 봤지만 잡음만이 들렸다. 인터넷이라면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집엔 컴퓨터가 없고, 스마트 폰이 있는 아빠가 없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이틀째에 가스가 안 나오는 걸 알았다. 사흘째 밤에 정전, 복구 안 됨.
이따금 멀리── 집 밖에서 뭔가가 충돌하는 소리나 자동차 엔진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나흘째엔 잠잠해졌다.
2주 후…… 집 밖에 나가보자 살아있는 인간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이제는 5월.
아름다운 핑크빛 꽃이 피었던 벚꽃도 푸르른 잎이 무성하다.
오늘은 아주 맑지만 6월이면 장마가 시작된다. 햇빛이 줄면 시인들은 낮에도 밖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멀리 가려면 지금…… 인걸까요."
그렇게 말하곤 왼손에 든 '전리품'── 빵빵하게 들어찬 비닐봉투를 내려다본다.
안에는 휴지나 비누, 샴푸 같은 소모품. 이것들은 평소에 가던 편의점에서 얻은 것이다.
편의점은 물자 보급 장소로서 꽤 편리하다. 밖에서 안이 어떤지 거의 다 보여서 시인을 먼저 처리하고 안을 안전하게 탐색할 수 있다.
음식은 없었지만 이만한 소모품을 얻었으니 성과는 충분하다. 이제 해가 지고, 도시의 '그림자'가 짙어지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위험한 지점은 이미 지났으니 앞으로는 비교적 편한 길이다. 강변길은 둑 위에 나 있어서 해가 잘 들기 때문에 낮에는 시인이 거의 다가오지 않는다. 만약 근처에 있어도 시야가 넓어서 바로 보인다.
하지만 나무 지팡이를 든 오른 손에는 자연스레 땀이 배인다.
──시인 대처법은 익숙해졌지만 역시 밖은 긴장됩니다…….
시인을 쓰러트림에 있어 이제는 거의 저항감이 없다. 저것은 모양만 사람인 무언가니까. 짐승조차 아닌, 생명 없는 것들이니까.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쉽게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움직이는 시체와 친지의 얼굴을 겹쳐 보며 공격을 망설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대다수의 인간은 원래 '적'이었다. 게다가 자기들이 악당이 되지 않게, 복수당하지 않게 비겁하게 공격하는 사람뿐이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훨씬 알기 좋다.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나도 주저 없이 반격할 수 있다.
머리를, 뇌를 파괴하면 '승리'할 수도 있다.
그저 '지지 않기'에 매달리던 지난달의 일상과는 천양지차다.
뭐 물론…… 공격당하는 건 무섭고, 가능하면 싸우고 싶지도 않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예전엔 그렇게 싫어하던, 기분 나쁜 우리 집이 그립다. 돌아가면 1주일은 틀어박혀서 뒹굴뒹굴 대고 싶다.
──지금 읽는 소설 뒷권도 궁금하고요…….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그림자는 확실하게 경계한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간 나도 허무하게 시인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외줄타기 하는 삶일지라도 전보다는 훨씬 편하다.
나를 비웃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정말이지 시원하다.

탕!!

그 때, 어디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 한 소리가 났다.
"!?"
숨을 들이켠 나는 걸음을 멈췄다.
"쀼이?"
어깨에 멘 가방이 흔들리더니 귀여운 아기 펭귄── 사역마 페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이 없고 차도 없는 도시는 보통 아주 조용하다. 시인들이 으으 소리를 내긴 해도 그건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만 낸다.
그러니 큰 소리는 꽤 먼 곳까지 퍼진다. 그것은 죽은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물질과 같다.
탕탕!!
또 들렸다. 이번엔 연속해서 났다.
"이건……"
나는 두리번댔다.
이 주변은 주택가라 건물이 적다. 둑 위에서라면 꽤 먼 곳까지 보인다.
죽은 도시는 평소와 같다. 하지만 하늘엔 날아다니는 새떼가 보인다.
다다다다다다다다다!!
이번엔 소리가 조금 변했다.
세계가 종말하기 전에, 치안이 나쁜 나라를 다룬 뉴스나 영화에서 곧잘 들은 소리.
강 하류 쪽 공원 주위에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총소리?"
직접 들은 건 처음이지만,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생각해왔다. 만약 이 나라에 아직 생존자가 있다면 아마 총기를 보유한 사람이리라고.
일본에서 평범하게 살아오던 사람들은 시인을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시인은 인간보다 힘이 아주 세니까. 다가오면 거의 끝이다. 시인을 쓰러트리려면 멀리서 머리를 파괴할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술로 파편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같은 '마녀'뿐이다.
누구든 쓸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생각나는 건 총 정도.
지금 이 도시에 온 누군가는 총기 같은 걸 소유했기 때문에 요 한 달을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경찰이나 자위대일까요? 아니면 혼란한 판국에 총을 얻은 사람일지도. 뭐 어느 쪽이건…….
"피하는 게 낫겠죠……?"
가방에서 고개를 내민 페라에게 혼잣말처럼 물었다.
"쀼이?"
하지만 아기 펭귄은 귀엽게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페라와 말이 안 통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아빠가 나를 위해 남겨준 사역마니까. 내 명령에 따라 주지만 내 뜻에 간섭하지 않는다.
맑고 검은 눈이 '직접 정하라구?'라는 듯 느껴진다.
"그치만…… 위험한 사람이면 어떡해요? 아니…… 보통 사람이라도 안 돼요. 제 존재를 알게 되면 분명 화 낼 거예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그럼에도 나는 페라에게 내 생각을 쏟아 부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이 도시에, 저만이 '안전지대'를 소유하고 있는데, 저는 아무도 구하지 않았어요. 무서워서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거나…… 그 때는 마술을 쓸 줄 몰랐다거나…… 그럴듯한 이유는 있지만── 실제로는, 저한테는 '구하고 싶은' 사람이 이 도시에 아무도 없었을 뿐이예요."
그래서 나설 수 없었다. 나서지 않았다.
'결계'가 쳐져서 안전한 저택을 나설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아빠를 욕하는 이웃들이 혐오스러웠으니까. 나를 비웃는 사람들이 미웠으니까.
"쀼이……"
내 참회를 얼마나 이해했을지, 페라는 조금 작은 울음소리로 맞장구 쳤다.
"그러니, 누가 됐건 절 혐오할거예요. 저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을 혐오할 거구요. 그런 제가 모르는 사람을 구하러 나설 이유가 있나요? 구한 사람이 욕을 하기라도 하면 제 손해가 아닐까요?"
페라의 눈에 비친 내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을 혐오……해도, 전/부는 아니지 않나요?
"……"
뇌리를 스치는 건 꿈만 같은 1주일.
중학교 때 유일하게 사귄 '친구'와의 즐거운 추억.
분명 전부는 아니었다. 내겐 아빠 말고도 싫지 않은 사람이 있다.
여기서 낯선 이방인을 무시하면, 이 단 하나뿐인 예외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일단, 보기만 하러 가 볼까요."
이건 대화가 아니라 결론.
"쀼이!"
페라는 힘차게 납득의 울음소리를 냈다.
장소는 아마 아까 새가 날아간 공원 근처.
다다다다다다다다──!!
울려 퍼지는 총소리는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5

강변길의 하류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 집은 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빙 돌아가는걸 넘어 완전한 탈선.
한참을 가자 나무에 둘러싸인 넓은 공원이 보였다.
총소리는 아직도 산발적으로 났다.
둑에서 쳐다보자 공원 주위에 수많은 시인이 모여 있었다.
──엄청난 수…… 총소리가 근처 시인을 불러 모은 거겠어요.
총이라면 시인을 없앨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 이상으로 시인을 모아서야 의미가 없다.
아마 총이 있는 경찰 같은 경우도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렸으리라.
"아──"
찾았다.
공원 중앙 근처 미끄럼틀 위에 자리 잡은 사람이 보였다.
그냥 우락부락한 남자를 상상했지만 그 사람은 여자 같았다. 게다가 입은 옷은 교복처럼 보인다.
그녀는 병사들이 멜 법한 큰 총을 벨트로 어깨에 걸치고, 두 손으로 잡은 권총을 주변 시인에게 조준했다.
탕! 탕!
건조한 총소리가 두 번 나더니 미끄럼틀을 기어오르려던 시인 둘이 균형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어쩐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시인이라면 이미 일상의 일부지만 '총을 쏘는 소녀'라는 장면은 더없이 비현실적이다.
언뜻 봤을 때 그녀는 총을 아주 잘 다뤘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시인의 습성을 잘 파악했다는 증거다. 시인은 움직임이 느리지만 특히 위아래로 움직일 때 이런 특징이 아주 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시인의 수는 계속 늘어나, 조만간 실패할 것이 뻔했다.
어째서 저런 상황이 됐는지 눈길을 돌려보다 공원 입구에 쓰러진 소형 바이크를 발견했다.
──분명 저 바이크가 고장 나던지 어쨌던지 해서 멈추고, 시인에 둘러싸인 거겠네요.
라고 냉정히 상황을 분석하는 나 자신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저…… 냉정한 사람이네요. 진짜 마녀처럼."
위험에 처한 소녀를 보고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내게 남이라는 것은 먼 존재였다.
하지만…… 딱히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안 든다. 그래서 '가능할 것 같으면 구하자'는 마음으로 구출 방법을 생각해본다.
시인이 저렇게 모여 있으면 파편으로 하나씩 머리를 깨 봤자 언 발에 오줌 누기. 돌파구를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지쳐버린다. 그러면──.
나는 옆에 흐르는 강을 쳐다봤다. 조잡하긴 해도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어떻게 해결될지도 몰라요."
전리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둑을 내려갔다. 그리고 강가에서 들고 있던 지팡이 끄트머리를 물에 참방 담갔다.
"떠 줘."
바라면서 속삭이자 내 열이 지팡이를 통해 물에 전해진다.
강을 흐르는 물과 내가 이어졌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수면이 크게 솟아오르고, 강의 일부가 구형 물덩이가 되어 떠올랐다.
일시적으로 강에 큰 구멍이 뚫리고, 강바닥이 들여다보였다.
남겨진 물고기들은 파닥파닥 뛰었지만 이내 주변의 물이 흘러들어 강의 빈 부분을 채웠다.
소용돌이치는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은 박리된 강 덩어리.
"영차……"
지팡이를 수직으로 들자 거대한 수구는 내 머리 위로 움직이더니 둥실대며 멈췄다.
조금 무리를 한 지라 몸이 무겁다. 하지만 저 소녀를 구하기 위해선 물이 이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수구를 띄운 상태로 영차영차 둑을 올랐다. 여기서 넘어지면 말 그대로 물거품이다. 어찌어찌 비닐봉지를 놔둔 곳까지 와서 둑 반대편── 공원의 상황을 확인했다.
소녀는 아직 미끄럼틀 위에서 닥쳐오는 시인들과 전투중이다.
──음, 저 '높이'라면 아마 괜찮겠죠.
지팡이를 앞으로 눕히자 내 머리 위에 떠 있던 수구도 약간 앞으로 움직였다.
그 상태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기 가만히 계세요!!"
총성이 멈춘 틈에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일이 거의 없던 지라 목이 아팠다.
소녀가 이 쪽을 쳐다봤다.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나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지팡이를 쥔 손에서 힘을 빼고── 마술을 유지하는 '이미지'를 무산시킨다.
커다란 물덩어리가 퍽 터진다.
해방된 물은 단박에 둑을 다고 내려가더니 공원으로 힘차게 흘러들었다.
물줄기에 먹히고 밀려가는 시인들.
하지만 미끄럼틀 위의 소녀는 격류에 쓸려가지 않는다.
물이 지나가자 그녀 주위의 시인은 소탕돼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임시방편. 시인을 쓰러트린 게 아니기 때문에 금세 다시 모인다.
"빨리요! 지금 이리로 오세요!"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치자 멍하니 있던 소녀는 정신을 차린 모양으로 미끄럼틀을 내려 나를 향해 달려왔다.
둑과 공원 사이에 있던 시인은 아까 터진 물줄기에 전부 떠내려갔다. 지금이라면 시인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다.
──이, 이제 어떡하죠…….
다만…… 나는 다가오는 소녀를 앞에 두고 긴장에 굳어졌다.
구하긴 했지만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예상도 안 된다.
마술을 쓰는 모습을 봤으니 적어도 마술에 관한 질문은 피할 수 없겠지.
"쀼이!"
페라가 경고성을 냈다.
내 존재를 알아챈 시인들이 나를 향해 움직인다.
그녀와는 더 이상 얽히지 말고 나도 도망쳐야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허둥지둥 비닐봉지를 주워들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한 순간──.

"유키!"
──엥?
이/름/을/불/린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뛰어서 둑을 올라오는 소녀는 헐떡대며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허억…… 허억…… 아── 역시 유키구나……"
벨트로 큰 총을 어깨에 걸치고, 오른 손에 권총을 든 교복 소녀.
그녀는 긴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며 희희 웃는다.
"야호…… 오랜만."
흙먼지에 지저분해도 저 얼굴을 착각할 리가 없다.
"호노카……"
나도 그녀의 이름을 내뱉는다.
사카키 호노카──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한 친구의 이름.
다시는 못 만나리라 생각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부터 포기했다. 그건 일주일짜리 행복한 꿈이었다고. 하지만──.
"다행이다…… 살아 있었구나. 근데 아까 그건 뭐야? 물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와── 그 펭귄 혹시 진짜야? 뭐야 너무 귀엽잖아!?"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호노카.
아무리 봐도 그녀는 꿈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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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9

20

호카게 아키는 문득 눈을 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데운 실내 온도는 땀이 날 정도였지만 일어나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자기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은, 넓은 객실에서 자 보려고 했지만 잠은 안 들고, 꿈속에서 또 가위에 눌렸었는데 갑자기 이불을 뺏기고, 내던져지나 싶더니…… 그 충격 탓에 깬 것일까. 이런 애매한 기억도 급격히 희미해지더니 이내 떠올릴 수가 없어졌다.
세수를 하려고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사야 방 앞을 지났지만 동생의 인기척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동생을 본 것 같은 흐릿한 기억이 남았다. 어쩐지 즐거워보였다. 언니가 가위에 눌렸는데도 꺅꺅거리기에 묘하게 짜증이 났지만── 평소의 무뚝뚝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층에 내려가 세면장에서 세수했다. 아주 오래 잔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머릿속이 깔끔했다. 방에 들어가다가 현관을 쳐다봤다. 사야의 신발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친구를 보러 간다고 했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 들은 사야의 밝은 웃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의외긴 했지만 친구랑 있을 때는 그런 성격일지도 모른다.
아키는 샌들을 대충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연보라와 노랜 색이 섞인 노을이 예상치도 않게 아름다워 한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평온한 저녁 분위기가 온 도시를 감싸 안았다. 아키 뒤, 집 안에서도 소리가 난다. 아무래도 부모님도 잠에서 깬 모양이다.
저녁 먹을 때까진 돌아올까──. 아키는 현관 앞에 선 채 사야를 무의식적으로 찾으며 황혼 속의 마을을 쳐다보았다.

사카이모리 침구점 침실에선 세 사람이 동시에 의식을 되찾았다. 소파 위에서 서로에게 기대 잠들었다……기 보단 아주 잠깐 기절한 듯 한 감각이었다. 잠시 끊긴 기억에 당황하다, 세 사람은 깨달았다. 이번엔 오랜만에 셋 다 저항 없이 잠들었었다.
그럼 해낸 걸까. 사야와 히츠지가 수수를 쓰러트리고 도둑맞았던 잠을 되찾아준 걸까.
세 사람은 서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소파에 몸을 맡겼다. 가운데 앉은 란의 어깨 좌우로 카에데와 란의 머리가 걸쳐진다. 눈을 감고, 이번엔 본인의 의지로 잠들러 간다. 히츠지의 능력만큼은 아닐지라도 동료들이 함께 한다는 안심감이 셋을 착실하게 잠 속으로 데려갔다.
지금 나이트랜드는 어떻게 돼 있을지 셋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아직 그곳에 사야와 히츠지가 있다면 데리러 가야한다.
눈꺼풀 뒤편의 어둠에 반짝대며 빛나는 모양이 생겨난다. 잠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것은 서서히 나이트랜드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변해갔다.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닫힌 커튼 너머의 창밖은 고요했고, 방 안은 어두웠다.
손을 뻗어 곁을 더듬는다. 살갗의 온기가 손끝에 느껴져 겨우 안심했다.
데이랜드에서 나이트랜드를 거쳐 도착한 이곳이 과연 어떤 곳일지 아직 모르지만, 아직은 수수의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녀가 눈을 뜨고, 꼼질거리는 게 느껴졌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보이지 않아도 그녀가 미소 짓는 걸 안다. 커튼 틈새로 비쳐드는 희미한 빛이 반사되어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빛났다. 사람의 모양을 한 야수가 그곳에 누워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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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8

19

깨어날 수 없다──. 이 두려운 결론을 받아들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날아도 뛰어 봐도, 뺨을 꼬집어도 손가락을 늘려도, 무슨 수를 써도 나이트랜드에서 나갈 수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트랜드는 분명, 완전히 소멸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인간의 잠을 잇는 집합적 무의식── 이란 해석이 맞다면 나이트랜드에서 사람들을 다 쫓아내도 데이랜드에 깨어있는 인간의 의식이 나이트랜드를 놔 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남겨진 나이트랜드를 꿈꾸는 마지막 두 사람. 우리는 잠을 빼앗은 대가로 잠 속에 갇힌 것이다.
어쩌면 어느 한쪽만 일어나는 건 아직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쪽이 남겨진다. 어느 한 쪽이 반드시 희생되는──데드락Deadlock이다.
"큰일 났네. 동반자살 할까."
포기하는 심정으로 뱉은 내 말에 히츠지가 고민에 잠겨버렸다.
"……그래. 좋아."
"예스 하지 말라고."
"그치만 나 혼자서만 깨어나는 건 싫어. 같이 사라지는 게 나아."
"나도 그렇긴 하지만 말이야……"
매트리스 위에 앉아 몰려오는 수수의 벽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한동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생각을 너무 해서 또 졸려졌어."
히츠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까지 이 상태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기에 나도 절제 없이, 히츠지에게 머리를 가져다 댔다.
"히츠지는 좋은 냄새가 나. 꿈속에서도."
"사야도 그래. 알고 있었어?"
"몰랐어. 땀 냄새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참 좋더라."
히츠지가 내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대, 간지러워진 나는 목을 움츠렸다.
"야아~."
"안심되는 냄새. 곁에 있으면 엄청 푹 잘 수 있어."
어쩌지도 못하고 냄새를 맡게 두던 내 머릿속에 뭔가가 번득였다.
"…………그래."
나는 바로 옆에 둥글려진 시트를 집어 들었다. 무한한 넓이로 보이던 시트인데 막상 들어보자 아주 평범한 사이즈였다.
일어나는 나를 히츠지가 올려본다.
"동반자살?"
"안 한다니까. 잠깐만 있어봐."
시트를 펼쳐 폭신한 매트리스 위에 깐다.
"뭐 할 거야?"
"잘 거야."
"여기서!?"
나는 기억과 상상력을 일으켰다. 늘 내가 쓰던 베개가 두 손 위에 생겨났다. 히츠지에게 패스해주곤 내가 쓸 것을 하나 더 만들었다.
"내 베개라 좀 그런데."
"어, 이거 사야 베개야?"
히츠지가 베개를 끌어안더니 냄새를 맡았다.
"진짜네."
"야! 그러지 마, 부끄럽잖아."
나도 모르게 항의하며 다시금 상상력으로 침구를 만들어냈다. 얇은 여름 이불. 시트 위에 베개를 두고, 이불을 깐 나는 히츠지를 불렀다.
"이리 와. 빨리 안 자면 무서운 게 올 거야."
"그게 무슨……"
"슬립 워크 중에 잠들면 나이트랜드에 빨려 들어간다── 분명 그랬었어."
"으응."
"이판사판으로 그걸 이용해보자. 어쩌면 수수가 데이랜드를 나이트랜드로 덮어쓰듯이 우리 슬립 워크가 나이트랜드를 데이랜드로 뒤집어놓을지도 몰라. 동반자살이건 탈출이건 우리가 직접 경험하게 되겠지만."
눈을 땡그랗게 뜬 히츠지의 손을 잡은 나는 이불 위에 앉았다. 폭신폭신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말했다.
"미안해. 기껏 해봐야 이런 생각밖에 안 나네.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해줘."
"아니. 사야와 함께라면 어떤 악몽이라도 괜찮아."
히츠지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말했다.
"이번엔 히츠지가 재워줘. 평소처럼."
"알겠어, 사랑스런 사야."
히츠지가 이불 속에 들어왔다. 한 이불에, 두 베개를 두고 서로를 마주본다. 히츠지의 눈 속에서 내가 보였다.
"──잘 자, 히츠지."
"안녕히 주무세요, 사야──"
히츠지가 눈을 감고 힘을 빼자 금세 졸음의 블랭킷이 나를 감싸 안았다.
사방팔방에서 수수가 몰려오는 종말 같은 풍경 속에서 우리는 나이트랜드 속으로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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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8

18

긴장 탓에 심장이 쿵쿵거려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잔 경험이 수도 없이 많음에도 도무지 졸려 오질 않았다.
"……저기, 멀었어?"
히츠지가 말했다.
"미안, 뭔가."
"긴장했어?"
그렇게 말하는 히츠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서 부드럽게 들렸다.
"응…… 왜일까. 평소처럼 자면 되는 건데."
"숨 쉬는 타이밍을 맞춰보자. 천천히 숨을 쉬어봐. 편하게. 난 신경 안 써도 돼. 딱 붙어 갈 테니까."
"알겠어. 그럼…… 갈게."
사야는 호흡에 의식을 집중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히츠지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사야를 따라 들이쉬고, 내쉬고…….
커튼을 닫고 전등을 끈 방, 시계 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힌다. 긴장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 같긴 해도 졸음은 한참 멀리 있다.
히츠지가 쿡쿡 웃더니 고요히 속삭였다.
"옆에서 꼬물거리니까 하나도 안 졸려."
"미안."
"자장가라도 불러볼래?"
"에~……"
"에~는 무슨. 진짜 날 재우려는 거 맞아?"
"맞아…… 잠깐만 있어봐……"
사야가 잠의 입구를 찾으려 하는 중에 히츠지가 모로 고쳐 누웠다.
"그럼 얘기 하자."
"무슨 얘기?"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슨 뜻이야?"
히츠지가 한숨을 폭 쉬었다.
"사야는 나이트랜드에 있을 땐 날 좋아하는데, 데이랜드에선 안 그러잖아."
"으, 응, 그렇지."
"지금도 그래?"
"엥."
"요샌 이름으로 부르니까 조금은 익숙해졌을까."
"익숙해졌다……기 보단"
사야가 우물거린다.
"아직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아 아니."
"반대라니……?"
당황한 사야를 놀리지도 않고 히츠지는 말을 흘렸다. 사야는 한숨을 쉰 후에 자백했다.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는데."
"응."
"언제부턴가 있지…… 너를 대하는 감정이, 나이트랜드랑 데이랜드에서 같아져서."
"응."
"지금도 그…… 좋아하는 것 같아."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가 밀려온다.
"앗~ 잠깐만, 아냐. 그런 얘길 하려고 온 게 아닌데. 미안, 잊어줘."
"잊을 리 없잖아. 난 기뻐."
히츠지의 어조는 생각지도 못한, 따뜻한 것이었다.
"그, 그치만 히츠지는 그렇잖아, 날 좋아하는 건 나이트랜드에서만 그런 거잖아."
"아니. 난 처음부터, 나이트랜드건 데이랜드건 사야를 좋아했어."
"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사야를 히츠지가 누운 채 치켜본다.
"……처음부터?"
"사야가 양호실에서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계속 좋아했어."
"엇, 앗, 그럼."
갑자기 나타난 건 히츠지잖아──. 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사야의 입에선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히츠지가 이어 말했다.
"내가 데이랜드에서 사야를 좋아하지 않는다곤 한 번도 말 안했는데."
"거짓말……"
어이없어하는 사야를 보며 히츠지가 킥킥 웃었다.
"정말이지 야박하긴. 네가 날 나이트랜드에서만 사랑하니까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치사해."
"안 치사해. 사야가 착각한 것뿐이지. 남 탓 하지 말라구."
말문이 막힌 사야의 등에 손을 대며 히츠지가 말했다.
"언젠간 전하고 싶었어. 말하길 잘했다. 사야가 털어놔줘서 나도 용기가 났어. 고마워."
"나, 나야말로, 고, 고마워……."
"정신 차려. 말투가 영 이상해."
히츠지가 우스워하며 말하기에 사야도 함께 웃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침대에 드러누워 서로를 마주보자 깔깔 웃음이 나왔다.
"정말, 조용히 해 줘. 잘 거 아니었어?"
"그, 그렇지. 진정하자."
심호흡 하려했지만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이래선 틀렸네. 바로 눕자."
"응."
둘은 다시금 천장을 향해 고쳐 누웠다.
"흐암……"
히츠지가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사야에게도 옮겨가, 큰 하품을 만들었다.
"……하으. 이젠 졸려?"
"하려던 말을 해서 안심이 됐는지 갑자기 졸려."
"나도……"
"먼저 자지 마. 사야가 재워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럴 거야……"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조용해지자 졸음이 물밀듯 다가왔다.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속삭이듯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사야."
"너도 잘 자, 히츠지──"



밝은 밤하늘 아래, 시트에 덮인 대지 위에 무수한 사람들이 잠들어있었다.
수정 알을 파괴한 순간 보인 풍경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졌다. 나이트랜드를 덮어왔던 모든 허식이 떨어져 나간 결과인 걸까. 의식을 잃고 잠든 사람들을 넘어 다니는, 코끼리를 확대한 것처럼 생긴 거대 수수가 활보하고 있었다.
시트 위에 내려선 나와 히츠지는 지평선까지 이어진 잠든 이들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이걸…… 깨우러 가는 거야?"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지."
"딱 봐도 힘들어 보이는데."
"나이트랜드에선 상상력을 쓰는 거잖아. 다들 그렇게 가르쳐줬잖아."
나는 쪼그려 앉아 발치의 시트를 잡았다. 히츠지도 옆에서 따라했다.
"셋 하면 당기는 거다."
"알겠어."
"둘 셋……"
"셋!"
둘이 한 목소리로, 있는 힘껏 시트를 잡아당겼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잠든 사람들이 차례로 굴러간다. 번득 눈을 뜨자마자 그 모습이 사라졌다. 깜짝 놀란 표정이 웃겨서 우리 둘은 깔깔 웃었다.
"다들, 일어나~~! 그만 자~~!"
히츠지가 비명 지르듯 폭소했다. 어느 틈엔가 우린 산처럼 커다래져서, 발밑으로는 미니추어로 변한 인류가 줄지어 나이트랜드에서 쫓겨나간다. 이상을 느낀 거대 수수가 다가오지만 시트의 파도에 다리가 걸려 도무지 이쪽으로 다가오질 못한다. 그 틈을 노려 우리는 시트를 무한히 잡아당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시트가 사라졌다. 대지는 매트리스 표면이 됐고, 잠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의 크기도 돌아왔다.
사라진 인간 대신 사방의 지평선에서 솟아나는 거대한 벽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수히 많은 수수가 만들어낸, 난생 처음 볼만큼 거대한 무리다. 잠의 바다가 말라붙어 모든 수수가 우리 둘의 잠에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우와~ 장관이다."
히츠지는 기가 막힌 말투로 말했다.
"수수가 이렇게 많았구나. 이게 전부 우리 둘의 꿈속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이상한 느낌이야."
"나이트랜드가 이렇게 작은 건 사상 최초일 테니까 말야."
"이제 우리가 눈을 뜨면 수수가 전멸 당하는구나…… 똑똑하네, 사야."
"뭐 그렇지."
"란도, 카에데도, 미도리도── 이제 모두가 다시 슬립 워크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럴 거야."
"좋아, 그럼, 이제…… 일어날까."
달성감을 품으며 우리는 깨어나려고 했다.
"…………"
"…………"
"…………응?"
──깨어나는 건, 어떻게 하는 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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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7

17

현관을 연 사야를 맞이한 히츠지의 눈 밑에 커다란 다크서클이 자리해 제대로 못 잔 것이 일목요연했다.
"우와. 얼굴이 왜 그래."
사야의 말에 히츠지는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볼일인데?"
"할 얘기가 있어. 들어가도 돼."
"……상관은 없는데."
미심쩍어하면서도 히츠지는 사야를 집에 들였다. 집 안은 고요했다, 둘 외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히츠지 뿐이야?"
"응. 부모님은 본가에 피난하셨어. 부모님도 내 쿨쿨 파워를 잘 아시니까 자취생활을 만끽하는 중이지."
"그렇구나……. 우리 집이랑 반대네, 다 불면증이거든. 다음에 우리 집에 들려줘."
"상관은 없는데 가기가 힘들어. 그냥 걸어만 가도 차들이 전부 졸음운전을 하더라구."
그렇게 말을 하던 히츠지는 사야를 살펴보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야는 안 졸려?"
"엄청 졸려. 그래도 아직 참을 만 해."
그렇게 말하다 하품을 해 버렸다. 내성이 있는 사야조차 이 꼴이니 네버 슬리퍼가 아닌 사람은 30초도 못 버티리라.
"흐음~. 뭐 너무 무리하진 마."
"나도 알아…… 하암."
히츠지의 방에 들어가자 침대 위에 죽 늘어선 인형들의 눈길이 환영했다.
"대충 앉아."
무뚝뚝한 말투로 한마디 던진 히츠지가 책상 앞 의자에 걸터앉았다. 사야가 바닥에 앉으려 하자 히츠지는 침대를 가리켰다.
"괜찮아?"
"특별히 봐 줄게. 걔들도 딱 하나라면 안아도 돼."
"알겠어. 그럼…… 실례합니다."
사야는 히츠지의 침대에 앉아 커다란 올빼미를 안았다. 보들보들한 타월 천에서 히츠지 냄새가 났다.
"그래서, 할 말은?"
"그 전에. 왜 말 안했어?"
"응?"
"집에서 못 나올 만큼 블랭킷 능력이 강해진 거. 다른 애들은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라서 충격 받았어."
"괜한 걱정시키기 싫어서."
"아무리 그래도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방금 만났으면 또 몰라도 이제는 그…… 왜…… 안 그렇잖아! 내 말이 틀려? 나만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 건…… 지금은 상관없잖아."
"상관 있어! 내 계획도 애들이 가르쳐주지 않았으면 못 짜냈을 거라고!"
"계획이 뭔데."
"현재 상황을 타파할 계획. 수수를 해치우고 편하게 잠들기 위해."
"흐음~……?"
히츠지의 못미더워하는 눈빛이 재촉하자 사야는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진 계속 히츠지가 나를 잠 속으로 데려갔잖아? 그걸 반대로 해보면 어떨까 해서."
"응? 그게…… 무슨 뜻이야?"
"히츠지가 나랑 동침하는 게 아니라, 내가 히츠지랑 동침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히츠지의 '블랭킷'이 된다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불면증에 시달려."
"응?"
히츠지가 눈을 끔뻑인다.
"어어…… 일단 지금도 상당히 그렇지 않아?"
"아직 부족해. 더 뺏는 거야. 완전히 잠들지 못하게. 미안한 소리지만 수면제로 잠드는 불면증은 가짜야. 진짜 불면을 가르쳐 주는 거지."
급하게 말을 쏟아내는 사야를 히츠지가 수상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사야, 대체 언제 인류를 배신한 거야?"
"영원히 그러겠다는 게 아냐. 일시적으로. 아마. 조금만……"
"벌써 수상해지기 시작했는데."
"나이트랜드는 전부 이어졌다고 했었잖아. 수수는 인간의 잠을 매개 삼아 늘어나니까 잠이 없으면 살 수가 없지. 세상은 누가 일어난대도 다른 누가 자니까 잠에서 잠으로 계속 옮겨가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어. 보통은 말이야."
"그 잠을 없애버리자고? 그런 게 가능해?"
"혼자선 못 해. 하지만 히츠지한테는 블랭킷 능력이 있잖아. 내 불면을 히츠지의 능력으로 모두에게 나눠주는 거야. 나이트랜드에 남은 잠은 나랑 히츠지 것뿐이야. 그러면──"
"그러면……?"
"우리 말고 자는 사람이 없으면 수수는 나랑 히츠지의 잠 속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잖아. 그렇게 되면 우리 둘이 일어나는 거야."
"일망타진 할 수 있다는 거구나. 고민좀 했겠네."
히츠지가 고요하게 말했다. 불안해진 사야는 말을 더했다.
"물론 말이지, 그래도 되나 싶은 생각은 해. 전 인류에게 영향을 주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봐. 안 그러면 모두가 꿈이 돼 버려──"
히츠지가 일어나 사야에게 다가갔다.
당황하는 사야 옆, 침대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가라앉자 둘의 어깨가 닿았다.
"히츠지?"
"알겠어. 하자."
"괘…… 괜찮아?"
"사야가 꺼낸 계획이잖아. 그래서 어떡하면 돼? 난 매번 먼저 자서 누가 재워주는 건 처음이야."
히츠지가 침대에 누워 사야를 올려본다.
"동침해줘, 사야."
"으, 아, 알겠어."
사야는 점잖게 히츠지 곁에 누웠다.
전 인류의 잠을 빼앗고, 둘이서 푹 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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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6

16

"사야, 어디 가."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려던 사야는 그 물음에 뒤를 돌았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키가 벽에 기대 나른한 표정으로 사야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 밑엔 큼직한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머리카락도 퍼석댔다.
"언니…… 괜찮아?"
"엉망이지. 너는?"
사야가 고개를 가로젓자 아키는 괴롭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얼마나 힘든지 이해가 안됐어. 잠을 못 자는 게 이렇게 힘들줄이야."
사야는 그저 끄덕였다. 언니가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지 며칠이 지났다. 아키뿐만이 아니라 부모님도 그랬다. 아직 짧은 시간이라면 수면유도제로 강제로 잠든다지만, 약의 효과도 점차 약해지는 듯했다.
"어디 가."
아키가 다시 물었다.
"친구 보러 가."
"아, 그 낮잠 동호회랬나. 걔들은 좀 잔대?"
"아니…… 요샌 그다지."
사야가 말을 흐리자 아키는 느릿하게 끄덕인다.
"불쌍하다, 진짜. 다들 편하게 잘 수 있으면 좋겠다."
"응."
"나갈 거면 조심해. 너도 못 자서 좀 멍하니까."
그러더니 뒤로 돈 아키의 목과 어깨에 수수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찝찝해진 사야는 시선을 돌리고선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나섰다.

꿈의 빈곤화── 라는 단어가 있다고 미도리가 말했었다.
잠에서 깼을 때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을 못한다는 뜻이다. 슬립 워크를 시작하고서부터 명석한 상태로 꾼 꿈은 확실히 기억했는데, 지금은 나이트랜드에서 자기들이 뭘 했는지 거의 다 잊게 됐다.
또 한편, 격렬한 데자뷔에 시달리게 되기도 했다. 간신히 남은 토막 난 꿈의 기억은 예전에도 체험한 것만 같았고, 루프에 사로잡혀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다 피폐한 상태로 눈을 뜨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이트랜드와 데이랜드를 헷갈리는 경우도 점점 늘었다. 학교에서 걷다가 하늘을 날려고 바닥을 찼다가 고꾸라지거나, 자동차가 오가는 도로를 무의식적으로 건너려 하는 등 오싹한 체험이 늘어나 수시로 손가락을 잡아당기는 게 꿈이 돼 버렸다.
다섯 명이 서로를 보듬어가며 슬립 워크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사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우린 잠에서 방축(放逐)당하고 만거야──"
란이 툭 내뱉은 말이 현 상황을 그대로 가리켰다. 다섯 명의 슬립 워크 능력은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만신창이가 됐다. 히츠지의 블랭킷 능력은 효과가 불안정해져선 의도치 않은 상황에 동료들을 기절시켰다. 카에데의 변신도 제어가 안 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괴물로 변해 본인과 동료들 모두를 패닉 상태에 빠트렸다.
거기에 더해 평범한 수면조차 침식당했다. 꿈의 컨트롤을 완전히 잃고, 기억도 멀쩡하지 않은 상태로 나이트랜드에 들어가는 건 공포임에 다름없었다. 생각해보면 이 상황은 명석하지 않은, 평범한 꿈에 돌아간 것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슬립 워커로서의 삶을 경험하고 나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동시에 데이랜드에 출몰하는 수수가 점차 늘어났다. 햇빛 아래를 헤매다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들러붙는 수수의 모습은 보기 싫어도 눈에 들어왔다. 그에 비례하듯 주위엔 수면장애가 늘어났다. 가족도, 학교에도 수수가 들러붙은 사람들뿐이다. 눈 밑에 다크서클을 만들곤 휘청거리는 사람, 갑자기 쓰러져 잠드는 사람, 악몽을 꾸곤 절규하는 사람……. 우려해왔던 폭발적 감염(아웃 브레이크)가 시작됐다. 이 마을을 폭심지 삼아 수수의 데이랜드 침략이 급속도로 진행돼 가고 있다.
사야 일행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의심은 짙어졌다. 수수는 '알'을 향한 관심을 미끼삼아 사야 일행이 나이트랜드와 데이랜드를 잇는 통로를 만들게 유도했으리라. '알'의 기억이 애매해졌던 사실조차, 아마도 주의를 끌기 위한 수작이었으리라. 수수가 이런 지혜를 갖고 있었음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은 사야 일행을 완벽하게 추월한 것이다.
외출하면 강제로 자기들이 일으킨 사태를 직면당하지만, 집에 있어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가족들이 죄책감을 자극한다. 마침내 버티지 못한 사야는 견디다 못해 밖으로 나서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겨 오랜만에 사카이모리 침구점을 방문한 것이다.
창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 발소리만이 들려오고, 천창에서 비쳐드는 빛줄기 속을 먼지가 덧없이 날아다녔다.
처음 여기 왔을 때 같다.
침실 중앙의 킹 사이즈 침대는 저번에 쓴 상태 그대로 방치된 것처럼 시트와 이불이 주름져있었다.
누가 있으면 조금은 신경이 분산될 줄 알았지만 기대가 빗나갔다. 도저히 성공하지 않는 슬립 워크에 마음이 꺾여 마침내 아무도 안 오게 됐다.
넓은 침대에 쓰러진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고요한 창고에 혼자 누워있자니 문득 기척이 느껴졌다.
따각따각, 따각따각 바닥을 치는 단단한 소리는 신발이 아니라…… 발굽 소리다.
산양을 타고 후드를 둘러쓴 남자가 선반 사이에서 나타났다.
"또 만났군, 네버 슬리퍼."
"이건…… 꿈?"
"꿈이나 현실, 어느 쪽이건 언젠가 모든 것은 꿈이 된다. 너희들은 놈들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남자는 침대 앞에 딱 멈추더니 사야와 마주했다.
"수수놈들은 이런 식으로 슬립 워커들을 수도 없이 함정에 빠트려 데이랜드를 나이트랜드로 만들어왔다. 지금까지 현실이었던 것이 꿈이 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새로운 데이랜드가 시작된다. 그리고 슬립 워커도 꿈이 되어 사라진다. 이전에 우리가 그랬듯. 그리고 이번엔 너희가 그리 됐듯이."
"그럼…… 당신도, 슬립 워커?"
남자는 후드 속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있던 데이랜드에서는, 난 CIA 몽견(夢見)부대 일원이었다. 'GOAT'라 불리던 팀은 세계 각지의 몽견 전승자와 협력해 조직적으로 수수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우리 팀도 전부 당했다. 나도 나이트랜드를 헤매는 꿈의 잔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음으로 너희가 그렇게 돼 가고 있다."
"우리도…… 꿈이 된다고?"
"그래. 하지만 우리 때는 없었던 요소가 단 하나 있다. 그게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
"뭔데?"
"너다, 네버 슬리퍼."
남자는 안장 위에서 팔을 뻗어 사야를 가리켰다.
"너만이 기나긴 불면 속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너만이 데이랜드에 나타난 수수를 볼 수 있다── 그건 즉, 너는 데이랜드와 나이트랜드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쳐도── 나보고 어떡하라고. 지금 일어나는 사건을 어떻게 멈추면 되는데."
짜증내는 사야에게 산양 기수는 비밀처럼 속삭였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No one shall sleep)."

"호카게 양?"
누가 나를 부른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미도리가 사야를 보고 있었다.
"아…… 안녕."
"사야찌네. 잘 지냈어?"
미도리 뒤에서 카에데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둘 다 웬일로 온 거야?"
"호카게 양이야말로."
"난── 여기 오면 누가 있지 않을까 해서."
미도리와 카에데가 눈을 마주치더니 슬쩍 웃었다.
"우리도 그래. 그치 미도리."
"네."
"슬립 워크가 안 되는 건 알겠는데 말이지, 너네랑 못 만나는 게 영 쓸쓸해서."
"소파에 앉아요. 차 내 올게요."
미도리의 말에 사야가 일어섰다. 주변을 둘러봐도 산양 기수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현실에서 일어난 일일리가 없다── 정신을 차리려 했을 때 사야의 눈길이 바닥에 빨려들었다.
침대 옆 바닥, 콘크리트 표면에 발굽자국 네 개처럼 작은 패임이 있었다.
"사카이모리 양…… 이거 원래 있던 거였나?"
사야가 가리키는 곳을 미도리가 돌아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랬었나요. 팔레트 자국 같은데── 이게 왜요?"
팔레트 자국?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산양을 탄 남자가 거기 있었다는 생각보다는 합리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사야는 방금 겪은 체험을 되새겼다.
최근 들어, 아마 수수가 방해했기 때문에 사야 일행은 나이트랜드에서 멀쩡한 기억을 가져올 수가 없었지만 이번엔 명확한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 남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눌러앉아 사라지질 않았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
사야의 혼잣말에 생각지도 않은 반응이 돌아왔다.
"'투란도트'인가요?"
고개를 들자 선반 틈새로 란이 보이더니, 당연한 양 소파에 앉았다.
"선배, 왜 여기에."
"너희랑 똑같은 이유 아닐까?"
미리 짠 것처럼 미도리가 모두의 머그컵을 테이블에 두고 커피를 따르기 시작했다.
"투란도트가 뭐예요?"
"오페라예요. 옛날 중국의 투란도트 공주에게 구혼하는 왕자가 수수께끼를 냈어요. 자기 이름을 동틀 때까지 맞추지 못하면 결혼하고, 못 맞추면 결혼을 포기하고 목숨을 내놓겠다, 고. 그 때 공주는 백성들에게 왕자의 이름을 밝힐 때까지 아무도 잠들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
"엥, 너무하잖아!?"
카에데가 비난했다.
"너무하죠. 결혼하기 싫은 것도 이해되지만."
"악질에도 정도가 있지. 상관없잖아, 백성은."
"백성……이라."
사야는 테이블의 머그컵중 딱 하나 비어있는, 히츠지의 컵을 보며 중얼댔다.
"히츠지는 안 오는 걸까."
"그 아인…… 안 올 것 같아요."
란이 말했다.
"왜요?"
"그 아이의 블랭킷 능력은 원래부터 너무 강력했어요. 히츠지가 잠들면 의도하건 아니건 주변 사람들도 잠들어요. 그래서 주변에 아무도 없을 곳을 찾아 잤는데, 지금은 그런 수작이 안 통할만큼 강해졌을 거예요."
카에데가 이어 말했다.
"나도 걱정돼서 히츠지찌 집에 가 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가까이 가기만 해도 위험해."
"어떻게 위험한데?"
"졸려. 엄청 위험해. 전보다 범위가 늘어나서 진짜 위험해. 지금의 히츠지찌에게 다가가고도 멀쩡한 건 네버 슬리퍼인 사야찌 정도일걸."
이야기를 듣던 사야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히츠지는 사야에게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카게 양, 나중에 어떤 상태인지 보러 가주지 않을래요?"
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호카게 양?"
"응? 아, 미안……. 있잖아, 물어볼 게 있거든. 히츠지의 블랭킷 능력은 얼마나 널리 펼쳐질 수 있을까."
"콘파루 양은 늘 억제했는데, 하려고만 하면…… 얼마나 펼쳐질지 예상이 안 되네요."
"그래……"
세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 사야를 쳐다본다. 마침내 사야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는데── 들어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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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5

15

우리 다섯 명은 영문 모를 신음소리를 내며 차례차례 벌떡 일어났다.
"아~~! 아~~~~!!"
"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 모르겠어요, 전원을 끈 것처럼 갑자기 꿈에서……"
혼란 속에서 몇 분이 지나 겨우 대화가 가능해졌을 무렵 란이 말했다.
"수수의 둥지가 어떻게 됐는지 본 사람 있나요?"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을 깬 것까진 기억해. 하지만 거기까지밖에──"
란은 굳은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다시 가 보죠."
"잠깐 안 쉴래? 어쩐지 멍한 느낌이라……"
카에데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란은 수긍해주지 않았다.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죠. 상황만 보고 바로 돌아오는 거예요."
사야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눈을 꽉 감았다. 아주 큰 충격을 받은 느낌은 남았지만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옷이 살짝 당겨가는 감촉에 눈길을 떨구자 어느 샌가 불안해보이는 히츠지가 사야의 옷소매를 잡고 있었다. 사랑스러움에 사로잡혀 손을 잡자 히츠지도 맞잡았다.
땀에 살짝 축축해진 침대 위에 다섯 명이 다시금 누웠다. 슬립 워크를 중단했을 때도 바로 다시 돌입하면 직전에 꾸던 꿈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점은 사야도 경험을 통해 배웠다.
히츠지가 뿜는 졸음의 블랭킷이 모두를 감싸 안자 날카롭던 신경이 가라앉아, 다섯 명은 방금까지 있던 샘을 향해 슬립 워크를 재개했다.

*

우리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창고 천창에선 잔뜩 찌푸린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어떻게 된 거지?"
"다시 한 번 슬립 워크 했을 텐데……"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본다. 어떤 원인 탓에 잠이 깨버린 모양이다. 란이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틀렸나보네…… 어쩔 수 없네요"
"좀 쉬죠. 지금 차 내 올게요."
미도리가 제일 처음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타박타박 뛰어갔다.
곧 물이 끓고 커피향기가 퍼져왔다. 우리는 아직도 멍한 머리를 붙잡고 평소처럼 소파에 모였다.
"오늘은 기모브(마시멜로)를 사왔거든요."
"오~ 멋진데."
"멋진 거야?"
"몇 년 전쯤 유행했었죠."
접시에 얹힌 색색깔 입방체 과자를 보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각자의 머그컵에 미도리가 커피를 부어줬다.
"자 다들 드세요──"
그렇게 말하며 먼저 기모브를 입에 넣은 미도리가 뚝 하고 굳었다.
뭔가 무서운 것을 본 양 눈을 크게 뜨고 얼어붙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진 걸 느낀 란이 말을 걸었다.
"미도리……?"
어리둥절한 말투로 미도리가 중얼댔다.
"맛이── 안 나요."
그 말과 동시에 접시 위에 있던 기모브가 단박에 모래로 변해 스르륵 무너졌다.
우리는 깜짝 놀라 일어났고, 침실을 둘러싼 높은 선반들이 덜걱덜걱 흔들리나 싶더니 쌓여있던 박스가 일거에 터졌다.
선반 저편에서 눈과 다리와 독이 담긴 거대한 턱으로 그득한, 더없이 역겨운 벌레들이 우글우글 나타나더니 우리를 산산이 갈라놓기 시작했다.
천창에선 모르는 사람의 거대한 얼굴이 보이더니, 절규하는 우리를 무표정으로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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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3

 

14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데 아래층에 있던 엄마가 불렀다. 입원중인 할머니 병문안을 갈 테니 운전을 해달라고 했다.
귀찮긴 했지만 요즘은 성적도 썩 좋지 않았으니 내가 약자 쪽이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내려가 엄마랑 집을 나섰다. 차고에 들어있던 차를 타고 시동을 건 다음 어찌어찌 안 긁고 도로로 나와 시내 쪽으로 운전한다. 벌써 후회된다. 왜냐하면 나는 면허가 없기 때문이다.
왜 운전하겠다고 한 걸까. 사고 난다, 무조건 사고 난다.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겁먹은 상태로 핸들을 잡고 어깨너머로 배운 운전 실력으로 비틀비틀 직진한다. 브레이크와 액셀이 뭔지는 겨우 알고 있지만 힘조절이 안된다. 액셀을 살짝 밟으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속도가 나기에 당황해서 브레이크를 밟자 덜컹대며 차가 섰다. 운전이 너무 어색해 주변 차들에게 방해된다는 점도 느껴진다.
비지땀을 흘리며 도강교에 들어섰다. 아주 복잡한 다리 위에서 수없이 많은 줄을 이루는 차들이 느릿하게 통과중이다. 그 때 마침내 운전이 끝장났다. 앞뒤 차에 끼어 도망칠 틈도 없는 상태로 액셀을 꽉 밟아버린 것이다. 공황상태에 빠진 나는 냅다 핸들을 꺾었다. 앞차와의 사고는 피했지만 대신 다리 난간에 들이박고 말았다.
그리 빠르지 않았던 게 불행중 다행이었지만 시동이 꺼진 차는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내 뒤로 차들이 점점 늘어서고, 교통정체가 커지는 장면을 절망적인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앞 유리를 타고 흐르는 수막이 바깥 풍경을 점점 흐리게 만든다.
뒷좌석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룸미러를 보자 거기 앉아있을 어머니가 없다. 비로 흐릿한 창밖 풍경으로 어딘가 낯익은 인영이 멀어져간다.
분명 내가 사고를 내서 화가 나서 간 것이다. 차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외로움을 느끼던 내 바로 옆에서 갑자기 유리를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옆을 본 내 눈앞에서 주먹이 다시 유리를 친다. 쾅쾅쾅! 겁이 나 몸을 빼자 이번엔 주먹이 아니라 공구──너트를 돌리는 긴 스패너가 떨어졌다. 유리가 산산조각나기에 나는 그만 얼굴을 가렸다.
"사야! 꿈이야!"
깨진 유리 틈으로 들어온 말에 안도했다. 차 밖에 서있던 건 히츠지였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남은 유리조각을 스패너로 정리한다. 물속에서 부상한 것처럼 의식이 급속도로 명확해진다. 내 눈을 본 히츠지가 말했다.
"빨리 나와. 여긴 위험해."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문이 찌그러져 잘 안 열렸다. 나는 히즈지가 깨준 운전석 창문으로 기어나갔다.
쏟아진 유리조각 위에 섰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히츠지, 웬일이람. 이런 데서 만나니 기쁜걸."
"진짜, 정신 차려. 명석해지지 않으면 큰일이라구."
화난 듯 말하는 표정 또한 귀여워서 끌어안고 싶어진다. 행동에 옮기려는 찰나, 어디선가 기적(汽笛)소리가 들렸다.
다리 저편에서 내리는 비를 뚫고 갑판이 수없이 겹쳐진 거대 호화 여객선이 다가온다. 차가 꽉꽉 들어찬 다리를 향해 배가 똑바로 밀어닥친다. 세우려는 기미도 없이, 이윽고 뱃머리가 닿았다. 귀를 찢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꺾이는 다리 경계선에서 차가 후두두둑 떨어진다.
발밑이 급격하게 기울어지더니 나와 히츠지도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졌다. 반응할 틈도 없이 공중에 내던져지자 시커먼 수면이 들이닥친다.
커다란 물보라를 만들며 수면에서 고래만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원자력 잠수함과 인간을 합체시킨 듯한, 인어로 변신한 카에데였다. 가슴팍으로 나와 히츠지를 받아낸 카에데가 말했다.
"깨 있어~?"
"깨 있진 않겠지."
내 말을 들은 카에데가 커다란 입을 벌리며 웃으니 상어 같은 치열이 보였다.
계속 전진하던 호화 여객선이 마침내 다리를 끊었다. 철골로 만들어졌을 다리가 나무젓가락 공작품 같은 싸구려로 변하더니 점차 붕괴된다. 다리 위의 차들도 디테일을 잃어서 지금은 둥그렇게 말아낸 종잇조각으로만 보인다. 작게 튀어나온 다리가 버둥대는 것을 보고서야 저게 수수떼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늘에서 란과 미도리가 날아와 카에데의 양 어깨에 착륙했다. 란이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명석하죠? 서로의 언동에 주의하면서,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비상을 알려주세요. 수수가 우리를 암우(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사리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음. 또는 그런 사람. 역주)로 만들려 하는 게 틀림없으니까."
미도리가 이어 말했다.
"기본적으로 제가 여러분을 모니터링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제가 당할 가능성도 높아요. 죄송하지만 저도 한 번씩 살펴봐주세요……."
"알겠어.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히츠지가 물었다.
"수수들이 어디서 오는지 찾자. 그 녀석들은 어디에선가 나와 우리의 잠을 타고 데이랜드로 오고 있어── 그러니까 입구를 찾아서, 부순다."
강 속으로 무너지는 다리를 뒤로하며 우리는 강변에 상륙했다. 어딘가 자동차를 닮은 수수떼가 점점 다가와 다리가 있던 자리에 선다. 정체가 심해지자 앞쪽 수수가 밀려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걸 다 해치우려면 뼈 빠지겠네~."
카에데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며 다리가 넷 달린 켄타우로스 같은 형태로 변신했다. 허공에서 긴 창을 만들어 수수떼를 찌르기 시작했지만 끝이 없어 보인다.
란이 카에데의 등을 타고 오르며 말했다.
"지금은 놔두죠. 여기서 시간을 뺏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아요. 녀석들이 오는 곳을 찾아내 본줄기를 끊어놓지 않으면 아무리 쓰러트려봤자 똑같아요."
미도리도 이어 말했다.
"저도 찬성이예요. 저희가 명석한 한 수수는 데이랜드에 들어올 수 없어요. 거꾸로 말하자면 꿈에 빠진 시점에 저희의 잠은 데이랜드행 통로가 돼 버리고요."
"있잖아, 혹시 수수 사냥에 빠지면 명석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끼어들지 미도리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럴지도 몰라요. 수수를 잡는 행위 자체가 슬립 워커를 꿈에 열중하게 만드는 함정으로서 기능한다면──"
히츠지가 갸웃했다.
"그럼 우린 한참 전부터 함정에 빠진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수수의 행동이 변한 지는 얼마 안 됐으니까."
"저기 저기, 느긋하게 얘기해도 괜찮을까? 수수가 어디서 올지 찾으려면 일단 우리도 움직여야 하잖아."
카에데가 초조한 듯 말했다.
"그렇죠── 움직여요. 너무 떨어지지 말고 뭉쳐다니는게 좋겠어요."
"날 타면 돼지. 태워다 줄게!"
네 다리로 달려 나가는 카에데, 나는 당황하며 카에데에게 붙었다. 반쯤 잠수함일 때부터 따라온 금속 장갑에는 친절하게도 사다리와 난간이 있었다.
우리 넷을 등에 태운 카에데가 아스팔트 위를 달려간다. 마주치는 수수를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창으로 찌르고, 기계 발굽으로 짓밟으며 나이트랜드 심부로 달려간다.
황토색 흙 위로 마른 풀이 드문드문 박힌 황야에 한줄기 도로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따금 수수떼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더니 스쳐 지나며 우리 뒤로 멀어진다.
머지않아 곧바르던 길이 구불대기 시작했다. 바닥의 경사도 험해져선 오르락내리락 커다란 파도모양을 이뤘다. 주위엔 나무가 늘어서 어느새 우리는 깊은 숲속을 달렸다.
우리는 카에데의 등 위에서 티 세트를 둘러싸고 앉아있었다. 미도리가 입에 컵을 대더니 인상을 썼다.
"역시 틀렸어요. 맛이 안 나요."
"어느 틈에……. 사카이모리양 괜찮아? 명석해?"
"죄송해요, 명석한 상태예요. 이렇게 하면 맛으로 꿈속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 그렇구나."
"호카게 양도 괜찮으시면 드세요."
"난 됐어. 꿈속인데도 뭘 마시면 화장실 가고 싶어지더란 말이지."
"어, 저도 그런데."
란이 격렬하게 동의했다.
"맛은 안 나는데 요의(尿意)만 멀쩡하게 작동하는 건 불합리하지 않아요?"
"맞아. 꿈속에서 화장실이 나오면 긴장돼. 데이랜드에서도 순간적으로 헷갈릴 때가 있어서 무서워."
히츠지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서일까, 카에데가 불안하게 외쳤다.
"너네 내 위에서 오줌 지리면 안 된다!?"
진심으로 겁먹은 듯 한 카에데의 말에 왁 웃음이 터졌다.
"카에데는 그런 경험 없어?"
"난 슬립 워크중엔 계속 변신한 상태라서 꿈인 줄 아는데. 너희도 변신하면 오줌 안 쌀걸?"
"카에데만큼 변신을 못하거든."
"다들 상상력이 부족하구나~"
자랑하듯 가슴을 내미는 카에데를 향해 히츠지가 입술을 비쭉 내민다. 삐친 표정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난 히츠지가 오줌 싸도 안 웃을 거야."
최고다. 내가 했지만 멋진 말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히츠지가 눈을 찡그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이 사람 지금 완전 명석하지 않은 것 같은데."
"늘 그렇지 않아? 그 양반."
"사야찌는 원래 이런 애 아냐?"
"호카게 양은 콘파루 양과 붙으면 대체적으로 이상한걸요."
제각기 내뱉은 평가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부끄러워진 내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이야~ 너무 그렇게 칭찬하면 부끄러운데."
"앗, 이 사람 틀렸어! 꽉 잡아!"
"야! 내 등에서 난리치지 마!"
꿈에서 마시는 차는 맛이 안 나는데 꿈에서 맞은 딱밤은 엄청나게 아팠다. 명석함은 되찾았지만 불합리하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소란스럽고 명석한 우리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꿈의 심부, 수수의 둥지──. 다들 서너 번씩 골고루 명석함을 잃을 뻔한 경험 후에 마침내 우리는 목적지를 찾아냈다.
숲 속의 절구모양 경사면 바닥에 샘이 있었다. 흔들리는 수면에 시선을 집중하자 수정을 깎아 만든 듯한 알이 잠겨있었다. 알은 안쪽에서부터 반짝이며 빛을 내고, 난반사되는 빛이 물 위에서 형태를 만들자, 제각기 다르게 생긴 수수가 되어 샘 밖으로 나온다. 큰 것, 작은 것, 아름다운 것, 추한 것. 수수들은 어색한 움직임으로 경사면을 기어올라 데이랜드를 향해 긴 여행을 시작했다.
"이게…… 수수의 둥지."
란이 중얼댄다. 우리는 한동안 매혹당한 양 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구조였군요."
"저 알에서 수수가 태어난다는 거야?"
"그래 보이는데…… 우리가 보는 게 정확한걸까?"
"나이트랜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겉보기와 다를 때가 많지만 적어도 수수가 저기서 나온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어보여요."
"쪼-아, 그럼 저것만 박살내면 된다 이거지."
카에데가 육식동물처럼 으르렁댔다. 여기서 수수에게 가장 직접적인 원한이 있는 건 카에데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히츠지가 조용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옆을 보자 카에데의 등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 몸을 내밀고 집어삼킬 듯 샘을 주시한다.
"히츠지? 위험해."
내가 안아들려 하자 히츠지가 툭 내뱉었다.
"저거야."
"응?"
"난, 저걸 찾고 있었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기억이 폭발했다.
알! 맞아! 히츠지가 나이트랜드에서 찾아헤메던 알이잖아!
모두에게 그토록 필사적으로 떠올리게 하려 했는데 어느 샌가 내가 잊어버렸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나는 히츠지의 주목을 끌려 했다.
"얘들아, 저거야! 내가 계속 말했던 거!"
"저도 방금 생각났어요……."
란이 당황한 말투로 말했다.
"나도야. 우린 분명히 이런 행동을 여러 번 되풀이했어."
"저도예요── 왜죠? 지금 저희는 명석한 상태일 텐데."
"이 기억만 이상해. 누가 숨기려고 하는 것처럼,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잊혀져버려."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방금까지 우리를 인식도 못하는 것 같던 수수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고요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답다고 형언해야할 달 아래 샘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날이 바짝 선 것으로 변했다.
"어쨌건, 목표물은 찾아냈다 이거네요."
우리는 수수들을 계속 쳐다보며 카에데의 등에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저걸 부수면 모든 수수를 섬멸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또 잊기 전에 해치워버리죠."
"쪼-아, 그럼 간다."
카에데의 등 끄트머리에서 철컹철컹 대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해치가 열렸다. 그 안에서 미사일이 잇달아 발사되더니 수수들의 머리 위로 날아간다.
날아가는 사이에 우리도 싸울 준비를 했다. 란은 칠흑 같은 사자, 미도리는 북극곰, 나는 머리통이 몸통 앞뒤에 달린 영양을 탔다. 히츠지만이 도보에 금색 권갑을 찬 평소 모습이었다.
"돌격!"
란이 사브르를 치켜들며 외쳤다. 우리는 경사면을 달려내려 수수떼에게 파고들었다. 모두가 소리쳤다. 나도 엘리펀트 건을 갈겨대며 샘을 향해 달렸다.
수수의 파편을 폭풍처럼 흩날리며 샘에 처음으로 당도한 것은 히츠지였다. 걱정하는 낌새도 없이 물속에 들어가더니 수정 알을 향해 갔다. 방금 막 생겨난 수수가 금색 권갑에 두들겨 맞고 산산조각났다.
히츠지의 손이 물속에서 알을 건져 올렸다. 두 손으로 들어 올린 수정 알은 공기중으로 나온 순간 한층 더 밝게 빛났다. 빠져들듯 그것을 쳐다보는 히츠지의 표정에 위기감을 느낀 나는 외쳤다.
"히츠지! 부숴버려!"
순간적으로 흐릿해졌던 히츠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사방팔방에서 몰려드는 수수떼가 히츠지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나는 방아쇠를 끊임없이 당겼다. 잠시간 나와 히츠지의 눈이 맞았다. 히츠지는 끄덕이곤 마주쥔 두 손을 쥐어냈다.
알이 빠지직 짜부러지며 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시야가 새하얗게 되곤 갑자기 의식이 멀어져──.



주위엔 온통 이음매 없는 침대가 펼쳐져있었다. 발치부터 지평선까지 끝없는 시트의 바다가 이어졌다. 그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있었다. 파자마를 입은 사람, 알몸인 사람, 아이마스크를 낀 사람, 묶인 사람, 피범벅인 사람……. 인종, 복장, 자세 모두 제각각인 남녀노소가 누워서 한사람도 빠짐없이 자고 있었다.
바로 곁에는 란과 카에데, 미도리도 자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을 보니 낯익은 사람들도 여기저기 섞여있었다. 같은 반 친구, 선생님, 그리고 우리 부모님과 언니.
수많은 사람들의 숨소리, 잠꼬대,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앓는 소리가 대기를 낮게 진동시켰다. 인류가 전부 잠든 듯 한 광경 속에 나와 히츠지 둘만이 잠들지 않고 서 있었다.
"히츠지,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내 물음에 히츠지도 어리둥절한 대답을 했다.
"모르겠어…… 여긴, 어디지? 나이트랜드, 맞지?"
나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 위에 펼쳐진 것은 달과 별이 모두 빛나는 나이트랜드의 밤하늘이었지만 지금까지 슬립 워크를 하면서 이런 곳은 처음 봤다.
"아이조메 선배…… 카에데…… 미도리!"
말을 걸면서 흔들었지만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있지, 사야. 저게 뭘까."
히츠지의 말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밤하늘 한켠이 시커멓고 거대한 것에 가려 있었다. 수수, 인걸까── 전체적인 형태는 아리송했지만 코끼리 코처럼 부드럽게 꺾이는 장대한 구조물이 암흑 속에서 지면에 늘어져있었다.
그 코가 누운 사람들의 상공을 쓰다듬는 듯 움직임에 따라 반짝이던 무언가가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까 샘에서 나온, 수수의 씨앗같은 것과 비슷했다.
코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자 란, 카에데, 미도리의 모습에 변화가 생겼다. 주변에서 자는 사람들과는 달리 셋의 몸에서는 명확한 이미지가 빨려나갔다. 하늘을 나는 범선, 반짝이는 마법검, 낙타 대열, 종이비행기 편대, 달에 박힌 로켓, 색색깔 꽃다발, 교실에서 수업 받는 학생들, 눈 덮인 산맥……. 맥락없는 비전(vision)이 떠오르더니, 마치 청소기라도 달려든 양 빨려들어가 사라진다.
직감적으로 큰일 난 것 같았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소리 없는 외침을 터트리며 이미지의 수확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비정상적인 감각에 사로잡힌 나는 신음했다. 재빨리 만들어내려한 총, 내 공격성을 그대로 빚어낸 듯 한 야수의 이미지가 완전히 형태를 이루기도 전에 내 안에서 뽑혀나간다. 나뿐만이 아니라 히츠지도 비명을 질렀다.
"사야! 사야, 살려줘── 전부 뺏길 거야!"
겁먹은 히츠지를 끌어안으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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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24. 23:22

13

긴급 슬립 워크는 정해둔 15분이되기도 전에 끝났다. 잠이 깬 셋은 급하게 옷차림을 정리하고 침대를 나섰다. 소란 탓에 깼는지 양호교사가 책상에서 고개를 들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미안, 온 줄 몰랐어. 무슨 일이니?"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지 고개를 흔들며 양호교사가 물었다. 그 뒤에 유령처럼 들러붙은 수수를 사야는 보았다. 아까 히츠지의 몸에서 나타난 개체와 많이 닮았다.
양호교사가 하품을 하곤 흐리멍텅한 음색으로 말했다.
"어디 안 좋니? 한 숨 잘 거면 침대──"
"앗, 아뇨, 벌써."
사야가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자 양호교사는 다시금 크게 하품했다.
"……하으. 미안. 선생님도 뭔가 좀 기운이 없네."
"괜찮으세요……?"
사야가 쭈뼛쭈뼛 묻자 양호교사가 말했다.
"그냥 갈 거면 선생님은 한숨 자야겠다."
셋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호교사가 칸막이 커튼을 치고 그 너머로 사라졌다.
"정말…… 선생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한숨 잔거야? 시트가 주름투성이네."
멍한 목소리가 커튼 너머에서 들려왔다.
"상관은, 없는데…… 일어났으면, 정리쯤은 해 둬……"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묵직한 털썩 소리가 났다.
"……선생님?"
셋이 커튼을 슬쩍 당기고 엿보자 양호교사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이불도 놔두고, 옷이며 신발, 안경조차 안 벗고 잠들었다.
사야의 눈에는 양호교사 위에 들러붙은 수수의 형태가 희미하게 보였다. 인간의 수면 상태를 어떠한 형태로 반영하는지 호흡이나 눈꺼풀의 떨림과 함께 수수의 형태도 미묘하게 변화한다. 그 모양새는 수수라기 보단 반투명 도시 미니어처가 인간 위에서 살아 숨쉬는 듯했다.
"수수가 기생했어── 둘은, 보여요?"
사야의 물음에 란과 히츠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안 보여."
"나도."
"역시 나한테만 보이는구나……."
"그런가보네. 어쩔래? 다시 한 번 슬립 워크 할래?"
히츠지가 물었다. 사야는 란과 눈을 마주치고서 말했다.
"놔두자. 이 녀석들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를 먼저 알아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
"그러게요. 수수잡이는 그 다음에 하죠. 방과 후에 침구점에서 봐요."
"알겠어."
잠든 양호교사를 뒤로하고 셋은 양호실 밖으로 나섰다. 한창인 점심시간, 학교는 소란과 활기로 가득차있다. 그런 학교를 걸어가던 사야의 낯빛은 점점 새파래졌다.
"왜 그래 사야."
낌새를 느꼈는지 히츠지가 말했다. 침을 꿀꺽 삼킨 사야가 말했다.
"이건, 위험할지도."
"뭐가요?"
란도 사야를 주목했다.
"늘어났어요──수수가."
사야의 눈에는 여러 수수들이 오가는 학생 사이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의 몸에 박혀 있거나, 머리와 어깨에 올라탄 개체도 있었다. 개중에는 많은 수수에게 기생당해 이형의 구조물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학생도 보였다.
30분 전까진 이렇게 많진 않았는데.
변화의 계기는 명확했다. 세 사람이 슬립 워크를 했기 때문이다.
나이트랜드의 광경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 수수들은 세 사람의 잠에 다리를 세워 데이랜드로 건너온 것이다.

수수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다──.
사카이모리 침구점에 모인 다섯은 이 무시무시한 사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어."
란이 분한 듯 말했다.
"지금까진 이런 적 없었어요? 한 번도?"
사야의 물음에 넷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없었어요. 달리 들어본 적도 없구요."
미도리가 대답했다.
"아이조메 선배네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건 없어요? 비전서나 뭐 그런 거."
"적어도 내가 물려받은 부분에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사카이모리양 집안에서도 그런 건 없는 거죠?"
"네. 전혀요."
"그럼 새로운 현상이란 뜻이 되는데……."
사야의 말에 미도리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도움이 안 되서 죄송해요."
"괜찮아 미도리. 다 같이 생각해보자, 응?"
카에데가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정리해보죠. 일어나는 사건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사야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선, 수수가 데이랜드로 오고 있어요. 이건 저한테만 보이지만, 절 믿는다면 틀림없는 사실이예요."
"믿어."
말 한 마디 없던 히츠지가 툭 대답했다. 다른 셋도 끄덕인다.
"고마워요. 다음으로, 어떻게 왔느냐에 대해선데, 이건 저랑 아이조메 선배가 봤어요. 수수는 저희의 꿈을 타고 나이트랜드에서 데이랜드로 이동해요."
란이 끄덕이며 보충설명을 했다.
"큰 다리 같은 수수였어요. 그런 게 수없이, 우리를 받침대 삼아 데이랜드와 통하는 통로를 만들어서…… 그보다 작은 수수들이 그걸 타고 건너왔어요."
"제가 알아챈 건 나이트랜드에서, 잠든 히츠지 위에 다리가 세워진 것을 봤기 때문이예요. 하지만 히츠지뿐만이 아니었어요. 아이조메 선배도 저도, 명석한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샌가 받침대가 돼 있었어요. 중간에 알아채긴 했어도 그러는 동안에 이미 많은 수수가 데이랜드에 들어왔어요."
미도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얘기, 엄청 무섭네요. 몰랐으면 더 큰 일로 번졌을 거란 얘기죠."
"그렇다고 봐. 아니, 지금까지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던게 아닌가 해서……"
"진짜……?"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내뱉은 카에데에게 사야가 말했다.
"요즘 우리가 꿈 속 통제권을 많이 잃었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수수가 벌인 짓이라고 봐요."
"실험했던 걸지도."
미도리가 끼어들었다.
"실험?"
"수수에게 지성이 있다, 는 전제를 깔아야 하는데──. 잠들었을 때 우리가 명석하다고 믿게 하고선 실제론 통제권을 빼앗아 받침대로 삼는다. 꽤 수준 높은 작전같지 않아요?"
"컴퓨터 바이러스 같네요……."
고민에 빠져드는 란 옆에서 카에데가 말했다.
"그치만 바이러스는 지성이 없잖아. 그치? 지성이 있든 없든 수준 높은 짓을 할 수 있는거 아냐? 우와, 나 금방 엄청 똑똑하게 얘기했어, 대단하지 않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을 마친 카에데의 머리를 쓰다듬던 미도리가 말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어찌 됐건 수수들이 우리를 찾는 건 틀림없다고 봐요."
"우리를 이용해서 데이랜드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기생하고…… 근데 굳이 데이랜드로 나올 이유가 있을까요?"
"나이트랜드에선 슬립 워커가 방해하니까 우리의 의표를 찌른 건 아닐까요……? 추측이긴 하지만."
"귀찮게 됐네요. 이대론 저희를 중심으로 데이랜드에 수수 아웃브레이크(폭발적 감염)가 터지겠어요."
란이 한숨을 폭 쉬고 말했다.
"우린 데이랜드에서 수수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렇다고 슬립 워크를 하면 통제권을 뺏겨서 감염을 확대하게 돼."
"그럼…… 앞뒤가 막힌 건가요?"
사야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미도리가 말했다.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실제로 호카게양 일행은 수수가 손쓴 걸 잠 속에서 알아챘으니까요. 여태까진 컨디션이 안 좋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젠 아니예요. 다 같이 경계하면 알아챈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명석 상태로 만들 수 있어요."
"응. 우리를 속이려 하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으니까."
사야가 끄덕이자 카에데는 열기를 품은 어투로 말했다.
"해 보자고. 당하기만 하는 건 분하잖아."
사야 일행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히츠지는 앉아서 쿠션을 안은 상태로 사야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어색함을 버티지 못한 사야가 반응했다.
"히츠지는 할 말 있어?"
"에."
수업 중에 졸다가 들킨 것처럼 히츠지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 음~, 딱히 없으려나."
"콘파루양 괜찮아요?"
란이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히츠지를 자세히 본다.
"미안, 좀 벙벙해서."
"정신 차려야지 히츠지."
사야의 말에 란이 미소 지었다.
"호카게양, 어느 샌가 콘파루양이랑 많이 친해졌네요."
"엥?"
"이름."
란이 말했다.
"전엔 굳이 성으로 불렀잖아요. 언제부터 이름으로 부르게 됐어요?"
"어……"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사야는 당황했다.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히츠지를 보자 고개를 휙 돌렸다. 나만 친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처음 보는데 잠에 취해서 갑자기 키스를 했다는 악행을 아직 용서받지 못한 모양이다.
어색해하는 사야의 등을 카에데가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친해지는 건 좋은 거잖아. 사야찌는 그동안 내내 거리를 두려고 했잖아. 그치, 히츠지찌"
"……그럴지도."
히츠지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란은 자기 차를 다 마시곤 일어섰다.
"좋아, 그럼 가 볼까. 지금 오시면 수수 무한사냥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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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19. 22:16

12

집에 도착한 것은 9시가 넘어서였다. '낮잠 동호회' 활동이라는 명목이 있다지만 너무 늦었다. 혼나지 않을까 각오하며 살포시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살살 닫았다.
"다녀왔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현관 복도 할 것 없이 불이 꺼진 상태로 거실의 불빛만이 반쯤 열린 문에서 흘러나왔다.
신발을 벗다가 자기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뇌리에 아까 꾼 꿈이 떠오른 것이다. 어두운 복도와 거실 불빛. 미도리가 동생이라는, 꿈이기에 가능한 말도 안 되는 전개에 정신이 팔렸었지만 저 광경은 낯익은 본가 그 자체였다.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가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음소거 상태로 켜진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실내엔 아무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부모님과 언니 모두 있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거실에도, 부엌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창문가에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꿈과 달리 그곳에는 넓은 마당이 아니라 코앞에 세워진 담과 건너편 주차장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밖에 곰은 없었다.
창문 걸쇠를 확인하고 원래대로 커튼을 닫았다. 뒤로 돈 순간 누군가 서있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비명을 질었다.
"아악!?"
"뭐, 뭐야!? 깜짝 놀랐네~"
"어, 언니?"
벽에 손을 대고 불을 켠 것은 아야였다. 형광등 빛을 받은 언니는 어이가 없을 만큼 평소와 같았다.
"어두운 데서 뭐 한 거야? 아니, 언제 온 건데."
"금방……. 엄마 아빠는?"
"거래처 사람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 갔다고 메시지 보내놨잖아."
"아, 미안, 몰랐어."
"사야 저녁 안 먹었지? 뭐 먹을래?"
"아니…… 괜찮아. 나중에 대충 때울게,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방에 가려 한 순간 불이 꺼졌다.
놀랄 틈도 없이 누군가가 등 뒤에 철썩 들러붙었다.
"왜 날 두고 간 거야 사야."
시커먼 실내에서, 누군가 귓전에 속삭였다.



사야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자기 방이다. 아직 어둡다──시계를 보자 새벽 4시였다.
"──꿈이였구나."
정신이 들자 한 손이 누군가를 찾듯 침대 위를 더듬고 있었다. 살짝 찜찜함을 느끼며 팔을 당겼다. 악몽의 충격과 함께 곁에 아무도 없는 침대가 너무 넓게 느껴져 불안함마저 느껴졌다.
불안해하며 손가락을 얽어 잡아당기자 명확한 반응이 느껴졌다. 여기는 데이랜드가 분명한 모양이다.
어두운 천장을 올려보며 안정을 찾으려 하자 시야를 가로지르는 것이 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며 공중을 걷는, 자기 발로 움직이기 시작한 별자리 같은 그것은 사야 위를 지나쳐 베란다와 이어진 창문을 빠져나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수수다.
튕기듯 일어나 창문에 달려가선 베란다로 나간다.
수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수수가 데이랜드에서 활동한다──.

한 번 알아채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사야는 그 날 점심까지 수수 12개체를 목격했다.
꼭 요정을 보는 눈이 생긴 것처럼 수수들은 차례차례 사야의 시야에 뛰어들었다.
집 안. 등굣길. 학교 여기저기. 생물이라고도, 인공물이라고도 하기 힘든 이형의 개체들은 누구 눈에도 띄지 않고 태양 아래를 활보했다.
수수들은 목적 없이 떠돌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애초에 그 진의를 알 수는 없다. 알았대도 슬립 워크상태가 아닌 사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수수도 사야에게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수업중인 교실의 책상 사이를 느긋하게 떠다니는, 해마와 백파이프를 더해 반으로 나눈 것처럼 생긴 수수를 시야 한구석으로 쫓으며 사야는 복잡한 심경으로 생각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수수는 어디까지나 나이트랜드 내부의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애들한테 들은 말도 그랬고 본인의 경험으로 비추어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데이랜드에 나오게 되면 슬립 워커의 전제가 무너진다── 잠의 안팎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아니──그러고 보니.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히츠지와 두 번째로 만나기 직전. 히츠지를 찾아 학교를 떠돌던 사야는 몽롱한 의식 상태로 옥상에 가는 수수를 발견했었다.
그 때, 사야의 불면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환각을 봐도 납득이 갈 만큼. 그러나 지금 사야는 수면장애때문에 고생하는 게 아니다.
일행에게는 이미 메시지를 보내뒀다. 수수가 보이는 건 역시 사야뿐이었지만 다급한 분위기는 전해진 모양이다.

사야 [방과 후엔 창고에 모이고, 일단 긴급 슬립워크해보지 않을래요?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을 하고 싶어요.]
란  [찬성]
히츠지[언제 어디?]
사야 [점심에 양호실]
란  [알겠습니다]
히츠지[ㅇ. 먼저 가서 침대 챙겨놓을게.]

4교시 끝을 알리는 종이 쳤다. 소란스러워질 반을 뒤로하며 사야는 서둘러 양호실에 갔다.
노크하고 문을 열자 양호교사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이 보였다. 살금살금 침대에 다가가 칸막이 커튼을 걷자 히츠지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기다렸지."
말을 걸었지만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았다.
"아…… 벌써 자는 거구나."
사야가 침대에 앉아도 히츠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보드라운 머리칼을 침대 위에 흩뿌리곤 색색 숨소리를 내는 히츠지를 내려다보며 사야가 생각했다.
이렇게 히츠지가 자는 걸 가만히 보는 건 어쩐지 신선하다. 어쩌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슬립워크할 때는 금세 잠에 끌려들어가고, 처음 봤을 땐 정말 순식간이었다.
지금 이렇게 깨 있는 건, 일단은 잠을 제대로 잤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니 히츠지의 블랭킷 능력이란 것도 대단한 녀석이다.
흐암, 큰 하품이 나왔다. 슬슬 옆에 누워볼까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 틈으로 내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란이 들어와 있었다. 몰래 문을 잠그고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제가 늦었죠. 얼른──"
말을 하다 만 란은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했다.
"아흐…… 실례. 얼른 처리하죠. 여길 오랫동안 차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양호 선생님의 점심시간을 뺏으면 미안하구요."
사야의 뒤를 이어 란도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왔다. 역시 보건실 싱글침대는 셋이 자긴 좁다.
"아이조메 선배, 괜찮겠어요? 안 떨어져요?"
"시끄럽게. 일단은 컴플렉스거든……."
"걱정되서 그래요, 근데……."
하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히츠지가 발하는 순수한 졸음이 양 옆에 누운 둘을 무자비하게 감쌌다.



고층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 여기저기에 불길이 일어났다. 총성이 산발적으로 터지고, 빌딩 벽에서 메아리친다.
전투 헬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간다. 사무실이 밀집한 곳에 장갑차와 병사들이 뛰어다니고, 전차가 포를 쏘면 건물들이 차례로 폐허가 된다.
나는 아래의 광경을 보고 떨었다.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집이나 학교는 무사할까──.
학교 하면, 그래, 히츠지는 무사할까. 그 애는 멍한 구석이 있어서 걱정된다. 얼른 데리러 가야한다. 하지면 여기서 어떻게 가야하지?
그 때, 옥상에 있는 전화가 울었다. 박물관에 있을법한 낡은, 빨간 전화.
"사야, 꿈이야."
"물론 알고 있어, 히츠지."
"정말로?"
"히츠지랑 얘기했더니 의식이 명확해졌어."
전화기 저편에서 히츠지가 의심스레 갸웃하는 모양이 보일 것 같았다.
코트를 흩날리며 란이 옥상에 뛰어내렸다.
"선배."
"호카게양, 명석한가요?"
"명석해요, 명석명석."
"정말인가요? 아니 됐어요, 저걸 봐요."
가리키는 곳을 보니 도시 저편에 빌딩보다 훨씬 높게 선 거대 수수가 걸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나아가는 원기둥 다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구름 속에 희미한 교각 같은 게 비쳐보였다.
"크다."
"네. 그리고 하나가 아니예요."
나는 란과 함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도시와 주변 황야에 장대한 크기의 수수가 떼로 걸어가고 있었다. 큰 강에 세워진 다리가 그대로 걸어 나가는 것 같았다.
"……수수, 점점 늘어나지 않아요?"
"틀림없이 그래 보이네요."
내가 란이랑 얘기하자 아직 들고 있던 수화기에서 히츠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한텐 잘 안 보이는데 뭐 하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다리 모양 거대 수수 위에 보다 작은 수수가 득실댔다.
다리 양 끝은 구름 탓에 희미하게 보인다. 한 쪽에서 슬금슬금 새로운 수수가 나타나 반대편을 향해 간다.
제각각에 꼴불견인 행진의 목적지를 보기 위해 나와 란은 걸어가는 다리에 다가섰다. 구름이 걷히자 다리가 바다 위에 걸쳐진 게 보였다. 완만하게 솟은 섬 위를 교각이 넘어가더니 더 앞을 향해 나아간다.
"바다 냄새가 나기 시작하네."
수화기에서 히츠지가 말했다.
"바다에 나왔으니까. 히츠지는 어디서 보고 있어?"
"그걸 잘 모르겠어. 여긴 어딜까?"
갑자기 란이 헉 소리를 냈다.
"설마. 말도 안 돼."
"왜 그러세요?"
"저 녀석들의 목적지. 어딘지 알 것 같아."
"어딘데요?"
"호카게양, 저 섬을 자세히 봐. 뭔가로 보이지 않아?"
교각이 건너가는 섬에 의식을 집중했다. 기묘한 섬이었다.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바위도 아니다. 섬의 윤곽은 섹시하다고 해도 될 만큼, 예를 들자면 그건 꼭 사람──.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히츠지?"
"왜에? 내가 뭐 했어?"
수화기가 손에서 미끄러지더니 아득히 먼 바다에 떨어진다.
섬이 아니었다. 히츠지였다. 콘파루 히츠지. 소중한 내 애인. 누워서 자는 히츠지의 몸을 넘어 수수들이 행진한다. 주위에 퍼진 바다는 어느새 물이 아니라 넓게 펴진 시트였다.
나와 란도 히츠지 양 옆에, 시트 위에 누워있었다. 로프로 묶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눈을 돌리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위에도 다리가 세워져 있었고, 그 무게가 나를 시트의 바다에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기력을 쥐어짜자 겨우겨우 몸이 움찔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났다. 몸 위에 세워진 다리가 기울어지고, 뒤집어지고, 대량의 수수와 함께 떨어진다.
소리쳤다.
"히츠지! 일어나! 이 녀석들 데이랜드에──"



사야는 몸을 잠에서 쥐어뜯듯 각성했다.
소리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앓는 소리만 난 모양이다. 강제로 눈을 떴을 때 특유의 몽롱한 생각과 온 몸에 뭔가가 들러붙어있는 듯 한 감각. 정신을 차리려 시도하면서 사야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콘파루양, 일어나."
쉰 소리로 말하며 잠든 히츠지의 어깨를 흔든다.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표정을 찡그리고 신음했다.
"으응……"
눈을 뜨려 하는 히츠지의 몸에서 연기 같은 것이 살며시 올라왔다. 고개를 든 사야의 시야엔 침대 위에 펼쳐진 반투명 구조물이 보였다. 고치에서 우화하는 벌레처럼, 히츠지의 몸에서 나온 수수가 낮의 세계의 빛에 녹아든다. 모습은 금세 안 보이게 됐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 강한 기척이 사야에겐 아직 느껴졌다.
눈을 비비는 히츠지 건너편에서 란도 일어났다.
"호카게양…… 방금 뭐였어?"
"수수예요, 또 나왔어요."
사야의 말에 히츠지가 갸웃했다.
"나한테는 안 보였어. 어디서 나왔는데?"
"……콘파루양, 몸에서."
"내 몸?"
사야는 끄덕였다.
"수수가 데이랜드로 건너오고 있어── 우리의 잠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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