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17. 22:14

11

다음 슬립 워크 때 본 수수는 하나뿐이었다.
그 다음도 하나.
그 다음은 둘.
다시 하나로 돌아갔다가 또 둘──. 대충 세 번에 한 번 주기로 수수의 변칙적인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다.
동시에 수수 사냥의 성공률도 떨어져서 하나만 있을 때도 허를 찔려 놓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료칸의 긴 복도를 걸어간다. 소란스러운 연회 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기에 나는 초조해진다. 연회에 늦은 것이다. 복도 오른 편에는 미닫이문이 이어지고, 왼편에는 유리창 너머로 정원이 펼쳐졌다. 왼편에는 악어가 득실거려 내려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
복도 저편도 미닫이 문인데 대충 벗어던진 수많은 슬리퍼가 굴러다닌다. 헐레벌떡 미닫이를 열자 그곳은 천장이 높은 연회실이었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까지, 개인상이 몇 줄이고 늘어서 있었다.
나는 카트를 끌고 연회실에 들어가 개인상중 하나에 다가갔다. 카에데가 거기서 동인지를 팔고 있던 것이다.
"기다렸지? 미안해."
"오케오케. 그럼 시작할까."
나는 카에데 곁에 정좌하고 앉아 오늘 즉매회 준비를 시작했다. 개인상 위에는 카에데가 그린 동인지가 놓여 있었다. 제목은 '동물 사사미시'. '사사미시'는 5단계 중에 4정도 슬픈 것을 의미한다.
"이건 기대해도 되겠는데."
"그치~"
카에데가 자랑스레 말한 후에 즉매회가 시작됐다. 이내 히츠지와 미도리, 란이 손님으로 찾아와 늘 보던 다섯은 상을 둘러싸고 마주한다. 란이 '동물 사사미시'를 들고 물었다.
"봐도 될까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란이 책을 펼치고 우리 모두가 쳐다본다. 카에데와 미도리가 애인이 되어 애정행각을 펼치는 만화가 전편에 걸쳐 이어졌다.
미도리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이런 걸 그렸었군요……"
"이야~ 실은 그랬었어, 미안. 너희한테는, 특히 미도리한테는 꼭 비밀로 해야겠다고── 어?"
태평하게 웃던 카에데의 얼굴에 당황의 표정이 서서히 스며든다.
"잠깐. 있어봐. 아냐. 이런 얘길 할 셈이 아니었는데──"
"카에데?"
"싫어,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 거짓말이야 안 돼 보지 마 나 죽어."
웬일로 인간 모습이었던 카에데의 몸이 단숨에 부풀어 올라 시커먼 괴수로 변했다. 상도, 연회실도, 료칸도, 모든 것이 변신 때문에 사라진다. 크게 찢어진 카에데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업화가 우리를 집어삼키고──.



"아아아아악!!"
카에데의 절규가 모두를 단숨에 각성시켰다.
침대 위에서 뛰쳐오른 카에데가 넷의 시선에 경직됐다. 꼭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본 고라니같은 표정이었다.
"아, 아니야."
궁지에 몰린 표정으로 고개를 휙휙 젓는 카에데. 당황한 듯 란이 물었다.
"그렇게 안 놀라도 돼……. 콘파루 양이랑 호카게 씨처럼 꿈 속 얘기── 맞죠?"
"…………"
바로 답하지 못하는 카에데의 태도가 무언가를 알려준다. 누가 도와줄 말을 떠올리기 전에 카에데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도 제대로 안 입곤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앗, 잠깐만!"
란도 당황해 뒤를 쫓는다──.
화장실에 틀어박혀 우는 카에데를 달래는 데에 넷이 달려들어 1시간 반이 걸렸다.

"진짜야. 진짜로 안 그렸어, 그런 거."
"알고 있어요. 괜찮으니까 울지 말아요, 응?"
울먹울먹 훌쩍대는 카에데 옆에 앉은 미도리가 침착하게 속삭인다. 란과 히츠지, 사야도 카에데에게 말을 던지고, 머리나 어깨를 쓰다듬으며 곁에 모여들었다.
마침내 카에데가 진정됐을 무렵, 머뭇거리면서도 사야는 입을 열었다.
"우리, 꿈의 제어권을 잃은 거 아냐?"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들었다.
"전에 누가 그랬었지. 슬립 워커는 잠 속에서 꿈을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에 수수랑도 싸울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오늘은 수수를 찾아내긴 커녕 마지막까지 꿈을 꾼다는 사실조차 몰랐어."
란이 고민하며 대답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명석행동에 실패하는 건 드물지 않지만 평소 같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서포트해줬을 거예요. 오늘은, 미도리도 실패했었죠?"
"실패였어요. 넌 거의 100퍼센트 명석몽에 진입할 수 있어서 모두를 서포트해왔는데. 이런 경험은, 얼마만인지──"
"콘파루 양은? 꿈인 걸 알았었어?"
사야의 물음에 히츠지는 눈썹에 힘을 주며 답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어……"
"이상하다니?"
"그건, 내용적으로, 카에데의 악몽이었잖아?"
"마…… 맞을, 거야."
끄덕이는 카에데의 목소리는 아직도 떨렸다.
"그렇지. 지금까지 다섯 명이 슬립 워크 했을 때 누군가의 꿈에 사로잡힌 적은 없었을 거야."
"남의 꿈에 들어가는 걸 알아채니까요. 꿈의 모티브가 자기한테서 나온 게 아니니까 어디선가 위화감을 느끼죠."
"하지만 그런 위화감이 없었어. 어떻게 된 거지?"
"──같은 꿈이었던 거 아냐?"
사야의 말에 히츠지가 눈을 크게 떴다. 란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호카게 씨, 같다는 뜻이 뭐죠?"
"아, 그러니까, 모두가 같은 꿈을 꿨다, 이런 가능성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해서."
"모두가──"
"왜 남의 꿈에 들어가게 되면 눈치를 챌 거고, 다들 나보다 경험이 많은데도 꿈이라고 생각 안 했어. 그럼 있잖아, 이번에는 우연히 토키시마 양의 악몽으로 끝났지만 그건 우리 모두가 같은 하나의 꿈을 꿨다고도 볼 수 있잖아."
"지금까지 슬립 워크를 수없이 해왔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어요."
미도리는 망설이듯 끼어들었다.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요즘 들어 수수의 동향이 이상했잖아. 이번엔 끝까지 수수를 볼 수도 없었고. 어쩌면 무슨 수를 쓴 걸지도 몰라."
"즉, 이번 꿈은 수수의 공격이었다구요?"
사야의 말에 히츠지가 갸웃해보였다.
"그런 게 가능해? 수수 녀석들이 그렇게 똑똑해보이진 않았는데."
"지금까진 그랬지."
"확인해 봐야겠어. 그런 일이 또 생기면──"
시계를 본 란이 말했다.
"그건 다음 기회에 해야겠네요.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해산하죠."
다섯 명은 창고를 뒤로 하며 해가 완전히 가라앉은 길을 따라 집에 갔다.
"오늘은 잠 못 잘거 같아~."
헤어지며 카에데가 한 말이 귀에 들어왔다. 사야는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멀어져가는 등을 불안한 시선으로 배웅했다.



밤에 화장실에서 깨니 거실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빠가 깨 있나 싶어 들어가보니 TV만 켜져있고 아무도 없다. 화면은 흑백 노이즈. 옛날 아날로그 TV는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보고 창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바깥을 보자 마당에 곰이 있었다.
큰일이다! 깜짝 놀라 창문에서 떨어지며 후회했다. 아차, 창문을 안 닫으면 들어오잖아.
예상대로 곰의 콧김이 다가오더니 집 안에 들어오고 말았다. 나는 쿵쾅대는 심장을 느끼며 계단으로 향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2층에 올라간다. 아래층에서는 곰이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나를 찾는다. 올라오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서 자는 동생 미도리를 흔들어 깨운다.
"왜 그래 사야 언니."
"쉿. 집 안에 곰이 있어. 도망쳐야 해."
"어, 아빠 엄마는?"
"몰라. 먹혔을지도 몰라."
"싫어, 무서워."
미도리는 훌쩍대며 울기 시작하더니 이불 속에 숨어버렸다. 계단이 삐걱대며 곰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미도리가 나오질 않아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도망치기로 했다. 창문을 열고 지붕으로 나와 기울어진 함석지붕 위를 걷는다. 뒤에서는 곰이 방 안에 들어온 기척이 났다. 남아있던 미도리가 걱정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괜찮을 테지만 못 버티고 나온다면…….
나는 지붕 위에서 움직인다. 달리고 싶은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현관 앞바닥에 뛰어내리곤 집에서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려 한다. 어두운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언덕길을 있는 힘껏 오른다. 뒤에서 쫓아오는 곰의 기척. 검고, 크고, 무서운 그것은 정말로 곰일까?
뒤로 돌아보지도 못한 채 억지로 앞을 향해 한 발씩 내딛는 내 등에 누군가가 찰싹 업혔다.
"언니, 왜 버리고 간 거야."
미도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귓전에 속삭였다.



땀범벅이 된 사야는 눈을 떴다. 담요를 걷어치우고 일어난다. 심장이 터질 만큼 두근대서 호흡이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각자 자는 스타일대로 이불 위에 누운 동료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 보였다. 침실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그 위엔 이불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이불 주위엔 쳐진 커다란 모기장이 주변 암운과의 경계가 됐다.
주위에는 모기향 냄새가 감돈다. 다다미 위에 놓인 베드사이드램프는 행등 모양이었다. 한지 너머의 아련한 불빛이 에어컨 바람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모기장 위에 연녹색 잔물결을 일으킨다.
방금 꿨던 꿈의 느낌이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또 명석 행동에 들어가지 못한 채 농락당했다. 그건 내 꿈이었나? 아니면──.
머리를 쓰며 미도리를 쳐다본다. 미도리는 반대방향을 보고 누워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기에 불안해진 사야는 얼굴을 쳐다보려 했다.
그 때, 모기장 저편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창고 안을 천천히 걷는, 창틀 집합체 같은 것이 행등의 빛을 가로막았다. 다다미 위에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수수다.
여기도 아직 나이트 랜드였나. 사야는 자기 손에 시선을 보내며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꿈속이라면 아무 저항 없이 늘어날 손가락이 꼼짝하지 않았다.
여긴 틀림없이 데이랜드다.
생각이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야의 눈앞에서 수수는 모기장을 통과해 안에 들어왔다. 반쯤 투명한 모습은 실체 같진 않았지만 모기향 연기가 희미하게 그 윤곽에 휘감겼다.
수수가 다리를 접어 누운 미도리의 냄새를 맡기라도 하려는 듯 제 몸을 들이댄다. 그걸 보고서야 사야의 가위가 겨우 풀렸다.
"사카이모리 양! 도망쳐!"
뛰어들듯 미도리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 흔든다.
"헉?! 어!? 뭐야!?"
미도리가 삑사리를 터트리며 눈을 뜸과 동시에 덮쳐들던 머리 위의 수수가 안개처럼 모습을 감췄다.
사야와 미도리가 지른 소리에 다른 셋도 깨어났다.
"으음~? 뭐야, 왜 그래?"
눈을 비비며 히츠지가 일어났다.
"시끄럽게스리, 우리 지금 딱── 어라?"
당황한 듯 카에데의 목소리가 떨렸다.
"혹시 나 또 뭐 했어?"
"……토키시마 씨가 아니예요. 이번 건──"
란이 쉰 소리로 말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생각을 정리하려는지, 눈꼬리를 꾹 누르곤 눈을 떴다.
"또 꿈의 제어권을 일었었네요. 심지어 다섯 명이 다 모이지도 못했고……"
"그게 다가 아니예요 아이조메 선배."
사야는 란의 말을 끊었다.
"저 봤어요. 수수가, 데이랜드에 나왔었어요."
사야의 말은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데이랜드와 나이트랜드는 명확히 나뉘어있다는 것이 슬립 워커 선배로서의 란의 의견이었다.
"확실히 긴 꿈을 꾸다 깼을 때 나이트랜드에서 나왔는지 여부를 확신하기 힘들 때가 있긴 하지만."
란이 말했다.
"그치만, 요즘 뭔가 좀 이상하잖아요. 수수가 힘을 합쳐 움직이고, 명석 행동을 못 취하기도 하고……. 이게 수수의 공격이라면 데이랜드에 나오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요."
"나올 목적은?"
"그건 모르겠어요."
"그…… 호카게 양이 봤다는 수수 말인데, 절 덮쳤었던 거죠. 뭘 하려고 했던 걸까요."
미도리가 불안한 듯 말했다.
"음~…… 녀석들이 동물이면 냄새를 맡거나 먹으려고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수수는 어디가 머린지도 모를 모양새잖아."
사야가 끙끙대자 방금까지 아무 말 없던 카에데가 조심조심 손을 들었다.
"얘기 좀 해도 돼? 사야찌 얘기랑은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럼?"
재촉을 들은 카에데는 머뭇머뭇 말했다.
"사야찌 전에 알이 뭐라느니 하지 않았었어?"
사야는 깜짝 놀라 허리를 죽 폈다. 데이랜드에서도, 나이트랜드에서도 수없이 설명했을, 수수께끼의 '알'. 어째서인지 다들 잊었을 그 기억에 관한 언급이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야찌 소리에 갑자기 일어났었잖아? 나이트랜드에서 나오기 직전에 봤던 것 같아. 그, '알'을."
"──어땠었어?"
"흐름은 기억 안 나지만 히츠지찌가 나왔던 것 같아."
시선을 받은 히츠지가 허둥지둥 눈을 깜빡인다.
"내가?"
"응. 두 손을 이렇게, 가슴 앞에 모아서, 손바닥을 위로 하고── 거기에 연하늘색에 크림색 반점이 있는 알 같은 모양인 뭔가가 올라가있었어."
"그, 그래서?"
카에데가 눈을 꾹 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어쨌더라…… 부쉈던가? 망했다~, 점점 기억이 흐려져."
"수수랑 싸웠어? 내가 봤을 땐 쓰러트린 수수 안에서 뽑았었어, 분명."
"싸웠던 기억은 없는데……. 그냥 까먹은 걸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히츠지찌가 뭔가 들고 서 있는데 손에 든 뭔가가 엄청나게 중요한 거였다는 느낌이었던 건 기억나."
"콘파루 양은? 기억 있어?"
히츠지는 사야의 눈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 안 나. 아무 것도."
"슬립 워크를 시작하고부터는 나이트랜드에서 일어난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면, 좀 찝찝하네요."
표정이 어두워지는 미도리의 말을 받듯 히츠지가 말했다.
"그건 나이트랜드의 기억만이 아닌 거지. 데이랜드의 기억도 같이 없어졌다는 말이 돼."
"호카게 양이 깬 후에 수수를 봤다는 게 사실이라면 나이트랜드에서 데이랜드로 어떤 간섭이 일어난다는 가설을 세울 수는 있겠네요."
란이 말했다.
"간섭?"
"공격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수수가 역습한다는 건가."
"사라진 기억은 그 '알'에 관한 것뿐이야?"
"모르겠어요. 잊어버렸으니까 알 수가 없네요."
문득 떠오른 듯 카에데가 고개를 들었다.
"있잖아, 데이랜드의 기억도 없어진다 치면 조만간 이렇게 얘기한 것도 잊어버리는 거 아냐?"
눈길을 마주치는 넷을, 사야는 초조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그렇다. 실제로 사야가 지금까지 얘기했던 의문과 경고는 다음 슬립워크할 때면 다들 잊어버렸었다. 사야 자신도 잊어버리기 쉬웠다. 이렇게 슬립 워크에서 복귀하고 결과 보고를 했을 때 비슷한 얘기를 했던 적은 있었지만 그 또한 일시적인 것이었다.
"기록을 남기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밝혀야겠어요."
란의 말에 일동은 끄덕였다.

'번역 소설 > 동침 드리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0) 2019.12.24
12  (0) 2019.12.19
10  (0) 2019.12.14
09  (0) 2019.12.12
08  (0) 2019.03.09
Posted by [ 편집됨 ]
,

10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14. 22:13

10

계절은 흘러 7월에 접어들었다. 창고 안에 에어컨을 돌리기에도 한계가 있어 일행은 밖에서 자기로 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창고 뒤편에 펼쳐진 잔디밭에 기둥을 세우고 나무그늘에 해먹 다섯 개를 이어서 잤다.
넓게 펼쳐진 빙원을 개썰매로 달리는, 시원하고 기분 좋은 꿈이었다. 얼음 밑에 숨었다가 덮치는 백곰이나 범고래같이 생긴 대형 수수를 쓰러트린 기세로 물에 빠져 시원함에 눈이 뜨였다.
사야는 네버 슬리퍼라서 그런지, 이따금 이렇게 혼자서만 먼저 눈을 뜨고는 했다.
해먹이 뒤집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굴려 발을 땅에 붙였다. 넷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물을 마시려고 신발을 신고 고개를 들었을 때, 다른 누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후드 티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였다. 당당한 몸집의 산양에 올라타 안장 위에서 사야에게 시선을 보낸다. 그림자 탓에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저기요?"
경계하며 말을 건 사야에게 남자가 말했다.
"양의 알을 조심해라, 슬립 워커."



둔탁한 충격과 함께 사야는 눈을 떴다.
위에서 해먹이 흔들린다. 방금까지 보던 건 꿈이고, 땅에 떨어져서 깼다는 사실을 알아채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히츠지가 해먹에서 일어나 사야를 내려다본다.
"어? 사야 떨어졌어."
"아하하, 바보같, 엇차찻차."
뒤를 이어 떨어진 카에데를 본 미도리가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다치셨나요?"
란이 위에서 사야를 쳐다본다.
"아니……"
일어나며 사야는 뇌리에 스며든 기억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그 알, 뭘까?
그래.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사야에게 기생하던 수수를 쓰러트렸을 때, 히츠지가 수수의 시체에서 알 모양의 핵을 꺼냈었다.
또 하나 기억난 사실이 있다.
지금까지 슬립 워크에서 수수를 쓰러트렸을 때, 히츠지는 반드시 그 핵을 손에 잡고 부쉈었다.
그리고 동료들은 늘 주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데이 랜드에 귀환하기 직전에 이뤄지는, 의식과도 같은 과정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교실을 가득 메우고 흥분해서 뛰어다니는 호랑이꼬리여우원숭이들이 창 밖에서 뻗어 들어온 나뭇가지의 과일을 따 먹어서 바닥은 먹다 남긴 딱딱한 씨로 덮여 있었다.
수십 마리의 호랑이꼬리여우원숭이와 호랑이꼬리여우원숭이가 아닌 네 학생을 마주한 나는 교탁에서 소리를 크게 냈지만 소란에 섞여 퍼지질 않는다. 피로와 무력감에 마음이 꺾이려 할 때, 히츠지가 마침내 나를 쳐다봤다.
"저기, 얘들아, 사야 선생님이 무슨 얘기 하실 건가봐."
주목을 모아주니 마침내 네 명이 나를 향했다.
"고마워, 히츠지 군."
"오늘은 뭔가 심각한 표정이네, 사야 선생님."
"확인할 게 좀 있어서."
나는 내 의문을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야기의 맥락을 잃지 않는 것은 썩 쉽지 않았다. 잠 속에선 조금만 방심했다간 이내 논리가 뒤틀려서 어느 샌가 다른 얘기를 하거나,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만 내게 되는 경우가 곧잘 있었다. 이렇게 설명하려 시도하는 것도 사실은 벌써 세 번째였다.
덧붙이자면, 나는 데이랜드에서도 몇 번이고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나마저도. 꿈을 꿀 때의 의식은 깨어 있을 때의 의식과는 다른지, 눈을 뜨면 나이트 랜드에서 있었던 기억은 상당히 애매한 것으로 변한다. 개중에서도 이 '알'에 관한 기억을 유지하는 것은 한층 더 어려웠다.
"전혀 기억 안 나는데. 내가 진짜 그랬었어?"
"했어. 매번. 우린 그걸 쳐다봤고."
내 말에도 동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당황할 뿐이었다.
"그래도 알았어. 사야찌가 그렇다면 다들 집중해 보자."
"그렇죠. 저도 뒤에서 주의해서 볼게요."
우리는 교실 창문으로 나가선 바오밥 나무줄기를 감싼 나선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사바나를 배회하는 대형 고양이와 비슷한 수수의 모습은 여기서도 보였다.
"저거구나."
내가 말하자 란도 소리를 높였다.
"잠깐만, 다들── 저기도 있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다른 수수가 보였다.
왕도마뱀처럼 땅을 기는 다리 여덟 달린 수수가 우리를 올려다본다──.



실패했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시도했지만 두 수수 모두 놓쳐버렸다.
사냥을 실패한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다섯은 테이블 앞에 축 늘어져 당을 섭취하며 사냥을 반추했다.
"그 녀석들, 합공했어. 그런 건 처음인데."
히츠지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까지 수수를 만났을 때는 반드시 하나씩이었다. 수수는 제각각 생김새와 움직임도 다르고, 인간이 아는 생물과도 다른, 굳이 따지자면 기계적으로 감정이입을 막는 듯 행동했었다.
그런 것이 한 번에 둘이나 나타난 데다 힘을 합치듯 행동하며 사냥을 막았다.
"벌레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미도리가 혼잣말을 했다. 카에데도 인상을 쓰고 생각에 빠졌다.
"지능이 생긴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다음번엔 좀 신중하게 가보죠. 저들의 행동이 변했는지 여부를 잘 관찰하는 거예요."
란의 말에 일행은 끄덕였다.
"결국 알은 확인도 못 했네."
사야의 말에 넷은 이상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이 뭐야?"

'번역 소설 > 동침 드리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  (0) 2019.12.19
11  (0) 2019.12.17
09  (0) 2019.12.12
08  (0) 2019.03.09
07  (1) 2019.02.15
Posted by [ 편집됨 ]
,

09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2. 12. 21:11

9

비행기에서 눈을 뜬다. 굉음과 함께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객실 불빛은 꺼져 있다. 많은 승객이 자리에 앉아 고요히 잠들어 있다.
기압 탓에 귀가 좀 멍하다. 침을 삼킨다.
어두운 좌석 저편에 독서등이 켜진 자리. 낯익은 뒷모습이 보인다.
그립다…… 정말로 그립다.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말을 걸려고 입을 연 순간 목구멍에서 새 한마리가 날아갔다.
뒷모습이 그리운 이는 자리를 나서 비행기 앞쪽으로 걸어간다. 새가 된 나는 잠든 승객들 위를 날아 쫓는다.
그녀는 커튼을 걷고 퍼스트 클래스로 들어간다. 나도 따라가려 했지만 새의 몸인지라 어떻게든 커튼을 걷을 수가 없다. 아름다운 파랑 커튼이 부리에 쪼여 너절해진다.
그 때 뒤에서 뻗친 손이 나를 위해 커튼을 열어줬다. 커튼 너머에 있는 것은 옷집 피팅룸이다. 정면 벽에 걸린 큰 거울 안에 내 모습은 없었다.
헉 하며 시선을 떨군다. 날개였던 팔이 손바닥으로 변한다. 나는 마침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명석한가요? 호카게 양."
어느 샌가 정면 거울 속에 란이 있었다.
"명석?"
"꿈을 컨트롤 할 수 있냐는 말이예요."
"뭐, 아마. 꿈인 걸 방금 안 지라."
내 대답에 자신이 없는 걸 알아챘는지 란이 인상을 찌푸린다.
"아마 가지고는 안 돼요. 꿈의 관성은 강력한 것이라 멍하니 있다간 순식간에 명석을 잃고 그냥 꿈꾸는 상태로 변해버려요.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호카게 양, 당신은 누구인가요?"
"누구냐고 하면…… 슬립 워커, 이려나요."
"그건 뭐 하는 사람인데요?"
"모두 함께 수수를 잡는……"
"모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말해볼래요?"
끝도 없이 묻는구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이조메 선배, 토키시마 씨, 사카이모리 씨, 그리고, 히츠지."
란이 만족스레 끄덕인다.
"괜찮아 보이네요. 고유명사는 의외로 명석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서 깜빡 잘못하면 전혀 다른 이름이 나오고도 위화감을 못 느끼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 이 명석한 감각을 기억해 두세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사실 아직 자신은 없지만 일단 끄덕였다. 란이 빙글 돌아 거울 속을 걸어간다.
"다른 사람들이랑 모일 거예요. 따라와 주세요."
나는 란의 뒤를 따라 거울 테두리를 넘었다. 테두리 너머로 가자 사방이 만화경에 끝없이 이어지는 피팅룸 미궁이 나타났다. 거울 속에는 우리 둘만이 안 비친다.
그렇게 무한히 많은 피팅룸 안을 뭔가 큰 것이 가로질렀다.
"선배, 방금 그건."
"수수네요. 쫓아가죠."
"어, 쫓는 거예요? 먼저 모이는 게──"
"놓치면 귀찮아져요. 둘이서도 잡을 수 있으니, 괜찮아요."
거울에서 거울로 헤엄치는 그림자를 쫓아 우리도 앞으로 나아갔다. 지나치는 피팅룸에 벗은 채 내버려둔 옷이니 옷걸이 따위가 방금 전까지 누군가 있었을 분위기를 감돌게 했다.
피팅룸이 끝나자 마침내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리스 식 돌기둥이 늘어선 홀에 천장이 없다. 우리가 쫓던 수수가 밝은 밤하늘에 떠 있었다. 수많은 노로 하늘을 젓는, 갤리 선 같은 수수의 선두 부분은 다양한 크기의 유리병이 불규칙적으로 솟아 있었다. 병 속의 알 수 없는 광원이 주위에 창백한 빛을 뿌린다.
"무기를 준비하세요, 호카게 양."
란이 어깨에 멘 큰 활을 끌렀다. 양 끝에 톱니바퀴가 달린 데다 굵은 줄이 여럿 매겨져 있는, 강력해 보이는 활이었다.
"무기라니……"
"전에도 했잖아요. 최대한 세 보이는 무기를 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번에는 이상한 성게 같은 것만 나왔었어요."
"상상력을 단련할 수밖에 없겠네요."
다시금 란을 보자 방금까지 교복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샌가 판타지 RPG에 나올 법한, 장식이 덕지덕지 붙은 장비를 두르고 있었다.
"선배는 익숙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전 원래 게임을 해서 이런 걸 잘 해요. 호카게 양도 뭔가 익숙한 것 중에서 무기를 고르면 쉬울 거예요."
란이 허리춤의 화살 통에서 긴 화살을 뽑았다. 공작처럼 선명한 청록색 활깃이 수수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화살을 활에 메기고 최대한 당겼다가, 놓는다. 때려박는 듯한 활소리를 남기고 화살은 하늘을 갈라 수수의 유리 병 여럿을 아울러 깬다. 마치 포효 같은 그 소리를 퍼뜨리며 수수는 몸을 기울였다. 늘어선 노와 평행선을 그리며 표면에 틈새가 생기더니 안에서 수많은 렌즈가 나와 우리를 겨눴다.
"보는 거예요?"
"보고 있네요."
렌즈가 번쩍이나 싶더니 얄팍한 광선이 우리 발밑을 태웠다. 광선은 깜짝 놀라 물러나는 우리를 쫓아온다. 개중 하나가 내 팔을 스쳤다.
"앗뜨!"
"괜찮아?"
"그럼 좋겠네요! 스루가 머위 풀을 바르고 아침까지 가만있으면 괜찮아요."
나는 냉정하게 답했다. 이럴 때 어떡해야 할지는 잘 안다. 오늘 '월간 이런 혜택 SP' 권두 특집에서 봤기 때문이다.
"선배도 풀 발라드릴테니 가만있으세요. 늘 가지고 다니거든요 저. 여기요."
내가 자주 쓰는 풀 튜브를 꺼내 뚜껑을 열고 손가락에 내용물을 짜는 걸 본 란이 말했다.
"아, 틀렸구만── 미도리! 부탁해!"
"자, 잠깐만요오"
뒤쪽 피팅룸에서 소리가 나나 싶더니 미도리가 헐떡이며 뛰어 왔다.
"아 사카이모리 씨. 같이 풀을……"
미도리는 말을 꺼내려는 내 이마에 손을 뻗어 딱밤을 먹였다.
"에잇!"
"아악!?"
미도리가 전력을 실은 딱밤에 비명을 지른 내게 말했다.
"자기 손을 보고 명석을 되찾으세요. 이름이 뭔지 알겠어요?"
"호, 호카……호카게…… 뭐더라……"
미도리가 란과 눈길을 마주친다.
"일단 일으킬게요."
미도리는 그러더니 내 입가에 살며시 손을 댔다.
말을 탄 히츠지와 허리 아래가 사자인 카에데가 피팅룸 떼 쪽에서 달려오는 걸 보며 내 의식은 어두워──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 미도리가 사야 위에 올라타듯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소리 지르려 한 사야의 입을 미도리의 손이 막는다.
"쉬~잇. 다들 일어나겠어요. 진정해요, 이젠 데이랜드예요."
사야가 침착함을 되찾은 것을 알아챘는지 미도리는 손을 뗐다.
"……미안. 나 이상한 소리 했었지?"
"마음 쓸 필요 없어요. 그냥 잠꼬대예요. 수수의 공격은 우리의 명석을 갉아먹거든요."
아직 혼란스러웠다. 극도로 유사한 다른 언어로 일본어를 덮어쓴 듯 한 위화감이 서서히 개여간다.
"좀 더 쉴래요? 더 있다가 와도 돼요."
"아니, 괜찮아. 갈게. 미안."
사야와 미도리는 다시금 침대 위 제자리에 누웠다. 마침 히츠지를 중간에 낀 맞은편이다. 바로 누워 깊은 숨소리를 내는 히츠지에게서 거의 눈에 보일만큼 짙은 졸음의 파도가 퍼져온다. '블랭킷'── 어떤 인간이라도 잠에 빠지게 하는 히츠지의 능력이 사야와 미도리를 꾸준히 얽어맨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걸 느끼며 사야가 말 했다.
"방금 그건 히츠지한테는 말 안 하면 안 될까요?"
"왜요?"
"어─ 그러니까…… 수수한테 당해서 잠꼬대 한 걸 들키는 건…… 부끄러우니까……"
"의외로 신경 쓰는 쪽이었네요 호카게 양."
"의외라니 그게 무슨? 아니……"



여러 돌기둥이 쓰러진 홀에 수수의 거체가 누워있었다. 무참히 부러진 용골과 뽑혀 나온 긴 노가 돌바닥 위에 무수히 흩어져 있었고, 뱃머리의 유리병은 모조리 깨져 있었다.
"빠르네. 벌써 정리가 끝났어요."
미도리의 말에 고개를 들자 수수의 잔해 위에 나머지 셋이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저쪽에서도 우리가 돌아온 걸 발견한 모양이다. 히츠지가 발돋움을 하며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아까 한 얘기 있잖아── 잠들기 직전에"
"말 안 할 거예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슬립 워크중에 뭔가를 계속 의식하면 그것 때문에 꿈의 제어력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수수가 공격할 약점이 되기도 하고, 들키기 전에 자기 입으로 말할 때도 있으니까요."
"알겠어. 안 까먹을게."
미도리의 뒤를 이어 셋이 선 곳으로 향했다.



사카이모리 침구점 창고에 다니며 슬립 워크를 반복하는 나날. 모이는 건 다들 일정을 비우기 쉬운 수요일과 금요일 방과후, 그리고 일요일이 대부분이었다.
활동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저녁까지 집에 들어가기가 힘들어져서 가족한테는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동호회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무슨 동호회라고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실상에 한없이 가까운 '낮잠동호회'라고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나처럼 수면 심도가 낮거나 꿈자리가 사나운 애들이 모여서 질 좋은 잠을 추구하는 모임이다── 라는 사야의 말은 그간 쌓아온 불면증의 실적 덕택에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평일에도 슬립 워크에 전념할 기반이 갖춰졌다.
하지만 사야의 슬립 워크 실력은 썩 늘지 않았다. 일단 명석함을 유지하기가 힘든 것인데, 나이트랜드에 들어간 직후에는 어떡해봐도 제어에 실패한다.
네버 슬리퍼라서 꿈의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는 예측은 대체 뭐였냐며 항의했지만 일행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전혀 아니잖아요 아이조메 선배!"
"이상하네요……. 혹시 재능이 없는게 아닐지?"
"그쪽이 끌어들여놓고 그런 말 하면 안 되는거 아니예요!?"
사야와 란이 왁자지껄 다투는 와중에 히츠지가 끼어들었다.
"괜찮아 란. 내가 돌봐줄거야."
"어?"
히츠지는 소파에 앉아 사야를 올려보며 말을 이었다.
"사야가 나이트 랜드에서 길을 잃으면 내가 반드시 데리러 갈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으, 응…… 알겠어."
기백에 밀린 사야는 그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어찌어찌 문제가 해결된 듯 한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나이트 랜드 여행은 이어졌다.



개찰구를 나서자 급경사에 들러붙은 등산로가 한없이 위를 향해 이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온천이 가까운지 짙은 증기가 주위를 메웠다. 옆에 있는 것은 본격적인 장비를 챙긴 등산객들뿐이었고, 멈춰선 내 곁을 지나 줄줄이 산으로 향했다.
남들과 비교해보면, 나는 왜 이렇게 평범한 옷을 입고 온 걸까. 경사가 너무 급해서 군데군데 있는 계단도 거의 벽이나 다름없다.
개찰구에서 나오는 사람이 늘자 등산로도 복잡해졌다. 인파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산으로 향한다. 기어서 어느 정도 간 다음 문득 생각 나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까 뒤로한 역은 이미 한참 아래쪽이었다. 손발이 얼어붙는다. 두렵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벽에 달라붙은 나를 일별한 등산객들은 차례로 나를 추월한다.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상태로 겁을 먹고 있는데, 곁에 사다리가 세워지더니 히츠지가 영차영차 올라왔다.
"안녕 히츠지."
"사야, 넌 늘 두려워하네."
"후훗, 그렇지 않아."
"허세부릴 필요 없어, 사랑스런 사람. 그런 부분도 좋지만.
"히츠지한테는 못 당하겠네."
"저길 봐. 산꼭대기에 수수의 둥지가 있어. 무식하게 올라가는 건 녀석들의 계획에 따르는 거야. 여기서부터 같이 가자. 사다리를 세워줄게."
가리킨 곳을 쳐다보자 산꼭대기에 철골이 얽힌, 새 둥지 같은 조형물이 있었다. 그 안에는 머리 셋 달린 독수리와 전철을 섞어둔 것처럼 생긴 수수가 있었는데, 산을 다 오른 등산객을 차례로 삼키고 있었다.
"저거구나. 좋아~"
히츠지가 곁에 있는 덕에 신이 난 나는 그대로 공중에 떠올랐다.
"사야, 잠깐만?"
"괜찮아, 맡겨줘. 내가 전부 박살내 줄게."
가능한 한 강력한 무기를 떠올리려 노력한다. 총…… 대포…… 폭탄…… 그래, 핵폭탄! 산꼭대기에 미사일을 폭발시키면 수수 따윈 한 방일 것이다. 다들 왜 이런 생각은 못 했던 걸까.
나는 상상했다. 폭발한 핵에 수수의 둥지가 단숨에 증발당하는 모습을.
상상한 대로 위에서 섬광이 치달았다. 독기를 품은 빨갛고 노란 불덩어리가 생겨나고, 팽창해서, 산꼭대기를 집어삼키고, 크레스피 클라크 군 반응에 의해 우리의 생애 수입은 낮아지는 것이다. 은행이 차례대로 파산한다. 시장에서 생선이 사라진다. 아이 방 TV 화면에 나오는 폭발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불안에 떨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울먹이는 나를 찬찬히 쳐다본 다음 히츠지가 팔을 뻗어 내 뒤통수를 따콩 때렸다.
"아야."
"자~ 명석을 찾으세요."
"어라?"
멍하니 명석을 되찾은 내게 히츠지가 말했다.
"세다고 장땡이 아냐 사야. 다 상상하지 못할 걸 만들어내려고 하면 금세 제어력을 잃어. 그래서 다들, 저렇게 자기가 상상하기 편한 식으로 싸우는 거잖아."
그러고 보면 란은 RPG스러운 검이나 활, 히츠지는 권갑을 낀 주먹으로 싸웠다. 카에데는 변신이 특기라 동물의 송곳니나 발톱을 이용한다.
"미도리는?"
"걘 전투 자체를 상상하는 실력이 좋진 않아. 그래서 베드 메이커로서 우리 서포트를 맡은 거고."
"내 실력도 별로 좋진 않은 것 같단 말이지. 호랑이 사냥 때는 큰 총이 있었지만 그건 애초에 꿈에서 나온 걸 그대로 쓴 느낌이었고."
"성게폭탄같은 걸 꺼냈었잖아. 사야도 공격성 자체는 있는 거야. 그러면 쓰기 편한 모양새로 바꾸기만 하면 돼. 정형을 만들어서 쓰고 싶을 때 변형하는 게 편하려나."
"음~……"
고민하는 와중에 갑자기 아이 방 벽이 날아가며 셋으로 나뉜 수수의 대가리가 처박혔다.
"으악!"
히츠지가 순간적으로 주먹질을 하자 대가리가 하나 날아가고, 그 대신 두 개가 생겨났다. 넷이 된 대가리는 강제로 실내에 들어와 우리를 벽에 몰아세웠다.
"자 사야! 뭔가, 익숙하고 싸울 때 쓸만한 거 딱 떠오르지 않아?"
"그럼, 그러면……"
상상하기 편한 것…… 익숙한 것…… 일상적이고, 싸울 때 쓸 만한 것……. 위기에 몰린 내 상상력이 마침내 강제로 무기를 끄집어냈다. 다음 순간 한 손에는 살충제 스프레이, 다른 손에는 긴 라이터가 쥐여 있었다. 라이터를 켜고 스프레이를 뿌리자 뿜어진 화염이 죽 뻗어 수수의 온 몸을 감쌌다. 수수는 모가지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아이 방에서 굴러 나왔다. 부서진 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보니, 불덩어리가 된 수수는 깎아지른 산중턱에서 굴러 떨어져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무기 창조를 이뤄낸 기쁨과, 수수를 해치운 달성감에 가득 찬 나는 히츠지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흐흠~ 어때?"
히츠지의 감상은 한 마디였다.
"──구려!!"



멤버 기분에 따라 침실 침구는 이따금씩 변했다. 창고에 늘어선 침대 밑에는 팔레트가 있어서 미도리가 직접 지게차로 교환하곤 했다.
"한 번 쓴 침대는 비싸게 팔려요."
교환이 끝난 다음 지게차에 실려 나가는 예전 침대를 쳐다보며 란이 말했다.
"뭐……?"
"슬립 워커가 쓴 침대를 매입하는 시장이 있거든요."
"완전 소름 돋는데!?"
"수수에게 당한 희생자 중에는 수면장애로 힘들어하는 분도 많이 계세요. 잠에 들지 못 하거나, 악몽에 시달리는 등…… 슬립 워커가 썼던 침대나 침구가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런 생각 안 드나요."
"…………"
"걱정 안 해도 팔 때는 다 세탁 한다구요."
"뭐…… 그렇다면야……"
망설이며 답하는 사야의 얼굴을 히츠지가 들여다보았다.
"그럼 진짜 괜찮은 거야? 사야."
"난 이제 도무지 모르겠다."



죽은 애완견 박제 만들기에 완전히 실패한 내게는 애매한 모양의 동물 시체만이 남았다. 만쥬처럼 짜부러진 대가리에 박힌 유리구슬 눈알이 비난하듯 나를 노려보기에 박제를 향해 변명하는 신세가 됐다.
다음엔 제대로 만들게, 횡설수설 그렇게 떠든 나에게 박제는, 다음 따윈 없다, 진지하게 안 하니 이렇게 된 거다, 따위의 거친 말투로 따졌다.
아~아! 어쩔 셈이냐! 너 때문에 나는 끝장이다! 어떻게 책임 질 테냐!
"미안해.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미안해."
용서받고 싶다면 몸을 바꿔라. 네가 박제가 돼라. 실패한 박제가 돼라!
박제가 나를 벽에 밀어붙인다. 실패한 박제 따위가 되긴 싫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잘못이라 반론할 수가 없다. 울며 받아들이려 한 순간, 박제가 딱 세로 절반으로 찢기더니 펄럭이는 모피와 내용물이 되어 흩어졌다. 히츠지가 금색 권감을 찬 두 손을 털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괜찮아 사야?"
"히츠지……  이런 데서 만나다니 신기하네."
"너, 나이트랜드에서 나랑 보면 묘하게 센 척 하는 건 왜일까."
"네 얼굴을 보면 아무리 괴로운 일도 아무렇지 않게 되니까."
"거기다 뭔가 폼이나 재고. 자 명석 명석."
사야한테 찰딱찰딱 뺨을 맞은 나는 명석을 되찾았다.
"늘 수고를 끼칩니다."
"아~녜요~"
박제가 있는 교실을 나선 우리는 싸늘한 해안을 걷기 시작했다. 흐린 하늘 아래, 색 바랜 초원이 찬 바닷바람에 나부낀다. 앞서 가는 히츠지의 부드러운 머리칼 또한.
"있잖아 히츠지."
"왜~애"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나준 거야?"
"사야야말로. 나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어."
"나도 그래. 잠들었을 때만 그런 걸 둘 다 아는데도 말야."
"하하…… 그렇지."
낮은 소리로 웃는 히츠지에게 말했다.
"우린, 왜 서로를 좋아하는 걸까. 처음에 꿈속에서 만난 그 순간부터 갑자기 애인이었잖아."
"같이 자서 그런 거 아닐까."
"누가 들을라."
나도 모르게 웃었지만 히츠지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왜냐면 같은 잠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숨 쉬는 타이밍이 맞아떨어지는 건…… 그건 거의 같은 생물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다른 애들도 그렇지 않아? 다 같이 모여 자잖아."
"그렇지. 우린 모두 같은 잠을 공유한 동료야. 그래서 거리가 굉장히 가까워졌어."
나는 끄덕였다. 나를 뺀 넷의 사이는 슬립 워크를 경험하지 않았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듣자 하니 란과 미도리는 슬립 워커의 비전을 잇는 집안들 사이의 소꿉친구. 미도리와 카에데는 처음부터 인터넷으로 알게 된 오타쿠 친구. 히츠지는 블랭킷 능력이 밝혀져서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란이 찾아내 함께 하게 됐다고 한다.
알게 된 계기는 다 다르지만 함께 슬립 워크를 한 번이라도 경험하곤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의 나는 완전히 이해가 된다. 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슬립 워크 '중독'에 끌려들어갔지만 그것은 잠 그 자체에 굶주린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사람과 사람간의 가까운 거리감, 따스함과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런 것을 고순도로 접하게 되면 사람은 그것을 다신 놓을 수 없게 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쳐도 나랑 히츠지는 특별하지 않아?"
내 말에 히츠지는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더니 내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그렇지. 왜 그런 걸까. 나는 사야를 사랑해."
"나도. 데이랜드에서도 그러면 좋을 텐데."
폭신한 머리를 안으며 말하자 히츠지는 한동안 조용하더니 작은 소리로 답했다.
"그러게. 정말로,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알고 있다, 잠 속에서 느끼는 이 따스한 마음이 데이랜드에서는 사라져버리는 것을. 눈을 뜬 순간 히츠지가 고개를 돌리고, 붙어있던 둘의 몸이 어색하게 떨어질 것도. 그럼에도 나는, 이 짧은 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슬립 워크를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사야도 차츰 익숙해졌다. 명석을 찾기엔 동료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아직 많고, 만들 수 있는 무기도 대단할 게 없었지만 나이트랜드에서의 전투에도 익숙해졌고, 어느 샌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듯 수수와의 싸움에 몰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츠지와의 관계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나이트랜드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하는 연인, 데이랜드에서는 타인── 아니, 타인까지는 너무 심하지만 지금으로선 친구, 동료라고 표현하면 될런지. 그럼에도 잠의 안팎에서 생기는 감정의 온도차는 혼란스러울 만큼 큰 것이었다.

'번역 소설 > 동침 드리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  (0) 2019.12.17
10  (0) 2019.12.14
08  (0) 2019.03.09
07  (1) 2019.02.15
06  (0) 2019.02.07
Posted by [ 편집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