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21.03.20 서장, 제 1장 1
  2. 2019.03.16 최초이자 최후의 아이돌 2
  3. 2019.03.09 08
  4. 2019.03.02 너는 죽은 내 동생을 닮았다 03/03
  5. 2019.02.23 너는 죽은 내 동생을 닮았다 02/03
  6. 2019.02.15 너는 죽은 내 동생을 닮았다 01/03
  7. 2019.02.15 07 1
  8. 2019.02.07 06
  9. 2019.01.26 05
  10. 2019.01.26 04

내일 세상에 별은 빛난다
stars twinkle in tomorrow world
츠카사 저
뭇슈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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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유키

아버지가 남긴 마술을 쓰는 소녀.

작다.

 

사카키 호노카

목적이 있어 여행하는 소녀.

몸매가 좋다.

 

페라

유키의 아버지가 남긴 펭귄형 사역마

12월 찬바람을 견디며 꼭 붙어서 잡담을──


목차

서장
제 1장 위치 라이프
제 2장 유키와 호노카
제 3장 펭귄 비박
제 4장 종말의 마녀
종장


서장
세계가 멸망했습니다.
뭐 오늘도 변함없이 하늘은 푸르고, 귀엽게 생긴 구름이 떠다니고, 따스함과 서늘함이 섞인 5월 바람은 기분 좋고, 강변에 피는 들꽃은 예쁘지만.
하지만 역시 이 도시──내가 혐오하는 세계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

기분 좋은 햇살 아래 타박타박 차도 중간을 걷는다.
차는 없으니 문제없다. 도로엔 까맣게 탄 오토바이나 연쇄 충돌 탓에 박살난 승용차만 방치된 상태.
평일 대낮부터 교복을 입고 차도를 활보하는 여고생에게 잔소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고생의 패션에서 탈선한 '예스러운 나무 지팡이'를 든 내게 호기심 담긴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없다.
이 도시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 하나.
죽은 인간이라면 수없이 많다. 그것도 아주 우글우글.
지금도 도로변──빌딩 그림자 속에 득실득실.
흔들흔들, 휘청휘청.
허술한 발걸음으로 배회하는 시인(屍人)들.
다들 옷은 넝마짝. 창백한 피부가 얼룩지듯 벗겨져 검붉은 살점과 하얀 뼈가 드러난 상태다.
──아무리 봐도, 역겹습니다. 움직이는 시체란 건.
햇빛을 싫어하는 저들은 낮이면 저렇게 그늘진 곳을 서성인다.
다만, 싫어할 뿐이지 딱히 약점은 아니다.
먹잇감이 보이면 양지로도 나온다.
지금도 한 마리씩 슬금슬금 나를 향해──.
"쀼이쀼이!"
그 때 어깨에 걸친 학교 가방에서 북슬북슬한 회색 조류──아기 펭귄이 고개를 빼고 높은 소리로 우짖는다.
"페라, 조용히 하세요. 알고 있으니까."
꽈악.
나는 '사역마'를 억지로 가방 속에 들여보낸 다음 손에 들고 있던 긴 나무 지팡이를 반 바퀴 빙그르 돌렸다.
빨간 돌이 박힌 지팡이 끝을 발밑에 굴러다니던 파편에 콕 찍었다.
그리고 염원하며 속삭였다.
"움직여줘."
왈칵 하고 몸에서 힘이──체온이 빨리는 감각.
지팡이를 통해 내 '열'이 전해지자 무게가 10킬로는 됨직한 파편이 두둥실 떠올랐다.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 파편을 내 머리위에서 돌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붕붕대며 퍼지는 와중에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늘에서 나온 시인들 탓에 앞뒤 할 것 없이 막혔다.
바람에 섞여 생물이 썩어가는 냄새가 퍼져온다.
나는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옆으로 휘둘렀다.
부앙!
원심력이 더해진 파편이 지팡이의 움직임을 따라──난다.
콰앙!
파편이 직격한 시인의 머리가 비산했다.
나는 그대로 몸까지 돌려 날아다니는 파편으로 다른 시인까지 떨쳐낸다.
퍼퍼퍽 철퍽 와장창 쿵쾅──!
연이어서 터지는 소리. 흩날리는 검붉은 혈액. 누르스름한 뇌수.
파편은 기세를 살려 하늘로.
──마지막 하나.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시인을 향해 파편을 힘차게 떨어트렸다.
우직!
머리가 정수리부터 박살나고 몸엔 파편이 박힌 시인이 무릎부터 바닥에 기우뚱 너부러진다.
머리를 잃은 다른 시인들도 실이 끊긴 듯이 털썩털썩 쓰러졌다.
시인은 머리──뇌를 파괴당하면 움직일 수 없다. 단순한 시체가 된다.
──그럼 이 틈에.
나는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여기서 나가면 주위에 높은 건물은 없다. 정오인 지금 시인이 밀집할 그늘은 적다.
머릿속으로 비교적 안전할 루트를 그리며 나는 죽은 도시를 거닌다.
이 멸망한 세계에 내가 아직 살아있을 수 있는 건 시인들을 물리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얼마 전까진 나 자신도 몰랐지만…… 난 보통 인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쀼이?"
다시 가방에서 고개를 내민 아기 펭귄형 사역마──페라에게 나는 웃어 보인다.
"이제 괜찮아요. 얼른 볼일만 보고 저택으로 돌아가요."
이번엔 페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쁜지 미소 짓는 페라를 보자 내 표정도 풀린다.

이 도시에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인 나는── 마녀.
오늘도 그럭저럭, 재밌게 삽니다.


제 1장 위치 라이프

4월 7일 화요일.
자 오늘부터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고등학생의 삶이 시작됩니다.
중학교 때보다 불쾌한 나날이 되겠습니다.
아침에 출발하며 본 일기예보를 패러디해서 나──미나토 유키는 인생예보를 가슴속에서 말해본다.
하나도 재미없다. 웃어넘길 수도 없다.
4월 하늘은 이렇게 푸르고 벚꽃은 아름다운데 심경은 전혀 밝아지지 않는다.
아빠, 전 언제까지 참으면 되나요?
다른 학군 학교에 입학하는 걸 완강히 거부한 아버지──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무뚝뚝한 표정을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물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
아빠에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약한 부분을 보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빠랑은 5년 넘게 불화상태니까.
입학 때문에 얘기한 게 오랜만에 나눈 대화다.
'……아빠, 나 가능하면…… 요코하마 …… 기숙 사립 고등학교──'
'안 돼. 이 집을 떠나선 안 된다.'
대화라고 해봤자 이게 전부다.
이유를 말할 틈도 없었다. 이유를 물을 틈도 없었다.
결론이 나온 이상 무슨 말을 더 해봤자 비참해질 뿐이다.
아빠에게 동정당하는 건 싫다. 아빠 앞에서 센 척 하는 게 내게 남은 유일한 자존심. 그래서 그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역시 후회된다.
다른 학생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지각 직전에 등교했지만── 교문을 지나, 건물에 들어서고, 교실과 가까워질수록 다리가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오늘은 시업식.
하지만 지난 입학식 때 내가 앞으로 누구와 고등학교 생활을 보낼지는 이미 알았다.
초, 중학교 때와 거의 똑같은 면면.
나를 비웃어온 사람들.
변한 건 없다. 모든 게 그대로 최악──.
"……정말, 발전이 없네요."
교실 앞에 도착한 나는 복도에 떡하니 놓인 책상과 의자를 보고 작게 투덜댔다.
책상에 이름이 적히진 않았다.
하지만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 교실에 들어가 보면 분명 내 책상만 없을 것이다.
문이 닫힌 교실에선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틀림없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며 들떠있을 것이다.
──책상에 낙서라도 해주면 알기 쉬울 텐데.
저들은 증거를 남기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도저히 성장이라곤 하지 않는 얼간이들인데, 이런 부분에서만 영리해지는 것이다.
드라마나 만화처럼 알기 쉬운 왕따는 '여기'에 없다. 왜냐하면 왕따는 나쁜 짓이니까. 누구든 자기가 악당이 되긴 싫은 법이니까──.
모두들 '일반인'인 채로 나를 비웃는다.
──……정말, 최악입니다.
딩-동-댕-동.
책상 앞에 서 있자니 종이 쳤다.
"왜, 무슨 일 있냐?"
뒤에서 말을 걸기에 돌아보자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 선생님이 서 있었다.
──분명 담임선생님…….
"저, 이게── 아마 제 책상 같은데요……"
용기를 낸 나는 아주 자그마한 기대를 담아 책상을 가리켰다.
이제 전해졌을 것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어른이니까,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 빨리 안에 들여놔. 벌써 종 쳤다."
그는 모르는 척, 귀찮은 표정으로 말한다.
그저 책상과 의자가 교실 밖에 나온 것뿐이다. 구체적인 악의의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선생님도 '저쪽'에 가담한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는 셈이니까…….
──역시, 똑같다. 내 일상은 변함없다.
대단한 희망을 품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낙담한 나는 뒤로 돌아 걸어 나간다. 교실에서 멀어진다.
"어, 야! 어디 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조퇴할게요."
온갖 것을 '진지하게' 대하는 게 갑자기 멍청하게 느껴진 나는 대충 변명했다.
선생님은 쫓아오지 않았다. 뭐라 말을 더 하지도 않았다.
내 변명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게 덜 귀찮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면 그런 대로 나한테도 편하다.
오늘은 시업식이랑 HR뿐이라 성적에 영향은 없다.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일부러 웃음거리가 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는 합리적으로 선택했다고 내게 핑계를 댔다.
하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얼굴이, 눈가가 뜨거워진다.
──왜 나는,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까요.
나는 '강한'선택을 한 걸 텐데…… 가슴 속에 점점 후회가 들어찬다.
어떻게 변명한들 내 자신에게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허세를 부리고, 달관한 척을 해도, 나는 안다. 내가──도망쳤다는 사실을.
도망치는 건 나쁜 짓이 아니라고, 부드럽고 달디단 말을 흔히 듣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도망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도망치면 '패배'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혐오하는 것들에게 지기 싫었다. 하지만──.
시야가 울렁이고, 뜨거운 물방울이 뺨에 흐른다.
──분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우는 모습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고개를 처박고 걷다, 걷다, 걷다보니── 어느새 우리 집 앞이었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서양식 저택. 훌륭한 석조 건물이지만, 담쟁이덩굴이 벽을 뒤덮고, 금간 창문은 안에서 나무 판자로 막아── 밖에서는 어떻게 봐도 귀신의 집이다.
이런 집에 사는 탓에 초등학교 때부터 내 별명은 '마녀'였다.
게다가 아빠는 '마술사'를 자칭하며 오컬트쪽 의뢰를 비싼 값에 해결하는, 수상한 직업의 소유자다.
근처 어른들은 아빠를 사기꾼이라 불렀다. 학교에서는 나를 마녀라며 놀렸다.
놀림 받고, 괴롭힘 당하는 매일.
나는 아빠에게 이상한 일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포기했고, 아빠와의 대화도 멈췄다.
그러고부터 한동안 나는 아빠와 달리 '정상'이라고, 마녀 같은 게 아니라고 열심히 어필 해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를 '비웃고 싶은'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유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 연장선상에 현재가 존재한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진 않게, 버텨내는 매일.
중학교 2학년 2학기──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 아이'와 즐겁게 보내기도 했다.
'유키~! 또 보자~!'


뇌리를 스치는 건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소녀와…… 작별 인사.
그녀와 보낸 시간은 꿈처럼 스쳐갔고, 빛을 잃은 매일이 다시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오늘, 나는 마침내 도망쳤다. 절대 지기 싫은 것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면 아빠한테 더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전부 솔직히 얘기하자. 더는 싸울 수 없다고. 이제는 무리라고, 다 말해버리자.
그렇게 결심하고 집에 들어갔지만, 눈에 띈 것은 거실 테이블 위의 쪽지.
"……일 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란 말이죠."
이 얼마나 최악의 타이밍인가.
늘 아귀가 맞질 않는다며 한숨을 쉬고, 쪽지 옆에 놓인 것을 쳐다본다.
그것은 '입학 선물'이라고 적힌 선물 봉투. 내용물은 돈이 아닌지, 부자연스럽게 빵빵했다.
"오늘은 입학식이 아니라 시업식이지만요."
쓴웃음과 함께 선물봉투를 들고 뒤집었다.
손바닥에 톡 떨어진 것은 작은 아기펭귄 인형이 달린 스트랩.
"──와, 귀엽다."
회색 털이 몽실몽실하게 귀여운 아기 펭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왔다.
"펭귄…… 인가요."
휴대전화도 안 사주면서 스트랩이라니──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근질대는 감정이 솟구친다.
──펭귄이 좋다고 했던 건 유치원 때잖아요.
아직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 온 가족이 함께 간 수족관에서 본 황제 펭귄. 그게 너무 맘에 들어서 한 때는 펭귄 그림이 있는 것만 사 달라 했었다.
아빠에게 있어서 나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받아 드릴 테니까…… 돌아오시면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나는 어디 멀리 있을 아버지에게 말하고, 휴대폰이 없는지라 학교 가방에 펭귄 스트랩을 달았다.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도 못하고──.

*

4월 8일 수요일.
나는 결국 오늘도 학교에 간다.
이미 도망친 탓에 어제보다 발걸음이 무겁다.
하지만 아직 어떻게든 싸워야 할 이유가 있다.
난 가방에 달아놓은 펭귄 스트랩을 살며시 잡았다.
이건 '입학 축하'선물로 받은 스트랩. 그러니까 이 펭귄과 함께 하루쯤은 학교에 가야지만 아빠의 선물을 제대로 받은 실감이 날 것 같아서다.
등굣길은 평소와 똑같다. 강변길에 핀 벚꽃이 아침 해에 반짝인다.
──하지만 아마도, 그 때 이미 시작됐던 것 같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나는 게 들렸지만 어디서 사고가 났나보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다행히 교실 밖에 내 책상과 의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게 '다행'인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눈에 안 띄게, 최대한 조용히 교실 문을 연다.
어제처럼 웃음소리가 나질 않고 웅성임의 파도만이 나를 둘러쌌다.
교실엔 벌써 학생들 태반이 있었지만 저들은 패거리별로 모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거 실화냐……?"
"주작 빳다죠 쉬바."
"동영상이 있는데──"
한 마디씩 들려오는 말소리. 혼자 자리에 앉은 학생들도 휴대폰 화면을 집어삼킬 듯 쳐다본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걸까요.
하지만 휴대폰도, 친구도 없는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등교 전에 늘 보는 아침 방송은 특별한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창가에 모인 여자들 중 하나가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앗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저 애는 내가 혐오하는 것 중 하나. 초등학교 때부터 곧잘 같은 반에 배정되는 요네지마 양.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를 비웃는 사람. 비웃을 이유가 없으면 만드는 사람. 아마 어제 책상을 꺼낸 것도 요네지마 양이 한 짓.
"──아, 미나토 양도 우리 반이었구나~ 어제 없어서 몰랐네~"
입가에 역겨운 미소를 띄우며 부자연스럽게 말한다.
"…………"
나는 말없이 눈을 돌리고 복도 맨 뒤쪽 자리에 앉았다.
표정과 말, 모든 것이 비웃을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진저리가 날 만큼 잘 안다.
"에~!? 무시해~!? 너무해앵~ 그러다 친구 없는 찐따 고딩되면 어떡해?"
큰 소리로 피해자 흉내를 내는 그녀였지만, 근처에 있던 애가 휴대폰을 보며 "와 미쳤네!? 이거좀 봐!"라고 하자 "뭔데 뭔데~?" 라며 그리로 갔다.
역시 무슨 큰 사건이 난 모양이다.
앞으로도 매일 나 같은 건 잊어버릴 만한 사건이 일어나면 좋을 텐데.
이뤄질리 없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이 좀 지나 수업 종이 치고, 담임선생님이 왔다. 나를 슬쩍 보더니 바로 눈길을 돌렸다. 반응은 이게 끝.
"자 다들 앉아~"
시치미를 떼는 표정으로 잘난 척 명령하는 선생.
소란이 사라지고, 아침 HR이 시작됐다. 출석 확인과 전달사항 몇 가지를 말하고는 더 이상 나를 보려고도 않고 교실을 나섰다.
이 다음은 1교시인 수학.
교실 구석에 앉은 내겐 교실 분위기가 잘 보인다.
많은 애들이 수업을 듣는 척 휴대폰을 만진다.
"어이, 수업 중에──"
그걸 깨달은 선생이 주의를 주려고 한 순간──.
콰앙!!
굉음이 나기에 나는 깜짝 놀라 쪼그라들었다.
──깜짝…… 놀랐어요. 뭐지……?
심장이 쿵쾅대는 걸 느끼며 소리가 난 창문 쪽을 쳐다봤다.
우리 교실은 1층에 있고, 창밖으로는 교문과 이어진 길, 그리고 운동장이 보인다.
언뜻 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쳐다보고 깨달았다. 꽉 닫힌 철제 교문 옆에서 연기가 난다. 자세히 보니 교문 옆에 기울어진 자동차가 조금 보였다.
"사고……?"
누가 그렇게 내뱉자 침묵이 깨지고, 소란이 커졌다.
"조용히들 해! 일어서지 말고!"
수학 선생이 일어나려는 학생들을 막고 창가로 간다.
조금만 늦었다면 다들 창가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앉은 채 목을 빼서 창문 너머를 쳐다보고, 옆자리와 소곤소곤 떠들었다.
잠시 후에 교문으로 선생 두 명이 달리듯 다가간다. 트레이닝복을 입었으니 체육 선생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교문이 아니라 옆의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
무슨 '목소리'같은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라 단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의 나열이었기 때문이다.
교실의 소란이 커진다.
창밖으로 상태를 보던 수학선생의 안색이 변했다.
그 때 출입문에서 트레이닝복을 입은 선생이 혼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트레이닝복의 한쪽이 빨간색으로 물든 상태였다.
소란이 사그라진다. 교실이 적막에 휩싸인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를 못 한 것이다. 나도 모른다. 그러니 입을 열 수가 없다.
또 한 명, 이번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 선생이 교문으로 달려간다.
"어, 담임 쌤이다……"
학생 중 누군가가 내뱉었다.
분명 그는 아까 HR때 봤던 담임선생. 뒷모습이지만 착각할 거리는 아니다.
그는 휘청대는 트레이닝 복 선생에게 달려가 부축하려 했지만…….
"────!!"
또 그 소리다.
나는 안다. 아까 들은 것은…… 남자가 지른 비명이라는 것을.
담임선생이 절규한다. 트레이닝 복 선생에게 잡히고, 그대로 바닥에 깔려 버둥버둥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직후에 담임선생의 목 근처에서 빨간 체액이 안개처럼 솟아올랐다.
두쿵, 두쿵, 두쿵──.
심장 소리가 시끄럽다. 손이 떨려 들고 있던 샤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휘청, 어색한 움직임으로 빨간색 범벅이 된 트레이닝복 선생이 일어섰다.
잠시 후에 쓰러져있던 담임선생도 비칠대며 일어선다.
무사해서 다행이다──라 할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멀리서도 확연히 창백한 안색이라 도무지 무사해보이진…… 살/아/있/다/곤/볼/수/없/었/으/니/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교실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마 다른 교실에서도 일제히.
다들 동시에 지른 비명과 일어나는 소리가 합쳐져 학교가 흔들렸다.
다른 반 학생들이 복도를 달려가는 걸 보고 몇 명이 따라서 교실을 뛰쳐나갔다. 이번엔 수학 선생의 제지도 효과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태반의 학생은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교문 옆 출입문에서 온 몸에 피범벅을 한──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걸 본 순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내 자리는 복도쪽 맨 뒷자리. 정확히 문 옆.
난생 처음 보는 필사적인 표정을 지은 요네지마 양이 멍하니 서있던 나를 짜증에 가득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꺼져!"
힘에 나가떨어진다.
다리가 접질린 나는 넘어졌다. 무릎과 팔꿈치가 아프더니, 그 직후에── 등을 밟혀서 숨이 턱 막혔다. 수많은 신발이 나를 차고, 짓밟는다. 피하려는 사람은 없다.
비상사태니까, 나니까 상관없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리라.
변명을 할 수 있다면, 올바르게 보일 이유만 있다면 이 사람들은 더없이 끔찍한 짓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아파, 아파, 아파──제발 그만해.
몸을 옹송그리고 폭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린다.
짓밟는 발이 사라지고, 사위가 고요해져도 통증 탓에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서, 이대로 있다간 위험하다는 위기감이 몸을 움직였다.
"으윽……"
팔다리와 배에서 느껴지는 둔통을 참으며 나는 책상에 매달려 일어선다.
아무 소리가 안 나서 알곤 있었지만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수학 선생도 애들을 따라 나선 모양이다.
두쿵, 두쿵──.
심장은 아직 크게 뛴다. 창문을 보자 '움직이는 시체'는 건물 코앞까지 몰려온 상태였다.
저건 뭐야? 누구? 현실인가? 꿈이 아니라면 잘못된 거야. 하지만 아파.
온 몸이 너무 아프다. 등이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팔이 아프다. 무서워. 무서워무서워무서워. 아파무서워괴로워──.
아, 또 누군가 잡혔다. 교복을 안 입었으니 아마…… 선생.
왜 막아주지 않는 걸까. 선생인데. 어른인데. 저 사람들은 언제든지 날 구해주지 않는다. 물렸다── 피다. 피, 피, 피── 정말로 붉은──.
"아…… 아……"
말이 잘 안 나온다. 떨리는 손길로 가방에 교과서를 허겁지겁 채워넣는다.
──나, 뭐 하는 거지…… 왜 돌아갈 준비를…… 맞아요, 돌아가야…… 빨리 도망쳐야…….
돌아가자, 돌아가자돌아가자돌아가자── 도망쳐야해도망쳐야해도망쳐야해──!
제대로 생각을 못 하는 상태로 묵직해진 가방을 걸쳤다. 아기 펭귄 스트랩이 살짝 흔들렸다.
──돌아가……도망쳐? 아니 어디서? 교문엔 저 사람들이…….
교실을 나서려던 순간 걸음이 멎었다.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갈 수 없어? 그럼 어떻게어떻게어떻게──.
밖은 위험해. 1층도 위험해. 이제 곧 저게 들어와. 도망쳐야해── 그럼 위? 빨리 도망쳐야해── 하지만 아마 다른 애들도──.
밖이 안 된다면 일단 위로. 안 된다면 더 먼 건물로── 어찌 됐건 여기 머무르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하지만…… 도망친 곳엔 분명 '모두'가 있다. 요네지마 양이 있다. 날 계속 비웃고, 무시하고, 짓밟아온 사람들이 있다──.
무섭다. 저 움직이는 시체만큼, 나를 비웃는 학생들이.
그래서 움직일 수 없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복도에서 난 소리에 몸을 깜짝 움츠렸다.
가깝다── 움직이는 시체는 이미 건물 안에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 오지 마!
"윽……"
나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교실 문은 안쪽에서 잠글 수 없다.
대신 책상을 문 앞으로 옮기고 2층으로 쌓아 쉽사리 못 들어오게 만들었다.
목덜미를 살며시 스쳐간 바람에 창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사적으로 창문을 죄다 닫고, 잠가 두었다.
"헉…… 헉…… 헉……"
왜…… 왜 이런 일이──.
거칠고 빠르게 헐떡대며, 나는 교실 창가 제일 뒤쪽에 주저앉았다.
안고 있던 가방에 고개를 처박고 두 손으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달리 지금 가능한 행동이 떠오르질 않았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멀리서 비명이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꿈이라면 당장 깼으면 좋겠다. 깨라 깨라, 깨 줘──.
제아무리 빌어도 깨어나질 않는다. 애원하다 지친 나머지, 나는 아마 이대로 죽을 거라고 머리 한구석에서 생각했다.
하지만── 꽉 눌린 귀가 아파져도, 끝은 찾아오지 않는다.
귀가 너무 아파서 힘을 살짝 뺐다.
"────!!"
각오는 했지만 비명이 갑작스레 손가락 틈새로 쏟아져서, 더 쪼그렸다.
가깝다── 아마, 창밖이다.
들린 이상 무서워도 확인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창 밑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살펴봤다.
"헉……!?"
비명이 터지려 하기에 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건물 바로 앞, 화단 건넛길에서 여학생이 공격당한다. 시뻘게진 교복을 입은, 창백한 낯빛의 남학생에게 잡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요네지마 양.
여학생이, 내가 혐오하는 인물임을 깨달았다.
이런 광경을 바란 적도 있었으리라. 혐오하는 모든 것이 붕괴하는 꿈. 나를 비웃는 이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망상──.
그럼 역시 이건 내 꿈인 걸까. 하지만 깨질 않는다. 몸은 아직도 아프다.
그리고…… 전혀 기쁘지 않다.
꿈이 이뤄졌는데도 전혀 가슴 벅차지 않다.
그저, 무섭고 무섭고 무섭고── 두려울 뿐.
남학생이 요네지마 양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안돼애애애애앳! 하지── 꺄아아아아아아악!!"
절규하는 그녀의 눈알이 바쁘게 구른다.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뛰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나는 아직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가 떨어졌을 때의 공포와 고통이 되살아난다.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보지마보지마보지말아주세요……!
그녀의 목에서 피가 힘차게 터져 나오더니 창문에 쏟아졌다.
붉게 문든 광경 저편에서 그녀는 눈을 휘꺼덕 까뒤집고── 움직임이 멎었다.
안심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무서운데, 더 이상 그녀가 비웃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남학생이 휘청대며 일어섰다. 어색한 움직임으로 나를 향해 온다.
얼굴은 긁힌 자국 투성이에, 뺨의 살점이 큼직하게 떨어져 나갔다. 백탁색 눈과 새파란 살갗은 시체 그 자체다.
그는 입가로 붉은 피를 흘리며 창문을 향해 다가왔다.
"힉──"
엉덩방아를 쿵 찧고, 그대로 뒤로 기었다.
싫어. 싫어싫어싫어──.
하지만 뒤에서 난 큰 소리에 나는 굳었다.
뒤를 보자 책상으로 막아둔 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복도에도 틀림없이── 움직이는 시체가 있다.
퍽── 피투성이 창문을 창백한 손이 두들긴다.
도망칠 곳이 없다. 심지어 다리도 풀려 일어날 수도 없다.
쨍그랑!!
두 번째 공격에 유리가 깨졌다. 파편을 맞으면서도, 남은 유리에 살점이 긁혀나가는데도 움직이는 시체는 교실로 밀고 들어온다.
뒤에는 아까 죽은 요네지마 양도 보인다── 경직된 표정 그대로, 마치 웃는 듯 한 표정으로 '죽었으면서 움직이는' 그녀를 본 나는 쉰 소리를 내뱉었다.
"아직도…… 절 비웃는 거군요."
분했다. 죽을 때까지 비웃음 당하는 나 자신이.
하지만, 손 쓸 도리가 없다.
그렇게 포기한 순간, 내 이해를 더 뛰어넘은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느낀 것은 눈부심.
왜 그런가 하고 눈길을 돌리자 가방에 메여있던 펭귄 스트랩이 눈부신 빛을 떨치고 있었다.
"어……?"
빛이 점점 커지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쿵…… 뭔가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머리 위로 자잘한 파편 같은 것이 후두둑 떨어졌다.
조심조심 눈을 떴다.


"하?"
눈앞에, 거/대/한/황/제/펭/귄/이/서/있/었/다.
황제 펭귄은 원래 큰 편이지만 내 앞에 선 것은 그 몇 배는 컸다. 머리가 1층 천장을 뚫고 나가서, 떨어지는 파편 사이로 검고 맑은 눈망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뭐람── 저,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요?
환각인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펭귄은 사라지지 않았다. 
"푸~"
약간 낮은 소리로 거대 펭귄이 울었다.
바로 옆엔 창문으로 들어온 움직이는 시체.
상황이 너무 정신 나가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뭐예요! 시체가 움직이고, 거대 펭귄이 나타나는데 역시 이건 꿈 아니예요!? 꿈이면 빨리 끝나주세요! 빨리 빨리 빨리──.
상황 그 자체에게 화를 내며 손등을 꼬집었다.
하지만 그저 아플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이 짓밟힌 몸은 아직도 욱신대며 아팠다.
고통으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엉망진창인 현실은 끝나지 않는다.
"푸~"
펭귄은 내게 말하듯 울더니 커다란 부리를 열었다. 그리곤 그대로 숙이며 내게 머리를 들이댄다.
"어? 어……?"
──뭘 하려는…….
큰 입이 머리 위로 다가오고, 나는 의아해했다.
가방 째로 온 몸이 펭귄의 부리에 끼었다.
"어어? 잠──"
잠깐만. 잠깐잠깐잠깐──!
몸이 힘차게 들린다. 목에선 으햐악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머리 한편에서 문득 펭귄이 생선을 집어삼키는 이미지가 스쳤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그만──"
펭귄은 나를 물고 위를 쳐다봤다. 그곳은 2층 교실. 나도 거꾸로 뒤집어진다.
"아."
아래엔 거대한 황제 펭귄의 검고 깊은 식도가──.
꿀꺽.

그렇게 저는 거대 펭귄에게 통째로 먹히고 말았습니다.


2

차닥, 차닥──.
움직이는 시체가 득실대는 도시를 거대한 황제 펭귄 한 마리가 걸어간다.
잘딱잘딱 짧은 걸음으로 천천히── 그러면서도 착실히 목적지라도 있는 양 거침없이 걸어간다.
그것은 너무나 비정상적인 광경.
하지만 생존자를 찾아 배회하는 시체들은 펭귄이 안 보이는 것처럼, 옆을 지나도 반응하지 않았다.
펭귄은 곳곳에서 차가 불타는 대로변을 지나 벚꽃이 핀 강변을 통해, 고급 주택이 늘어선 언덕길을 올라, 부지가 한 층 더 큰 낡은 저택 앞에 멈췄다.
주변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움직이는 시체가 없었다.
"푸~"
펭귄이 낮은 소리로 울었다.
그러자 닫혀 있던 철문이 저절로 끼이이익 열렸다.
펭귄은 차닥차닥 걸어 저택 부지에 들어갔다. 그러자 문은 또 저절로 움직이더니 철컹 소리를 내며 닫히곤 잠겼다.
현관 앞으로 온 황제펭귄은 위를 보고 목을 꿀렁대더니 배를 흔들었다.
그리고 힘차게 숙이더니── 입에서 한 소녀를 내뱉었다.


3

──저, 죽었었죠? 죽은 거죠?
어둡고 미적지근한 어둠 속에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죽었으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여긴 아마 거대 펭귄의 뱃속. 그런데 어째선지 숨이 쉬어지고, 오히려 편하기까지 하다.
아까부터 주기적으로 흔들린 데다, 나를 감싼 온기가 합쳐져 졸음을 불렀다.
"흐암……"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한 순간, 주변의 어둠이 요동쳤다.
"어?"
몸이 뒤집히는 감각.

철퍽!

어렸을 때 워터 슬라이더를 탄 기억이 스쳤다.
그 순간을 연상시키는 가속도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는 어둠 속에서 한 바퀴 돌았다.
엉덩이에 꿍 하는 충격.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빛.
갑자기 밝은 곳에 던져진 나는 눈이 부셔 인상을 썼다.
빛 속에 보이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음침한 저택. 혐오스러운 우리 집.
살아 있어? 저, 살아 있나요? 정말?
"푸~"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거대한 황제 펭귄이 서 있었다.
"히익──"
아까 '먹힌' 기억이 떠올라 나는 깜짝 움츠렸다.
그런 내 앞에서 황제 펭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단순한 수축이 아니다. 온 몸이 줄어듦과 동시에 성체成體가 '젊어'진다.
"뭐, 뭐에요……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 나는 읊조린다.
"쀼이쀼이!"
겨우 몇 초 만에 조그매진 아기 황제 펭귄은 커다랬을 때와는 다른, 높고 귀여운 소리로 울었다.
그걸 본 나는 황제 펭귄이 나타난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때…… 펭귄 스트랩이……"
설마 아빠에게 받은 스트랩에 달린 펭귄이 '이것'인 걸까.
"쀼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30센티쯤 되는 아기 펭귄이 긍정하듯 울었다.
날개를 파닥대더니 몸을 양 옆으로 흔드는 펭귄.
"……귀여워."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털과 짧은 날개, 맑고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힘껏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하지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뻗은 내 손을 피하듯 펭귄이 현관을 향해 차닥차닥 걸어갔다.
그러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현관이 저절로 열리더니 펭귄이 저택 안에 들어갔다.
"아…… 자, 잠깐만요!"
나도 퍼뜩 일어나 펭귄을 쫓아갔다.
오래된 저택이라 현관은 홀 형태고, 커다란 골동품 추시계가 지금도 추를 흔들며 시간을 알린다.
아기 펭귄은 그 추시계 앞에 탁 멈춰 섰다.
"저, 저기……"
떠듬떠듬 말을 걸었다.
그러자 펭귄은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짧은 부리로 추시계 받침 부분을 콕 쪼았다.
대앵─…….
그러자 정시도 아닌데 추시계가 울리더니── 추가 들어있는 자리 앞판이 벌컥 열렸다.
"쀼이쀼이!"
그 안을 가리키듯 펭귄이 울었다.
"……뭔가 있나요?"
펭귄에게 질문하는 나는 아직 제정신인가 생각하며, 몸을 굽혀 추시계 안을 들여다봤다.
"아."
흔들리는 추 너머에 막대기 같은 것이 걸려 있다. 그리고 바닥판 위엔 새하얀 봉투가 있었다.

그것은 아빠가 남긴 편지.
막대기로 보인 것은 예스러운 나무 지팡이.

'유키, 네가 이 편지를 읽었다는 건, 사방에 시인이 넘쳐나는 상황이겠지. 나는 그 때를 대비해 네게 '마술'을 남긴다.'

이 날, 세상은 멸망했고── 나는 진짜 마녀가 됐습니다.


4

"벌써 한 달인가요……"
강변길을 걸으며 마음을 담아 말했다.
시업식 다음 날, 이 도시는── 인간의 세계는 치명상을 입고, 조금씩 죽어갔다.
첫 날 밤엔 아직 TV가 나왔지만 모든 방송국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라고 적힌 화면만 표시됐다. 아빠 방에 있던 낡은 라디오를 처음 써 봤지만 잡음만이 들렸다. 인터넷이라면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집엔 컴퓨터가 없고, 스마트 폰이 있는 아빠가 없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이틀째에 가스가 안 나오는 걸 알았다. 사흘째 밤에 정전, 복구 안 됨.
이따금 멀리── 집 밖에서 뭔가가 충돌하는 소리나 자동차 엔진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나흘째엔 잠잠해졌다.
2주 후…… 집 밖에 나가보자 살아있는 인간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이제는 5월.
아름다운 핑크빛 꽃이 피었던 벚꽃도 푸르른 잎이 무성하다.
오늘은 아주 맑지만 6월이면 장마가 시작된다. 햇빛이 줄면 시인들은 낮에도 밖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멀리 가려면 지금…… 인걸까요."
그렇게 말하곤 왼손에 든 '전리품'── 빵빵하게 들어찬 비닐봉투를 내려다본다.
안에는 휴지나 비누, 샴푸 같은 소모품. 이것들은 평소에 가던 편의점에서 얻은 것이다.
편의점은 물자 보급 장소로서 꽤 편리하다. 밖에서 안이 어떤지 거의 다 보여서 시인을 먼저 처리하고 안을 안전하게 탐색할 수 있다.
음식은 없었지만 이만한 소모품을 얻었으니 성과는 충분하다. 이제 해가 지고, 도시의 '그림자'가 짙어지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위험한 지점은 이미 지났으니 앞으로는 비교적 편한 길이다. 강변길은 둑 위에 나 있어서 해가 잘 들기 때문에 낮에는 시인이 거의 다가오지 않는다. 만약 근처에 있어도 시야가 넓어서 바로 보인다.
하지만 나무 지팡이를 든 오른 손에는 자연스레 땀이 배인다.
──시인 대처법은 익숙해졌지만 역시 밖은 긴장됩니다…….
시인을 쓰러트림에 있어 이제는 거의 저항감이 없다. 저것은 모양만 사람인 무언가니까. 짐승조차 아닌, 생명 없는 것들이니까.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쉽게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움직이는 시체와 친지의 얼굴을 겹쳐 보며 공격을 망설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대다수의 인간은 원래 '적'이었다. 게다가 자기들이 악당이 되지 않게, 복수당하지 않게 비겁하게 공격하는 사람뿐이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훨씬 알기 좋다.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나도 주저 없이 반격할 수 있다.
머리를, 뇌를 파괴하면 '승리'할 수도 있다.
그저 '지지 않기'에 매달리던 지난달의 일상과는 천양지차다.
뭐 물론…… 공격당하는 건 무섭고, 가능하면 싸우고 싶지도 않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예전엔 그렇게 싫어하던, 기분 나쁜 우리 집이 그립다. 돌아가면 1주일은 틀어박혀서 뒹굴뒹굴 대고 싶다.
──지금 읽는 소설 뒷권도 궁금하고요…….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그림자는 확실하게 경계한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간 나도 허무하게 시인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외줄타기 하는 삶일지라도 전보다는 훨씬 편하다.
나를 비웃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정말이지 시원하다.

탕!!

그 때, 어디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 한 소리가 났다.
"!?"
숨을 들이켠 나는 걸음을 멈췄다.
"쀼이?"
어깨에 멘 가방이 흔들리더니 귀여운 아기 펭귄── 사역마 페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이 없고 차도 없는 도시는 보통 아주 조용하다. 시인들이 으으 소리를 내긴 해도 그건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만 낸다.
그러니 큰 소리는 꽤 먼 곳까지 퍼진다. 그것은 죽은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물질과 같다.
탕탕!!
또 들렸다. 이번엔 연속해서 났다.
"이건……"
나는 두리번댔다.
이 주변은 주택가라 건물이 적다. 둑 위에서라면 꽤 먼 곳까지 보인다.
죽은 도시는 평소와 같다. 하지만 하늘엔 날아다니는 새떼가 보인다.
다다다다다다다다다!!
이번엔 소리가 조금 변했다.
세계가 종말하기 전에, 치안이 나쁜 나라를 다룬 뉴스나 영화에서 곧잘 들은 소리.
강 하류 쪽 공원 주위에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총소리?"
직접 들은 건 처음이지만,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생각해왔다. 만약 이 나라에 아직 생존자가 있다면 아마 총기를 보유한 사람이리라고.
일본에서 평범하게 살아오던 사람들은 시인을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시인은 인간보다 힘이 아주 세니까. 다가오면 거의 끝이다. 시인을 쓰러트리려면 멀리서 머리를 파괴할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술로 파편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같은 '마녀'뿐이다.
누구든 쓸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생각나는 건 총 정도.
지금 이 도시에 온 누군가는 총기 같은 걸 소유했기 때문에 요 한 달을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경찰이나 자위대일까요? 아니면 혼란한 판국에 총을 얻은 사람일지도. 뭐 어느 쪽이건…….
"피하는 게 낫겠죠……?"
가방에서 고개를 내민 페라에게 혼잣말처럼 물었다.
"쀼이?"
하지만 아기 펭귄은 귀엽게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페라와 말이 안 통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아빠가 나를 위해 남겨준 사역마니까. 내 명령에 따라 주지만 내 뜻에 간섭하지 않는다.
맑고 검은 눈이 '직접 정하라구?'라는 듯 느껴진다.
"그치만…… 위험한 사람이면 어떡해요? 아니…… 보통 사람이라도 안 돼요. 제 존재를 알게 되면 분명 화 낼 거예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그럼에도 나는 페라에게 내 생각을 쏟아 부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이 도시에, 저만이 '안전지대'를 소유하고 있는데, 저는 아무도 구하지 않았어요. 무서워서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거나…… 그 때는 마술을 쓸 줄 몰랐다거나…… 그럴듯한 이유는 있지만── 실제로는, 저한테는 '구하고 싶은' 사람이 이 도시에 아무도 없었을 뿐이예요."
그래서 나설 수 없었다. 나서지 않았다.
'결계'가 쳐져서 안전한 저택을 나설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아빠를 욕하는 이웃들이 혐오스러웠으니까. 나를 비웃는 사람들이 미웠으니까.
"쀼이……"
내 참회를 얼마나 이해했을지, 페라는 조금 작은 울음소리로 맞장구 쳤다.
"그러니, 누가 됐건 절 혐오할거예요. 저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을 혐오할 거구요. 그런 제가 모르는 사람을 구하러 나설 이유가 있나요? 구한 사람이 욕을 하기라도 하면 제 손해가 아닐까요?"
페라의 눈에 비친 내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을 혐오……해도, 전/부는 아니지 않나요?
"……"
뇌리를 스치는 건 꿈만 같은 1주일.
중학교 때 유일하게 사귄 '친구'와의 즐거운 추억.
분명 전부는 아니었다. 내겐 아빠 말고도 싫지 않은 사람이 있다.
여기서 낯선 이방인을 무시하면, 이 단 하나뿐인 예외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일단, 보기만 하러 가 볼까요."
이건 대화가 아니라 결론.
"쀼이!"
페라는 힘차게 납득의 울음소리를 냈다.
장소는 아마 아까 새가 날아간 공원 근처.
다다다다다다다다──!!
울려 퍼지는 총소리는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5

강변길의 하류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 집은 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빙 돌아가는걸 넘어 완전한 탈선.
한참을 가자 나무에 둘러싸인 넓은 공원이 보였다.
총소리는 아직도 산발적으로 났다.
둑에서 쳐다보자 공원 주위에 수많은 시인이 모여 있었다.
──엄청난 수…… 총소리가 근처 시인을 불러 모은 거겠어요.
총이라면 시인을 없앨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 이상으로 시인을 모아서야 의미가 없다.
아마 총이 있는 경찰 같은 경우도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렸으리라.
"아──"
찾았다.
공원 중앙 근처 미끄럼틀 위에 자리 잡은 사람이 보였다.
그냥 우락부락한 남자를 상상했지만 그 사람은 여자 같았다. 게다가 입은 옷은 교복처럼 보인다.
그녀는 병사들이 멜 법한 큰 총을 벨트로 어깨에 걸치고, 두 손으로 잡은 권총을 주변 시인에게 조준했다.
탕! 탕!
건조한 총소리가 두 번 나더니 미끄럼틀을 기어오르려던 시인 둘이 균형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어쩐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시인이라면 이미 일상의 일부지만 '총을 쏘는 소녀'라는 장면은 더없이 비현실적이다.
언뜻 봤을 때 그녀는 총을 아주 잘 다뤘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시인의 습성을 잘 파악했다는 증거다. 시인은 움직임이 느리지만 특히 위아래로 움직일 때 이런 특징이 아주 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시인의 수는 계속 늘어나, 조만간 실패할 것이 뻔했다.
어째서 저런 상황이 됐는지 눈길을 돌려보다 공원 입구에 쓰러진 소형 바이크를 발견했다.
──분명 저 바이크가 고장 나던지 어쨌던지 해서 멈추고, 시인에 둘러싸인 거겠네요.
라고 냉정히 상황을 분석하는 나 자신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저…… 냉정한 사람이네요. 진짜 마녀처럼."
위험에 처한 소녀를 보고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내게 남이라는 것은 먼 존재였다.
하지만…… 딱히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안 든다. 그래서 '가능할 것 같으면 구하자'는 마음으로 구출 방법을 생각해본다.
시인이 저렇게 모여 있으면 파편으로 하나씩 머리를 깨 봤자 언 발에 오줌 누기. 돌파구를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지쳐버린다. 그러면──.
나는 옆에 흐르는 강을 쳐다봤다. 조잡하긴 해도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어떻게 해결될지도 몰라요."
전리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둑을 내려갔다. 그리고 강가에서 들고 있던 지팡이 끄트머리를 물에 참방 담갔다.
"떠 줘."
바라면서 속삭이자 내 열이 지팡이를 통해 물에 전해진다.
강을 흐르는 물과 내가 이어졌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수면이 크게 솟아오르고, 강의 일부가 구형 물덩이가 되어 떠올랐다.
일시적으로 강에 큰 구멍이 뚫리고, 강바닥이 들여다보였다.
남겨진 물고기들은 파닥파닥 뛰었지만 이내 주변의 물이 흘러들어 강의 빈 부분을 채웠다.
소용돌이치는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은 박리된 강 덩어리.
"영차……"
지팡이를 수직으로 들자 거대한 수구는 내 머리 위로 움직이더니 둥실대며 멈췄다.
조금 무리를 한 지라 몸이 무겁다. 하지만 저 소녀를 구하기 위해선 물이 이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수구를 띄운 상태로 영차영차 둑을 올랐다. 여기서 넘어지면 말 그대로 물거품이다. 어찌어찌 비닐봉지를 놔둔 곳까지 와서 둑 반대편── 공원의 상황을 확인했다.
소녀는 아직 미끄럼틀 위에서 닥쳐오는 시인들과 전투중이다.
──음, 저 '높이'라면 아마 괜찮겠죠.
지팡이를 앞으로 눕히자 내 머리 위에 떠 있던 수구도 약간 앞으로 움직였다.
그 상태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기 가만히 계세요!!"
총성이 멈춘 틈에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일이 거의 없던 지라 목이 아팠다.
소녀가 이 쪽을 쳐다봤다.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나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지팡이를 쥔 손에서 힘을 빼고── 마술을 유지하는 '이미지'를 무산시킨다.
커다란 물덩어리가 퍽 터진다.
해방된 물은 단박에 둑을 다고 내려가더니 공원으로 힘차게 흘러들었다.
물줄기에 먹히고 밀려가는 시인들.
하지만 미끄럼틀 위의 소녀는 격류에 쓸려가지 않는다.
물이 지나가자 그녀 주위의 시인은 소탕돼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임시방편. 시인을 쓰러트린 게 아니기 때문에 금세 다시 모인다.
"빨리요! 지금 이리로 오세요!"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치자 멍하니 있던 소녀는 정신을 차린 모양으로 미끄럼틀을 내려 나를 향해 달려왔다.
둑과 공원 사이에 있던 시인은 아까 터진 물줄기에 전부 떠내려갔다. 지금이라면 시인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다.
──이, 이제 어떡하죠…….
다만…… 나는 다가오는 소녀를 앞에 두고 긴장에 굳어졌다.
구하긴 했지만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예상도 안 된다.
마술을 쓰는 모습을 봤으니 적어도 마술에 관한 질문은 피할 수 없겠지.
"쀼이!"
페라가 경고성을 냈다.
내 존재를 알아챈 시인들이 나를 향해 움직인다.
그녀와는 더 이상 얽히지 말고 나도 도망쳐야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허둥지둥 비닐봉지를 주워들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한 순간──.

"유키!"
──엥?
이/름/을/불/린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뛰어서 둑을 올라오는 소녀는 헐떡대며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허억…… 허억…… 아── 역시 유키구나……"
벨트로 큰 총을 어깨에 걸치고, 오른 손에 권총을 든 교복 소녀.
그녀는 긴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며 희희 웃는다.
"야호…… 오랜만."
흙먼지에 지저분해도 저 얼굴을 착각할 리가 없다.
"호노카……"
나도 그녀의 이름을 내뱉는다.
사카키 호노카──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한 친구의 이름.
다시는 못 만나리라 생각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부터 포기했다. 그건 일주일짜리 행복한 꿈이었다고. 하지만──.
"다행이다…… 살아 있었구나. 근데 아까 그건 뭐야? 물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와── 그 펭귄 혹시 진짜야? 뭐야 너무 귀엽잖아!?"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호노카.
아무리 봐도 그녀는 꿈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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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이자 최초의 아이돌

쿠사노 겐겐 저

하야카와 쇼보


이것은 한 소녀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 주인공 후루츠키 미카는 가공의 캐릭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적힌 것은 모두 진실이다.

우주와 당신의 존재는 이 소설의 주인공 후루츠키 미카로부터 시작된 '아이돌'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당신은 이 소설을 정성껏 읽어야만 한다. 후루츠키 미카를 응원하고, 공감하고, 자기 동일시 하며 읽어야만 한다.

이 소설을 마지막까지 읽고 이해했다면 당신은 한 가지 사명이 부여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 전해지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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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확실히 잠이 들게 됐다.

수수를 쓰러트린 후로 사야의 밤엔 다시금 잠이 찾아들었다.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이 거짓말인 양 집이건 학교건 졸리면 쉽사리 잠에 빠진다.

오히려 너무 많이 잔다고 해도 될 정도다. 요 반 년간 필사적으로 졸음의 파도에 올라타려한 게 버릇이 됐는지 수업 중에도 잠깐 긴장을 풀면 쉽사리 잠에 빠진다. 그럼에도 잠 못 드는 채 몽롱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몸이 다시 잠에 익숙해질 때까지 1주일 정도 걸렸다. 늦은 진도를 따라잡기가 썩 어려울 줄 알았지만 양호 교사에게 이야기하자 담임과 하는 상담에 같이 가 줬다. 보충수업 안이 나오고 공부 계획이 정해지니 가족들에게 보일 면목이 서게 됐다.

"안색 많이 좋아졌네."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서려는 사야를 찬찬히 뜯어보던 언니 아야가 말했다.

"진짜?"

"다크서클이 연해졌어."

"그래도 아직 좀 남았어……"

"언니는 의외로 좋아해. 쇠약한 느낌이라."

"쇠약하단 말이야! 진짜로!"

삐친 사야를 보고 깔깔 웃은 언니는 거실에 돌아갔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는 학교건 집이건 가시방석 같았지만 냉정해지고 나니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잠만 제대로 자면 인생은 대충 잘 풀린다── 반 년간의 지옥을 헤쳐 나온 사야가 얻은 교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야의 마음 속에 초조함 같은 것이 점점 커져갔다. 갈증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처음엔 이해할 수 없던 감각이 평범하게 잠든다는 사실을 향한 불만이란 걸 알았을 때 사야는 경악했다.

혼자 잘 때보다 콘파루 히츠지와 동침하는 게 훨씬 깊고 편하고 기분 좋게 잠들었던 것이다.

수상쩍은 침구점 창고에서 다섯이 뒤엉켜 잤던 세 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저들과 자고 싶다. 슬립 워크 하고 싶다. 그 갈증을 자각한 순간 사야의 걸음은 자연스레 사카이모리 침구점으로 향했다. 지난 방문부터 약 2주가 지난 날이었다.


"어서 와요. 올 거라고 믿었어요."

침구점의 문을 두들긴 사야를 기다렸다는 듯 란이 맞았다.

"몸은 좀 어때요?"

"엄청 좋은데── 근데, 뭔가, 부족해서."

란은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럴 만도 해요."

"네……?"

"들어가서 얘기 하죠. 다들 모였어요."

줄선 침구와 높은 선반 사이를 지나 사야는 또다시 슬립 워커들의 침실에 들어섰다.

"어, 사야찌!"

제일 처음 본 카에데가 싱글벙글 손을 흔든다. 미도리와 히츠지도 소파에 앉아 사야를 돌아봤지만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란의 재촉에 같이 앉은 사야에게 미도리가 말한다.

"많이 참으셨네요. 역시 호카게 씨가 네버 슬리퍼라서 저희보다 더 잘 참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뜻이야?"

"한 번 슬립 워크 하면 중독돼요. 그냥 자는 것보다 훨씬 편히 잠드니까."

"뭣……"

넷의 안색을 살피지만 놀리는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그, 슬립 워크가…… 중독성이란 뜻?"

"뭐 대충 그런 셈이죠."

란이 툭 내뱉는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사야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다 짜고 나한테 사기 친 거야? 슬립 워크 중독으로 만들려고!? 어이가 없네 진짜──"

"어쩔 수 없어."

히츠지가 던진 말에 사야는 순간 조용해졌다.

"……어쩔 수 없다니, 뭐가."

"다 그렇게 돼. 나랑 동침한 사람은."

"다……"

사야는 다시금 테이블 둘레에 앉은 이들을 둘러본다. 란, 카에데, 미도리,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말없이 끄덕인다.

"그래도 있지 사야, 사기 치려고 한 건 아니었어. 왜냐하면── 먼저 내 침대에 들어온 게 너였으니까."

"뭐? 아니지, 내가 자려고 했는데 콘파루 씨가 멋대로"

"내가 자는데 사야는 멋대로 키스했었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

열이 뻗쳐 한숨을 쉬자 히츠지는 사야에게 손을 건넸다.

"……뭔데?"

"장황설은 됐어. 정말로 편안하게 자고 싶었던 거지? 지금도 그렇잖아?"

"그건."

"괜찮아── 이리 와."

그렇게 말한 히츠지는 눈을 감더니 후우 소리와 함께 힘을 뺐다.

사야의 시야가 어찔하며 흔들린다.

"아, 아."

소리가 멀어진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히츠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빨려들 듯 소파에 쓰러졌을 땐 이미 사야는 의식을 잃었다.




흔들리는 코끼리 위에 앉아 있자니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 떠올리기가 힘들어진다. 여자들이 앞길에 뿌린 금화와 꽃을 살포시 밟으며, 코끼리는 펼쳐진 논 위를 간다.

"속이다니 너무했잖아."

그렇게 비난했지만 날 무릎 위에 누인 히츠지는 기죽지 않고 쿡쿡 웃는다.

"속이지 않았어, 사랑하는 내 님."

"아무 말도 안 했어."

"안 물어봤는걸."

히츠지는 과일 쟁반에서 포도를 들어 무어라 더 항변하려는 내 입에 가져다 댄다. 매끄럽고 촉촉한 감촉이 입술을 따라 목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맛이 안 나."

"어머 아쉽게도."

백아白亞 궁전을 뒤로 한 우리 행렬은 밀림으로 나아간다. 오늘 밤 우리는 호랑이를 잡는 것이다. 목과 배에 흑단 갑옷을 두른 물소를 타고 호랑이 총을 짊어진 가신들이 행렬 선두를 차지한다. 저 멀리 눈을 뒤집어 쓴 산봉우리를 붉게 물들인 태양이 저물자 그 대신 횃불이 길 위의 금화를 반짝이게 했다.

느긋한 여행에 졸음이 몰려온다. 꾸벅꾸벅 졸기 직전에 짝 소리 나게 뺨을 맞았다.

눈을 뜨니 어느 샌가 란과 미도리를 태운 다른 코끼리가 옆에 와 있었다. 란이 든 작은 채찍 끄트머리로 때린 모양이다.

"아파. 왜 그랬어."

"자면 안 돼요 호카게 양."

"왜."

"슬립 워크 중에 잠들면 나이트 랜드가 집어삼켜요."

"집어삼키면?"

"나이트 랜드에서 잠든 슬립 워커는 두 번 다시 데이 랜드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조심하세요."

미도리가 무서운 소리를 별 것 아닌 양 던졌다.

"자세를 바로잡으세요. 오늘 잡을 호랑이는 강해요."

란이 말 한 호랑이가 수수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나도 이미 이해했다. 란은 총신을 세 개 엮은 장총을 들었는데 내 손에도 같은 무기가 있었다. 란과 나는 넉넉한 남장, 미도리와 히츠지는 얇은 천에 베일이라는, 무희 같은 옷이었다.

"카에데는 어디?"

"여깄어~"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여섯 팔에 제각기 언월도를 든, 온 몸이 새파란 여신상이 행렬 뒤에서 땅을 울리며 걸어오는 중이었다.

"세 보여."

"긋치~?"

밀림 안에 들어서자 횃불이 채 밝히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밤하늘의 별을 은사로 이은 거미집 같은 수수가 나타났다. 호랑이를 전혀 안 닮았지만 움직임은 어딘가 동물처럼 매끄러운 것이었다.

피에 굶주린 여신으로 변한 카에데가 돌진해서 수수와 부닥친다. 뒤를 이어 장총이 일제히 불을 뿜고 밀림을 붉게 물들여간다.




"……얼버무려도 안 넘어가!"

히츠지는 소파에서 눈을 뜨자마자 소리지르는 사야를 귀찮다는 표정으로 밀어냈다.

"모처럼 편히 자게 해 줬는데."

"고마워! 누가 재워 달랬어!"

히츠지를 향한 따스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사르르 사라진다. 열에 달떴을 때 꾸던 꿈은 열이 내렸을 때 기억 안 나는 것처럼. 깨 있을 때는 좋아하지도 뭣도 아닌 여자.

히츠지도 마찬가지로 삐친 듯 입을 삐죽 내민 사야에게서 멀어져갔다.

카에데와 미도리도 소파에서 일어났다. 란은 위아래로 휙 돌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본 잠버릇은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커피와 다과의 효과로 의식이 점차 명확해진다. 이번 과자는 부르봉에서 나온 루만도와 초코리에르였다.

검고 쓰고 뜨거운 액체를 들이키며 사야가 묻는다.

"우리, 이번엔 뭘 한 거야?"

"무슨 소리야?"

"저번에 나한테 기생한 수수를 쓰러트린 건 이해했어. 근데 이번엔? 그것도 누구한테 기생한 거야?"

"그렇죠. 나이트 랜드는 이어져 있으니까 어디 사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모르는 누군가가 불면증이나 악몽에서 풀려난다고 생각하면 조금쯤 기분 좋아지지 않나요?"

"수수가 그렇게 많은 거구나."

"몽마, 인큐버스, 서큐버스, 부쉬양스타(Būšyąstā), 샌드맨…… 꿈을 부르는 마물의 전승은 오래 전부터 전 세계에 존재했어요. 인간의 꿈에 기생하고 늘어나는 실체 없는 존재. 슬립 워커는 줄곧 이들과 싸워 왔어요. 저희 집안도, 사카이모리 양네 집안도."

점잖은 표정으로 말하는 란을 노려봐준 다음 사야가 말했다.

"속아서 중독된 게 진심으로 충격이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수면 중독 이예요. 처음으로 콘파루 양과 동침한 순간부터 호카게 양의 운명은 정해진 거예요."

한동안 말없이 생각한 후 사야는 마지못해 입을 연다.

"뭐…… 됐어, 어차피 잘 건데 못 자는 것보단 훨씬 나아."

란부터 시작해서 미도리, 카에데, 히츠지를 향해 눈길을 돌린 사야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같이 할 게……. 나 같은 사람 끼워넣었다가 무슨 일 생겨도 난 책임 못 진다."







루만도



초콜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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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2. 15. 01:22

07


일어난 넷을 따라 사야도 흠칫흠칫 일어났다.

카에데가 붙은 세 침대에 가면서 물었다.

"있지 리더 오늘도 이 침대 써?"

"사야찌가 있으니까 바꿔도 되지 않을까 해서."

"아…… 호카게 씨, 결벽증 같은 거 있나요? 없죠. 괜찮겠어요."

"왜 물어본 거예요. 말하기도 전에 정해버리는 건 좀 별론데요."

"콘파루 양을 끌어안고 잤으니 결벽증은 아니잖아요."

"으……윽……"

나도 모르게 도와달라는 듯이 히츠지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히츠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잘 생각해보면 당사자한테 도움을 청해봤자 말이 안 된다. 굳이 따지자면 상대가 피해자니까.

"저기, 호카게 씨는 어떤 침대를 좋아하고 그런 거 있나요?"

미도리가 묻는다.

"침대도 좋고 이불도 좋고. 베개 내용물이나 시트 재료같이 원하시는 침구를 가르쳐 주시면 어지간해선 준비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얘가 기재 담당 이랬었지──. 바뀐 화제에 내심 안심하며 사야는 고개를 틀었다.

"음~……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 불면증 때문에 침대도 바꾸고 해 봤는데 결국 전부 소용없었고."

"아 그렇군요. 그럼 지금 제일 좋아하는 침구는 히츠지 짱이겠네요."

"뭣……"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소리를 듣고 말을 잇지 못하는 사야에게 새 칫솔을 내밀며 미도리가 미소 지었다.

"자기 전에 양치하는 게 좋아요. 그건 드릴게요."

"싱크대 먼저 쓸게."

히츠지가 가방에서 꺼낸 양치 세트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칫솔을 든 채 잠시 굳어있던 사야였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란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 본격적으로 자는 거예요. 몇 시간쯤……"

"그러게, 일단 3시간 정도로 해 둘까. 개인차는 있지만 수면은 거의 90분을 주기로 얕아졌다 깊어졌다를 반복하니까 슬립 워크도 그 시간을 기준 잡으면 스무스해요."

시계를 본다. 4시 반. 3시간 후면 어두워져 있을 때다.

"집은 괜찮아? 자기 전에 연락하는 게 좋아."

카에데도 휴대폰으로 뭐라 타이핑하며 말했다. 사야도 조언에 따라 언니에게 늦어진다는 메시지를 보내두기로 했다.


받은 칫솔로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군 후에 침대로 갔다. 각자 웃옷을 벗고, 리본이나 타이를 끄르고, 옷깃과 소매 깃을 푼 후에 양말을 벗고 잘 준비를 한다. 제각각 옷을 넣을 바구니가 있어서 거기에 벗은 걸 넣는 듯하다.

"자, 이걸 쓰세요."

사야는 미도리에게 바구니를 받고 머뭇머뭇 웃옷을 벗었다. 미도리는 시트를 새로 갈고 침대 옆 테이블 자명종을 맞추는 등 바쁘게 움직인다. 위를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서큘레이터 각도를 조절하기에 따라서 위를 쳐다보니 높은 천장에 업소용 대형 에어컨이 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부는 바람이 직접 침대에 맞지 않게 조절하는 모양이다.

카에데가 제일 먼저 침대에 뛰어들었다.

"사야찌, 다 됐어~? 누워 누워."

"으, 응."

거리 파악을 못 하겠네! 처음 보는 사람이 같이 자자고 했을 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까. 그냥 같이 자는 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준비하다보니 점점 긴장이 고조된다.

"실례……합니다."

"들어와 들어와~"

머뭇머뭇 침대에 오른다. 시야가 낮아지자 침대 위는 썩 넓게 느껴졌다. 퀸 사이드 침대 세 개를 빈틈없이 붙인 위에 주문제작으로밖에 안 보일 드넓은 시트가 덮여 있다. 그 위에 크고 작은 베개가 여럿 굴러다니고, 가지각색의 담요니 여름 이불이 마구잡이로 놓여 있다.

"다섯 명이 자니까 더울 지도 모르겠지만 배엔 뭐 덮어두는 게 좋아. 꾸룩꾸룩 하게 되니까."

벌써 바로 누운 카에데가 말했다.

다음으로 란이 침대에 올라왔다. 위에는 민소매, 아래엔 숏팬츠로 깔끔한 복장이었다.

"갈아입었네요."

"교복에 주름지니까. 호카게 씨도 잠옷 가져와도 돼. 미도리한테 준비해달라고 해도 되고."

"아니 아직 같이 한다고 안 정했는데……"

사야가 우물우물 반론하고 있자니 히츠지가 옆에 힘차게 앉으며 침대를 흔들었다.

"아직도 반항하는구나, 사야."

그런 히츠지는 어느새 차이나 느낌 나는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미도리! 너도 빨리."

"아 네~"

취침 환경이 만족스러워졌는지 란의 부름에 미도리도 침대에 올라왔다. 다섯이 다 모여도 침대엔 여유 공간이 남아서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호카게 씨는 가운데로 가 줘."

란의 말에 사야가 당황한다.

"네? 저?"

"그럼 당연하지. 사야가 주인공인 파티잖아. 자 얼른."

히츠지도 재촉하기에 사야는 침대 한가운데로 밀렸다.

"어…… 어떡해요?"

"내키는 자세로 누워 주세요. 그냥 눕거나, 엎드리거나, 옆으로든 뭐든. 다키마쿠라 쓰세요?"

"아니, 필요 없어…… 아마."

위를 보고 누워서 큰 베개에 머리를 얹는다. 다른 넷도 사야를 둘러싸듯 제각기 다른 자세로 눕는다. 모두 머리를 사야 쪽에 향한 게 공통점이었다.

미도리가 손을 뻗어 리모컨을 누르자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좀 떨어진 커피 테이블 위의 작은 조명만이 부드러운 빛을 발한다.

히츠지가 곁에 있으니 금세 잠 들 줄 알았지만 썩 졸리지 않았다. 불을 끈 후에도 마음이 붕 떠서 잘 수가 없다── 꼭 수학여행 온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여자들만 모여서 잔다는 상황도 비슷하다.

"……저기"

사야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예전처럼 단숨에 잠들진 않네요."

"콘파루 양, 오늘은 천천히 가는 거야?"

란이 누운 채 묻자 히츠지가 답한다.

"모처럼 사야가 와 줬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그 뭐랄까 빨리 못 자서 안달하는 건 아깝잖아?"

"이런 식으로 같이 자는 건 처음인걸요."

"맞아 맞아."

"콘파루 양의 블랭킷 능력은 대단해요. 평소엔 억누르지만 하려고만 하면 끝없이 넓어지거든요."

"이래봬도 누르는 실력이 는 거야."

히츠지가 어쩐지 자랑스레 말한다. 란이 사야를 향해 미소 짓는다.

"걱정 말고 마음 편하게 가져. 곧 졸려 올 테니까 거기에 몸을 맡겨. 어려운 생각은 안 해도 돼. 평범하게 자면 돼……"

"평범하게 자는 방법은 이미 잊었는데요."

사야의 불평에 히츠지가 말한다.

"얘기하고 있어도 괜찮아. 무슨 수를 쓰든 내가 있으면 다들 확실하게 잠드니까."

"그러게요. 모처럼이니 궁금한 게 있으면 이번 기회에 물어보세요. 궁금한 것투성이잖아요."

란의 말에 사야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럼…… 이런 건 언제부터 시작한 거예요?"

"슬립 워커요? 같은 역할이었던 사람은 고대부터 있었다나봐요. 저희 집안에는 헤이안(서기 794~1185년; 역주)시대에 교토에서 베개맡의 주술 운운하는 문서가 전해져 와요."

"선배 가문에?"

"맞아요. 집이 신사거든요. 사카이모리 가와 오래 전부터 교류가 있었는데──"

"전 점장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제가 서둘러 침구점을 이어야 했거든요."

미도리가 이어가듯 말한다.

"란 짱은 슬립 워커의 지식을 물려받아서 둘이 시작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저랑 란 짱 밖에 없었어요."

"콘파루 씨랑 토키시마 씨는?"

"나랑 히츠지찌 둘 다 수수한테 당하게 생긴 걸 리더랑 미도리가 구해줬어. 그러니까 사야랑 같은 경위지."

"그렇구나……"

대화가 끊기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다시금 입을 열었을 때, 사야의 말투는 약간 흐리멍덩한 것이었다.

"왜 여자만 모였나 싶었거든요, 처음에."

"……네"

란의 맞장구도 간격이 조금 늘어진다.

"이렇게 같이 잔다고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싶지만 지금은"

"네에……"

"그래서 생각했어요. 여기엔 여자뿐이지만 슬립 워커가 달리 있으면, 그러면 거기서도 똑같이 여럿이 하면, 어딘가엔 남자만 모여 자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요."

"맞아! 그거."

카에데가 힘차게 외쳤다. 약간 발음이 뭉개졌지만.

"엄청 보고 싶어. 남자만 모인 슬립 워커. 뭣하면 내가 책 낼게. 동인지."

"봐 보고 싶어요, 그 책."

"어~ 그건 좀."

"그럼 왜 얘길 꺼냈어요……"

"그건, 그러니까, 왜……"

영양가 없는 이야기도 한 몫 해서 사야도 점점 멍해졌다. 의식이 머리 중심을 향해 떨어지는 듯한, 현기증과 비슷한 감각이 생겨난다. 그것을 느낀 듯 히츠지가 속삭인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 한 마디가 방아쇠가 된 건지 사야의 의식은 그 직후에 잠에 빠져들었다.




저 산 골짜기에 용 한마리가 사는 것을 마을 이들은 오랫동안 아무도 몰랐다. 어느 해질녘 약장수 하나가 서둘러 가려고 마른 계곡을 지나려했을 때 그곳에 커다란 도마뱀이 누운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약장수는 한껏 긴장했지만 용은 눈을 반쯤 뜨고 흥미 없는 듯 한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불꽃 숨결로 숯이 되지도, 긴 목을 뻗어 단숨에 삼키지도 않으리라 안심한 약장수는 흠칫대며 용에게 다가갔다. 용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당신은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시냐고 묻자 용이 대답한다. 이 계곡에서 백합꽃이 안 핀 지가 오래다. 너도 알겠지만 용은 꽃을 먹는 것이다. 나는 백합 꽃을 먹고 기천년을 살아왔지만 꽃이 피지 않는다면 방도가 없다. 이제 이 불모의 계곡에서 썩어갈 뿐이다.

허무하게 설명하는 용의 비늘은 아름다운 흰 색, 긴 꼬리와 날개 끄트머리는 연한 황록색. 눈은 짙은 노랑으로 빛난다. 저 모습을 본 약장수가 말했다. 자기를 한 번 돌아보라고. 계곡의 백합을 다 먹어치운 당신은 꽃 그 자체가 된 것이라고.

약장수가 내민 손거울을 들여다 본 용이 말했다. 과연 그랬군, 먹을 꽃이 없어질 만 하다. 내가 이미 백합이었구나. 하지만, 과연, 그러면 앞으로 어떡해야 하리오. 오랜 세월동안 백합 먹는 대룡大龍으로 살아왔기에 다른 삶을 모른다. 인간이여, 알고 있다면 가르쳐 주지 않겠는가. 그 말을 마칠 무렵에 용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마른 계곡이었던 곳은 눈길 닿는 곳 모두 백합 꽃밭이 돼 있었다. 이게 거기서 따 온 백합꽃이야. 나는 콘파루 히츠지에게 한 송이 백합을 내밀었다.

히츠지는 백합을 받아 들더니 눈을 감고 얼굴을 가져다 댔다.

"향이 좋네. 너무 진해서 머리가 어찔거려."

"괜찮은가? 내 사랑, 나를 안아주는 빛나는 양모야, 누워도 된단다. 풀이 요가 되어 우리를 부드러이 안아줄 테니. 꽃 먹는 도마뱀의 잠자리보다 좋은 침대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테니."

"내 소중한 사야, 정말로 대단해. 하지만 그건 다음에 해요."

"왜 그러니. 이 백합 계곡에 우리 둘 뿐인데 뭐가 부끄러울까."

"아, 사야, 그대, 들고 있는 거울을 보아요."

그 말에 나는 손거울을 들여다본다. 은색 표면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내 사랑아?"

"손 줘 봐 사야."

시키는 대로 내민 내 손 검지를 히츠지가 잡아 늘리자 손가락은 아무 저항 없이 늘어난다. 10센티, 20센티, 아픔도 위화감도 없이 늘어난다. 문득 깨달은 나는 외쳤다.

"앗!? 꿈이다!"




"헉."

사야는 너무 큰 충격에 눈을 떴다. 어두운 창고를 커피 테이블 위의 조명이 비추고, 침대 위엔 넷이 누워 있다. 고요한 숨소리 사중주에 사야의 거친 숨소리도 섞여든다.

쭈뼛쭈뼛 옆에 누운 히츠지에게 시선을 향한다.

히츠지는 자면서도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사야의 가슴팍에 얹는다.

"안 끝났잖아…… 도망가지 마……"

세상이 휘청 돌더니 사야는 다시금 잠 속에 끌려들어갔다.



나는 콜로세움의 메마른 모래에 뺨을 처박고 쓰러졌다. 추가 달린 전투용 그물이 발버둥 칠수록 엮여든다. 상대 검투사가 삼지창을 들자 객석이 와 끓어오른다.

마무리를 지으라고 외치는 관객들. 귀빈석의 황제가 손을 들자 소란은 썰물처럼 사라졌다. 몇 천 명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황제의 손이 엄지를 아래로 내리그이자 관중이 다시금 환성을 터트린다.

검투사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꼼짝도 못하는 내 곁에 오더니 삼지창을 내 등에 박아 넣었다.

아프진 않다. 숨 쉬기가 어려울 뿐.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은 충격과 안타까움에 눈물이 흐르려 하자 검투사가 말한다.

"어, 저기, 괜찮아? 사야찌."

"……어?"

고개를 들자 검투사 복장을 입은 카에데가 숙여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창에 찔린 줄 알았는데 온데간데 없다.

"토키시마……씨."

"맞아 사야찌. 겨우 잡았네. 이건 꿈이야. 이해 돼?"

"방금 알았, 는데, 숨을, 못 쉬겠."

"갑갑하대. 미도리~"

사이렌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투기장 모래 위로 구급차가 달려오더니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건 구급대원 옷을 입은 미도리였다. 모래에 무릎을 대고 나에게 말 한다.

"괜찮아요, 흔히 있는 일이예요. 데이랜드 쪽에서 배 위에 손 같은 걸 얹으면 살짝 갑갑한 느낌이 꿈속에서 증폭된 다음 심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거예요. 진정하고 천천히 심호흡을 해 주세요."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렇게요. 갑갑할 땐 당황하지 말고 숨 쉬는 데에 집중해 주세요."

"으, 응."

"꿈속에서 질식하지도 않고, 최악의 경우라도 그냥 깨고 끝이에요. …… 이제 괜찮아 보이네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어느 샌가 모래 위에 두 발로 서 있었다. 가득 찼던 관객석엔 아무도 없다. 남은 건 귀빈석의 황제뿐이다.

황제── 토가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히츠지가 살포시 모래 위로 내려섰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올려다본다.

"꿈이라고 가르쳐 줬는데 도망치는 건 너무하잖아."

"미안해. 너무 놀라서 그만."

뾰로통한 표정도 귀엽다고 생각하며 히츠지의 이마에 키스한다.

"엄멈머."

카에데가 눈을 크게 뜨곤 얼빠진 소리를 낸다.

"어, 어? 원래 그렇게 사이 좋으셨나요?"

깜짝 놀란 듯 묻는 미도리를 본 나와 히츠지가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터트린다.

"맞아. 왜 그런 걸까."

"그렇단 말이지. 왜 그러려나."

"아~, 그렇구나~"

카에데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다. 어쩐지 재밌어 보인다.

"사야, 자면서 꿈을 꾼다는 사실을 깨닫는 간단한 기술을 가르쳐 줄게. 레슨 1이야."

"응 가르쳐 줘. 히츠지 선생님."

"명석몽을 꾸는 유명한 방법이야. 자기 손을 보는 거지."

"손?"

나는 그 말대로 두 손을 펼쳐 내려다본다.

"일상에서 자기 손만큼 익숙한 건 거의 없지? 그런 것 치고는 모양이 굉장히 복잡해. 아마 손을 보면 적당하게 뇌에 부담이 걸린다고 보거든. 그 때 손가락을 잡아당기고 그러면 아무 저항 없이 변하니까 꿈을 꾼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어."

"진짜네!"

두 배로 길어진 검지에 깜짝 놀라 소리친다. 당기던 손을 놓자 청소기 전선을 정리하는 것처럼 슈룩 원상복귀 됐다.

"처음에 했던 것처럼 거울을 보는 것도 좋아. 꿈속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거울이 정상적으로 비치지 않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기억해 둘게."

"손을 갖고 노는 건 꿈속에서 변신하는 훈련 시작점으로도 좋다고 봐. 익숙해지면 이런 것도──"

그렇게 말 한 카에데는 힘차게 두 팔을 뻗었다. 순식간에 깃털이 자라나더니 대충 3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맹금류의 날개가 생겨난다. 지금 투기장 모래 위에 있는 건 사람 얼굴에 새 몸통이 달린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카에데는 날갯짓으로 모래를 흩날리며 떠올랐다. 구급차 지붕에 내려앉더니 비늘 달린 발톱이 차체에 손쉽게 구멍을 냈다. 괴물의 무게에 타이어 네 개 다 터지더니 차체가 가라앉는다.

"흐흥~ 어때?"

"엄청…… 예뻐."

"그치~"

내 감탄에 카에데는 새가슴을 으쓱댔다.

미도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카에데 양, 너무 우쭐거리지 마세요."

"안 그랬거든!"

"그건 그렇고…… 리더는 어딨어?"

히츠지가 주위를 두리번대며 돌아본다.

"여기 있어요."

의외로 가까이에 그 답이 있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란이 모래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후드가 달린 망토에 큰 활과 화살집을 멨다.

"이것 좀 보세요."

그렇게 가리킨 곳을 보자 모래 위에 작은 흔적이 수없이 남아있었다. 지네처럼 다리가 많이 달린 게 기어간 흔적으로 보였다.

"이게 뭐예요."

"호카게 씨에게 기생한 수수 발자국 이예요."

란이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서 끝장내려고 했는데 이상을 알아챘는지 도망친 모양이에요."

"도망친 거면 이제 수수한테 안 시달린다는 뜻?"

"그러면 좋겠지만 가만있으면 다시 와요."

시원스레 내뱉은 란의 말에 내 기쁨이 무로 돌아갔다.

"혹시 눈치를 챈 게 제가 꿈에서 나가서 그런 건가요."

"그것도 있겠지만 마음 쓰지 마세요. 수수는 원래 슬립 워커를 경계하니까요. 어찌 됐건 쫓아가면 끝이에요."

"맞아 맞아, 그러니까 빨리 가자!"

카에데가 재촉하듯 날갯짓한다.

"네. 호카게 씨, 이 투기장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풍경이예요. 마침 좋은 기회니 저 벽을 없애 보죠."

"어, 제가요?"

당황해서 되물었다. 주위를 빙 둘러싼 건 벽이라기 보단 거대한 건축물이다. 절구 모양 관객석은 언뜻 봐도 튼튼한 석조인지라 없애라고 해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레슨 2예요.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나이트 랜드의 모든 것은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해요. 부수자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부서져요. 지우개로 지우든, 폭탄으로 터트리든, 빔으로 녹이든. 상상하기 쉬운 방법이면 충분해요."

상상하기 쉬운 방법……. 투기장 가로 걸어가 벽을 만졌다. 거슬거슬하게 손바닥에 전해지는 돌의 감촉. 태양에 달궈졌을 텐데도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잡을 것 하나 없이 솟아오른 벽에 손가락으로 네모 모양을 그린다. 돌 위에 얇은 선이 새겨지기에 손톱을 끼워서 잡아당겨 봤다. 벽돌만 한 돌이 쑥 빠지곤 모래 위에 떨어진다.

그 순간 주위 벽이 지지대를 잃은 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붕괴는 쉼 없이 점점 더 힘차게 도미노처럼 넓어진다. 관객석에 귀빈석까지 10초도 안 돼서 모래 위에 흩어졌다.

덮쳐오는 엄청난 모래 먼지에 얼굴을 가리기 전에 세찬 바람이 뒤에서 불어왔다. 뒤를 보자 카에데가 모래먼지가 범접하지 못하게 큰 날개를 펼치고 날갯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너지는 돌들은 모래 속에 파묻히고, 어느 샌가 주위는 끝없는 사막으로 변했다.

"어때."

큰 일 해 낸 심정으로 묻자 히츠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없네~"

"에엑."

"얼마든지 더 호화로울 수 있었을 텐데."

"대단해보이면 장땡이 아니예요. 처음 한 것 치곤 잘 했다고 봐요."

미도리가 응원해줬지만 충격 탓에 감사인사도 못 했다.

"화려할 필요는 하나도 없지만 상상력의 폭을 일부러 넓혀두면 꿈속에서 자유도가 높아져요. 꿈이 단조로워지는 건 위험하다는 신호니까 대충이나마 기억해 두세요."

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진 않았지만 끄덕였다.

"어쨌건 이제 시야가 넓어졌어요. 수수를 쫓아갈 수 있겠네요."

란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발자국이 투기장이 있던 곳을 넘어 저 멀리 있는 모래 위에도 새겨져 있었다.

"그럼 가 볼까요. 이번엔 탈 것을 만들어 보죠. 호카게 씨, 한 번 해 보세요."

"만든다니…… 이번엔 어떡하면?"

"레슨 3이예요. 꿈속에선 뭐든 만들 수 있어요. 무기, 도구, 탈것까지. 당신의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 하엔 뭐든지. 아까랑 똑같아요."

"복잡한 건 어려운데, 복잡하다는 생각을 안 하면 의외로 쉬워."

카에데가 끼어들었다.

"무슨 뜻인데?"

"음~ 어, 예를 들어 총을 만들고 싶잖아? 그런데 총은 사실 구조가 꽤 복잡하거든.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어?"

"안 돼."

"그치. 그런 데에 걸리면 말짱 황이야.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오는 것쯤 된다고 대충 생각해보면 쉰게 만들 수 있어."

"그렇구나……?"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이동수단을 떠올리려 했다. 자동차…… 비행기…… 썰매……. 떠올랐다 사라지는 막연한 이미지 중에 하나를 잡아 디테일을 살리려 시도한다.

쿵쿵대며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리길래 고개를 들었다. 다섯 마리 말이 서 있었다.

"……나왔다."

카에데는 안심해서 혼잣말을 내뱉는 나를 재밌어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막인데 낙타가 아니네?"

"아, 그렇구나…… 그까진 생각 못 했어. 다시 해야 할까."

"이것도 좋잖아. 멋진걸."

이번엔 히츠지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래도 말발굽은 모래 위로 뛰기 힘들지 않아?"

"땅을 바꾸면 돼."

그러더니 히츠지는 쓰고 있던 월계관을 던졌다. 떨어진 데서부터 모래 위에 풀이 돋아난다. 순식간에 녹색 융단이 펼쳐지곤 모래를 덮어간다. 수수의 발자국이 있던 부분에는 색색깔 꽃이 피었다.

"이제 됐다. 가자!"

우리는 말 등에 올라탔다. 카에데도 변신을 풀고 인간이 되선 구급차 지붕에서 내려왔다. 말을 타 본 적도 없는데다 안장이니 등자니 하는 것도 없지만 꿈속이기에 아무 불편 없이 올라탈 수 있었다. 딱 한가지 문제만 빼고──.

"어? 어라~?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후후훗! 웃긴다!"

제각기 웃음소리가 터진다. 내가 만든 말에 타면 영문을 모르겠지만 뒤로 돌아 버린다. 즉, 진행 방향 반대인 꼬리 쪽을 보면서 말을 타게 되는 셈이다.

"사야, 너, 엄청 꼬였구나!"

신나서 말 한 히츠지가 자기 말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말이 단숨에 달려 나가고 누구 할 것 없어 환성이 터진다. 나도 고무감이 충동질하는 대로 웃었다.

맑던 하늘은 어느 샌가 푸름 얽힌 밤빛으로 변했다. 그래도 주위는 충분히 밝아서 잘 안보이고 그러진 않았다.

지평선에서 큰 달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운,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달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달밑에서 거꾸로 말을 탄 채 웃고 떠들며 달려간다.

몇 분인지, 며칠인지, 몇 달인지가 지나고 앞쪽에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목을 얽어 만든 철사 예술품처럼 생긴 그것은 여러 다리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우리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발자국에서 차례차례 꽃봉오리가 부풀고 꽃이 피어난다.

"저게 나한테 딸린 수수──?"

"그런가 보네요."

"좀, 크지 않아?"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수수의 크기가 점점 커져간다. 학교 건물만한 거대 조형물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풀밭 위를 맹진한다. 마침내 말이 따라잡은 후에 옆에 가니 크기 차이에 압도당할 것만 같다.

"사야! 겁먹지 마!"

히츠지가 발굽 소리에 지지 않는 소리로 외친다.

"네가 겁먹을수록 수수도 강해져!"

"아, 알겠어……"

말은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섭다.

"이걸 어떻게 쓰러트리…… 으악!?"

수수 옆에 달린 다리가 일제히 들리더니 주위를 쓸어냈다. 땅이 움푹 패고 말들이 차례대로 넘어진다.

공중에 뜬 내 몸을 뭔가가 잡았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다시금 괴물 인면조가 된 카에데가 나를 발톱으로 잡고 있었다.

카에데가 힘차게 날갯짓 하고, 땅이 쑥쑥 멀어진다. 수수 등 위에서 카에데가 발톱을 풀었다.

내려앉은 등판에는 긴 털이 돋아 있는 게, 거대한 장모종 강아지 같았다. 복사뼈까지 쑥쑥 빠진다. 밑에서 봤던 기계같은 느낌과는 달리 생물같은 게 의외였다.

카에데가 내 옆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었다.

"고, 고마워."

"오케오케"

"다른 애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미도리가 등에 올라탔다.

"굿 잡이었어요 카에데 양."

"긋치."

새처럼 끽끽 웃는 카에데 뒤에서 히츠지가 두둥실 떠오른다.

"아 사야, 무사했네."

"안 무사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히츠지는 안 도와줬잖아."

"사야는 그 정도에 안 당하잖아. 나, 아주 잘 아는 걸."

듣고 보면 맞는 말이다. 히츠지와 함께 있으면 뭐든 지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늘을 난다든가.

마음속에서 떠올린 순간 아무 전조 없이 발이 떠올랐다.

"악!"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제어에 실패하고, 위아래가 팩 돌았다. 위엔 수수의 등판, 밑에 하늘이 펼쳐진다. 다음 순간 나는 낙하하기 시작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히츠지와 애들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끝없이 이어진 푸르른 허공에 빨려드는 공포에 비명을 지르기 직전, 목덜미를 잡혔더니 낙하가 갑자기 멈췄다.

"소질이 있네요, 호카게 씨."

목을 뒤틀어 돌아보니 날 잡은 건 란이었다.

"레슨 4는 하늘을 나는 방법, 이었는데, 벌써 터득한 거예요?"

"모, 모르겠어. 갑자기 떠올라서."

"꿈속에서 나는 건 쉬워요. 특별하다는 생각 말고 평소에 걷고 말하는 것처럼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비결 이예요."

"당연히 토키시마 씨처럼 날개가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맞으면 날개든 뭐든 써도 돼요. 하지만 아무 것도 없이 날려고 해도 날 수 있어요. 방금처럼 당황해서 제어에 실패하면 움직임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가니까 최대한 빨리 익숙해져야겠죠."

어느 샌가 내 발은 다시금 땅을 향했다.

히츠지와 애들이 두둥실 떠올라선 나와 란 곁으로 모여든다.

모두 모이는 걸 기다렸다가 입을 연 란.

"자── 그럼 저 수수를 잡아 보죠."

란이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내 활에 메긴다. 끼릭댈만큼 당겼다 놓자 화살이 일직선으로 수수 등판 한중간에 꽂힌다.

수수가 포효한다. 전자악기 소리 비슷했지만 울음소리라고 본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카에데는 날개를 접고 급강하 한다. 발톱이 달린 네 다리가 떨어지는 힘을 담아 수수의 몸에 박히고, 찢어발긴다. 털이 흩어지더니 다리인지 골격인지 모를 게 쏟아진다.

히츠지가 두 주먹을 부딪히자 거친 쇳소리가 났다. 어느 샌가 황금 권갑이 손에 달려 있었다.

"먼저 갈게, 사야!"

히츠지는 그 말을 남기고 수수에게 날아갔다. 등짝에 내려앉더니 엄청난 기세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데이랜드와의 차이에 깜짝 놀랐다. 히츠지는 이렇게 화끈한 애였던 건가…….

다음엔 미도리 차례지 싶어서 눈치를 보니 미도리가 말한다.

"가요, 호카게 씨. 전 베드 메이커라서 기본적으로는 엄호 대기하거든요."

듣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란이 이번에는 활을 위로 겨누더니 수수가 아니라 진행방향에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레슨 5예요 호카게 씨. 어찌 됐건 상상력이 달하는 한, 무자비하게, 엉망진창으로 박살내 주세요."

박살낸다…… 박살낸다……?

난 낯선 쪽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무언가.

어찌어찌 나온 건 이상하게 생긴 성게라고 해야 할 지 가시 달린 별사탕이라 해야 할 지모를 것이었다.

"그게 뭔가요?"

미도리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뭘까……"

내 당황을 뒤로 한 별사탕이 수수를 향해 떨어진다. 어떻게 될지 지켜봤더니 수수 근처에서 모조리 폭발하길래 몸을 뒤로 제낀다. 잔뜩 달린 수수 다리 몇 개가 날아가더니 자세가 크게 흔들린다.

히츠지가 주먹을 치켜들고 항의하는 외침을 날린다.

"위험하게~!"

"미안!"

많이 다친 듯 보였지만 수수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반쯤 박살나고, 조각들을 흩뿌리면서도 한결같이 앞으로만 나아간다.

거기에 갑자기 큰 그림자가 생긴다.

위를 보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동시에 얇고 긴 게 보였다. 땅울림과 함께 박힌 그것은 나선을 그리며 솟구친 석탑이었다. 수수는 진로를 바꿀 틈도 없이 갑작스레 생겨난 첨탑에 부딪친다.

아래쪽에서 부러진 첨탑은 엄청난 양의 돌을 위에서 쏟아 붓는다. 수수의 다리가 하나하나 부서지고, 몸통에 모래 위에 쓰러진다.

다른 셋과 동시에 나도 서둘러 물러난다. 끝없이 쏟아지는 돌이 수수를 생매장한다.

이윽고 붕괴가 멈추자 조용해졌다. 수수를 깔아뭉갠 돌무더기 꼭대기에 란이 살며시 착지했다.

"후우. 다들 괜찮아?"

뜬 채로 다가간 나도 돌산 위에 내려앉는다.

"대단하다. 저 탑 아이조메 선배가 아까 쏜 화살이죠?"

"호카게 씨 흉내를 내 본 거야."

란의 말이 끝나자 카에데가 내려왔다.

"짭이네."

"그쯤 뭐 어때."

"상상력이 빈곤해서 좋을 거 없다고 그런 건 리더잖아."

미도리와 히츠지가 내려오니 다시금 다섯이 됐다.

"히츠지. 이제 나한테 붙었던 녀석은 퇴치했다고 봐도 돼?"

"아니. 수수 안에 핵같은 게 있는데 그걸 부숴야 해."

"핵?"

"봐 봐."

히츠지가 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돌산에 내리찍었다. 돌이 산산조각나자 밑에 깔린 수수가 드러난다. 그 순간 몸부림치려는 몸통에 히츠지의 손이 엄청난 속도로 박혔다.

팔꿈치까지 박혔다 빠진 손에는 연하늘색 계란 같은 게 들려 있었다.

수수의 몸에 부슬부슬 무너지기 시작했다. 겉이 차츰차츰 모래처럼 잘아지더니 땅과 분간이 힘들어진다.

히츠지가 주먹을 쥐었다. 작은 손 안에서 수수의 핵이 건조한 소리와 함께 깨졌다.

동시에 어디선가 종소리 같은 중저음이 퍼졌다.

이게 뭐야──? 내가 말했지만 점차 커지는 소리에 묻혔다. 이윽고 공기 자체가 드드득 떨리더니 지면의 모래가 끓어오르듯 솟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알람에 눈이 뜨였다. 사야를 둘러싼 넷도 꾸물꾸물 움직인다. 히츠지는 처음 누운 자리에서 180도 돌아서 오른다리를 사야 가슴 위에 척하니 얹어뒀다. 

이래서 갑갑했나──. 사야가 발목을 잡아 치우자 히츠지가 항의하듯 앓는 소리를 낸다.

"하~지~마~"

"내가 할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잠버릇이 별로였다. 개중에도 란은 온 몸을 뒤튼 데다 침대에서 떨어진 상태였다.

미도리가 침대 위를 기어가더니 알람시계를 껐다. 누웠을 땐 알람시계 제일 가까이 있었는데 자면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반대편에서 잔 모양이다.

"음~~~~, 잘 잤다!"

카에데는 기지개를 켜더니 벌떡 일어나 침대를 나섰다. 목을 뚝뚝 꺾으며 화장실에 걸어간다.

사야도 뒤따라 침대가로 기어가 다리를 내민다. 맨발에 닿는 바닥이 서늘하다. 일어서려다 휘청거렸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어두워진다.

"……어쿠쿠쿠"

"괜찮아요? 힘들었죠."

침대 가에서 안경을 끼던 미도리가 말했다.

"힘들었다기 보단…… 뭔가 어찔했어."

"저혈당이에요. 뇌가 엄청 열심히 활동해서 당분이 부족한 거거든요. 커피 끓일 테니까 단 것좀 먹고 잠깐 쉬죠."

곧 온 창고에 커피 향이 퍼지자 못 일어나던 히츠지나 란도 겨우 일어났다. 머리와 옷이 약간 흐트러진 다섯 명은 다시금 소파에 앉았다.

초콜릿과 함께 진한 커피를 받았다. 안 그래도 블랙커피를 못 마시는데다 카페인이 들어간 걸 한동안 피하던 사야였지만 입에 머금은 초콜릿이 뜨거운 커피에 녹아가는 감촉을 즐기고 있자니 지친 뇌에 당분이 들어차는 느낌이 났다.

"이제 호카게 씨도 슬립 워커네요."

란이 말했다.

"같이 한다고는 아직 한 마디도 안 했을 텐데요."

"다시 물어볼 필요도 없을 줄 알았는데. 한 잠 자고 깬 기분은 어떤가요?"

사야는 침묵했다. 기분은 좋았다── 요 반 년간 느껴본 적도 없는, 더없이 상쾌한 기상. 아니, 어쩌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잔 중에 가장 기분 좋게 깬 걸지도 모른다. 겨우 3시간 잤는데 8시간 꽉 채워 잔 듯 머릿속이 상쾌했다.

"분명 호카게 씨에게 쾌적한 수면을 약속한 기억이 나는데요."

"……기억나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하지만 이제 저한테 기생한 수수는 쓰러트린 거죠? 그럼 더 이상 제가 뭘 할 필요가──"

"당연히 강요할 생각은 아니예요. 앞으로는 평범하게 잘 수 있을 거예요. 혼자서도요."

사야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 란이 미소 짓는다.

"하지만, 오늘처럼 기분 좋은 잠은 같이 슬립 워크 하지 않으면 맛볼 수 없을 거예요."

"…………"

"모처럼 이렇게 만났으니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천천히 생각해 주세요."

사야는 말문이 막히고, 카에데가 말한다.

"이야~ 그건 그렇고 히츠지찌 사야찌가 그런 사이였을 줄이야."

미도리도 끄덕인다.

"그렇죠, 약간 놀랐어요."

"허?"

"허? 는 무슨. 완전 애인이더니. 자기 전엔 전혀 몰랐는데."

그 순간 사야의 뇌리에 꿈속에서 히츠지와 나눈 대화가 단숨에 떠오른다.

"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일어서는 사야. 자기도 모르게 히츠지를 쳐다본다. 히츠지는 말없이 사야를 마주보며 눈을 마주친 채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아, 아냐.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사야찌."

"그건 꿈! 꿈속에서만 그래!"

"뭐어? 키스 했었잖아."

"안 했…… 했지만 이마잖아! 무효지!"

"꿈속이니까 무효? 너무하지 않아요?"

누가 봐도 미도리의 말투는 놀리는 것이었지만 사야는 그걸 지적할 여유조차 없었다. 란은 싱글싱글 웃으며 듣기만 하고, 히츠지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긴 커녕 사야의 반응에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 난 몰라! 갈 거야!"

사야는 일어나서 가방을 들었다.

"마음이 정해지면 또 와 주세요."

미도리가 말 한다.

"사야는 어차피…… 올텐데."

히츠지는 말하면서 하품한다.

다 안다는 말투에 울컥한 사야는 침실을 뒤로하고 창고 출구를 향해 잰걸음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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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립 워커는 꿈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특수능력자예요."

홍차와 차과자가 다 돌아간 후에 란이 단언했다.

"모든 사람의 꿈은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곳을 한 세계로서 왕래할 수 있어요. 집합적 무의식 속을 돌아다닌다고 해도 되겠네요."

"집합적 무의식──"

사야도 어디서 들어봤다. 모든 인간은 무의식 하에 이어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의 신화나 상징에 공통분모가 있는 것이다, 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보통 사람은 꿈속에서 의지를 잃어요. 의식 수준이 올라왔을 때도 상황을 꿈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지 기억이나 감정에 지배당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죠. 하지만 이따금 꿈속에서 자아를 지키는 사람이 있어요."

"사야는 꿈속에서 자기가 꿈꾸고 있다는 걸 자각해본 적 없어?"

히츠지가 묻는다.

"있었……을걸. 바로 깼지만."

"자기가 꿈을 꾼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지한 상태로 수면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아요. 하지만 적절한 훈련만 하면 꿈속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차차 늘어나죠. 무제한적인 명석활동도 가능해져요."

란은 말을 이었다.

"이렇게 꿈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면 그곳엔 광대한 꿈의 세계가 펼쳐져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보리진*은 드림 타임이라고 불렀어요. 저희는 꿈 속 세계를 '나이트 랜드', 깨어 있는 세계를 '데이 랜드'라는 이름으로 구별해요."

"나이트 랜드 안에선 뭐든 할 수 있어~"

소파 위에 양반다리로 앉은 토키시마 카에데가 전병을 우득우득 먹으며 끼어들었다.

"명석몽이라는 말 알아? 꿈을 꾼다는 걸 안 사람은 꿈을 통제 할 수 있게 돼.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캐릭터를 나오게 하거나 자기를 변신시킬 수도 있어. 완전 자유. 엄청 재밌어."

"도를 지나치면 통제가 안 되기 때문에 명석을 잃을 때도 있지만요."

사카이모리 카에데가 홍차 컵을 후후 불며 말했다.

"기왕 뭐든 할 수 있으면 케이크건 뭐건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미각은 재현하기가 많이 힘들어요. 나이트 랜드에 갈 때마다 도전하는데 어쩐지 감촉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티슈를 먹는 느낌이라……"

"점장은 기합이 안 들어간 거야."

"안 그래요오. 있는 힘껏 시도해도 맛이 없는 게 너무너무 분한데……"

미도리가 카에데에게 불만스런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우리는 케이크 무한리필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게 아니예요. 슬립 워커에겐 다해야 할 사명이 있어요."

란이 말했다.

"그게, 수수를 쓰러트리는 거?"

사야의 물음에 란이 끄덕인다.

"맞아요. 나이트 랜드에는 수수──'샌드 비스트'로 알려진 존재가 도사리고 있어요."

"샌드 비스트? 모래…… 야수?"

"예전엔 샌드맨이라고 불렸어요. 독일 민담에 나오는 잠의 정령요. 사람 눈에 모래를 뿌려서 잠에 들게 하는……"

"스나카케바바*같단 말이지."

히츠지가 끼어들었다.

"스나카케바바는 그냥 모래만 뿌리는 걸 텐데……. 수수는 샌드맨이라고 부르기엔 그 행동에 지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샌드 비스트라고 부르게 된 모양이예요."

비스트──. 사야가 본 그것도 명백하게 인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야수와도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이름은 뭐든 상관없는데, 수수는 대체 뭐야?"

"인간에게 뿌리를 뻗고 잠을 침식하면서 나이트 랜드에 곰팡이처럼 퍼져가는 것이예요── 자율몽, 정신기생체라고도 부름직하죠."

"잠을 침식한다…… 내 불면증도 그건가."

"네. 당신은 아마 수수 알레르기가 있는 걸 거예요. 주위에 수수가 있으면 잠이 다가 올 수 없어서 불면에 시달리게 되는."

"고양이 알레르기인데 그걸 모르고 고양이를 키웠다─ 뭐 그런 거지."

카에데의 비유에 란이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고양이는 수수보다 훨씬 귀여워요."

"엥, 그 얘기?"

"뭐 상관없어요. 어쨌건 수수에게 기생당한 사람은 나이트 랜드에 정신이 묶이게 되고, 이윽고 자아가 없는 상태로 데이 랜드에 수수를 퍼트리는 보균자가 돼요. 내버려두면 수많은 사람에게 기생해서 나이트 랜드를 침식하기 때문에 조기에 감염을 막아야만 해요."

"나도 그 보균자가 되기 직전일까?"

사야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저었다.

"호카게 씨는 다른 루트를 향했다고 봐요. 수수 알레르기 때문에 나이트 랜드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수수에게 기생당한 채로 심신이 깎여선── 이르건 늦건 죽었을 거예요."

사야에게 있어선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대번에 납득이 갔다.

──'잠 못 자서 죽은 사람은 없다'는 개뿔. 거짓말쟁이! 진짜 죽잖아!

"저기, 괜찮으세요?"

사야의 안색이 심하게 파래졌는지 미도리가 걱정스레 살펴본다.

"어, 응…… 고마워."

"반년이나 버티다니 대단해! 나였으면 사흘 만에 죽었을거야."

"너무 빠르잖아. 최소한 1주일은 버티라고."

카에데가 히츠지에게 태클을 건다.

"힘들었죠, 호카게 씨.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당신 같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슬립 워커가 있는 거니까요!"

란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다.

"그러니까 다시 소개할게. 여기 있는 넷이 이 마을의 슬립 워커. 내가 리더인 아이조메 란."

란은 소파에 앉은 이들을 가리키며 순서대로 소개했다.

"콘파루 양은 '블랭킷'. 옆에서 자기만 하면 누구든 순식간에 재워버리는 취침사."

"취침사──?"

"내가 자면 주위 사람도 자 버려. 수업 중에 깜빡 잠들었다가 일어났더니 교실 애들이 전멸했을 때도 있었어."

"뭐어……? 선생님이 안 깨웠어?"

"선생님도 잠들었었어.."

그래서 교실이 아니라 양호실이나 옥상에서 잔 거구나──. 사야의 의문이 하나 풀렸다. 이해됨과 동시에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콘파루 씨랑 같이 있으면 잠드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누구든, 다 그래. 왜?"

"어……"

질문을 들은 사야는 혼란에 빠졌다.

──왜지. 아니, 왜 나만 그렇다고 생각했을까.

"사야만 잠드는 게 아니면, 안 돼?"

히츠지는 살피듯 사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냥."

당황한 사야에게 란은 소개를 이어갔다.

"토키시마 양은 '필로 파이터'. 나이트 랜드의 전투에 능한 슬립 워커예요."

"저, 전투?"

"맞아~. 수수는 꽤 공격적이거든. 방심하면 우리가 당해. 아무래도 난 남들보다 꿈을 조작해서 잘 싸우나봐. 사야찌한테도 가르쳐 줄게. "

카에데는 구김 없이 웃었다.

"미도리는 '베드 메이커'. 침구 쪽은 다 취급하는 기재 담당 이예요. 수면 환경을 조절하는 한 편 슬립 워크 중에도 우리 편의를 봐 주죠."

"저, 저기, 꿈속에서 뭔가 이상해지면 말 해 주세요. 어떻게 해 볼수 있을 거예요."

미도리는 소극적으로 말 한 다음 고개를 꼬빡 숙였다.

일제히 모이는 넷의 시선에 사야는 거북함을 느끼고 소파 위에서 몸을 틀었다.

"저기…… 이게 다야? 넷 뿐?"

"맞아. 네가 들어오면 다섯이 되지."

란이 테이블 너머에서 쭉 다가온다.

"어제도 말 했지만 네게는 '네버 슬리퍼'의 소질이 있어. 꿈속에 들어가도 꿈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잠을 잃은 자. '나이트키스트'── 수수에게 침식당한 희생자 중엔 이따금 그런 식으로 특수능력이 생겨나는 사람이 있거든."

"……나한테 뭘 시키게?"

기가 꺾인 사야에게 카에데가 태연히 말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일이야. 나이트랜드에 다이브 해서 인간에게 기생한 수수를 해치운다. 정의의 아군!"

그렇게 간단한 걸까……? 당황하는 사야를 향해 란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그럼 일단 같이 잘까요."

"뭐?"

"뭘 할래도 일단은 호카게 씨한테 기생한 수수를 없애야지."

"아니 그건 그런데, 같이 잔다니, 그게 무슨……?"

"말 안 했던가. 슬립 워커는 동침으로 꿈을 공유할 수 있어. 너도 이미 해 봤잖아?"






이하 주석


에보리진: Aborigine 유럽인의 이주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살았던 최초의 종족.


스나카케바바: 일본 괴담 속 요괴. 사람에게 모래를 뿌려(혹은 그런 소리를 내서) 겁을 먹게 하는 요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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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 26. 13:19

5


슬립 워커. 몽유병 환자, 수면보행증 환자.

수면중에 자리를 빠져나와서 무의식중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병── 수면장애중 하나다.

나중에 찾아봤을 때 그런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이조메 란이 입에 담았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단순한 환자 모임이 아닌 듯했다.

"우리 슬립 워커는 비밀리에 사람들의 잠을 지키는 활동을 해요. 일반적으론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람의 잠은 수수의 위협을 받고 있거든요."

"수수……"

"당신이 자면서 쓰러트린 거예요. 수면의 수에 짐승 수 자로 수수睡獸."

"저기 란. 그렇게 한 번에 설명하면 안될 것 같은데? 사야 짱 굳어버렸는데."

"어차피 쉽사리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 가랑비처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단숨에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좀 거칠지 않을까."

"난생 처음 보는 당신에게 갑자기 키스하는 사람인걸요."

"그건 그래."

"잠깐!"

항의하는 사야였지만 란은 들은 체도 안 하며 말을 이었다.

"슬립 워커는 수수를 퇴치하는 게 목적이지만 개중에도 사람마다 잘 맞는 역할이 있어요. 당신의 소질은 아마 네버 슬리퍼. 꿈의 영향과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는 불면자는 그 수가 적은데, 수수와 싸울 때 중요한 전력이 돼요. 그러니 호카게 씨── 도와주시지 않을래요?"

"가, 갑자기 그래도 말이지."

"네, 물론."

사야가 거부하리라 예상했던 양, 란은 성급하게 끄덕였다.

"믿어 달라기엔 힘들겠죠. 설득에 시간을 쏟을 생각은 없어요. 내키면 여기로 와 주세요."

그러면서 건넨 것은 두꺼운 포인트 카드였다. '사카이모리 침구점'이라는 가게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멍하니 카드를 쳐다보는 와중에 히츠지가 말했다.

"이제 일어나주지 않을래? 이불을 못 접겠어."

"어, 응……"

시킨 대로 일어서고, 다리가 아파 휘청대는 사야 앞에서 히츠지는 익숙한 솜씨로 이불을 개서 안아들었다.

란은 사야에게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 하룻밤 자고 생각해 보세요. 무사히 잠들 수 있다면, 말이지만."

협박 같은 말을 남기고 아이조메 란은 돌아 나선다.

"내일은 다들 여기 있거든. 안녕~"

히츠지도 란을 따라 나가고, 옥상에는 사야 혼자만이 남겨졌다.

"뭐냐고……"

미묘한 굴욕감을 느끼며 뻗대고 선 옥상에 종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 샌가 6교시가 끝나 있었다.

다음날 방과 후, 사야는 포인트 카드에 적힌 침구 점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어제는 결국 잠들 수 없었다. 분하게도 아이조메 란의 말 대로였다. 사야의 불면은 변함없었고, 히츠지 옆에서 맛본 깊은 잠은커녕 선잠까지도 갈 수 없었다.

도와주면, 편안한 잠을 자게 해줄 수 있다── 란이 한 말만 들으면 신빙성이 없었지만 히츠지가 함께 있다면 또 달랐다.

슬립 워커니 수수니 하는 수상한 이야기는 둘째 치고 저 감미로운 잠만큼은 진실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야는 적혀 있는 주소를 향해 간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 사카이모리 침구점은 실존하는 모양이었다. 미리 전화를 걸어봤지만 자동 응답은커녕 뚜르르 소리만 이어졌다. 주소만 믿고 지도 어플을 켠 채 걷다 보니 점차 인기척이 적은 구역에 들어섰다.

"진짜 여기 맞나……?"

태반이 문을 닫은 어두컴컴한 상점가를 지나자 창고만 늘어선 무미건조한 곳을 배경으로 이따금 커다란 트럭이 보도를 긁을 듯 달려간다. 흐린 날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점점 불안해진다.

──나 괜찮으려나. 별로 안 괜찮지. 아니, 어라? 어제 그 얘기 뭐지? 슬립 워커? 그런……설정인가?

롤플레잉 놀이를 하는 걸까…… 연극 같이? 그런 거면 알아서 했으면 좋겠는데, 난 별로 안 땡기고. 이 불면증을 어떻게 해결 안 하면 아무 것도 못 하고. 협력…… 협력이라면 뭘 해야 하는 걸까. 정말로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걸까. 그 선배, 아무 말이나 한 거였으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래도 키스한 건 큰일이지. 약점을 잡혔어…….

침울하게 생각에 빠져 걷던 사야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주위 건물과 썩 다를 것 없는 지붕이 검은 커다란 창고가 보였다. 지도에 나오는 목적지는 아무래도 여기인 모양이다. 출입구는 셔터가 닫혀 있었고, 건물 앞 주차장은 금 간 콘크리트 사이로 잡초가 자라 있었다. 셔터 옆에 작은 문이 있는데 '사카이모리 침구점'이라고 덤덤한 간판이 걸려 있다.

문에 다가가 안을 엿본다. 문에 유리창이 달려 있지만 안이 어두워서 잘 안 보였다.

인터폰도 없어서 한동안 고민한 다음 노크했다.

대답은 없었다. 안에서 누가 움직이는 기척도 없다.

시험 삼아 손잡이를 돌려보자──열려버렸다.

"실례합니다~……"

떠듬떠듬 말을 던지며 안에 들어간다.

"저기요오……?"

문 안쪽은 짧은 통로였다. 철제 록커와 말라죽은 화분, 먼지를 뒤집어 쓴 석유난로가 벽 쪽에 붙어 있다. 통로 왼편에 있는  미닫이 문은 출입구 쪽과 이어져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 불 켤 스위치가 없나 벽 쪽을 자세히 쳐다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야!"

생각지도 못한 부름에 펄쩍 뛴다. 뒤를 보자 문가에 콘파루 히츠지가 서 있었다. 사야의 얼굴을 보자마자 히츠지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우와, 얼굴이 왜 이래!"

"뭐어!?"

순수한 매도에 울컥하는 사야. 히츠지는 익숙하게 팔을 뻗어 통로의 불을 켠다.

조명 아래에서 가만히 사야를 들여다보곤 말한다.

"다크서클이 엄청난데. 잘 못 잤어?"

"어제 내 얘길 듣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계속 못 잤다니까!"

"나랑 잤을 때는 좀 더 깔끔했었잖아."

천연덕스럽게 말 한 히츠지는 사야보다 먼저 안에 들어간다. 둘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와 줘서 기뻐. 너 같은 아이를 합류시키고 싶어도 대부분 안 믿어주거든."

"딱히 믿은 게……"

히츠지가 어느 틈에 꺼낸 열쇠로 다른 입구를 열었다.

"도와줘. 이 문 무겁거든."

"어. 응."

시키는 대로 손을 뻗어 무거운 문을 둘이서 끌어당긴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히츠지는 시커먼 데로 들어가더니 또 불을 켰다.

높은 조명에 매달린 조명이 가까운 데서부터 순서대로 켜진다.

그곳은 그야말로 침구 시장, 아니면 테마파크 같았다. 거대한 창고에 일정 간격으로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인 침대나 이불, 해먹이 그득히 늘어서 있었다.

히츠지는 사야 앞에 서서 침구 사이를 걸어간다.

"어때? 이런 거 처음 보지."

어쩐지 자랑하듯 말하는 히츠지.

"아닌데."

"뭐? 어디서 봤어?"

"이케아* 침구 매장."

그 대답에 히츠지는 김이 빠졌다는 듯 입술을 빼쪽인다.

"사야는 귀엽지가 않아."

"미안하게 됐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침구에 사야도 엄청난 규모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그 끝까지 가자 눈앞에 매트리스나 이불 등이 포장 그대로 놓인 선반이 천장까지 벽처럼 쌓인 게 보였다.

미궁에 들어온 느낌을 받으며 선반 사이의 통로를 걸어가다 보니 갑자기 트인 공간이 나왔다. 사방이 거대한 선반에 둘러싸인 중앙에 침대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엔 독서 등이나 만화, 학교 교과서 등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소파 세트 테이블에는 과자 봉지와 머그컵. 한 구석에는 싱크대와 가스렌지, 그리고 냉장고와 식기 선반이 갖춰진 부분이 있었다.

"화장실은 저기야."

히츠지는 오른 편 선반 끄트머리를 가리킨 다음 커피 테이블 위의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소파에 가방을 던지고 싱크대에서 컵을 설거지한다.

"사야는 물 좀 끓여 줄래?"

"엥."

"다른 애들 올 때까지 차나 마시면서 기다리려고. 커피도 괜찮고."

"……알겠어."

가스레인지 위의 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을 켠다. 테이블 위의 바구니엔 찻잎 캔과 인스턴트커피가 모여 있었다.

"마시고 싶은 거 아무 거나 골라."

그 말을 듣고 카모마일을 골랐다. 잠이 잘 온다는 허브티다. 집에서는 아무리 마셔봤자 효과가 없었지만.

주전자에서 삐 소리가 나서* 티포트에 티백을 넣고 물을 붓는다. 히츠지는 나무로 만든 과자 쟁반에 전병을 올려 왔다.

"'미왕 쌀 과자*'?"

"달콤 짭짜름해서 어디든 잘 어울리거든."

차를 따르자 허브 향이 올라온다. 히츠지의 머그컵은 금색에 양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야의 컵은 손님용인지 깔끔한 흰색. 이건 정말 IKEA에서 싸게 파는 걸 본 것 같다.

소파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침묵에 버티지 못한 사야가 물었다.

"여긴 뭐야."

"우리 침실. 업무용으로도 쓰이고."

"업무면, 슬립 워커…… 랬었나."

"맞아. 돈을 받을 때도 있으니까 진짜 일이야."

그 말을 들은 사야는 놀랐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본다. 확실히 창고 건물을 비롯해서 롤플레잉이라기엔 너무 거창하다.

"그럼, 진짜구나. 그, 수수나, 그런 거."

"그럼."

"그, 그래."

"불안한 표정이야."

히츠지가 놀리듯 말했다. 순간적으로 받아칠까 싶었지만 상황을 받아들이질 못해서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고개를 숙인 사야를 향해 히츠지가 아까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갔다.

"다들 모이면 설명해 줄게. 걱정하지 마."

설탕옷이 얹힌 전병을 하릴없이 먹고 있자니 곧 창고 저 멀리에서 타박타박 걸음소리가 다가왔다.

곧 선반 미로 사이에서 소녀가 튀어나왔다. 안경을 끼고 얌전해 보이는, 사복을 입은 소녀였다.

"아~ 죄송해요 늦었……어, 아직 둘 뿐이네?"

"당황할 것 없어, 점장."

히츠지가 말했다.

"콘파루 씨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어? 이 분은?"

"아, 안녕하세요……"

"얜 사야 짱. 나이트키스트고, 신입 후보."

"아,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사카이모리 미도리라고 해요."

소녀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인다.

"미도리 짱은 있지, 이 침구점 후계자야. 그래서 점장."

──점장, 이라.

뒤따른 것은 뭔가가 콘크리트 위로 미끄러지는 좌악 소리였다.

미끄러져 들어온 건 포니테일 소녀였다. 사야나 히츠지와는 다른 고등학교 교복에 파카를 덧입었다. 발꿈치에 바퀴가 달린 힐리스*를 신었다는 사실에 사야는 조금 놀랐다. 초등학생 때 유행했던 걸 고등학생이 돼서도 신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안뇽~. 어, 신입?"

"응, 맞아. 사야, 얘는──"

"토키시마 카에뎀다. 안뇽안뇽."

자기소개 직후에 아이조메 란이 다른 통로 쪽에서 가만히 들어왔다.

"다 모였네요."

"와!"

사야를 포함한 넷이 흠칫거리는 걸 본 체 만 체, 란은 깔끔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을 둘러싼 이들의 분위기에 사야도 알아챘다. 이 팀의 보스는 란이다.





IKEA(이케아): 북유럽 조립식 가구 판매점. 뭔가 크고 뭔가 많다.


주전자에서 삐 소리가 나서: 안에서 물이 끓으면 삐 소리가 나는 주전자. 정식 명칭을 모른다.


미왕 쌀과자: 일본 전병 유키노야도(雪の宿)랑 똑같은 맛.


힐리스: 뒤꿈치에 바퀴 달린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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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 26. 13:19

4


오늘은 바람 한 점 없이 깔끔하게 갠 날씨다. 햇빛은 따스하고 또 보드랍다. 잠깐이라면 누워도 살이 안 타고 춥지도 않을 것이다. 즉 낮잠 자기 딱 좋은 날.

그렇게 축복받은 날씨에, 옥상 주변을 빙 둘러싼 철조망 곁에서 콘파루 히츠지가 자고 있었다.

얼굴이 그늘에, 다리가 햇빛을 받는 자리에 누워 있다. 밑에 깐 것은 얇은 이불. 머리를 얹은 베개에서 폭신폭신한 머리칼이 흘러넘친다.

"……찾았다."

혼잣말을 내뱉고 흠칫 해선 주위를 둘러본다. 수수는 그 흔적조차 없다. 대체 뭐였을지 신경은 쓰이지만 지금의 사야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옥상을 가로질러 자고 있는 콘파루 히츠지에게 다가간다. 자기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빨려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꼭 한 숨만 더 자라고 유혹하는 아침 이불 같은. 혹은 기분 좋게 폭신폭신한 비밀의 침대 같은. 더 이상 착각 따위가 아니다. 흡인력은 점차 강해진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생각의 흐름이 점점 끊기고, 저 옆에 눕고 싶다는 욕구만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아, 역시.

이거다. 난 여기에 당한 거다.

역시 이 녀석이어야만 한다. 이 녀석이라면 나를 잠에 데려가줄 수 있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잠이 다가온다. 지금의 사야가 무엇보다 원하는, 편안한 잠이──.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

깜짝 놀라 돌아보자 짧은 머리 학생이 서 있었다. 교복 가슴팍의 학년 배지 색깔이 3학년임을 가르쳐준다. 사야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연다.

"누구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사건에 사야는 굳어버렸다. 흐릿한 머리로 순간적인 임기응변은 불가능한 것이다.

저기, 그러니까, 따위의 뜻 없는 소리를 사야가 답답했는지 3학년이 성큼성큼 걸어오나 싶더니 사야와 콘파루 히츠지 사이를 막아섰다.

"나가 줘."

"어, 아니."

"지금 수업중이잖아. 빨리."

그건 그 쪽도 마찬가지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너무 졸려 반박하기조차 귀찮았다. 꼬여가는 혀를 채찍질해가며 사야가 말했다.

"찾고 있었어요…… 걔를."

"왜."

"그…… 쟤랑 같이, 자고 싶어서."

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몸이 휘청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뭐? 너── 잠깐."

3학년은 말리려고 한 모양이지만 사야는 거의 듣지 못했다. 누운 콘파루 히츠지는 그야말로 졸음의 블랙홀이었다. 두 발, 세 발, 거리를 좁히는 순간에 잠이 왈칵 덮쳐온다.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가 큰 아가리를 벌린 양, 수마가 사야를 단숨에 잡아채선 끌고 간다.

──역시, 이 녀석이었어……!

콘파루 히츠지 옆에 쓰러지는 사야의 머릿속에 떠오른 느낌은 정답에 도달한 만족감과도 비슷했다.

이불 구석에 무릎을 꿇고 눕기도 전에 사야의 의식은 이미 어둠에 빨려 들어갔다.




병원 복도는 너무 복잡했고, 벽 쪽에 늘어선 가죽 포장 벤치엔 많은 사람이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그 사이를 가르듯 나서지만 나를 보려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벽에 붙은 덕지덕지 붙은 전염병 예방 포스터엔 악몽에서 깨면 반드시 뜨거운 커피로 양치하라고 적혀 있었다. 커피 자판기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고, 아이들이 입을 헹군 커피를 옆에 붙은 세면대에 뱉어낸다.

진찰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 옷을 입은 애인이 고개를 내민다.

'다음 분' 애인이 그렇게 말 하곤 날 알아본다.

"어머, 늦게 왔네."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끌어안고 평소처럼 키스한다. 입을 뗀 애인이 꾸짖듯 말했다.

"커피 맛이 안 나는걸."

"태어나서 한 번도 마신 적이 없거든."

"그러면 위험해. 저기 좀 봐봐."

애인이 내 뒤를 가리킨다. 돌아보자 그렇게 많던 환자는 한 명도 없고, 다리가 수없이 달린 수수가 긴 복도에서 다가오는 중이었다.

"네 잠에 끌려 온 거야. 물러서 있어. 내가 해치울 테니까."

"괜찮아. 나도 저 정도는 해치울 수 있어."

덜걱덜걱 다리를 움직이며 들이닥치는 수수 앞에 노란 컬러콘을 놓아 길을 막는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자 뜨거운 커피가 나왔고, 나는 종이컵 째로 수수에게 던졌다. 수수는 흐물대며 녹아서 바닥에 펼쳐졌다.

"어때?"

의기양양하게 돌아보자 애인은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그만 넋을 일고 만다. 콘파루 히츠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 누구야?"




"뭐어!?"

충격과 함께 깨어난 사야가 가장 처음 본 것은 위에 올라타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콘파루 히츠지의 얼굴이었다.

꿈속에서 느껴졌던 사랑이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처럼 희미해진다. 콘파루 히츠지는 표정 변화 없이 사야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갸웃한다. 사야는 기가 죽으며 말문을 연다.

"아, 안녕."

"안~녕?"

그렇게 답하는 콘파루 히츠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도 안 되는 사야는 쩔쩔 맸다.

"저기…… 일어나도 될까요."

"안녕히이 주무셨어욧."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얘 뭐야 무서워. 옆에서 아까 본 3학년이 사야의 시야에 끼어든다.

"호카게 사야 씨."

"네, 넷!"

어떻게 내 이름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쳐다보는데 어느 틈엔가 3학년의 손에 사야의 학생수첩이 들려 있었다.

"2학년 C반 13번 호카게 씨. 왜 여기 왔는지 가르쳐줄 수 있을까."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도 허락을 구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돌려주세요, 수첩."

"똑바로 대답하면 돌려줄게. 심문하는 거야."

"심문이라니."

콘파루 히츠지가 몸을 쭉 내밀어 얼굴을 들이댔다.

"사야라고 하는구나. 어디서 봤었나?"

"저번에, 양호실에서……"

잠시간 눈을 굴리다가 손뼉을 짝 치는 콘파루 히츠지.

"아! 그 때 그!"

"마, 맞아."

"그 갑자기 키스한 얘야!"

갑작스런 돌직구를 맞은 사야는 변명할 말 한마디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앗 앗, 그건, 그러니까."

"키스……? 무슨 얘기야?"

3학년이 수상쩍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다.

"죄…… 죄송했습니다!!"

사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소리쳤다. 밑에 깔려 도망칠 수 없는 사야는 그 말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 많이 심한 불면증이었구나."

무릎을 꿇고 이유를 다 설명한 사야에게 3학년이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다라."

"네…… 어째선지 콘파루 씨가 곁에 있으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서."

"히츠지라고 불러. 나도 사야라고 부를게."

"앗, 그렇게 미국인처럼 거리를 좁힐 순 없는데."

약간 어이없어하는 사야를 향해 미소 지으며 히츠지는 말한다.

"키스했는데?"

"윽."

"미국인이라도 처음 본 사람한테는 키스 잘 안하죠."

"으윽."

"총 맞아도 할 말 없죠."

"재판 감이죠."

"그,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싱글싱글 웃는 히츠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사야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선수先手 콘파루, 동침."

히츠지가 갑자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응?"

"후수後手 호카게, 키스."

"큭."

히츠지는 장기 해설 흉내인지 뭔지 진지한 척 말을 잇는다.

"선수 콘파루, 낮잠. 후수 호카게, 요바이*."

"아, 아직 밤은 아닌데."

빈사 상태로 떠듬떠듬 반박 같지 않은 반박을 시도하는 사야를 보다 못했는지 3학년이 끼어들었다.

"콘파루 양, 그 쯤 해 두죠. 호카게 씨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꿈속에서 콘파루 양과 친했던 거죠?"

"아 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이해해요. 데이 랜드와 나이트 랜드 사이엔 그런 모순이 이따금 있으니까요."

"어……네?"

갑작스러운 뜻 모를 말에 당황한 사야에게, 이번엔 3학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것보다 몇 가지 자세히 물을 게 있어요. 호카게 씨,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요."

몸 상태는…… 좋았다. 아주 좋다. 잔 시간은 아주 잠깐일 텐데 머리속이 아주 맑다.

"굉장히 좋아요. 졸리지도 않고."

"불면은 얼마나 이어졌나요?"

"작년 가을부터 슬슬 시작하더니 완전히 못 자게 되고…… 그러니까, 이제 6개월쯤 지났으려나."

"6개월!"

"반년이나!? 우와, 그럼 힘들었겠다."

히츠지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렇게 불면상태가 이어지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사고 수준이 떨어졌을 텐데요. 그런데도 매일 학교에 왔었어요?"

"어찌어찌 걷고 말하기는 가능해서……. 수업은 못 따라가서 성적이 거의 바닥이었지만."

둘이 고개를 마주한다.

"얘, 네버 슬리퍼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콘파루 양, 실제로 동침을 했을 때 어땠어요?"

"완전하진 않지만 나이트 랜드에서 명석*활동 가능했던 것 같다. 수수를 쓰러트려서 깜짝 놀랐는걸."

"저기…… 무슨 얘기?"

둘은 사야에게 시선을 향한 다음 감정하듯 가만히 쳐다본다. 위축된 사야를 관찰하며 히츠지가 말했다.

"초대해 볼래?"

"괜찮겠어요? 콘파루 양 입장에서."

히츠지가 끄덕인다.

"알겠어요."

3학년은 이제껏 들고 있던 학생수첩을 사야에게 돌려주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아이조메 란. 콘파루 양과 마찬가지로 슬립 워커입니다."

"슬립…… 워커?"

아이조메 란이 당황하는 사야에게 말했다.

"당신에겐 소질이 있다고 봐요. 그것도 아마 희귀한 네버 슬리퍼의 재능이. 어때요, 저희를 도우면 편안한 잠을 제공해드릴 수 있을 텐데요."




이하 역주


요바이: 밤에 잠자리에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 성적 뉘앙스도 포함한다.


명석: 明晳. 판단력이 명확하다, 똑똑하다 등의 의미. 꿈속에서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아는 자각몽을 명석몽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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