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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9

20

호카게 아키는 문득 눈을 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데운 실내 온도는 땀이 날 정도였지만 일어나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자기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은, 넓은 객실에서 자 보려고 했지만 잠은 안 들고, 꿈속에서 또 가위에 눌렸었는데 갑자기 이불을 뺏기고, 내던져지나 싶더니…… 그 충격 탓에 깬 것일까. 이런 애매한 기억도 급격히 희미해지더니 이내 떠올릴 수가 없어졌다.
세수를 하려고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사야 방 앞을 지났지만 동생의 인기척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동생을 본 것 같은 흐릿한 기억이 남았다. 어쩐지 즐거워보였다. 언니가 가위에 눌렸는데도 꺅꺅거리기에 묘하게 짜증이 났지만── 평소의 무뚝뚝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층에 내려가 세면장에서 세수했다. 아주 오래 잔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머릿속이 깔끔했다. 방에 들어가다가 현관을 쳐다봤다. 사야의 신발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친구를 보러 간다고 했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 들은 사야의 밝은 웃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의외긴 했지만 친구랑 있을 때는 그런 성격일지도 모른다.
아키는 샌들을 대충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연보라와 노랜 색이 섞인 노을이 예상치도 않게 아름다워 한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평온한 저녁 분위기가 온 도시를 감싸 안았다. 아키 뒤, 집 안에서도 소리가 난다. 아무래도 부모님도 잠에서 깬 모양이다.
저녁 먹을 때까진 돌아올까──. 아키는 현관 앞에 선 채 사야를 무의식적으로 찾으며 황혼 속의 마을을 쳐다보았다.

사카이모리 침구점 침실에선 세 사람이 동시에 의식을 되찾았다. 소파 위에서 서로에게 기대 잠들었다……기 보단 아주 잠깐 기절한 듯 한 감각이었다. 잠시 끊긴 기억에 당황하다, 세 사람은 깨달았다. 이번엔 오랜만에 셋 다 저항 없이 잠들었었다.
그럼 해낸 걸까. 사야와 히츠지가 수수를 쓰러트리고 도둑맞았던 잠을 되찾아준 걸까.
세 사람은 서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소파에 몸을 맡겼다. 가운데 앉은 란의 어깨 좌우로 카에데와 란의 머리가 걸쳐진다. 눈을 감고, 이번엔 본인의 의지로 잠들러 간다. 히츠지의 능력만큼은 아닐지라도 동료들이 함께 한다는 안심감이 셋을 착실하게 잠 속으로 데려갔다.
지금 나이트랜드는 어떻게 돼 있을지 셋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아직 그곳에 사야와 히츠지가 있다면 데리러 가야한다.
눈꺼풀 뒤편의 어둠에 반짝대며 빛나는 모양이 생겨난다. 잠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것은 서서히 나이트랜드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변해갔다.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닫힌 커튼 너머의 창밖은 고요했고, 방 안은 어두웠다.
손을 뻗어 곁을 더듬는다. 살갗의 온기가 손끝에 느껴져 겨우 안심했다.
데이랜드에서 나이트랜드를 거쳐 도착한 이곳이 과연 어떤 곳일지 아직 모르지만, 아직은 수수의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녀가 눈을 뜨고, 꼼질거리는 게 느껴졌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보이지 않아도 그녀가 미소 짓는 걸 안다. 커튼 틈새로 비쳐드는 희미한 빛이 반사되어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빛났다. 사람의 모양을 한 야수가 그곳에 누워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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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8

19

깨어날 수 없다──. 이 두려운 결론을 받아들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날아도 뛰어 봐도, 뺨을 꼬집어도 손가락을 늘려도, 무슨 수를 써도 나이트랜드에서 나갈 수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트랜드는 분명, 완전히 소멸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인간의 잠을 잇는 집합적 무의식── 이란 해석이 맞다면 나이트랜드에서 사람들을 다 쫓아내도 데이랜드에 깨어있는 인간의 의식이 나이트랜드를 놔 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남겨진 나이트랜드를 꿈꾸는 마지막 두 사람. 우리는 잠을 빼앗은 대가로 잠 속에 갇힌 것이다.
어쩌면 어느 한쪽만 일어나는 건 아직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쪽이 남겨진다. 어느 한 쪽이 반드시 희생되는──데드락Deadlock이다.
"큰일 났네. 동반자살 할까."
포기하는 심정으로 뱉은 내 말에 히츠지가 고민에 잠겨버렸다.
"……그래. 좋아."
"예스 하지 말라고."
"그치만 나 혼자서만 깨어나는 건 싫어. 같이 사라지는 게 나아."
"나도 그렇긴 하지만 말이야……"
매트리스 위에 앉아 몰려오는 수수의 벽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한동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생각을 너무 해서 또 졸려졌어."
히츠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까지 이 상태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기에 나도 절제 없이, 히츠지에게 머리를 가져다 댔다.
"히츠지는 좋은 냄새가 나. 꿈속에서도."
"사야도 그래. 알고 있었어?"
"몰랐어. 땀 냄새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참 좋더라."
히츠지가 내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대, 간지러워진 나는 목을 움츠렸다.
"야아~."
"안심되는 냄새. 곁에 있으면 엄청 푹 잘 수 있어."
어쩌지도 못하고 냄새를 맡게 두던 내 머릿속에 뭔가가 번득였다.
"…………그래."
나는 바로 옆에 둥글려진 시트를 집어 들었다. 무한한 넓이로 보이던 시트인데 막상 들어보자 아주 평범한 사이즈였다.
일어나는 나를 히츠지가 올려본다.
"동반자살?"
"안 한다니까. 잠깐만 있어봐."
시트를 펼쳐 폭신한 매트리스 위에 깐다.
"뭐 할 거야?"
"잘 거야."
"여기서!?"
나는 기억과 상상력을 일으켰다. 늘 내가 쓰던 베개가 두 손 위에 생겨났다. 히츠지에게 패스해주곤 내가 쓸 것을 하나 더 만들었다.
"내 베개라 좀 그런데."
"어, 이거 사야 베개야?"
히츠지가 베개를 끌어안더니 냄새를 맡았다.
"진짜네."
"야! 그러지 마, 부끄럽잖아."
나도 모르게 항의하며 다시금 상상력으로 침구를 만들어냈다. 얇은 여름 이불. 시트 위에 베개를 두고, 이불을 깐 나는 히츠지를 불렀다.
"이리 와. 빨리 안 자면 무서운 게 올 거야."
"그게 무슨……"
"슬립 워크 중에 잠들면 나이트랜드에 빨려 들어간다── 분명 그랬었어."
"으응."
"이판사판으로 그걸 이용해보자. 어쩌면 수수가 데이랜드를 나이트랜드로 덮어쓰듯이 우리 슬립 워크가 나이트랜드를 데이랜드로 뒤집어놓을지도 몰라. 동반자살이건 탈출이건 우리가 직접 경험하게 되겠지만."
눈을 땡그랗게 뜬 히츠지의 손을 잡은 나는 이불 위에 앉았다. 폭신폭신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말했다.
"미안해. 기껏 해봐야 이런 생각밖에 안 나네.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해줘."
"아니. 사야와 함께라면 어떤 악몽이라도 괜찮아."
히츠지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말했다.
"이번엔 히츠지가 재워줘. 평소처럼."
"알겠어, 사랑스런 사야."
히츠지가 이불 속에 들어왔다. 한 이불에, 두 베개를 두고 서로를 마주본다. 히츠지의 눈 속에서 내가 보였다.
"──잘 자, 히츠지."
"안녕히 주무세요, 사야──"
히츠지가 눈을 감고 힘을 빼자 금세 졸음의 블랭킷이 나를 감싸 안았다.
사방팔방에서 수수가 몰려오는 종말 같은 풍경 속에서 우리는 나이트랜드 속으로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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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8

18

긴장 탓에 심장이 쿵쿵거려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
이렇게 잔 경험이 수도 없이 많음에도 도무지 졸려 오질 않았다.
"……저기, 멀었어?"
히츠지가 말했다.
"미안, 뭔가."
"긴장했어?"
그렇게 말하는 히츠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아서 부드럽게 들렸다.
"응…… 왜일까. 평소처럼 자면 되는 건데."
"숨 쉬는 타이밍을 맞춰보자. 천천히 숨을 쉬어봐. 편하게. 난 신경 안 써도 돼. 딱 붙어 갈 테니까."
"알겠어. 그럼…… 갈게."
사야는 호흡에 의식을 집중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히츠지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사야를 따라 들이쉬고, 내쉬고…….
커튼을 닫고 전등을 끈 방, 시계 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힌다. 긴장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 같긴 해도 졸음은 한참 멀리 있다.
히츠지가 쿡쿡 웃더니 고요히 속삭였다.
"옆에서 꼬물거리니까 하나도 안 졸려."
"미안."
"자장가라도 불러볼래?"
"에~……"
"에~는 무슨. 진짜 날 재우려는 거 맞아?"
"맞아…… 잠깐만 있어봐……"
사야가 잠의 입구를 찾으려 하는 중에 히츠지가 모로 고쳐 누웠다.
"그럼 얘기 하자."
"무슨 얘기?"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슨 뜻이야?"
히츠지가 한숨을 폭 쉬었다.
"사야는 나이트랜드에 있을 땐 날 좋아하는데, 데이랜드에선 안 그러잖아."
"으, 응, 그렇지."
"지금도 그래?"
"엥."
"요샌 이름으로 부르니까 조금은 익숙해졌을까."
"익숙해졌다……기 보단"
사야가 우물거린다.
"아직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아 아니."
"반대라니……?"
당황한 사야를 놀리지도 않고 히츠지는 말을 흘렸다. 사야는 한숨을 쉰 후에 자백했다.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는데."
"응."
"언제부턴가 있지…… 너를 대하는 감정이, 나이트랜드랑 데이랜드에서 같아져서."
"응."
"지금도 그…… 좋아하는 것 같아."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가 밀려온다.
"앗~ 잠깐만, 아냐. 그런 얘길 하려고 온 게 아닌데. 미안, 잊어줘."
"잊을 리 없잖아. 난 기뻐."
히츠지의 어조는 생각지도 못한, 따뜻한 것이었다.
"그, 그치만 히츠지는 그렇잖아, 날 좋아하는 건 나이트랜드에서만 그런 거잖아."
"아니. 난 처음부터, 나이트랜드건 데이랜드건 사야를 좋아했어."
"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사야를 히츠지가 누운 채 치켜본다.
"……처음부터?"
"사야가 양호실에서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계속 좋아했어."
"엇, 앗, 그럼."
갑자기 나타난 건 히츠지잖아──. 라고 반박하려 했지만 사야의 입에선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히츠지가 이어 말했다.
"내가 데이랜드에서 사야를 좋아하지 않는다곤 한 번도 말 안했는데."
"거짓말……"
어이없어하는 사야를 보며 히츠지가 킥킥 웃었다.
"정말이지 야박하긴. 네가 날 나이트랜드에서만 사랑하니까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치사해."
"안 치사해. 사야가 착각한 것뿐이지. 남 탓 하지 말라구."
말문이 막힌 사야의 등에 손을 대며 히츠지가 말했다.
"언젠간 전하고 싶었어. 말하길 잘했다. 사야가 털어놔줘서 나도 용기가 났어. 고마워."
"나, 나야말로, 고, 고마워……."
"정신 차려. 말투가 영 이상해."
히츠지가 우스워하며 말하기에 사야도 함께 웃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침대에 드러누워 서로를 마주보자 깔깔 웃음이 나왔다.
"정말, 조용히 해 줘. 잘 거 아니었어?"
"그, 그렇지. 진정하자."
심호흡 하려했지만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이래선 틀렸네. 바로 눕자."
"응."
둘은 다시금 천장을 향해 고쳐 누웠다.
"흐암……"
히츠지가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사야에게도 옮겨가, 큰 하품을 만들었다.
"……하으. 이젠 졸려?"
"하려던 말을 해서 안심이 됐는지 갑자기 졸려."
"나도……"
"먼저 자지 마. 사야가 재워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럴 거야……"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조용해지자 졸음이 물밀듯 다가왔다.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속삭이듯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사야."
"너도 잘 자, 히츠지──"



밝은 밤하늘 아래, 시트에 덮인 대지 위에 무수한 사람들이 잠들어있었다.
수정 알을 파괴한 순간 보인 풍경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졌다. 나이트랜드를 덮어왔던 모든 허식이 떨어져 나간 결과인 걸까. 의식을 잃고 잠든 사람들을 넘어 다니는, 코끼리를 확대한 것처럼 생긴 거대 수수가 활보하고 있었다.
시트 위에 내려선 나와 히츠지는 지평선까지 이어진 잠든 이들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이걸…… 깨우러 가는 거야?"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지."
"딱 봐도 힘들어 보이는데."
"나이트랜드에선 상상력을 쓰는 거잖아. 다들 그렇게 가르쳐줬잖아."
나는 쪼그려 앉아 발치의 시트를 잡았다. 히츠지도 옆에서 따라했다.
"셋 하면 당기는 거다."
"알겠어."
"둘 셋……"
"셋!"
둘이 한 목소리로, 있는 힘껏 시트를 잡아당겼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잠든 사람들이 차례로 굴러간다. 번득 눈을 뜨자마자 그 모습이 사라졌다. 깜짝 놀란 표정이 웃겨서 우리 둘은 깔깔 웃었다.
"다들, 일어나~~! 그만 자~~!"
히츠지가 비명 지르듯 폭소했다. 어느 틈엔가 우린 산처럼 커다래져서, 발밑으로는 미니추어로 변한 인류가 줄지어 나이트랜드에서 쫓겨나간다. 이상을 느낀 거대 수수가 다가오지만 시트의 파도에 다리가 걸려 도무지 이쪽으로 다가오질 못한다. 그 틈을 노려 우리는 시트를 무한히 잡아당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시트가 사라졌다. 대지는 매트리스 표면이 됐고, 잠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의 크기도 돌아왔다.
사라진 인간 대신 사방의 지평선에서 솟아나는 거대한 벽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수히 많은 수수가 만들어낸, 난생 처음 볼만큼 거대한 무리다. 잠의 바다가 말라붙어 모든 수수가 우리 둘의 잠에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우와~ 장관이다."
히츠지는 기가 막힌 말투로 말했다.
"수수가 이렇게 많았구나. 이게 전부 우리 둘의 꿈속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이상한 느낌이야."
"나이트랜드가 이렇게 작은 건 사상 최초일 테니까 말야."
"이제 우리가 눈을 뜨면 수수가 전멸 당하는구나…… 똑똑하네, 사야."
"뭐 그렇지."
"란도, 카에데도, 미도리도── 이제 모두가 다시 슬립 워크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럴 거야."
"좋아, 그럼, 이제…… 일어날까."
달성감을 품으며 우리는 깨어나려고 했다.
"…………"
"…………"
"…………응?"
──깨어나는 건, 어떻게 하는 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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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7

17

현관을 연 사야를 맞이한 히츠지의 눈 밑에 커다란 다크서클이 자리해 제대로 못 잔 것이 일목요연했다.
"우와. 얼굴이 왜 그래."
사야의 말에 히츠지는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볼일인데?"
"할 얘기가 있어. 들어가도 돼."
"……상관은 없는데."
미심쩍어하면서도 히츠지는 사야를 집에 들였다. 집 안은 고요했다, 둘 외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히츠지 뿐이야?"
"응. 부모님은 본가에 피난하셨어. 부모님도 내 쿨쿨 파워를 잘 아시니까 자취생활을 만끽하는 중이지."
"그렇구나……. 우리 집이랑 반대네, 다 불면증이거든. 다음에 우리 집에 들려줘."
"상관은 없는데 가기가 힘들어. 그냥 걸어만 가도 차들이 전부 졸음운전을 하더라구."
그렇게 말을 하던 히츠지는 사야를 살펴보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야는 안 졸려?"
"엄청 졸려. 그래도 아직 참을 만 해."
그렇게 말하다 하품을 해 버렸다. 내성이 있는 사야조차 이 꼴이니 네버 슬리퍼가 아닌 사람은 30초도 못 버티리라.
"흐음~. 뭐 너무 무리하진 마."
"나도 알아…… 하암."
히츠지의 방에 들어가자 침대 위에 죽 늘어선 인형들의 눈길이 환영했다.
"대충 앉아."
무뚝뚝한 말투로 한마디 던진 히츠지가 책상 앞 의자에 걸터앉았다. 사야가 바닥에 앉으려 하자 히츠지는 침대를 가리켰다.
"괜찮아?"
"특별히 봐 줄게. 걔들도 딱 하나라면 안아도 돼."
"알겠어. 그럼…… 실례합니다."
사야는 히츠지의 침대에 앉아 커다란 올빼미를 안았다. 보들보들한 타월 천에서 히츠지 냄새가 났다.
"그래서, 할 말은?"
"그 전에. 왜 말 안했어?"
"응?"
"집에서 못 나올 만큼 블랭킷 능력이 강해진 거. 다른 애들은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몰라서 충격 받았어."
"괜한 걱정시키기 싫어서."
"아무리 그래도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방금 만났으면 또 몰라도 이제는 그…… 왜…… 안 그렇잖아! 내 말이 틀려? 나만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 건…… 지금은 상관없잖아."
"상관 있어! 내 계획도 애들이 가르쳐주지 않았으면 못 짜냈을 거라고!"
"계획이 뭔데."
"현재 상황을 타파할 계획. 수수를 해치우고 편하게 잠들기 위해."
"흐음~……?"
히츠지의 못미더워하는 눈빛이 재촉하자 사야는 생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진 계속 히츠지가 나를 잠 속으로 데려갔잖아? 그걸 반대로 해보면 어떨까 해서."
"응? 그게…… 무슨 뜻이야?"
"히츠지가 나랑 동침하는 게 아니라, 내가 히츠지랑 동침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히츠지의 '블랭킷'이 된다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불면증에 시달려."
"응?"
히츠지가 눈을 끔뻑인다.
"어어…… 일단 지금도 상당히 그렇지 않아?"
"아직 부족해. 더 뺏는 거야. 완전히 잠들지 못하게. 미안한 소리지만 수면제로 잠드는 불면증은 가짜야. 진짜 불면을 가르쳐 주는 거지."
급하게 말을 쏟아내는 사야를 히츠지가 수상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사야, 대체 언제 인류를 배신한 거야?"
"영원히 그러겠다는 게 아냐. 일시적으로. 아마. 조금만……"
"벌써 수상해지기 시작했는데."
"나이트랜드는 전부 이어졌다고 했었잖아. 수수는 인간의 잠을 매개 삼아 늘어나니까 잠이 없으면 살 수가 없지. 세상은 누가 일어난대도 다른 누가 자니까 잠에서 잠으로 계속 옮겨가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어. 보통은 말이야."
"그 잠을 없애버리자고? 그런 게 가능해?"
"혼자선 못 해. 하지만 히츠지한테는 블랭킷 능력이 있잖아. 내 불면을 히츠지의 능력으로 모두에게 나눠주는 거야. 나이트랜드에 남은 잠은 나랑 히츠지 것뿐이야. 그러면──"
"그러면……?"
"우리 말고 자는 사람이 없으면 수수는 나랑 히츠지의 잠 속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잖아. 그렇게 되면 우리 둘이 일어나는 거야."
"일망타진 할 수 있다는 거구나. 고민좀 했겠네."
히츠지가 고요하게 말했다. 불안해진 사야는 말을 더했다.
"물론 말이지, 그래도 되나 싶은 생각은 해. 전 인류에게 영향을 주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봐. 안 그러면 모두가 꿈이 돼 버려──"
히츠지가 일어나 사야에게 다가갔다.
당황하는 사야 옆, 침대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가라앉자 둘의 어깨가 닿았다.
"히츠지?"
"알겠어. 하자."
"괘…… 괜찮아?"
"사야가 꺼낸 계획이잖아. 그래서 어떡하면 돼? 난 매번 먼저 자서 누가 재워주는 건 처음이야."
히츠지가 침대에 누워 사야를 올려본다.
"동침해줘, 사야."
"으, 아, 알겠어."
사야는 점잖게 히츠지 곁에 누웠다.
전 인류의 잠을 빼앗고, 둘이서 푹 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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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6

16

"사야, 어디 가."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려던 사야는 그 물음에 뒤를 돌았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키가 벽에 기대 나른한 표정으로 사야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 밑엔 큼직한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머리카락도 퍼석댔다.
"언니…… 괜찮아?"
"엉망이지. 너는?"
사야가 고개를 가로젓자 아키는 괴롭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얼마나 힘든지 이해가 안됐어. 잠을 못 자는 게 이렇게 힘들줄이야."
사야는 그저 끄덕였다. 언니가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지 며칠이 지났다. 아키뿐만이 아니라 부모님도 그랬다. 아직 짧은 시간이라면 수면유도제로 강제로 잠든다지만, 약의 효과도 점차 약해지는 듯했다.
"어디 가."
아키가 다시 물었다.
"친구 보러 가."
"아, 그 낮잠 동호회랬나. 걔들은 좀 잔대?"
"아니…… 요샌 그다지."
사야가 말을 흐리자 아키는 느릿하게 끄덕인다.
"불쌍하다, 진짜. 다들 편하게 잘 수 있으면 좋겠다."
"응."
"나갈 거면 조심해. 너도 못 자서 좀 멍하니까."
그러더니 뒤로 돈 아키의 목과 어깨에 수수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찝찝해진 사야는 시선을 돌리고선 현관문을 열고 밖에 나섰다.

꿈의 빈곤화── 라는 단어가 있다고 미도리가 말했었다.
잠에서 깼을 때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을 못한다는 뜻이다. 슬립 워크를 시작하고서부터 명석한 상태로 꾼 꿈은 확실히 기억했는데, 지금은 나이트랜드에서 자기들이 뭘 했는지 거의 다 잊게 됐다.
또 한편, 격렬한 데자뷔에 시달리게 되기도 했다. 간신히 남은 토막 난 꿈의 기억은 예전에도 체험한 것만 같았고, 루프에 사로잡혀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다 피폐한 상태로 눈을 뜨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이트랜드와 데이랜드를 헷갈리는 경우도 점점 늘었다. 학교에서 걷다가 하늘을 날려고 바닥을 찼다가 고꾸라지거나, 자동차가 오가는 도로를 무의식적으로 건너려 하는 등 오싹한 체험이 늘어나 수시로 손가락을 잡아당기는 게 꿈이 돼 버렸다.
다섯 명이 서로를 보듬어가며 슬립 워크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사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우린 잠에서 방축(放逐)당하고 만거야──"
란이 툭 내뱉은 말이 현 상황을 그대로 가리켰다. 다섯 명의 슬립 워크 능력은 마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만신창이가 됐다. 히츠지의 블랭킷 능력은 효과가 불안정해져선 의도치 않은 상황에 동료들을 기절시켰다. 카에데의 변신도 제어가 안 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괴물로 변해 본인과 동료들 모두를 패닉 상태에 빠트렸다.
거기에 더해 평범한 수면조차 침식당했다. 꿈의 컨트롤을 완전히 잃고, 기억도 멀쩡하지 않은 상태로 나이트랜드에 들어가는 건 공포임에 다름없었다. 생각해보면 이 상황은 명석하지 않은, 평범한 꿈에 돌아간 것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슬립 워커로서의 삶을 경험하고 나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동시에 데이랜드에 출몰하는 수수가 점차 늘어났다. 햇빛 아래를 헤매다 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들러붙는 수수의 모습은 보기 싫어도 눈에 들어왔다. 그에 비례하듯 주위엔 수면장애가 늘어났다. 가족도, 학교에도 수수가 들러붙은 사람들뿐이다. 눈 밑에 다크서클을 만들곤 휘청거리는 사람, 갑자기 쓰러져 잠드는 사람, 악몽을 꾸곤 절규하는 사람……. 우려해왔던 폭발적 감염(아웃 브레이크)가 시작됐다. 이 마을을 폭심지 삼아 수수의 데이랜드 침략이 급속도로 진행돼 가고 있다.
사야 일행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의심은 짙어졌다. 수수는 '알'을 향한 관심을 미끼삼아 사야 일행이 나이트랜드와 데이랜드를 잇는 통로를 만들게 유도했으리라. '알'의 기억이 애매해졌던 사실조차, 아마도 주의를 끌기 위한 수작이었으리라. 수수가 이런 지혜를 갖고 있었음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은 사야 일행을 완벽하게 추월한 것이다.
외출하면 강제로 자기들이 일으킨 사태를 직면당하지만, 집에 있어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가족들이 죄책감을 자극한다. 마침내 버티지 못한 사야는 견디다 못해 밖으로 나서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겨 오랜만에 사카이모리 침구점을 방문한 것이다.
창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 발소리만이 들려오고, 천창에서 비쳐드는 빛줄기 속을 먼지가 덧없이 날아다녔다.
처음 여기 왔을 때 같다.
침실 중앙의 킹 사이즈 침대는 저번에 쓴 상태 그대로 방치된 것처럼 시트와 이불이 주름져있었다.
누가 있으면 조금은 신경이 분산될 줄 알았지만 기대가 빗나갔다. 도저히 성공하지 않는 슬립 워크에 마음이 꺾여 마침내 아무도 안 오게 됐다.
넓은 침대에 쓰러진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고요한 창고에 혼자 누워있자니 문득 기척이 느껴졌다.
따각따각, 따각따각 바닥을 치는 단단한 소리는 신발이 아니라…… 발굽 소리다.
산양을 타고 후드를 둘러쓴 남자가 선반 사이에서 나타났다.
"또 만났군, 네버 슬리퍼."
"이건…… 꿈?"
"꿈이나 현실, 어느 쪽이건 언젠가 모든 것은 꿈이 된다. 너희들은 놈들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남자는 침대 앞에 딱 멈추더니 사야와 마주했다.
"수수놈들은 이런 식으로 슬립 워커들을 수도 없이 함정에 빠트려 데이랜드를 나이트랜드로 만들어왔다. 지금까지 현실이었던 것이 꿈이 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새로운 데이랜드가 시작된다. 그리고 슬립 워커도 꿈이 되어 사라진다. 이전에 우리가 그랬듯. 그리고 이번엔 너희가 그리 됐듯이."
"그럼…… 당신도, 슬립 워커?"
남자는 후드 속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있던 데이랜드에서는, 난 CIA 몽견(夢見)부대 일원이었다. 'GOAT'라 불리던 팀은 세계 각지의 몽견 전승자와 협력해 조직적으로 수수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우리 팀도 전부 당했다. 나도 나이트랜드를 헤매는 꿈의 잔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음으로 너희가 그렇게 돼 가고 있다."
"우리도…… 꿈이 된다고?"
"그래. 하지만 우리 때는 없었던 요소가 단 하나 있다. 그게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
"뭔데?"
"너다, 네버 슬리퍼."
남자는 안장 위에서 팔을 뻗어 사야를 가리켰다.
"너만이 기나긴 불면 속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너만이 데이랜드에 나타난 수수를 볼 수 있다── 그건 즉, 너는 데이랜드와 나이트랜드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쳐도── 나보고 어떡하라고. 지금 일어나는 사건을 어떻게 멈추면 되는데."
짜증내는 사야에게 산양 기수는 비밀처럼 속삭였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No one shall sleep)."

"호카게 양?"
누가 나를 부른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미도리가 사야를 보고 있었다.
"아…… 안녕."
"사야찌네. 잘 지냈어?"
미도리 뒤에서 카에데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둘 다 웬일로 온 거야?"
"호카게 양이야말로."
"난── 여기 오면 누가 있지 않을까 해서."
미도리와 카에데가 눈을 마주치더니 슬쩍 웃었다.
"우리도 그래. 그치 미도리."
"네."
"슬립 워크가 안 되는 건 알겠는데 말이지, 너네랑 못 만나는 게 영 쓸쓸해서."
"소파에 앉아요. 차 내 올게요."
미도리의 말에 사야가 일어섰다. 주변을 둘러봐도 산양 기수는 아무데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현실에서 일어난 일일리가 없다── 정신을 차리려 했을 때 사야의 눈길이 바닥에 빨려들었다.
침대 옆 바닥, 콘크리트 표면에 발굽자국 네 개처럼 작은 패임이 있었다.
"사카이모리 양…… 이거 원래 있던 거였나?"
사야가 가리키는 곳을 미도리가 돌아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랬었나요. 팔레트 자국 같은데── 이게 왜요?"
팔레트 자국?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산양을 탄 남자가 거기 있었다는 생각보다는 합리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사야는 방금 겪은 체험을 되새겼다.
최근 들어, 아마 수수가 방해했기 때문에 사야 일행은 나이트랜드에서 멀쩡한 기억을 가져올 수가 없었지만 이번엔 명확한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 남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눌러앉아 사라지질 않았다.
"……'아무도 잠들지 말라.'"
사야의 혼잣말에 생각지도 않은 반응이 돌아왔다.
"'투란도트'인가요?"
고개를 들자 선반 틈새로 란이 보이더니, 당연한 양 소파에 앉았다.
"선배, 왜 여기에."
"너희랑 똑같은 이유 아닐까?"
미리 짠 것처럼 미도리가 모두의 머그컵을 테이블에 두고 커피를 따르기 시작했다.
"투란도트가 뭐예요?"
"오페라예요. 옛날 중국의 투란도트 공주에게 구혼하는 왕자가 수수께끼를 냈어요. 자기 이름을 동틀 때까지 맞추지 못하면 결혼하고, 못 맞추면 결혼을 포기하고 목숨을 내놓겠다, 고. 그 때 공주는 백성들에게 왕자의 이름을 밝힐 때까지 아무도 잠들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
"엥, 너무하잖아!?"
카에데가 비난했다.
"너무하죠. 결혼하기 싫은 것도 이해되지만."
"악질에도 정도가 있지. 상관없잖아, 백성은."
"백성……이라."
사야는 테이블의 머그컵중 딱 하나 비어있는, 히츠지의 컵을 보며 중얼댔다.
"히츠지는 안 오는 걸까."
"그 아인…… 안 올 것 같아요."
란이 말했다.
"왜요?"
"그 아이의 블랭킷 능력은 원래부터 너무 강력했어요. 히츠지가 잠들면 의도하건 아니건 주변 사람들도 잠들어요. 그래서 주변에 아무도 없을 곳을 찾아 잤는데, 지금은 그런 수작이 안 통할만큼 강해졌을 거예요."
카에데가 이어 말했다.
"나도 걱정돼서 히츠지찌 집에 가 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가까이 가기만 해도 위험해."
"어떻게 위험한데?"
"졸려. 엄청 위험해. 전보다 범위가 늘어나서 진짜 위험해. 지금의 히츠지찌에게 다가가고도 멀쩡한 건 네버 슬리퍼인 사야찌 정도일걸."
이야기를 듣던 사야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히츠지는 사야에게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카게 양, 나중에 어떤 상태인지 보러 가주지 않을래요?"
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호카게 양?"
"응? 아, 미안……. 있잖아, 물어볼 게 있거든. 히츠지의 블랭킷 능력은 얼마나 널리 펼쳐질 수 있을까."
"콘파루 양은 늘 억제했는데, 하려고만 하면…… 얼마나 펼쳐질지 예상이 안 되네요."
"그래……"
세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 사야를 쳐다본다. 마침내 사야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는데── 들어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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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5

15

우리 다섯 명은 영문 모를 신음소리를 내며 차례차례 벌떡 일어났다.
"아~~! 아~~~~!!"
"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모, 모르겠어요, 전원을 끈 것처럼 갑자기 꿈에서……"
혼란 속에서 몇 분이 지나 겨우 대화가 가능해졌을 무렵 란이 말했다.
"수수의 둥지가 어떻게 됐는지 본 사람 있나요?"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을 깬 것까진 기억해. 하지만 거기까지밖에──"
란은 굳은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다시 가 보죠."
"잠깐 안 쉴래? 어쩐지 멍한 느낌이라……"
카에데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란은 수긍해주지 않았다.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죠. 상황만 보고 바로 돌아오는 거예요."
사야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눈을 꽉 감았다. 아주 큰 충격을 받은 느낌은 남았지만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옷이 살짝 당겨가는 감촉에 눈길을 떨구자 어느 샌가 불안해보이는 히츠지가 사야의 옷소매를 잡고 있었다. 사랑스러움에 사로잡혀 손을 잡자 히츠지도 맞잡았다.
땀에 살짝 축축해진 침대 위에 다섯 명이 다시금 누웠다. 슬립 워크를 중단했을 때도 바로 다시 돌입하면 직전에 꾸던 꿈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점은 사야도 경험을 통해 배웠다.
히츠지가 뿜는 졸음의 블랭킷이 모두를 감싸 안자 날카롭던 신경이 가라앉아, 다섯 명은 방금까지 있던 샘을 향해 슬립 워크를 재개했다.

*

우리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창고 천창에선 잔뜩 찌푸린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어떻게 된 거지?"
"다시 한 번 슬립 워크 했을 텐데……"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본다. 어떤 원인 탓에 잠이 깨버린 모양이다. 란이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틀렸나보네…… 어쩔 수 없네요"
"좀 쉬죠. 지금 차 내 올게요."
미도리가 제일 처음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타박타박 뛰어갔다.
곧 물이 끓고 커피향기가 퍼져왔다. 우리는 아직도 멍한 머리를 붙잡고 평소처럼 소파에 모였다.
"오늘은 기모브(마시멜로)를 사왔거든요."
"오~ 멋진데."
"멋진 거야?"
"몇 년 전쯤 유행했었죠."
접시에 얹힌 색색깔 입방체 과자를 보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각자의 머그컵에 미도리가 커피를 부어줬다.
"자 다들 드세요──"
그렇게 말하며 먼저 기모브를 입에 넣은 미도리가 뚝 하고 굳었다.
뭔가 무서운 것을 본 양 눈을 크게 뜨고 얼어붙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진 걸 느낀 란이 말을 걸었다.
"미도리……?"
어리둥절한 말투로 미도리가 중얼댔다.
"맛이── 안 나요."
그 말과 동시에 접시 위에 있던 기모브가 단박에 모래로 변해 스르륵 무너졌다.
우리는 깜짝 놀라 일어났고, 침실을 둘러싼 높은 선반들이 덜걱덜걱 흔들리나 싶더니 쌓여있던 박스가 일거에 터졌다.
선반 저편에서 눈과 다리와 독이 담긴 거대한 턱으로 그득한, 더없이 역겨운 벌레들이 우글우글 나타나더니 우리를 산산이 갈라놓기 시작했다.
천창에선 모르는 사람의 거대한 얼굴이 보이더니, 절규하는 우리를 무표정으로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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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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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뒹굴고 있는데 아래층에 있던 엄마가 불렀다. 입원중인 할머니 병문안을 갈 테니 운전을 해달라고 했다.
귀찮긴 했지만 요즘은 성적도 썩 좋지 않았으니 내가 약자 쪽이다.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내려가 엄마랑 집을 나섰다. 차고에 들어있던 차를 타고 시동을 건 다음 어찌어찌 안 긁고 도로로 나와 시내 쪽으로 운전한다. 벌써 후회된다. 왜냐하면 나는 면허가 없기 때문이다.
왜 운전하겠다고 한 걸까. 사고 난다, 무조건 사고 난다. 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겁먹은 상태로 핸들을 잡고 어깨너머로 배운 운전 실력으로 비틀비틀 직진한다. 브레이크와 액셀이 뭔지는 겨우 알고 있지만 힘조절이 안된다. 액셀을 살짝 밟으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속도가 나기에 당황해서 브레이크를 밟자 덜컹대며 차가 섰다. 운전이 너무 어색해 주변 차들에게 방해된다는 점도 느껴진다.
비지땀을 흘리며 도강교에 들어섰다. 아주 복잡한 다리 위에서 수없이 많은 줄을 이루는 차들이 느릿하게 통과중이다. 그 때 마침내 운전이 끝장났다. 앞뒤 차에 끼어 도망칠 틈도 없는 상태로 액셀을 꽉 밟아버린 것이다. 공황상태에 빠진 나는 냅다 핸들을 꺾었다. 앞차와의 사고는 피했지만 대신 다리 난간에 들이박고 말았다.
그리 빠르지 않았던 게 불행중 다행이었지만 시동이 꺼진 차는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내 뒤로 차들이 점점 늘어서고, 교통정체가 커지는 장면을 절망적인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앞 유리를 타고 흐르는 수막이 바깥 풍경을 점점 흐리게 만든다.
뒷좌석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룸미러를 보자 거기 앉아있을 어머니가 없다. 비로 흐릿한 창밖 풍경으로 어딘가 낯익은 인영이 멀어져간다.
분명 내가 사고를 내서 화가 나서 간 것이다. 차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외로움을 느끼던 내 바로 옆에서 갑자기 유리를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옆을 본 내 눈앞에서 주먹이 다시 유리를 친다. 쾅쾅쾅! 겁이 나 몸을 빼자 이번엔 주먹이 아니라 공구──너트를 돌리는 긴 스패너가 떨어졌다. 유리가 산산조각나기에 나는 그만 얼굴을 가렸다.
"사야! 꿈이야!"
깨진 유리 틈으로 들어온 말에 안도했다. 차 밖에 서있던 건 히츠지였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남은 유리조각을 스패너로 정리한다. 물속에서 부상한 것처럼 의식이 급속도로 명확해진다. 내 눈을 본 히츠지가 말했다.
"빨리 나와. 여긴 위험해."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문이 찌그러져 잘 안 열렸다. 나는 히즈지가 깨준 운전석 창문으로 기어나갔다.
쏟아진 유리조각 위에 섰다.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히츠지, 웬일이람. 이런 데서 만나니 기쁜걸."
"진짜, 정신 차려. 명석해지지 않으면 큰일이라구."
화난 듯 말하는 표정 또한 귀여워서 끌어안고 싶어진다. 행동에 옮기려는 찰나, 어디선가 기적(汽笛)소리가 들렸다.
다리 저편에서 내리는 비를 뚫고 갑판이 수없이 겹쳐진 거대 호화 여객선이 다가온다. 차가 꽉꽉 들어찬 다리를 향해 배가 똑바로 밀어닥친다. 세우려는 기미도 없이, 이윽고 뱃머리가 닿았다. 귀를 찢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꺾이는 다리 경계선에서 차가 후두두둑 떨어진다.
발밑이 급격하게 기울어지더니 나와 히츠지도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졌다. 반응할 틈도 없이 공중에 내던져지자 시커먼 수면이 들이닥친다.
커다란 물보라를 만들며 수면에서 고래만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원자력 잠수함과 인간을 합체시킨 듯한, 인어로 변신한 카에데였다. 가슴팍으로 나와 히츠지를 받아낸 카에데가 말했다.
"깨 있어~?"
"깨 있진 않겠지."
내 말을 들은 카에데가 커다란 입을 벌리며 웃으니 상어 같은 치열이 보였다.
계속 전진하던 호화 여객선이 마침내 다리를 끊었다. 철골로 만들어졌을 다리가 나무젓가락 공작품 같은 싸구려로 변하더니 점차 붕괴된다. 다리 위의 차들도 디테일을 잃어서 지금은 둥그렇게 말아낸 종잇조각으로만 보인다. 작게 튀어나온 다리가 버둥대는 것을 보고서야 저게 수수떼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늘에서 란과 미도리가 날아와 카에데의 양 어깨에 착륙했다. 란이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명석하죠? 서로의 언동에 주의하면서,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비상을 알려주세요. 수수가 우리를 암우(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사리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음. 또는 그런 사람. 역주)로 만들려 하는 게 틀림없으니까."
미도리가 이어 말했다.
"기본적으로 제가 여러분을 모니터링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제가 당할 가능성도 높아요. 죄송하지만 저도 한 번씩 살펴봐주세요……."
"알겠어. 그럼 이제 어떡할 거야?"
히츠지가 물었다.
"수수들이 어디서 오는지 찾자. 그 녀석들은 어디에선가 나와 우리의 잠을 타고 데이랜드로 오고 있어── 그러니까 입구를 찾아서, 부순다."
강 속으로 무너지는 다리를 뒤로하며 우리는 강변에 상륙했다. 어딘가 자동차를 닮은 수수떼가 점점 다가와 다리가 있던 자리에 선다. 정체가 심해지자 앞쪽 수수가 밀려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걸 다 해치우려면 뼈 빠지겠네~."
카에데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며 다리가 넷 달린 켄타우로스 같은 형태로 변신했다. 허공에서 긴 창을 만들어 수수떼를 찌르기 시작했지만 끝이 없어 보인다.
란이 카에데의 등을 타고 오르며 말했다.
"지금은 놔두죠. 여기서 시간을 뺏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아요. 녀석들이 오는 곳을 찾아내 본줄기를 끊어놓지 않으면 아무리 쓰러트려봤자 똑같아요."
미도리도 이어 말했다.
"저도 찬성이예요. 저희가 명석한 한 수수는 데이랜드에 들어올 수 없어요. 거꾸로 말하자면 꿈에 빠진 시점에 저희의 잠은 데이랜드행 통로가 돼 버리고요."
"있잖아, 혹시 수수 사냥에 빠지면 명석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끼어들지 미도리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럴지도 몰라요. 수수를 잡는 행위 자체가 슬립 워커를 꿈에 열중하게 만드는 함정으로서 기능한다면──"
히츠지가 갸웃했다.
"그럼 우린 한참 전부터 함정에 빠진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수수의 행동이 변한 지는 얼마 안 됐으니까."
"저기 저기, 느긋하게 얘기해도 괜찮을까? 수수가 어디서 올지 찾으려면 일단 우리도 움직여야 하잖아."
카에데가 초조한 듯 말했다.
"그렇죠── 움직여요. 너무 떨어지지 말고 뭉쳐다니는게 좋겠어요."
"날 타면 돼지. 태워다 줄게!"
네 다리로 달려 나가는 카에데, 나는 당황하며 카에데에게 붙었다. 반쯤 잠수함일 때부터 따라온 금속 장갑에는 친절하게도 사다리와 난간이 있었다.
우리 넷을 등에 태운 카에데가 아스팔트 위를 달려간다. 마주치는 수수를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창으로 찌르고, 기계 발굽으로 짓밟으며 나이트랜드 심부로 달려간다.
황토색 흙 위로 마른 풀이 드문드문 박힌 황야에 한줄기 도로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따금 수수떼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더니 스쳐 지나며 우리 뒤로 멀어진다.
머지않아 곧바르던 길이 구불대기 시작했다. 바닥의 경사도 험해져선 오르락내리락 커다란 파도모양을 이뤘다. 주위엔 나무가 늘어서 어느새 우리는 깊은 숲속을 달렸다.
우리는 카에데의 등 위에서 티 세트를 둘러싸고 앉아있었다. 미도리가 입에 컵을 대더니 인상을 썼다.
"역시 틀렸어요. 맛이 안 나요."
"어느 틈에……. 사카이모리양 괜찮아? 명석해?"
"죄송해요, 명석한 상태예요. 이렇게 하면 맛으로 꿈속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 그렇구나."
"호카게 양도 괜찮으시면 드세요."
"난 됐어. 꿈속인데도 뭘 마시면 화장실 가고 싶어지더란 말이지."
"어, 저도 그런데."
란이 격렬하게 동의했다.
"맛은 안 나는데 요의(尿意)만 멀쩡하게 작동하는 건 불합리하지 않아요?"
"맞아. 꿈속에서 화장실이 나오면 긴장돼. 데이랜드에서도 순간적으로 헷갈릴 때가 있어서 무서워."
히츠지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얘기를 꺼내서일까, 카에데가 불안하게 외쳤다.
"너네 내 위에서 오줌 지리면 안 된다!?"
진심으로 겁먹은 듯 한 카에데의 말에 왁 웃음이 터졌다.
"카에데는 그런 경험 없어?"
"난 슬립 워크중엔 계속 변신한 상태라서 꿈인 줄 아는데. 너희도 변신하면 오줌 안 쌀걸?"
"카에데만큼 변신을 못하거든."
"다들 상상력이 부족하구나~"
자랑하듯 가슴을 내미는 카에데를 향해 히츠지가 입술을 비쭉 내민다. 삐친 표정이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난 히츠지가 오줌 싸도 안 웃을 거야."
최고다. 내가 했지만 멋진 말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히츠지가 눈을 찡그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이 사람 지금 완전 명석하지 않은 것 같은데."
"늘 그렇지 않아? 그 양반."
"사야찌는 원래 이런 애 아냐?"
"호카게 양은 콘파루 양과 붙으면 대체적으로 이상한걸요."
제각기 내뱉은 평가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부끄러워진 내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이야~ 너무 그렇게 칭찬하면 부끄러운데."
"앗, 이 사람 틀렸어! 꽉 잡아!"
"야! 내 등에서 난리치지 마!"
꿈에서 마시는 차는 맛이 안 나는데 꿈에서 맞은 딱밤은 엄청나게 아팠다. 명석함은 되찾았지만 불합리하다.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소란스럽고 명석한 우리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꿈의 심부, 수수의 둥지──. 다들 서너 번씩 골고루 명석함을 잃을 뻔한 경험 후에 마침내 우리는 목적지를 찾아냈다.
숲 속의 절구모양 경사면 바닥에 샘이 있었다. 흔들리는 수면에 시선을 집중하자 수정을 깎아 만든 듯한 알이 잠겨있었다. 알은 안쪽에서부터 반짝이며 빛을 내고, 난반사되는 빛이 물 위에서 형태를 만들자, 제각기 다르게 생긴 수수가 되어 샘 밖으로 나온다. 큰 것, 작은 것, 아름다운 것, 추한 것. 수수들은 어색한 움직임으로 경사면을 기어올라 데이랜드를 향해 긴 여행을 시작했다.
"이게…… 수수의 둥지."
란이 중얼댄다. 우리는 한동안 매혹당한 양 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구조였군요."
"저 알에서 수수가 태어난다는 거야?"
"그래 보이는데…… 우리가 보는 게 정확한걸까?"
"나이트랜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겉보기와 다를 때가 많지만 적어도 수수가 저기서 나온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어보여요."
"쪼-아, 그럼 저것만 박살내면 된다 이거지."
카에데가 육식동물처럼 으르렁댔다. 여기서 수수에게 가장 직접적인 원한이 있는 건 카에데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히츠지가 조용하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옆을 보자 카에데의 등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 몸을 내밀고 집어삼킬 듯 샘을 주시한다.
"히츠지? 위험해."
내가 안아들려 하자 히츠지가 툭 내뱉었다.
"저거야."
"응?"
"난, 저걸 찾고 있었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기억이 폭발했다.
알! 맞아! 히츠지가 나이트랜드에서 찾아헤메던 알이잖아!
모두에게 그토록 필사적으로 떠올리게 하려 했는데 어느 샌가 내가 잊어버렸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나는 히츠지의 주목을 끌려 했다.
"얘들아, 저거야! 내가 계속 말했던 거!"
"저도 방금 생각났어요……."
란이 당황한 말투로 말했다.
"나도야. 우린 분명히 이런 행동을 여러 번 되풀이했어."
"저도예요── 왜죠? 지금 저희는 명석한 상태일 텐데."
"이 기억만 이상해. 누가 숨기려고 하는 것처럼,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잊혀져버려."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방금까지 우리를 인식도 못하는 것 같던 수수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고요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답다고 형언해야할 달 아래 샘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날이 바짝 선 것으로 변했다.
"어쨌건, 목표물은 찾아냈다 이거네요."
우리는 수수들을 계속 쳐다보며 카에데의 등에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저걸 부수면 모든 수수를 섬멸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또 잊기 전에 해치워버리죠."
"쪼-아, 그럼 간다."
카에데의 등 끄트머리에서 철컹철컹 대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해치가 열렸다. 그 안에서 미사일이 잇달아 발사되더니 수수들의 머리 위로 날아간다.
날아가는 사이에 우리도 싸울 준비를 했다. 란은 칠흑 같은 사자, 미도리는 북극곰, 나는 머리통이 몸통 앞뒤에 달린 영양을 탔다. 히츠지만이 도보에 금색 권갑을 찬 평소 모습이었다.
"돌격!"
란이 사브르를 치켜들며 외쳤다. 우리는 경사면을 달려내려 수수떼에게 파고들었다. 모두가 소리쳤다. 나도 엘리펀트 건을 갈겨대며 샘을 향해 달렸다.
수수의 파편을 폭풍처럼 흩날리며 샘에 처음으로 당도한 것은 히츠지였다. 걱정하는 낌새도 없이 물속에 들어가더니 수정 알을 향해 갔다. 방금 막 생겨난 수수가 금색 권갑에 두들겨 맞고 산산조각났다.
히츠지의 손이 물속에서 알을 건져 올렸다. 두 손으로 들어 올린 수정 알은 공기중으로 나온 순간 한층 더 밝게 빛났다. 빠져들듯 그것을 쳐다보는 히츠지의 표정에 위기감을 느낀 나는 외쳤다.
"히츠지! 부숴버려!"
순간적으로 흐릿해졌던 히츠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사방팔방에서 몰려드는 수수떼가 히츠지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나는 방아쇠를 끊임없이 당겼다. 잠시간 나와 히츠지의 눈이 맞았다. 히츠지는 끄덕이곤 마주쥔 두 손을 쥐어냈다.
알이 빠지직 짜부러지며 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시야가 새하얗게 되곤 갑자기 의식이 멀어져──.



주위엔 온통 이음매 없는 침대가 펼쳐져있었다. 발치부터 지평선까지 끝없는 시트의 바다가 이어졌다. 그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있었다. 파자마를 입은 사람, 알몸인 사람, 아이마스크를 낀 사람, 묶인 사람, 피범벅인 사람……. 인종, 복장, 자세 모두 제각각인 남녀노소가 누워서 한사람도 빠짐없이 자고 있었다.
바로 곁에는 란과 카에데, 미도리도 자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을 보니 낯익은 사람들도 여기저기 섞여있었다. 같은 반 친구, 선생님, 그리고 우리 부모님과 언니.
수많은 사람들의 숨소리, 잠꼬대, 미처 말이 되지 못한 앓는 소리가 대기를 낮게 진동시켰다. 인류가 전부 잠든 듯 한 광경 속에 나와 히츠지 둘만이 잠들지 않고 서 있었다.
"히츠지,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내 물음에 히츠지도 어리둥절한 대답을 했다.
"모르겠어…… 여긴, 어디지? 나이트랜드, 맞지?"
나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 위에 펼쳐진 것은 달과 별이 모두 빛나는 나이트랜드의 밤하늘이었지만 지금까지 슬립 워크를 하면서 이런 곳은 처음 봤다.
"아이조메 선배…… 카에데…… 미도리!"
말을 걸면서 흔들었지만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다.
"있지, 사야. 저게 뭘까."
히츠지의 말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밤하늘 한켠이 시커멓고 거대한 것에 가려 있었다. 수수, 인걸까── 전체적인 형태는 아리송했지만 코끼리 코처럼 부드럽게 꺾이는 장대한 구조물이 암흑 속에서 지면에 늘어져있었다.
그 코가 누운 사람들의 상공을 쓰다듬는 듯 움직임에 따라 반짝이던 무언가가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까 샘에서 나온, 수수의 씨앗같은 것과 비슷했다.
코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자 란, 카에데, 미도리의 모습에 변화가 생겼다. 주변에서 자는 사람들과는 달리 셋의 몸에서는 명확한 이미지가 빨려나갔다. 하늘을 나는 범선, 반짝이는 마법검, 낙타 대열, 종이비행기 편대, 달에 박힌 로켓, 색색깔 꽃다발, 교실에서 수업 받는 학생들, 눈 덮인 산맥……. 맥락없는 비전(vision)이 떠오르더니, 마치 청소기라도 달려든 양 빨려들어가 사라진다.
직감적으로 큰일 난 것 같았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소리 없는 외침을 터트리며 이미지의 수확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비정상적인 감각에 사로잡힌 나는 신음했다. 재빨리 만들어내려한 총, 내 공격성을 그대로 빚어낸 듯 한 야수의 이미지가 완전히 형태를 이루기도 전에 내 안에서 뽑혀나간다. 나뿐만이 아니라 히츠지도 비명을 질렀다.
"사야! 사야, 살려줘── 전부 뺏길 거야!"
겁먹은 히츠지를 끌어안으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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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24. 23:22

13

긴급 슬립 워크는 정해둔 15분이되기도 전에 끝났다. 잠이 깬 셋은 급하게 옷차림을 정리하고 침대를 나섰다. 소란 탓에 깼는지 양호교사가 책상에서 고개를 들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미안, 온 줄 몰랐어. 무슨 일이니?"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지 고개를 흔들며 양호교사가 물었다. 그 뒤에 유령처럼 들러붙은 수수를 사야는 보았다. 아까 히츠지의 몸에서 나타난 개체와 많이 닮았다.
양호교사가 하품을 하곤 흐리멍텅한 음색으로 말했다.
"어디 안 좋니? 한 숨 잘 거면 침대──"
"앗, 아뇨, 벌써."
사야가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자 양호교사는 다시금 크게 하품했다.
"……하으. 미안. 선생님도 뭔가 좀 기운이 없네."
"괜찮으세요……?"
사야가 쭈뼛쭈뼛 묻자 양호교사가 말했다.
"그냥 갈 거면 선생님은 한숨 자야겠다."
셋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호교사가 칸막이 커튼을 치고 그 너머로 사라졌다.
"정말…… 선생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한숨 잔거야? 시트가 주름투성이네."
멍한 목소리가 커튼 너머에서 들려왔다.
"상관은, 없는데…… 일어났으면, 정리쯤은 해 둬……"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묵직한 털썩 소리가 났다.
"……선생님?"
셋이 커튼을 슬쩍 당기고 엿보자 양호교사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이불도 놔두고, 옷이며 신발, 안경조차 안 벗고 잠들었다.
사야의 눈에는 양호교사 위에 들러붙은 수수의 형태가 희미하게 보였다. 인간의 수면 상태를 어떠한 형태로 반영하는지 호흡이나 눈꺼풀의 떨림과 함께 수수의 형태도 미묘하게 변화한다. 그 모양새는 수수라기 보단 반투명 도시 미니어처가 인간 위에서 살아 숨쉬는 듯했다.
"수수가 기생했어── 둘은, 보여요?"
사야의 물음에 란과 히츠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안 보여."
"나도."
"역시 나한테만 보이는구나……."
"그런가보네. 어쩔래? 다시 한 번 슬립 워크 할래?"
히츠지가 물었다. 사야는 란과 눈을 마주치고서 말했다.
"놔두자. 이 녀석들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를 먼저 알아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
"그러게요. 수수잡이는 그 다음에 하죠. 방과 후에 침구점에서 봐요."
"알겠어."
잠든 양호교사를 뒤로하고 셋은 양호실 밖으로 나섰다. 한창인 점심시간, 학교는 소란과 활기로 가득차있다. 그런 학교를 걸어가던 사야의 낯빛은 점점 새파래졌다.
"왜 그래 사야."
낌새를 느꼈는지 히츠지가 말했다. 침을 꿀꺽 삼킨 사야가 말했다.
"이건, 위험할지도."
"뭐가요?"
란도 사야를 주목했다.
"늘어났어요──수수가."
사야의 눈에는 여러 수수들이 오가는 학생 사이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의 몸에 박혀 있거나, 머리와 어깨에 올라탄 개체도 있었다. 개중에는 많은 수수에게 기생당해 이형의 구조물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학생도 보였다.
30분 전까진 이렇게 많진 않았는데.
변화의 계기는 명확했다. 세 사람이 슬립 워크를 했기 때문이다.
나이트랜드의 광경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 수수들은 세 사람의 잠에 다리를 세워 데이랜드로 건너온 것이다.

수수가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다──.
사카이모리 침구점에 모인 다섯은 이 무시무시한 사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어."
란이 분한 듯 말했다.
"지금까진 이런 적 없었어요? 한 번도?"
사야의 물음에 넷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없었어요. 달리 들어본 적도 없구요."
미도리가 대답했다.
"아이조메 선배네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건 없어요? 비전서나 뭐 그런 거."
"적어도 내가 물려받은 부분에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사카이모리양 집안에서도 그런 건 없는 거죠?"
"네. 전혀요."
"그럼 새로운 현상이란 뜻이 되는데……."
사야의 말에 미도리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도움이 안 되서 죄송해요."
"괜찮아 미도리. 다 같이 생각해보자, 응?"
카에데가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정리해보죠. 일어나는 사건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요."
사야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선, 수수가 데이랜드로 오고 있어요. 이건 저한테만 보이지만, 절 믿는다면 틀림없는 사실이예요."
"믿어."
말 한 마디 없던 히츠지가 툭 대답했다. 다른 셋도 끄덕인다.
"고마워요. 다음으로, 어떻게 왔느냐에 대해선데, 이건 저랑 아이조메 선배가 봤어요. 수수는 저희의 꿈을 타고 나이트랜드에서 데이랜드로 이동해요."
란이 끄덕이며 보충설명을 했다.
"큰 다리 같은 수수였어요. 그런 게 수없이, 우리를 받침대 삼아 데이랜드와 통하는 통로를 만들어서…… 그보다 작은 수수들이 그걸 타고 건너왔어요."
"제가 알아챈 건 나이트랜드에서, 잠든 히츠지 위에 다리가 세워진 것을 봤기 때문이예요. 하지만 히츠지뿐만이 아니었어요. 아이조메 선배도 저도, 명석한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샌가 받침대가 돼 있었어요. 중간에 알아채긴 했어도 그러는 동안에 이미 많은 수수가 데이랜드에 들어왔어요."
미도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얘기, 엄청 무섭네요. 몰랐으면 더 큰 일로 번졌을 거란 얘기죠."
"그렇다고 봐. 아니, 지금까지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던게 아닌가 해서……"
"진짜……?"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내뱉은 카에데에게 사야가 말했다.
"요즘 우리가 꿈 속 통제권을 많이 잃었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수수가 벌인 짓이라고 봐요."
"실험했던 걸지도."
미도리가 끼어들었다.
"실험?"
"수수에게 지성이 있다, 는 전제를 깔아야 하는데──. 잠들었을 때 우리가 명석하다고 믿게 하고선 실제론 통제권을 빼앗아 받침대로 삼는다. 꽤 수준 높은 작전같지 않아요?"
"컴퓨터 바이러스 같네요……."
고민에 빠져드는 란 옆에서 카에데가 말했다.
"그치만 바이러스는 지성이 없잖아. 그치? 지성이 있든 없든 수준 높은 짓을 할 수 있는거 아냐? 우와, 나 금방 엄청 똑똑하게 얘기했어, 대단하지 않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을 마친 카에데의 머리를 쓰다듬던 미도리가 말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어찌 됐건 수수들이 우리를 찾는 건 틀림없다고 봐요."
"우리를 이용해서 데이랜드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기생하고…… 근데 굳이 데이랜드로 나올 이유가 있을까요?"
"나이트랜드에선 슬립 워커가 방해하니까 우리의 의표를 찌른 건 아닐까요……? 추측이긴 하지만."
"귀찮게 됐네요. 이대론 저희를 중심으로 데이랜드에 수수 아웃브레이크(폭발적 감염)가 터지겠어요."
란이 한숨을 폭 쉬고 말했다.
"우린 데이랜드에서 수수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렇다고 슬립 워크를 하면 통제권을 뺏겨서 감염을 확대하게 돼."
"그럼…… 앞뒤가 막힌 건가요?"
사야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미도리가 말했다.
"그렇지만은 않을 거예요. 실제로 호카게양 일행은 수수가 손쓴 걸 잠 속에서 알아챘으니까요. 여태까진 컨디션이 안 좋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젠 아니예요. 다 같이 경계하면 알아챈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명석 상태로 만들 수 있어요."
"응. 우리를 속이려 하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으니까."
사야가 끄덕이자 카에데는 열기를 품은 어투로 말했다.
"해 보자고. 당하기만 하는 건 분하잖아."
사야 일행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히츠지는 앉아서 쿠션을 안은 상태로 사야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어색함을 버티지 못한 사야가 반응했다.
"히츠지는 할 말 있어?"
"에."
수업 중에 졸다가 들킨 것처럼 히츠지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 음~, 딱히 없으려나."
"콘파루양 괜찮아요?"
란이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히츠지를 자세히 본다.
"미안, 좀 벙벙해서."
"정신 차려야지 히츠지."
사야의 말에 란이 미소 지었다.
"호카게양, 어느 샌가 콘파루양이랑 많이 친해졌네요."
"엥?"
"이름."
란이 말했다.
"전엔 굳이 성으로 불렀잖아요. 언제부터 이름으로 부르게 됐어요?"
"어……"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사야는 당황했다.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히츠지를 보자 고개를 휙 돌렸다. 나만 친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처음 보는데 잠에 취해서 갑자기 키스를 했다는 악행을 아직 용서받지 못한 모양이다.
어색해하는 사야의 등을 카에데가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친해지는 건 좋은 거잖아. 사야찌는 그동안 내내 거리를 두려고 했잖아. 그치, 히츠지찌"
"……그럴지도."
히츠지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란은 자기 차를 다 마시곤 일어섰다.
"좋아, 그럼 가 볼까. 지금 오시면 수수 무한사냥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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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19. 22:16

12

집에 도착한 것은 9시가 넘어서였다. '낮잠 동호회' 활동이라는 명목이 있다지만 너무 늦었다. 혼나지 않을까 각오하며 살포시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살살 닫았다.
"다녀왔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현관 복도 할 것 없이 불이 꺼진 상태로 거실의 불빛만이 반쯤 열린 문에서 흘러나왔다.
신발을 벗다가 자기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뇌리에 아까 꾼 꿈이 떠오른 것이다. 어두운 복도와 거실 불빛. 미도리가 동생이라는, 꿈이기에 가능한 말도 안 되는 전개에 정신이 팔렸었지만 저 광경은 낯익은 본가 그 자체였다.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가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음소거 상태로 켜진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실내엔 아무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부모님과 언니 모두 있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거실에도, 부엌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창문가에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꿈과 달리 그곳에는 넓은 마당이 아니라 코앞에 세워진 담과 건너편 주차장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밖에 곰은 없었다.
창문 걸쇠를 확인하고 원래대로 커튼을 닫았다. 뒤로 돈 순간 누군가 서있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비명을 질었다.
"아악!?"
"뭐, 뭐야!? 깜짝 놀랐네~"
"어, 언니?"
벽에 손을 대고 불을 켠 것은 아야였다. 형광등 빛을 받은 언니는 어이가 없을 만큼 평소와 같았다.
"어두운 데서 뭐 한 거야? 아니, 언제 온 건데."
"금방……. 엄마 아빠는?"
"거래처 사람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 갔다고 메시지 보내놨잖아."
"아, 미안, 몰랐어."
"사야 저녁 안 먹었지? 뭐 먹을래?"
"아니…… 괜찮아. 나중에 대충 때울게,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방에 가려 한 순간 불이 꺼졌다.
놀랄 틈도 없이 누군가가 등 뒤에 철썩 들러붙었다.
"왜 날 두고 간 거야 사야."
시커먼 실내에서, 누군가 귓전에 속삭였다.



사야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자기 방이다. 아직 어둡다──시계를 보자 새벽 4시였다.
"──꿈이였구나."
정신이 들자 한 손이 누군가를 찾듯 침대 위를 더듬고 있었다. 살짝 찜찜함을 느끼며 팔을 당겼다. 악몽의 충격과 함께 곁에 아무도 없는 침대가 너무 넓게 느껴져 불안함마저 느껴졌다.
불안해하며 손가락을 얽어 잡아당기자 명확한 반응이 느껴졌다. 여기는 데이랜드가 분명한 모양이다.
어두운 천장을 올려보며 안정을 찾으려 하자 시야를 가로지르는 것이 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며 공중을 걷는, 자기 발로 움직이기 시작한 별자리 같은 그것은 사야 위를 지나쳐 베란다와 이어진 창문을 빠져나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수수다.
튕기듯 일어나 창문에 달려가선 베란다로 나간다.
수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수수가 데이랜드에서 활동한다──.

한 번 알아채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사야는 그 날 점심까지 수수 12개체를 목격했다.
꼭 요정을 보는 눈이 생긴 것처럼 수수들은 차례차례 사야의 시야에 뛰어들었다.
집 안. 등굣길. 학교 여기저기. 생물이라고도, 인공물이라고도 하기 힘든 이형의 개체들은 누구 눈에도 띄지 않고 태양 아래를 활보했다.
수수들은 목적 없이 떠돌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애초에 그 진의를 알 수는 없다. 알았대도 슬립 워크상태가 아닌 사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수수도 사야에게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수업중인 교실의 책상 사이를 느긋하게 떠다니는, 해마와 백파이프를 더해 반으로 나눈 것처럼 생긴 수수를 시야 한구석으로 쫓으며 사야는 복잡한 심경으로 생각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수수는 어디까지나 나이트랜드 내부의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애들한테 들은 말도 그랬고 본인의 경험으로 비추어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데이랜드에 나오게 되면 슬립 워커의 전제가 무너진다── 잠의 안팎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아니──그러고 보니.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히츠지와 두 번째로 만나기 직전. 히츠지를 찾아 학교를 떠돌던 사야는 몽롱한 의식 상태로 옥상에 가는 수수를 발견했었다.
그 때, 사야의 불면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환각을 봐도 납득이 갈 만큼. 그러나 지금 사야는 수면장애때문에 고생하는 게 아니다.
일행에게는 이미 메시지를 보내뒀다. 수수가 보이는 건 역시 사야뿐이었지만 다급한 분위기는 전해진 모양이다.

사야 [방과 후엔 창고에 모이고, 일단 긴급 슬립워크해보지 않을래요?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을 하고 싶어요.]
란  [찬성]
히츠지[언제 어디?]
사야 [점심에 양호실]
란  [알겠습니다]
히츠지[ㅇ. 먼저 가서 침대 챙겨놓을게.]

4교시 끝을 알리는 종이 쳤다. 소란스러워질 반을 뒤로하며 사야는 서둘러 양호실에 갔다.
노크하고 문을 열자 양호교사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이 보였다. 살금살금 침대에 다가가 칸막이 커튼을 걷자 히츠지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기다렸지."
말을 걸었지만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았다.
"아…… 벌써 자는 거구나."
사야가 침대에 앉아도 히츠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보드라운 머리칼을 침대 위에 흩뿌리곤 색색 숨소리를 내는 히츠지를 내려다보며 사야가 생각했다.
이렇게 히츠지가 자는 걸 가만히 보는 건 어쩐지 신선하다. 어쩌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슬립워크할 때는 금세 잠에 끌려들어가고, 처음 봤을 땐 정말 순식간이었다.
지금 이렇게 깨 있는 건, 일단은 잠을 제대로 잤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니 히츠지의 블랭킷 능력이란 것도 대단한 녀석이다.
흐암, 큰 하품이 나왔다. 슬슬 옆에 누워볼까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 틈으로 내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란이 들어와 있었다. 몰래 문을 잠그고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제가 늦었죠. 얼른──"
말을 하다 만 란은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했다.
"아흐…… 실례. 얼른 처리하죠. 여길 오랫동안 차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양호 선생님의 점심시간을 뺏으면 미안하구요."
사야의 뒤를 이어 란도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왔다. 역시 보건실 싱글침대는 셋이 자긴 좁다.
"아이조메 선배, 괜찮겠어요? 안 떨어져요?"
"시끄럽게. 일단은 컴플렉스거든……."
"걱정되서 그래요, 근데……."
하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히츠지가 발하는 순수한 졸음이 양 옆에 누운 둘을 무자비하게 감쌌다.



고층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 여기저기에 불길이 일어났다. 총성이 산발적으로 터지고, 빌딩 벽에서 메아리친다.
전투 헬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간다. 사무실이 밀집한 곳에 장갑차와 병사들이 뛰어다니고, 전차가 포를 쏘면 건물들이 차례로 폐허가 된다.
나는 아래의 광경을 보고 떨었다.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집이나 학교는 무사할까──.
학교 하면, 그래, 히츠지는 무사할까. 그 애는 멍한 구석이 있어서 걱정된다. 얼른 데리러 가야한다. 하지면 여기서 어떻게 가야하지?
그 때, 옥상에 있는 전화가 울었다. 박물관에 있을법한 낡은, 빨간 전화.
"사야, 꿈이야."
"물론 알고 있어, 히츠지."
"정말로?"
"히츠지랑 얘기했더니 의식이 명확해졌어."
전화기 저편에서 히츠지가 의심스레 갸웃하는 모양이 보일 것 같았다.
코트를 흩날리며 란이 옥상에 뛰어내렸다.
"선배."
"호카게양, 명석한가요?"
"명석해요, 명석명석."
"정말인가요? 아니 됐어요, 저걸 봐요."
가리키는 곳을 보니 도시 저편에 빌딩보다 훨씬 높게 선 거대 수수가 걸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나아가는 원기둥 다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구름 속에 희미한 교각 같은 게 비쳐보였다.
"크다."
"네. 그리고 하나가 아니예요."
나는 란과 함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도시와 주변 황야에 장대한 크기의 수수가 떼로 걸어가고 있었다. 큰 강에 세워진 다리가 그대로 걸어 나가는 것 같았다.
"……수수, 점점 늘어나지 않아요?"
"틀림없이 그래 보이네요."
내가 란이랑 얘기하자 아직 들고 있던 수화기에서 히츠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한텐 잘 안 보이는데 뭐 하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다리 모양 거대 수수 위에 보다 작은 수수가 득실댔다.
다리 양 끝은 구름 탓에 희미하게 보인다. 한 쪽에서 슬금슬금 새로운 수수가 나타나 반대편을 향해 간다.
제각각에 꼴불견인 행진의 목적지를 보기 위해 나와 란은 걸어가는 다리에 다가섰다. 구름이 걷히자 다리가 바다 위에 걸쳐진 게 보였다. 완만하게 솟은 섬 위를 교각이 넘어가더니 더 앞을 향해 나아간다.
"바다 냄새가 나기 시작하네."
수화기에서 히츠지가 말했다.
"바다에 나왔으니까. 히츠지는 어디서 보고 있어?"
"그걸 잘 모르겠어. 여긴 어딜까?"
갑자기 란이 헉 소리를 냈다.
"설마. 말도 안 돼."
"왜 그러세요?"
"저 녀석들의 목적지. 어딘지 알 것 같아."
"어딘데요?"
"호카게양, 저 섬을 자세히 봐. 뭔가로 보이지 않아?"
교각이 건너가는 섬에 의식을 집중했다. 기묘한 섬이었다.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바위도 아니다. 섬의 윤곽은 섹시하다고 해도 될 만큼, 예를 들자면 그건 꼭 사람──.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히츠지?"
"왜에? 내가 뭐 했어?"
수화기가 손에서 미끄러지더니 아득히 먼 바다에 떨어진다.
섬이 아니었다. 히츠지였다. 콘파루 히츠지. 소중한 내 애인. 누워서 자는 히츠지의 몸을 넘어 수수들이 행진한다. 주위에 퍼진 바다는 어느새 물이 아니라 넓게 펴진 시트였다.
나와 란도 히츠지 양 옆에, 시트 위에 누워있었다. 로프로 묶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눈을 돌리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위에도 다리가 세워져 있었고, 그 무게가 나를 시트의 바다에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기력을 쥐어짜자 겨우겨우 몸이 움찔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났다. 몸 위에 세워진 다리가 기울어지고, 뒤집어지고, 대량의 수수와 함께 떨어진다.
소리쳤다.
"히츠지! 일어나! 이 녀석들 데이랜드에──"



사야는 몸을 잠에서 쥐어뜯듯 각성했다.
소리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앓는 소리만 난 모양이다. 강제로 눈을 떴을 때 특유의 몽롱한 생각과 온 몸에 뭔가가 들러붙어있는 듯 한 감각. 정신을 차리려 시도하면서 사야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콘파루양, 일어나."
쉰 소리로 말하며 잠든 히츠지의 어깨를 흔든다.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표정을 찡그리고 신음했다.
"으응……"
눈을 뜨려 하는 히츠지의 몸에서 연기 같은 것이 살며시 올라왔다. 고개를 든 사야의 시야엔 침대 위에 펼쳐진 반투명 구조물이 보였다. 고치에서 우화하는 벌레처럼, 히츠지의 몸에서 나온 수수가 낮의 세계의 빛에 녹아든다. 모습은 금세 안 보이게 됐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 강한 기척이 사야에겐 아직 느껴졌다.
눈을 비비는 히츠지 건너편에서 란도 일어났다.
"호카게양…… 방금 뭐였어?"
"수수예요, 또 나왔어요."
사야의 말에 히츠지가 갸웃했다.
"나한테는 안 보였어. 어디서 나왔는데?"
"……콘파루양, 몸에서."
"내 몸?"
사야는 끄덕였다.
"수수가 데이랜드로 건너오고 있어── 우리의 잠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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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17. 22:14

11

다음 슬립 워크 때 본 수수는 하나뿐이었다.
그 다음도 하나.
그 다음은 둘.
다시 하나로 돌아갔다가 또 둘──. 대충 세 번에 한 번 주기로 수수의 변칙적인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다.
동시에 수수 사냥의 성공률도 떨어져서 하나만 있을 때도 허를 찔려 놓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료칸의 긴 복도를 걸어간다. 소란스러운 연회 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기에 나는 초조해진다. 연회에 늦은 것이다. 복도 오른 편에는 미닫이문이 이어지고, 왼편에는 유리창 너머로 정원이 펼쳐졌다. 왼편에는 악어가 득실거려 내려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
복도 저편도 미닫이 문인데 대충 벗어던진 수많은 슬리퍼가 굴러다닌다. 헐레벌떡 미닫이를 열자 그곳은 천장이 높은 연회실이었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까지, 개인상이 몇 줄이고 늘어서 있었다.
나는 카트를 끌고 연회실에 들어가 개인상중 하나에 다가갔다. 카에데가 거기서 동인지를 팔고 있던 것이다.
"기다렸지? 미안해."
"오케오케. 그럼 시작할까."
나는 카에데 곁에 정좌하고 앉아 오늘 즉매회 준비를 시작했다. 개인상 위에는 카에데가 그린 동인지가 놓여 있었다. 제목은 '동물 사사미시'. '사사미시'는 5단계 중에 4정도 슬픈 것을 의미한다.
"이건 기대해도 되겠는데."
"그치~"
카에데가 자랑스레 말한 후에 즉매회가 시작됐다. 이내 히츠지와 미도리, 란이 손님으로 찾아와 늘 보던 다섯은 상을 둘러싸고 마주한다. 란이 '동물 사사미시'를 들고 물었다.
"봐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란이 책을 펼치고 우리 모두가 쳐다본다. 카에데와 미도리가 애인이 되어 애정행각을 펼치는 만화가 전편에 걸쳐 이어졌다.
미도리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이런 걸 그렸었군요……"
"이야~ 실은 그랬었어, 미안. 너희한테는, 특히 미도리한테는 꼭 비밀로 해야겠다고── 어?"
태평하게 웃던 카에데의 얼굴에 당황의 표정이 서서히 스며든다.
"잠깐. 있어봐. 아냐. 이런 얘길 할 셈이 아니었는데──"
"카에데?"
"싫어,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 거짓말이야 안 돼 보지 마 나 죽어."
웬일로 인간 모습이었던 카에데의 몸이 단숨에 부풀어 올라 시커먼 괴수로 변했다. 상도, 연회실도, 료칸도, 모든 것이 변신 때문에 사라진다. 크게 찢어진 카에데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업화가 우리를 집어삼키고──.



"아아아아악!!"
카에데의 절규가 모두를 단숨에 각성시켰다.
침대 위에서 뛰쳐오른 카에데가 넷의 시선에 경직됐다. 꼭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본 고라니같은 표정이었다.
"아, 아니야."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고개를 휙휙 젓는 카에데. 당황한 듯 란이 물었다.
"그렇게 안 놀라도 돼……. 콘파루 양이랑 호카게 씨처럼 꿈 속 얘기── 맞죠?"
"…………"
바로 답하지 못하는 카에데의 태도가 무언가를 알려준다. 누가 도와줄 말을 떠올리기 전에 카에데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도 제대로 안 입곤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앗, 잠깐만!"
란도 당황해 뒤를 쫓는다──.
화장실에 틀어박혀 우는 카에데를 달래는 데에 넷이 달려들어 1시간 반이 걸렸다.

"진짜야. 진짜로 안 그렸어, 그런 거."
"알고 있어요. 괜찮으니까 울지 말아요, 응?"
울먹울먹 훌쩍대는 카에데 옆에 앉은 미도리가 침착하게 속삭인다. 란과 히츠지, 사야도 카에데에게 말을 던지고, 머리나 어깨를 쓰다듬으며 곁에 모여들었다.
마침내 카에데가 진정됐을 무렵, 머뭇거리면서도 사야는 입을 열었다.
"우리, 꿈의 제어권을 잃은 거 아냐?"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들었다.
"전에 누가 그랬었지. 슬립 워커는 잠 속에서 꿈을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에 수수랑도 싸울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오늘은 수수를 찾아내긴 커녕 마지막까지 꿈을 꾼다는 사실조차 몰랐어."
란이 고민하며 대답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명석행동에 실패하는 건 드물지 않지만 평소 같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서포트해줬을 거예요. 오늘은, 미도리도 실패했었죠?"
"실패였어요. 넌 거의 100퍼센트 명석몽에 진입할 수 있어서 모두를 서포트해왔는데. 이런 경험은, 얼마만인지──"
"콘파루 양은? 꿈인 걸 알았었어?"
사야의 물음에 히츠지는 눈썹에 힘을 주며 답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어……"
"이상하다니?"
"그건, 내용적으로, 카에데의 악몽이었잖아?"
"마…… 맞을, 거야."
끄덕이는 카에데의 목소리는 아직도 떨렸다.
"그렇지. 지금까지 다섯 명이 슬립 워크 했을 때 누군가의 꿈에 사로잡힌 적은 없었을 거야."
"남의 꿈에 들어가는 걸 알아채니까요. 꿈의 모티브가 자기한테서 나온 게 아니니까 어디선가 위화감을 느끼죠."
"하지만 그런 위화감이 없었어. 어떻게 된 거지?"
"──같은 꿈이었던 거 아냐?"
사야의 말에 히츠지가 눈을 크게 떴다. 란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호카게 씨, 같다는 뜻이 뭐죠?"
"아, 그러니까, 모두가 같은 꿈을 꿨다, 이런 가능성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해서."
"모두가──"
"왜 남의 꿈에 들어가게 되면 눈치를 챌 거고, 다들 나보다 경험이 많은데도 꿈이라고 생각 안 했어. 그럼 있잖아, 이번에는 우연히 토키시마 양의 악몽으로 끝났지만 그건 우리 모두가 같은 하나의 꿈을 꿨다고도 볼 수 있잖아."
"지금까지 슬립 워크를 수없이 해왔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어요."
미도리는 망설이듯 끼어들었다.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요즘 들어 수수의 동향이 이상했잖아. 이번엔 끝까지 수수를 볼 수도 없었고. 어쩌면 무슨 수를 쓴 걸지도 몰라."
"즉, 이번 꿈은 수수의 공격이었다구요?"
사야의 말에 히츠지가 갸웃해보였다.
"그런 게 가능해? 수수 녀석들이 그렇게 똑똑해보이진 않았는데."
"지금까진 그랬지."
"확인해 봐야겠어. 그런 일이 또 생기면──"
시계를 본 란이 말했다.
"그건 다음 기회에 해야겠네요.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해산하죠."
다섯 명은 창고를 뒤로 하며 해가 완전히 가라앉은 길을 따라 집에 갔다.
"오늘은 잠 못 잘거 같아~."
헤어지며 카에데가 한 말이 귀에 들어왔다. 사야는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멀어져가는 등을 불안한 시선으로 배웅했다.



밤에 화장실에서 깨니 거실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빠가 깨 있나 싶어 들어가보니 TV만 켜져있고 아무도 없다. 화면은 흑백 노이즈. 옛날 아날로그 TV는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보고 창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바깥을 보자 마당에 곰이 있었다.
큰일이다! 깜짝 놀라 창문에서 떨어지며 후회했다. 아차, 창문을 안 닫으면 들어오잖아.
예상대로 곰의 콧김이 다가오더니 집 안에 들어오고 말았다. 나는 쿵쾅대는 심장을 느끼며 계단으로 향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2층에 올라간다. 아래층에서는 곰이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나를 찾는다. 올라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서 자는 동생 미도리를 흔들어 깨운다.
"왜 그래 사야 언니."
"쉿. 집 안에 곰이 있어. 도망쳐야 해."
"어, 아빠 엄마는?"
"몰라. 먹혔을지도 몰라."
"싫어, 무서워."
미도리는 훌쩍대며 울기 시작하더니 이불 속에 숨어버렸다. 계단이 삐걱대며 곰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미도리가 나오질 않아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도망치기로 했다. 창문을 열고 지붕으로 나와 기울어진 함석지붕 위를 걷는다. 뒤에서는 곰이 방 안에 들어온 기척이 났다. 남아있던 미도리가 걱정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괜찮을 테지만 못 버티고 나온다면…….
나는 지붕 위에서 움직인다. 달리고 싶은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현관 앞바닥에 뛰어내리곤 집에서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려 한다. 어두운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언덕길을 있는 힘껏 오른다. 뒤에서 쫓아오는 곰의 기척. 검고, 크고, 무서운 그것은 정말로 곰일까?
뒤로 돌아보지도 못한 채 억지로 앞을 향해 한 발씩 내딛는 내 등에 누군가가 찰싹 업혔다.
"언니, 왜 버리고 간 거야."
미도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귓전에 속삭였다.



땀범벅이 된 사야는 눈을 떴다. 담요를 걷어치우고 일어난다. 심장이 터질 만큼 두근대서 호흡이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각자 자는 스타일대로 이불 위에 누운 동료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 보였다. 침실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그 위엔 이불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불 주위엔 쳐진 커다란 모기장이 주변 암운과의 경계가 됐다.
주위에는 모기향 냄새가 감돈다. 다다미 위에 놓인 베드사이드램프는 행등 모양이었다. 한지 너머의 아련한 불빛이 에어컨 바람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모기장 위에 연녹색 잔물결을 일으킨다.
방금 꿨던 꿈의 느낌이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또 명석 행동에 들어가지 못한 채 농락당했다. 그건 내 꿈이었나? 아니면──.
머리를 쓰며 미도리를 쳐다본다. 미도리는 반대방향을 보고 누워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기에 불안해진 사야는 얼굴을 쳐다보려 했다.
그 때, 모기장 저편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창고 안을 천천히 걷는, 창틀 집합체 같은 것이 행등의 빛을 가로막았다. 다다미 위에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수수다.
여기도 아직 나이트 랜드였나. 사야는 자기 손에 시선을 보내며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꿈속이라면 아무 저항 없이 늘어날 손가락이 꼼짝하지 않았다.
여긴 틀림없이 데이랜드다.
생각이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야의 눈앞에서 수수는 모기장을 통과해 안에 들어왔다. 반쯤 투명한 모습은 실체 같진 않았지만 모기향 연기가 희미하게 그 윤곽에 휘감겼다.
수수가 다리를 접어 누운 미도리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려는 듯 제 몸을 들이댄다. 그걸 보고서야 사야의 가위가 겨우 풀렸다.
"사카이모리 양! 도망쳐!"
뛰어들듯 미도리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 흔든다.
"헉?! 어!? 뭐야!?"
미도리가 삑사리를 터트리며 눈을 뜸과 동시에 덮쳐들던 머리 위의 수수가 안개처럼 모습을 감췄다.
사야와 미도리가 지른 소리에 다른 셋도 깨어났다.
"으음~? 뭐야, 왜 그래?"
눈을 비비며 히츠지가 일어났다.
"시끄럽게스리, 우리 지금 딱── 어라?"
당황한 듯 카에데의 목소리가 떨렸다.
"혹시 나 또 뭐 했어?"
"……토키시마 씨가 아니예요. 이번 건──"
란이 쉰 소리로 말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생각을 정리하려는지, 눈꼬리를 꾹 누르곤 눈을 떴다.
"또 꿈의 제어권을 일었었네요. 심지어 다섯 명이 다 모이지도 못했고……"
"그게 다가 아니예요 아이조메 선배."
사야는 란의 말을 끊었다.
"저 봤어요. 수수가, 데이랜드에 나왔었어요."
사야의 말은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데이랜드와 나이트랜드는 명확히 나뉘어있다는 것이 슬립 워커 선배로서의 란의 의견이었다.
"확실히 긴 꿈을 꾸다 깼을 때 나이트랜드에서 나왔는지 여부를 확신하기 힘들 때가 있긴 하지만."
란이 말했다.
"그치만, 요즘 뭔가 좀 이상하잖아요. 수수가 힘을 합쳐 움직이고, 명석 행동을 못 취하기도 하고……. 이게 수수의 공격이라면 데이랜드에 나오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요."
"나올 목적은?"
"그건 모르겠어요."
"그…… 호카게 양이 봤다는 수수 말인데, 절 덮쳤었던 거죠. 뭘 하려고 했던 걸까요."
미도리가 불안한 듯 말했다.
"음~…… 녀석들이 동물이면 냄새를 맡거나 먹으려고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수수는 어디가 머린지도 모를 모양새잖아."
사야가 끙끙대자 방금까지 아무 말 없던 카에데가 조심조심 손을 들었다.
"얘기 좀 해도 돼? 사야찌 얘기랑은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럼?"
재촉을 들은 카에데는 머뭇머뭇 말했다.
"사야찌 전에 알이 뭐라느니 하지 않았었어?"
사야는 깜짝 놀라 허리를 죽 폈다. 데이랜드에서도, 나이트랜드에서도 수없이 설명했을, 수수께끼의 '알'. 어째서인지 다들 잊었을 그 기억에 관한 언급이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야찌 소리에 갑자기 일어났었잖아? 나이트랜드에서 나오기 직전에 봤던 것 같아. 그, '알'을."
"──어땠었어?"
"흐름은 기억 안 나지만 히츠지찌가 나왔던 것 같아."
시선을 받은 히츠지가 허둥지둥 눈을 깜빡인다.
"내가?"
"응. 두 손을 이렇게, 가슴 앞에 모아서, 손바닥을 위로 하고── 거기에 연하늘색에 크림색 반점이 있는 알 같은 모양인 뭔가가 올라가있었어."
"그, 그래서?"
카에데가 눈을 꾹 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어쨌더라…… 부쉈던가? 망했다~, 점점 기억이 흐려져."
"수수랑 싸웠어? 내가 봤을 땐 쓰러트린 수수 안에서 뽑았었어, 분명."
"싸웠던 기억은 없는데……. 그냥 까먹은 걸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히츠지찌가 뭔가 들고 서 있는데 손에 든 뭔가가 엄청나게 중요한 거였다는 느낌이었던 건 기억나."
"콘파루 양은? 기억 있어?"
히츠지는 사야의 눈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 안 나. 아무 것도."
"슬립 워크를 시작하고부터는 나이트랜드에서 일어난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면, 좀 찝찝하네요."
표정이 어두워지는 미도리의 말을 받듯 히츠지가 말했다.
"그건 나이트랜드의 기억만이 아닌 거지. 데이랜드의 기억도 같이 없어졌다는 말이 돼."
"호카게 양이 깬 후에 수수를 봤다는 게 사실이라면 나이트랜드에서 데이랜드로 어떤 간섭이 일어난다는 가설을 세울 수는 있겠네요."
란이 말했다.
"간섭?"
"공격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수수가 역습한다는 건가."
"사라진 기억은 그 '알'에 관한 것뿐이야?"
"모르겠어요. 잊어버렸으니까 알 수가 없네요."
문득 떠오른 듯 카에데가 고개를 들었다.
"있잖아, 데이랜드의 기억도 없어진다 치면 조만간 이렇게 얘기한 것도 잊어버리는 거 아냐?"
눈길을 마주치는 넷을, 사야는 초조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그렇다. 실제로 사야가 지금까지 얘기했던 의문과 경고는 다음 슬립워크할 때면 다들 잊어버렸었다. 사야 자신도 잊어버리기 쉬웠다. 이렇게 슬립 워크에서 복귀하고 결과 보고를 했을 때 비슷한 얘기를 했던 적은 있었지만 그 또한 일시적인 것이었다.
"기록을 남기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밝혀야겠어요."
란의 말에 일동은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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