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제 1장 위치 라이프 제 2장 유키와 호노카 제 3장 펭귄 비박 제 4장 종말의 마녀 종장
서장 세계가 멸망했습니다. 뭐 오늘도 변함없이 하늘은 푸르고, 귀엽게 생긴 구름이 떠다니고, 따스함과 서늘함이 섞인 5월 바람은 기분 좋고, 강변에 피는 들꽃은 예쁘지만. 하지만 역시 이 도시──내가 혐오하는 세계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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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햇살 아래 타박타박 차도 중간을 걷는다. 차는 없으니 문제없다. 도로엔 까맣게 탄 오토바이나 연쇄 충돌 탓에 박살난 승용차만 방치된 상태. 평일 대낮부터 교복을 입고 차도를 활보하는 여고생에게 잔소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고생의 패션에서 탈선한 '예스러운 나무 지팡이'를 든 내게 호기심 담긴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없다. 이 도시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 하나. 죽은 인간이라면 수없이 많다. 그것도 아주 우글우글. 지금도 도로변──빌딩 그림자 속에 득실득실. 흔들흔들, 휘청휘청. 허술한 발걸음으로 배회하는 시인(屍人)들. 다들 옷은 넝마짝. 창백한 피부가 얼룩지듯 벗겨져 검붉은 살점과 하얀 뼈가 드러난 상태다. ──아무리 봐도, 역겹습니다. 움직이는 시체란 건. 햇빛을 싫어하는 저들은 낮이면 저렇게 그늘진 곳을 서성인다. 다만, 싫어할 뿐이지 딱히 약점은 아니다. 먹잇감이 보이면 양지로도 나온다. 지금도 한 마리씩 슬금슬금 나를 향해──. "쀼이쀼이!" 그 때 어깨에 걸친 학교 가방에서 북슬북슬한 회색 조류──아기 펭귄이 고개를 빼고 높은 소리로 우짖는다. "페라, 조용히 하세요. 알고 있으니까." 꽈악. 나는 '사역마'를 억지로 가방 속에 들여보낸 다음 손에 들고 있던 긴 나무 지팡이를 반 바퀴 빙그르 돌렸다. 빨간 돌이 박힌 지팡이 끝을 발밑에 굴러다니던 파편에 콕 찍었다. 그리고 염원하며 속삭였다. "움직여줘." 왈칵 하고 몸에서 힘이──체온이 빨리는 감각. 지팡이를 통해 내 '열'이 전해지자 무게가 10킬로는 됨직한 파편이 두둥실 떠올랐다.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 파편을 내 머리위에서 돌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붕붕대며 퍼지는 와중에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늘에서 나온 시인들 탓에 앞뒤 할 것 없이 막혔다. 바람에 섞여 생물이 썩어가는 냄새가 퍼져온다. 나는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옆으로 휘둘렀다. 부앙! 원심력이 더해진 파편이 지팡이의 움직임을 따라──난다. 콰앙! 파편이 직격한 시인의 머리가 비산했다. 나는 그대로 몸까지 돌려 날아다니는 파편으로 다른 시인까지 떨쳐낸다. 퍼퍼퍽 철퍽 와장창 쿵쾅──! 연이어서 터지는 소리. 흩날리는 검붉은 혈액. 누르스름한 뇌수. 파편은 기세를 살려 하늘로. ──마지막 하나.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시인을 향해 파편을 힘차게 떨어트렸다. 우직! 머리가 정수리부터 박살나고 몸엔 파편이 박힌 시인이 무릎부터 바닥에 기우뚱 너부러진다. 머리를 잃은 다른 시인들도 실이 끊긴 듯이 털썩털썩 쓰러졌다. 시인은 머리──뇌를 파괴당하면 움직일 수 없다. 단순한 시체가 된다. ──그럼 이 틈에. 나는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여기서 나가면 주위에 높은 건물은 없다. 정오인 지금 시인이 밀집할 그늘은 적다. 머릿속으로 비교적 안전할 루트를 그리며 나는 죽은 도시를 거닌다. 이 멸망한 세계에 내가 아직 살아있을 수 있는 건 시인들을 물리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얼마 전까진 나 자신도 몰랐지만…… 난 보통 인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쀼이?" 다시 가방에서 고개를 내민 아기 펭귄형 사역마──페라에게 나는 웃어 보인다. "이제 괜찮아요. 얼른 볼일만 보고 저택으로 돌아가요." 이번엔 페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쁜지 미소 짓는 페라를 보자 내 표정도 풀린다.
이 도시에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인 나는── 마녀. 오늘도 그럭저럭, 재밌게 삽니다.
제 1장 위치 라이프
4월 7일 화요일. 자 오늘부터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고등학생의 삶이 시작됩니다. 중학교 때보다 불쾌한 나날이 되겠습니다. 아침에 출발하며 본 일기예보를 패러디해서 나──미나토 유키는 인생예보를 가슴속에서 말해본다. 하나도 재미없다. 웃어넘길 수도 없다. 4월 하늘은 이렇게 푸르고 벚꽃은 아름다운데 심경은 전혀 밝아지지 않는다. 아빠, 전 언제까지 참으면 되나요? 다른 학군 학교에 입학하는 걸 완강히 거부한 아버지──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무뚝뚝한 표정을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물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 아빠에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약한 부분을 보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빠랑은 5년 넘게 불화상태니까. 입학 때문에 얘기한 게 오랜만에 나눈 대화다. '……아빠, 나 가능하면…… 요코하마 …… 기숙 사립 고등학교──' '안 돼. 이 집을 떠나선 안 된다.' 대화라고 해봤자 이게 전부다. 이유를 말할 틈도 없었다. 이유를 물을 틈도 없었다. 결론이 나온 이상 무슨 말을 더 해봤자 비참해질 뿐이다. 아빠에게 동정당하는 건 싫다. 아빠 앞에서 센 척 하는 게 내게 남은 유일한 자존심. 그래서 그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역시 후회된다. 다른 학생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지각 직전에 등교했지만── 교문을 지나, 건물에 들어서고, 교실과 가까워질수록 다리가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오늘은 시업식. 하지만 지난 입학식 때 내가 앞으로 누구와 고등학교 생활을 보낼지는 이미 알았다. 초, 중학교 때와 거의 똑같은 면면. 나를 비웃어온 사람들. 변한 건 없다. 모든 게 그대로 최악──. "……정말, 발전이 없네요." 교실 앞에 도착한 나는 복도에 떡하니 놓인 책상과 의자를 보고 작게 투덜댔다. 책상에 이름이 적히진 않았다. 하지만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 교실에 들어가 보면 분명 내 책상만 없을 것이다. 문이 닫힌 교실에선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틀림없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며 들떠있을 것이다. ──책상에 낙서라도 해주면 알기 쉬울 텐데. 저들은 증거를 남기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도저히 성장이라곤 하지 않는 얼간이들인데, 이런 부분에서만 영리해지는 것이다. 드라마나 만화처럼 알기 쉬운 왕따는 '여기'에 없다. 왜냐하면 왕따는 나쁜 짓이니까. 누구든 자기가 악당이 되긴 싫은 법이니까──. 모두들 '일반인'인 채로 나를 비웃는다. ──……정말, 최악입니다. 딩-동-댕-동. 책상 앞에 서 있자니 종이 쳤다. "왜, 무슨 일 있냐?" 뒤에서 말을 걸기에 돌아보자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 선생님이 서 있었다. ──분명 담임선생님……. "저, 이게── 아마 제 책상 같은데요……" 용기를 낸 나는 아주 자그마한 기대를 담아 책상을 가리켰다. 이제 전해졌을 것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어른이니까,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 빨리 안에 들여놔. 벌써 종 쳤다." 그는 모르는 척, 귀찮은 표정으로 말한다. 그저 책상과 의자가 교실 밖에 나온 것뿐이다. 구체적인 악의의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선생님도 '저쪽'에 가담한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는 셈이니까……. ──역시, 똑같다. 내 일상은 변함없다. 대단한 희망을 품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낙담한 나는 뒤로 돌아 걸어 나간다. 교실에서 멀어진다. "어, 야! 어디 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조퇴할게요." 온갖 것을 '진지하게' 대하는 게 갑자기 멍청하게 느껴진 나는 대충 변명했다. 선생님은 쫓아오지 않았다. 뭐라 말을 더 하지도 않았다. 내 변명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게 덜 귀찮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면 그런 대로 나한테도 편하다. 오늘은 시업식이랑 HR뿐이라 성적에 영향은 없다.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일부러 웃음거리가 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는 합리적으로 선택했다고 내게 핑계를 댔다. 하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얼굴이, 눈가가 뜨거워진다. ──왜 나는,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까요. 나는 '강한'선택을 한 걸 텐데…… 가슴 속에 점점 후회가 들어찬다. 어떻게 변명한들 내 자신에게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허세를 부리고, 달관한 척을 해도, 나는 안다. 내가──도망쳤다는 사실을. 도망치는 건 나쁜 짓이 아니라고, 부드럽고 달디단 말을 흔히 듣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도망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도망치면 '패배'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혐오하는 것들에게 지기 싫었다. 하지만──. 시야가 울렁이고, 뜨거운 물방울이 뺨에 흐른다. ──분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우는 모습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고개를 처박고 걷다, 걷다, 걷다보니── 어느새 우리 집 앞이었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서양식 저택. 훌륭한 석조 건물이지만, 담쟁이덩굴이 벽을 뒤덮고, 금간 창문은 안에서 나무 판자로 막아── 밖에서는 어떻게 봐도 귀신의 집이다. 이런 집에 사는 탓에 초등학교 때부터 내 별명은 '마녀'였다. 게다가 아빠는 '마술사'를 자칭하며 오컬트쪽 의뢰를 비싼 값에 해결하는, 수상한 직업의 소유자다. 근처 어른들은 아빠를 사기꾼이라 불렀다. 학교에서는 나를 마녀라며 놀렸다. 놀림 받고, 괴롭힘 당하는 매일. 나는 아빠에게 이상한 일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포기했고, 아빠와의 대화도 멈췄다. 그러고부터 한동안 나는 아빠와 달리 '정상'이라고, 마녀 같은 게 아니라고 열심히 어필 해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를 '비웃고 싶은'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유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 연장선상에 현재가 존재한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진 않게, 버텨내는 매일. 중학교 2학년 2학기──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 아이'와 즐겁게 보내기도 했다. '유키~! 또 보자~!'
뇌리를 스치는 건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소녀와…… 작별 인사. 그녀와 보낸 시간은 꿈처럼 스쳐갔고, 빛을 잃은 매일이 다시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오늘, 나는 마침내 도망쳤다. 절대 지기 싫은 것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면 아빠한테 더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전부 솔직히 얘기하자. 더는 싸울 수 없다고. 이제는 무리라고, 다 말해버리자. 그렇게 결심하고 집에 들어갔지만, 눈에 띈 것은 거실 테이블 위의 쪽지. "……일 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란 말이죠." 이 얼마나 최악의 타이밍인가. 늘 아귀가 맞질 않는다며 한숨을 쉬고, 쪽지 옆에 놓인 것을 쳐다본다. 그것은 '입학 선물'이라고 적힌 선물 봉투. 내용물은 돈이 아닌지, 부자연스럽게 빵빵했다. "오늘은 입학식이 아니라 시업식이지만요." 쓴웃음과 함께 선물봉투를 들고 뒤집었다. 손바닥에 톡 떨어진 것은 작은 아기펭귄 인형이 달린 스트랩. "──와, 귀엽다." 회색 털이 몽실몽실하게 귀여운 아기 펭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왔다. "펭귄…… 인가요." 휴대전화도 안 사주면서 스트랩이라니──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근질대는 감정이 솟구친다. ──펭귄이 좋다고 했던 건 유치원 때잖아요. 아직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 온 가족이 함께 간 수족관에서 본 황제 펭귄. 그게 너무 맘에 들어서 한 때는 펭귄 그림이 있는 것만 사 달라 했었다. 아빠에게 있어서 나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받아 드릴 테니까…… 돌아오시면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나는 어디 멀리 있을 아버지에게 말하고, 휴대폰이 없는지라 학교 가방에 펭귄 스트랩을 달았다.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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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수요일. 나는 결국 오늘도 학교에 간다. 이미 도망친 탓에 어제보다 발걸음이 무겁다. 하지만 아직 어떻게든 싸워야 할 이유가 있다. 난 가방에 달아놓은 펭귄 스트랩을 살며시 잡았다. 이건 '입학 축하'선물로 받은 스트랩. 그러니까 이 펭귄과 함께 하루쯤은 학교에 가야지만 아빠의 선물을 제대로 받은 실감이 날 것 같아서다. 등굣길은 평소와 똑같다. 강변길에 핀 벚꽃이 아침 해에 반짝인다. ──하지만 아마도, 그 때 이미 시작됐던 것 같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나는 게 들렸지만 어디서 사고가 났나보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다행히 교실 밖에 내 책상과 의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게 '다행'인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눈에 안 띄게, 최대한 조용히 교실 문을 연다. 어제처럼 웃음소리가 나질 않고 웅성임의 파도만이 나를 둘러쌌다. 교실엔 벌써 학생들 태반이 있었지만 저들은 패거리별로 모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거 실화냐……?" "주작 빳다죠 쉬바." "동영상이 있는데──" 한 마디씩 들려오는 말소리. 혼자 자리에 앉은 학생들도 휴대폰 화면을 집어삼킬 듯 쳐다본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걸까요. 하지만 휴대폰도, 친구도 없는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등교 전에 늘 보는 아침 방송은 특별한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창가에 모인 여자들 중 하나가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앗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저 애는 내가 혐오하는 것 중 하나. 초등학교 때부터 곧잘 같은 반에 배정되는 요네지마 양.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를 비웃는 사람. 비웃을 이유가 없으면 만드는 사람. 아마 어제 책상을 꺼낸 것도 요네지마 양이 한 짓. "──아, 미나토 양도 우리 반이었구나~ 어제 없어서 몰랐네~" 입가에 역겨운 미소를 띄우며 부자연스럽게 말한다. "…………" 나는 말없이 눈을 돌리고 복도 맨 뒤쪽 자리에 앉았다. 표정과 말, 모든 것이 비웃을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진저리가 날 만큼 잘 안다. "에~!? 무시해~!? 너무해앵~ 그러다 친구 없는 찐따 고딩되면 어떡해?" 큰 소리로 피해자 흉내를 내는 그녀였지만, 근처에 있던 애가 휴대폰을 보며 "와 미쳤네!? 이거좀 봐!"라고 하자 "뭔데 뭔데~?" 라며 그리로 갔다. 역시 무슨 큰 사건이 난 모양이다. 앞으로도 매일 나 같은 건 잊어버릴 만한 사건이 일어나면 좋을 텐데. 이뤄질리 없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이 좀 지나 수업 종이 치고, 담임선생님이 왔다. 나를 슬쩍 보더니 바로 눈길을 돌렸다. 반응은 이게 끝. "자 다들 앉아~" 시치미를 떼는 표정으로 잘난 척 명령하는 선생. 소란이 사라지고, 아침 HR이 시작됐다. 출석 확인과 전달사항 몇 가지를 말하고는 더 이상 나를 보려고도 않고 교실을 나섰다. 이 다음은 1교시인 수학. 교실 구석에 앉은 내겐 교실 분위기가 잘 보인다. 많은 애들이 수업을 듣는 척 휴대폰을 만진다. "어이, 수업 중에──" 그걸 깨달은 선생이 주의를 주려고 한 순간──. 콰앙!! 굉음이 나기에 나는 깜짝 놀라 쪼그라들었다. ──깜짝…… 놀랐어요. 뭐지……? 심장이 쿵쾅대는 걸 느끼며 소리가 난 창문 쪽을 쳐다봤다. 우리 교실은 1층에 있고, 창밖으로는 교문과 이어진 길, 그리고 운동장이 보인다. 언뜻 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쳐다보고 깨달았다. 꽉 닫힌 철제 교문 옆에서 연기가 난다. 자세히 보니 교문 옆에 기울어진 자동차가 조금 보였다. "사고……?" 누가 그렇게 내뱉자 침묵이 깨지고, 소란이 커졌다. "조용히들 해! 일어서지 말고!" 수학 선생이 일어나려는 학생들을 막고 창가로 간다. 조금만 늦었다면 다들 창가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앉은 채 목을 빼서 창문 너머를 쳐다보고, 옆자리와 소곤소곤 떠들었다. 잠시 후에 교문으로 선생 두 명이 달리듯 다가간다. 트레이닝복을 입었으니 체육 선생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교문이 아니라 옆의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 무슨 '목소리'같은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라 단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의 나열이었기 때문이다. 교실의 소란이 커진다. 창밖으로 상태를 보던 수학선생의 안색이 변했다. 그 때 출입문에서 트레이닝복을 입은 선생이 혼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트레이닝복의 한쪽이 빨간색으로 물든 상태였다. 소란이 사그라진다. 교실이 적막에 휩싸인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를 못 한 것이다. 나도 모른다. 그러니 입을 열 수가 없다. 또 한 명, 이번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 선생이 교문으로 달려간다. "어, 담임 쌤이다……" 학생 중 누군가가 내뱉었다. 분명 그는 아까 HR때 봤던 담임선생. 뒷모습이지만 착각할 거리는 아니다. 그는 휘청대는 트레이닝 복 선생에게 달려가 부축하려 했지만……. "────!!" 또 그 소리다. 나는 안다. 아까 들은 것은…… 남자가 지른 비명이라는 것을. 담임선생이 절규한다. 트레이닝 복 선생에게 잡히고, 그대로 바닥에 깔려 버둥버둥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직후에 담임선생의 목 근처에서 빨간 체액이 안개처럼 솟아올랐다. 두쿵, 두쿵, 두쿵──. 심장 소리가 시끄럽다. 손이 떨려 들고 있던 샤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휘청, 어색한 움직임으로 빨간색 범벅이 된 트레이닝복 선생이 일어섰다. 잠시 후에 쓰러져있던 담임선생도 비칠대며 일어선다. 무사해서 다행이다──라 할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멀리서도 확연히 창백한 안색이라 도무지 무사해보이진…… 살/아/있/다/곤/볼/수/없/었/으/니/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교실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마 다른 교실에서도 일제히. 다들 동시에 지른 비명과 일어나는 소리가 합쳐져 학교가 흔들렸다. 다른 반 학생들이 복도를 달려가는 걸 보고 몇 명이 따라서 교실을 뛰쳐나갔다. 이번엔 수학 선생의 제지도 효과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태반의 학생은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교문 옆 출입문에서 온 몸에 피범벅을 한──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걸 본 순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내 자리는 복도쪽 맨 뒷자리. 정확히 문 옆. 난생 처음 보는 필사적인 표정을 지은 요네지마 양이 멍하니 서있던 나를 짜증에 가득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꺼져!" 힘에 나가떨어진다. 다리가 접질린 나는 넘어졌다. 무릎과 팔꿈치가 아프더니, 그 직후에── 등을 밟혀서 숨이 턱 막혔다. 수많은 신발이 나를 차고, 짓밟는다. 피하려는 사람은 없다. 비상사태니까, 나니까 상관없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리라. 변명을 할 수 있다면, 올바르게 보일 이유만 있다면 이 사람들은 더없이 끔찍한 짓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아파, 아파, 아파──제발 그만해. 몸을 옹송그리고 폭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린다. 짓밟는 발이 사라지고, 사위가 고요해져도 통증 탓에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서, 이대로 있다간 위험하다는 위기감이 몸을 움직였다. "으윽……" 팔다리와 배에서 느껴지는 둔통을 참으며 나는 책상에 매달려 일어선다. 아무 소리가 안 나서 알곤 있었지만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수학 선생도 애들을 따라 나선 모양이다. 두쿵, 두쿵──. 심장은 아직 크게 뛴다. 창문을 보자 '움직이는 시체'는 건물 코앞까지 몰려온 상태였다. 저건 뭐야? 누구? 현실인가? 꿈이 아니라면 잘못된 거야. 하지만 아파. 온 몸이 너무 아프다. 등이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팔이 아프다. 무서워. 무서워무서워무서워. 아파무서워괴로워──. 아, 또 누군가 잡혔다. 교복을 안 입었으니 아마…… 선생. 왜 막아주지 않는 걸까. 선생인데. 어른인데. 저 사람들은 언제든지 날 구해주지 않는다. 물렸다── 피다. 피, 피, 피── 정말로 붉은──. "아…… 아……" 말이 잘 안 나온다. 떨리는 손길로 가방에 교과서를 허겁지겁 채워넣는다. ──나, 뭐 하는 거지…… 왜 돌아갈 준비를…… 맞아요, 돌아가야…… 빨리 도망쳐야……. 돌아가자, 돌아가자돌아가자돌아가자── 도망쳐야해도망쳐야해도망쳐야해──! 제대로 생각을 못 하는 상태로 묵직해진 가방을 걸쳤다. 아기 펭귄 스트랩이 살짝 흔들렸다. ──돌아가……도망쳐? 아니 어디서? 교문엔 저 사람들이……. 교실을 나서려던 순간 걸음이 멎었다.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갈 수 없어? 그럼 어떻게어떻게어떻게──. 밖은 위험해. 1층도 위험해. 이제 곧 저게 들어와. 도망쳐야해── 그럼 위? 빨리 도망쳐야해── 하지만 아마 다른 애들도──. 밖이 안 된다면 일단 위로. 안 된다면 더 먼 건물로── 어찌 됐건 여기 머무르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하지만…… 도망친 곳엔 분명 '모두'가 있다. 요네지마 양이 있다. 날 계속 비웃고, 무시하고, 짓밟아온 사람들이 있다──. 무섭다. 저 움직이는 시체만큼, 나를 비웃는 학생들이. 그래서 움직일 수 없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복도에서 난 소리에 몸을 깜짝 움츠렸다. 가깝다── 움직이는 시체는 이미 건물 안에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 오지 마! "윽……" 나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교실 문은 안쪽에서 잠글 수 없다. 대신 책상을 문 앞으로 옮기고 2층으로 쌓아 쉽사리 못 들어오게 만들었다. 목덜미를 살며시 스쳐간 바람에 창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사적으로 창문을 죄다 닫고, 잠가 두었다. "헉…… 헉…… 헉……" 왜…… 왜 이런 일이──. 거칠고 빠르게 헐떡대며, 나는 교실 창가 제일 뒤쪽에 주저앉았다. 안고 있던 가방에 고개를 처박고 두 손으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달리 지금 가능한 행동이 떠오르질 않았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멀리서 비명이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꿈이라면 당장 깼으면 좋겠다. 깨라 깨라, 깨 줘──. 제아무리 빌어도 깨어나질 않는다. 애원하다 지친 나머지, 나는 아마 이대로 죽을 거라고 머리 한구석에서 생각했다. 하지만── 꽉 눌린 귀가 아파져도, 끝은 찾아오지 않는다. 귀가 너무 아파서 힘을 살짝 뺐다. "────!!" 각오는 했지만 비명이 갑작스레 손가락 틈새로 쏟아져서, 더 쪼그렸다. 가깝다── 아마, 창밖이다. 들린 이상 무서워도 확인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창 밑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살펴봤다. "헉……!?" 비명이 터지려 하기에 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건물 바로 앞, 화단 건넛길에서 여학생이 공격당한다. 시뻘게진 교복을 입은, 창백한 낯빛의 남학생에게 잡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요네지마 양. 여학생이, 내가 혐오하는 인물임을 깨달았다. 이런 광경을 바란 적도 있었으리라. 혐오하는 모든 것이 붕괴하는 꿈. 나를 비웃는 이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망상──. 그럼 역시 이건 내 꿈인 걸까. 하지만 깨질 않는다. 몸은 아직도 아프다. 그리고…… 전혀 기쁘지 않다. 꿈이 이뤄졌는데도 전혀 가슴 벅차지 않다. 그저, 무섭고 무섭고 무섭고── 두려울 뿐. 남학생이 요네지마 양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안돼애애애애앳! 하지── 꺄아아아아아아악!!" 절규하는 그녀의 눈알이 바쁘게 구른다.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뛰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나는 아직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가 떨어졌을 때의 공포와 고통이 되살아난다.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보지마보지마보지말아주세요……! 그녀의 목에서 피가 힘차게 터져 나오더니 창문에 쏟아졌다. 붉게 문든 광경 저편에서 그녀는 눈을 휘꺼덕 까뒤집고── 움직임이 멎었다. 안심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무서운데, 더 이상 그녀가 비웃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남학생이 휘청대며 일어섰다. 어색한 움직임으로 나를 향해 온다. 얼굴은 긁힌 자국 투성이에, 뺨의 살점이 큼직하게 떨어져 나갔다. 백탁색 눈과 새파란 살갗은 시체 그 자체다. 그는 입가로 붉은 피를 흘리며 창문을 향해 다가왔다. "힉──" 엉덩방아를 쿵 찧고, 그대로 뒤로 기었다. 싫어. 싫어싫어싫어──. 하지만 뒤에서 난 큰 소리에 나는 굳었다. 뒤를 보자 책상으로 막아둔 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복도에도 틀림없이── 움직이는 시체가 있다. 퍽── 피투성이 창문을 창백한 손이 두들긴다. 도망칠 곳이 없다. 심지어 다리도 풀려 일어날 수도 없다. 쨍그랑!! 두 번째 공격에 유리가 깨졌다. 파편을 맞으면서도, 남은 유리에 살점이 긁혀나가는데도 움직이는 시체는 교실로 밀고 들어온다. 뒤에는 아까 죽은 요네지마 양도 보인다── 경직된 표정 그대로, 마치 웃는 듯 한 표정으로 '죽었으면서 움직이는' 그녀를 본 나는 쉰 소리를 내뱉었다. "아직도…… 절 비웃는 거군요." 분했다. 죽을 때까지 비웃음 당하는 나 자신이. 하지만, 손 쓸 도리가 없다. 그렇게 포기한 순간, 내 이해를 더 뛰어넘은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느낀 것은 눈부심. 왜 그런가 하고 눈길을 돌리자 가방에 메여있던 펭귄 스트랩이 눈부신 빛을 떨치고 있었다. "어……?" 빛이 점점 커지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쿵…… 뭔가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머리 위로 자잘한 파편 같은 것이 후두둑 떨어졌다. 조심조심 눈을 떴다.
"하?" 눈앞에, 거/대/한/황/제/펭/귄/이/서/있/었/다. 황제 펭귄은 원래 큰 편이지만 내 앞에 선 것은 그 몇 배는 컸다. 머리가 1층 천장을 뚫고 나가서, 떨어지는 파편 사이로 검고 맑은 눈망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뭐람── 저,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요? 환각인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펭귄은 사라지지 않았다. "푸~" 약간 낮은 소리로 거대 펭귄이 울었다. 바로 옆엔 창문으로 들어온 움직이는 시체. 상황이 너무 정신 나가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뭐예요! 시체가 움직이고, 거대 펭귄이 나타나는데 역시 이건 꿈 아니예요!? 꿈이면 빨리 끝나주세요! 빨리 빨리 빨리──. 상황 그 자체에게 화를 내며 손등을 꼬집었다. 하지만 그저 아플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이 짓밟힌 몸은 아직도 욱신대며 아팠다. 고통으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엉망진창인 현실은 끝나지 않는다. "푸~" 펭귄은 내게 말하듯 울더니 커다란 부리를 열었다. 그리곤 그대로 숙이며 내게 머리를 들이댄다. "어? 어……?" ──뭘 하려는……. 큰 입이 머리 위로 다가오고, 나는 의아해했다. 가방 째로 온 몸이 펭귄의 부리에 끼었다. "어어? 잠──" 잠깐만. 잠깐잠깐잠깐──! 몸이 힘차게 들린다. 목에선 으햐악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머리 한편에서 문득 펭귄이 생선을 집어삼키는 이미지가 스쳤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그만──" 펭귄은 나를 물고 위를 쳐다봤다. 그곳은 2층 교실. 나도 거꾸로 뒤집어진다. "아." 아래엔 거대한 황제 펭귄의 검고 깊은 식도가──. 꿀꺽.
그렇게 저는 거대 펭귄에게 통째로 먹히고 말았습니다.
2
차닥, 차닥──. 움직이는 시체가 득실대는 도시를 거대한 황제 펭귄 한 마리가 걸어간다. 잘딱잘딱 짧은 걸음으로 천천히── 그러면서도 착실히 목적지라도 있는 양 거침없이 걸어간다. 그것은 너무나 비정상적인 광경. 하지만 생존자를 찾아 배회하는 시체들은 펭귄이 안 보이는 것처럼, 옆을 지나도 반응하지 않았다. 펭귄은 곳곳에서 차가 불타는 대로변을 지나 벚꽃이 핀 강변을 통해, 고급 주택이 늘어선 언덕길을 올라, 부지가 한 층 더 큰 낡은 저택 앞에 멈췄다. 주변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움직이는 시체가 없었다. "푸~" 펭귄이 낮은 소리로 울었다. 그러자 닫혀 있던 철문이 저절로 끼이이익 열렸다. 펭귄은 차닥차닥 걸어 저택 부지에 들어갔다. 그러자 문은 또 저절로 움직이더니 철컹 소리를 내며 닫히곤 잠겼다. 현관 앞으로 온 황제펭귄은 위를 보고 목을 꿀렁대더니 배를 흔들었다. 그리고 힘차게 숙이더니── 입에서 한 소녀를 내뱉었다.
3
──저, 죽었었죠? 죽은 거죠? 어둡고 미적지근한 어둠 속에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죽었으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여긴 아마 거대 펭귄의 뱃속. 그런데 어째선지 숨이 쉬어지고, 오히려 편하기까지 하다. 아까부터 주기적으로 흔들린 데다, 나를 감싼 온기가 합쳐져 졸음을 불렀다. "흐암……"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한 순간, 주변의 어둠이 요동쳤다. "어?" 몸이 뒤집히는 감각.
철퍽!
어렸을 때 워터 슬라이더를 탄 기억이 스쳤다. 그 순간을 연상시키는 가속도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는 어둠 속에서 한 바퀴 돌았다. 엉덩이에 꿍 하는 충격.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빛. 갑자기 밝은 곳에 던져진 나는 눈이 부셔 인상을 썼다. 빛 속에 보이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음침한 저택. 혐오스러운 우리 집. 살아 있어? 저, 살아 있나요? 정말? "푸~"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거대한 황제 펭귄이 서 있었다. "히익──" 아까 '먹힌' 기억이 떠올라 나는 깜짝 움츠렸다. 그런 내 앞에서 황제 펭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단순한 수축이 아니다. 온 몸이 줄어듦과 동시에 성체成體가 '젊어'진다. "뭐, 뭐에요……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 나는 읊조린다. "쀼이쀼이!" 겨우 몇 초 만에 조그매진 아기 황제 펭귄은 커다랬을 때와는 다른, 높고 귀여운 소리로 울었다. 그걸 본 나는 황제 펭귄이 나타난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때…… 펭귄 스트랩이……" 설마 아빠에게 받은 스트랩에 달린 펭귄이 '이것'인 걸까. "쀼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30센티쯤 되는 아기 펭귄이 긍정하듯 울었다. 날개를 파닥대더니 몸을 양 옆으로 흔드는 펭귄. "……귀여워."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털과 짧은 날개, 맑고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힘껏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하지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뻗은 내 손을 피하듯 펭귄이 현관을 향해 차닥차닥 걸어갔다. 그러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현관이 저절로 열리더니 펭귄이 저택 안에 들어갔다. "아…… 자, 잠깐만요!" 나도 퍼뜩 일어나 펭귄을 쫓아갔다. 오래된 저택이라 현관은 홀 형태고, 커다란 골동품 추시계가 지금도 추를 흔들며 시간을 알린다. 아기 펭귄은 그 추시계 앞에 탁 멈춰 섰다. "저, 저기……" 떠듬떠듬 말을 걸었다. 그러자 펭귄은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짧은 부리로 추시계 받침 부분을 콕 쪼았다. 대앵─……. 그러자 정시도 아닌데 추시계가 울리더니── 추가 들어있는 자리 앞판이 벌컥 열렸다. "쀼이쀼이!" 그 안을 가리키듯 펭귄이 울었다. "……뭔가 있나요?" 펭귄에게 질문하는 나는 아직 제정신인가 생각하며, 몸을 굽혀 추시계 안을 들여다봤다. "아." 흔들리는 추 너머에 막대기 같은 것이 걸려 있다. 그리고 바닥판 위엔 새하얀 봉투가 있었다.
그것은 아빠가 남긴 편지. 막대기로 보인 것은 예스러운 나무 지팡이.
'유키, 네가 이 편지를 읽었다는 건, 사방에 시인이 넘쳐나는 상황이겠지. 나는 그 때를 대비해 네게 '마술'을 남긴다.'
이 날, 세상은 멸망했고── 나는 진짜 마녀가 됐습니다.
4
"벌써 한 달인가요……" 강변길을 걸으며 마음을 담아 말했다. 시업식 다음 날, 이 도시는── 인간의 세계는 치명상을 입고, 조금씩 죽어갔다. 첫 날 밤엔 아직 TV가 나왔지만 모든 방송국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라고 적힌 화면만 표시됐다. 아빠 방에 있던 낡은 라디오를 처음 써 봤지만 잡음만이 들렸다. 인터넷이라면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집엔 컴퓨터가 없고, 스마트 폰이 있는 아빠가 없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이틀째에 가스가 안 나오는 걸 알았다. 사흘째 밤에 정전, 복구 안 됨. 이따금 멀리── 집 밖에서 뭔가가 충돌하는 소리나 자동차 엔진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나흘째엔 잠잠해졌다. 2주 후…… 집 밖에 나가보자 살아있는 인간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이제는 5월. 아름다운 핑크빛 꽃이 피었던 벚꽃도 푸르른 잎이 무성하다. 오늘은 아주 맑지만 6월이면 장마가 시작된다. 햇빛이 줄면 시인들은 낮에도 밖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멀리 가려면 지금…… 인걸까요." 그렇게 말하곤 왼손에 든 '전리품'── 빵빵하게 들어찬 비닐봉투를 내려다본다. 안에는 휴지나 비누, 샴푸 같은 소모품. 이것들은 평소에 가던 편의점에서 얻은 것이다. 편의점은 물자 보급 장소로서 꽤 편리하다. 밖에서 안이 어떤지 거의 다 보여서 시인을 먼저 처리하고 안을 안전하게 탐색할 수 있다. 음식은 없었지만 이만한 소모품을 얻었으니 성과는 충분하다. 이제 해가 지고, 도시의 '그림자'가 짙어지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위험한 지점은 이미 지났으니 앞으로는 비교적 편한 길이다. 강변길은 둑 위에 나 있어서 해가 잘 들기 때문에 낮에는 시인이 거의 다가오지 않는다. 만약 근처에 있어도 시야가 넓어서 바로 보인다. 하지만 나무 지팡이를 든 오른 손에는 자연스레 땀이 배인다. ──시인 대처법은 익숙해졌지만 역시 밖은 긴장됩니다……. 시인을 쓰러트림에 있어 이제는 거의 저항감이 없다. 저것은 모양만 사람인 무언가니까. 짐승조차 아닌, 생명 없는 것들이니까.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쉽게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움직이는 시체와 친지의 얼굴을 겹쳐 보며 공격을 망설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대다수의 인간은 원래 '적'이었다. 게다가 자기들이 악당이 되지 않게, 복수당하지 않게 비겁하게 공격하는 사람뿐이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훨씬 알기 좋다.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나도 주저 없이 반격할 수 있다. 머리를, 뇌를 파괴하면 '승리'할 수도 있다. 그저 '지지 않기'에 매달리던 지난달의 일상과는 천양지차다. 뭐 물론…… 공격당하는 건 무섭고, 가능하면 싸우고 싶지도 않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예전엔 그렇게 싫어하던, 기분 나쁜 우리 집이 그립다. 돌아가면 1주일은 틀어박혀서 뒹굴뒹굴 대고 싶다. ──지금 읽는 소설 뒷권도 궁금하고요…….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그림자는 확실하게 경계한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간 나도 허무하게 시인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외줄타기 하는 삶일지라도 전보다는 훨씬 편하다. 나를 비웃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정말이지 시원하다.
탕!!
그 때, 어디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 한 소리가 났다. "!?" 숨을 들이켠 나는 걸음을 멈췄다. "쀼이?" 어깨에 멘 가방이 흔들리더니 귀여운 아기 펭귄── 사역마 페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이 없고 차도 없는 도시는 보통 아주 조용하다. 시인들이 으으 소리를 내긴 해도 그건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만 낸다. 그러니 큰 소리는 꽤 먼 곳까지 퍼진다. 그것은 죽은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물질과 같다. 탕탕!! 또 들렸다. 이번엔 연속해서 났다. "이건……" 나는 두리번댔다. 이 주변은 주택가라 건물이 적다. 둑 위에서라면 꽤 먼 곳까지 보인다. 죽은 도시는 평소와 같다. 하지만 하늘엔 날아다니는 새떼가 보인다. 다다다다다다다다다!! 이번엔 소리가 조금 변했다. 세계가 종말하기 전에, 치안이 나쁜 나라를 다룬 뉴스나 영화에서 곧잘 들은 소리. 강 하류 쪽 공원 주위에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총소리?" 직접 들은 건 처음이지만,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생각해왔다. 만약 이 나라에 아직 생존자가 있다면 아마 총기를 보유한 사람이리라고. 일본에서 평범하게 살아오던 사람들은 시인을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시인은 인간보다 힘이 아주 세니까. 다가오면 거의 끝이다. 시인을 쓰러트리려면 멀리서 머리를 파괴할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술로 파편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같은 '마녀'뿐이다. 누구든 쓸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생각나는 건 총 정도. 지금 이 도시에 온 누군가는 총기 같은 걸 소유했기 때문에 요 한 달을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경찰이나 자위대일까요? 아니면 혼란한 판국에 총을 얻은 사람일지도. 뭐 어느 쪽이건……. "피하는 게 낫겠죠……?" 가방에서 고개를 내민 페라에게 혼잣말처럼 물었다. "쀼이?" 하지만 아기 펭귄은 귀엽게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페라와 말이 안 통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아빠가 나를 위해 남겨준 사역마니까. 내 명령에 따라 주지만 내 뜻에 간섭하지 않는다. 맑고 검은 눈이 '직접 정하라구?'라는 듯 느껴진다. "그치만…… 위험한 사람이면 어떡해요? 아니…… 보통 사람이라도 안 돼요. 제 존재를 알게 되면 분명 화 낼 거예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그럼에도 나는 페라에게 내 생각을 쏟아 부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이 도시에, 저만이 '안전지대'를 소유하고 있는데, 저는 아무도 구하지 않았어요. 무서워서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거나…… 그 때는 마술을 쓸 줄 몰랐다거나…… 그럴듯한 이유는 있지만── 실제로는, 저한테는 '구하고 싶은' 사람이 이 도시에 아무도 없었을 뿐이예요." 그래서 나설 수 없었다. 나서지 않았다. '결계'가 쳐져서 안전한 저택을 나설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아빠를 욕하는 이웃들이 혐오스러웠으니까. 나를 비웃는 사람들이 미웠으니까. "쀼이……" 내 참회를 얼마나 이해했을지, 페라는 조금 작은 울음소리로 맞장구 쳤다. "그러니, 누가 됐건 절 혐오할거예요. 저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을 혐오할 거구요. 그런 제가 모르는 사람을 구하러 나설 이유가 있나요? 구한 사람이 욕을 하기라도 하면 제 손해가 아닐까요?" 페라의 눈에 비친 내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을 혐오……해도, 전/부는 아니지 않나요? "……" 뇌리를 스치는 건 꿈만 같은 1주일. 중학교 때 유일하게 사귄 '친구'와의 즐거운 추억. 분명 전부는 아니었다. 내겐 아빠 말고도 싫지 않은 사람이 있다. 여기서 낯선 이방인을 무시하면, 이 단 하나뿐인 예외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일단, 보기만 하러 가 볼까요." 이건 대화가 아니라 결론. "쀼이!" 페라는 힘차게 납득의 울음소리를 냈다. 장소는 아마 아까 새가 날아간 공원 근처. 다다다다다다다다──!! 울려 퍼지는 총소리는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5
강변길의 하류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 집은 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빙 돌아가는걸 넘어 완전한 탈선. 한참을 가자 나무에 둘러싸인 넓은 공원이 보였다. 총소리는 아직도 산발적으로 났다. 둑에서 쳐다보자 공원 주위에 수많은 시인이 모여 있었다. ──엄청난 수…… 총소리가 근처 시인을 불러 모은 거겠어요. 총이라면 시인을 없앨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 이상으로 시인을 모아서야 의미가 없다. 아마 총이 있는 경찰 같은 경우도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렸으리라. "아──" 찾았다. 공원 중앙 근처 미끄럼틀 위에 자리 잡은 사람이 보였다. 그냥 우락부락한 남자를 상상했지만 그 사람은 여자 같았다. 게다가 입은 옷은 교복처럼 보인다. 그녀는 병사들이 멜 법한 큰 총을 벨트로 어깨에 걸치고, 두 손으로 잡은 권총을 주변 시인에게 조준했다. 탕! 탕! 건조한 총소리가 두 번 나더니 미끄럼틀을 기어오르려던 시인 둘이 균형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어쩐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시인이라면 이미 일상의 일부지만 '총을 쏘는 소녀'라는 장면은 더없이 비현실적이다. 언뜻 봤을 때 그녀는 총을 아주 잘 다뤘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시인의 습성을 잘 파악했다는 증거다. 시인은 움직임이 느리지만 특히 위아래로 움직일 때 이런 특징이 아주 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시인의 수는 계속 늘어나, 조만간 실패할 것이 뻔했다. 어째서 저런 상황이 됐는지 눈길을 돌려보다 공원 입구에 쓰러진 소형 바이크를 발견했다. ──분명 저 바이크가 고장 나던지 어쨌던지 해서 멈추고, 시인에 둘러싸인 거겠네요. 라고 냉정히 상황을 분석하는 나 자신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저…… 냉정한 사람이네요. 진짜 마녀처럼." 위험에 처한 소녀를 보고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내게 남이라는 것은 먼 존재였다. 하지만…… 딱히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안 든다. 그래서 '가능할 것 같으면 구하자'는 마음으로 구출 방법을 생각해본다. 시인이 저렇게 모여 있으면 파편으로 하나씩 머리를 깨 봤자 언 발에 오줌 누기. 돌파구를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지쳐버린다. 그러면──. 나는 옆에 흐르는 강을 쳐다봤다. 조잡하긴 해도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어떻게 해결될지도 몰라요." 전리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둑을 내려갔다. 그리고 강가에서 들고 있던 지팡이 끄트머리를 물에 참방 담갔다. "떠 줘." 바라면서 속삭이자 내 열이 지팡이를 통해 물에 전해진다. 강을 흐르는 물과 내가 이어졌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수면이 크게 솟아오르고, 강의 일부가 구형 물덩이가 되어 떠올랐다. 일시적으로 강에 큰 구멍이 뚫리고, 강바닥이 들여다보였다. 남겨진 물고기들은 파닥파닥 뛰었지만 이내 주변의 물이 흘러들어 강의 빈 부분을 채웠다. 소용돌이치는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은 박리된 강 덩어리. "영차……" 지팡이를 수직으로 들자 거대한 수구는 내 머리 위로 움직이더니 둥실대며 멈췄다. 조금 무리를 한 지라 몸이 무겁다. 하지만 저 소녀를 구하기 위해선 물이 이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수구를 띄운 상태로 영차영차 둑을 올랐다. 여기서 넘어지면 말 그대로 물거품이다. 어찌어찌 비닐봉지를 놔둔 곳까지 와서 둑 반대편── 공원의 상황을 확인했다. 소녀는 아직 미끄럼틀 위에서 닥쳐오는 시인들과 전투중이다. ──음, 저 '높이'라면 아마 괜찮겠죠. 지팡이를 앞으로 눕히자 내 머리 위에 떠 있던 수구도 약간 앞으로 움직였다. 그 상태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기 가만히 계세요!!" 총성이 멈춘 틈에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일이 거의 없던 지라 목이 아팠다. 소녀가 이 쪽을 쳐다봤다.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나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지팡이를 쥔 손에서 힘을 빼고── 마술을 유지하는 '이미지'를 무산시킨다. 커다란 물덩어리가 퍽 터진다. 해방된 물은 단박에 둑을 다고 내려가더니 공원으로 힘차게 흘러들었다. 물줄기에 먹히고 밀려가는 시인들. 하지만 미끄럼틀 위의 소녀는 격류에 쓸려가지 않는다. 물이 지나가자 그녀 주위의 시인은 소탕돼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임시방편. 시인을 쓰러트린 게 아니기 때문에 금세 다시 모인다. "빨리요! 지금 이리로 오세요!"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치자 멍하니 있던 소녀는 정신을 차린 모양으로 미끄럼틀을 내려 나를 향해 달려왔다. 둑과 공원 사이에 있던 시인은 아까 터진 물줄기에 전부 떠내려갔다. 지금이라면 시인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다. ──이, 이제 어떡하죠……. 다만…… 나는 다가오는 소녀를 앞에 두고 긴장에 굳어졌다. 구하긴 했지만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예상도 안 된다. 마술을 쓰는 모습을 봤으니 적어도 마술에 관한 질문은 피할 수 없겠지. "쀼이!" 페라가 경고성을 냈다. 내 존재를 알아챈 시인들이 나를 향해 움직인다. 그녀와는 더 이상 얽히지 말고 나도 도망쳐야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허둥지둥 비닐봉지를 주워들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한 순간──.
"유키!" ──엥? 이/름/을/불/린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뛰어서 둑을 올라오는 소녀는 헐떡대며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허억…… 허억…… 아── 역시 유키구나……" 벨트로 큰 총을 어깨에 걸치고, 오른 손에 권총을 든 교복 소녀. 그녀는 긴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며 희희 웃는다. "야호…… 오랜만." 흙먼지에 지저분해도 저 얼굴을 착각할 리가 없다. "호노카……" 나도 그녀의 이름을 내뱉는다. 사카키 호노카──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한 친구의 이름. 다시는 못 만나리라 생각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부터 포기했다. 그건 일주일짜리 행복한 꿈이었다고. 하지만──. "다행이다…… 살아 있었구나. 근데 아까 그건 뭐야? 물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와── 그 펭귄 혹시 진짜야? 뭐야 너무 귀엽잖아!?"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호노카. 아무리 봐도 그녀는 꿈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이것은 한 소녀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 주인공 후루츠키 미카는 가공의 캐릭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적힌 것은 모두 진실이다.
우주와 당신의 존재는 이 소설의 주인공 후루츠키 미카로부터 시작된 '아이돌'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당신은 이 소설을 정성껏 읽어야만 한다. 후루츠키 미카를 응원하고, 공감하고, 자기 동일시 하며 읽어야만 한다.
이 소설을 마지막까지 읽고 이해했다면 당신은 한 가지 사명이 부여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 전해지는 문장이다.
Ⅰ
후루츠키 미카는 아이돌을 좋아했다. 아이돌 전국시대라 불리는 현대에 아이돌 팬은 썩 드물지 않다. 우후죽순처럼 쑥쑥 태어나는 아이돌과 함께 그 팬도 끝없이 늘어난다. 후루츠키 미카는 그런 초짜들과는 일선을 긋는 존재였다. 그녀는 자그마치, 생후 6개월에 아이돌 오타쿠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밤에도 울음이 그치지 않는 갓난쟁이였다. 낮이고 밤이고 하루 종일 째지는 소리로 부모의 잠을 방해하고 뇌를 혼란스럽게 했다. 부모는 고민 끝에 아이가 빠질만한 것을 찾아 정신적으로 안정시켜 주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인형, 캐스터네츠, 게임기, 프라모델, 팽이, 연, 로봇, 앞치마, 손전등, 골판지 미로, 햄스터 등을 차례로 주어 봤지만 후루츠키 미카는 개중 어느 것에도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피곤해진 부모는 밤에 텔레비전을 틀었다. 브라운관에 대통령, 영업사원, 쉐프, 의사, 개, 취주악단, 자동차가 줄줄이 나온다. 그리고, 아이돌이. 그 순간 후루츠키 미카는 울음을 그쳤다. 동그래진 눈으로 브라운관 안에서 춤추는 아이돌을 지켜봤다. 표정근이 활동하고, 웃음에 달한다. 구김살 없는, 천진난만한 웃음이다. 그야말로 아기의 웃음을 대표한다고 해도 될 만큼 순수하게 웃었다.
이거다! 부모는 확신했다. 이것이야말로 울음을 막을 비장의 한 수다.
후루츠키의 집은 썩 유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루츠키 미카에게는 더없이 많은 아이돌 상품을 사 주었다. 비디오테이프는 늘어나서 못 보게 될 만큼 셀 수도 없이 재생됐다. 후루츠키 미카가 태어난지 1년 후에 여동생 후루츠키 미야가 태어났고, 미야 또한 아이돌을 좋아했다. 둘이 성장함에 따라 비디오테이프는 DVD로 변했다. 초등학생이 되자 라이브에 가기 시작했다. 후루츠키 미카는 원래 내성적이고 틀어박히길 좋아하는, 정서가 불안한 아이였지만 아이돌 사랑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 친구는 많이 생겼다. 그야말로 아이돌이 구원한 것이다.
한 편, 후루츠키 미카의 인생을 뒤튼 것 또한 아이돌이었다. 수없는 라이브 원정과 DVD 구입에 늘어난 지출이 금전 사정을 압박했고, 그 탓에 식사는 간소하게, 부모는 일을 늘렸다. 그리고 집안에 쌓이는 스트레스가 급증한 결과 이혼에까지 다다랐다. 후루츠키 미야는 아버지가 데려갔기에 후루츠키 미카와는 헤어지게 됐다. 후루츠키 미카가 13살, 중학교 1학년 때 일어난 사건이다. 그 충격이 컸기에 그 후로 1년은 등교거부 상태로 어두컴컴한 방에서 끝없이 아이돌 라이브 영상만 되풀이해서 봤다. 식사는 하루에 두 끼, 그마저도 싫을 땐 한 끼였다. 그 탓에 피부는 염려스러울 만큼 하얘지고, 썩 자라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걱정했지만 후루츠키 미카는 그 사실을 내심 좋아했다. 꼭 아이돌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1년이 지났을 즈음에 후루츠키 미카의 마음도 편해졌다. 새로운 목표를 찾은 것이다. 국립 히카리가야마 고등학교. 몇 년 전까지 인기 없는 여고였지만 올해 시작된 아마추어 아이돌 대회에서 우승을 따 낸 결과 전국 아이돌 팬이 주목하게 됐다. 당연히 후루츠키 미카도 그 라이브에 갔지만, 압도당했다. 하나하나 개성적이면서도 천재적인 능력을 감춘데다가 전체로서 보여주는 퍼포먼스도 완벽했다. 이토록 남다른 개성을 가진 팀이 그룹으로서 하나가 된 순간은 예술적이기까지 했다. 예를 들자면 축구 선수와 사냥꾼과 군고구마 장수와 카 레이서와 종교인과 도예가와 엔지니어와 세일즈맨과 공항 관제탑 직원이 제각각의 능력을 보충해가며 세상의 위기를 구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어떻게든 이 집단에 들어가야만 한다. 후루츠키 미카의 결심은 굳었다. 히키코모리 시절의 반동인지 본인의 분위기는 들끓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아이돌이 되자는 결심이 가득 찼다.
후루츠키 미카는 공부했다. 등교 거부 탓에 또래보다 늦었지만 그 핸디캡을 엄청난 힘으로 극복하고 훌륭히 합격을 따냈다.
고등학교는 지금까지 살아온 곳 중에 최고였다. 아이돌로 유명한 학교이니 만큼 주위에는 마음 맞는 아이돌 팬들이 수없이 많았다. 아이돌부 선배들은 갑자기 늘어난 부원에 당황한 듯 했지만 시행착오 끝에 여러 유닛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시스템이 생겨났다. 후루츠키 미카는 5인조 유닛 'P-VALUE'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일어났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전 우주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니조노 마오리, 잘 부탁해."
무뚝뚝한 인사였다 P-VALUE가 처음으로 만난 날, 후루츠키 미카는 마오리를 만났다. 숏컷에, 큰 키와 드센 눈매까지 합쳐져 쉽사리 친구가 되기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유닛 멤버들과는 한 발 떨어져 있었다.
후루츠키 미카는 고등학교 때 누구에게든 사랑받는 것을 목표 삼았다. 원래는 겁쟁이에 내성적이지만 그런 성격이기에 더더욱 밝게 행동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퍼부었다. 겉모습뿐이라도, 만들어진 것이라도, 원래 따라다니던 낯가림을 숨기는 데에 성공했다. 후루츠키 미카는 겉으로 보이는 명랑함으로 친구를 만드는 게 특기였다. 하지만, 정말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귈 수는 없었다. 진짜 자기를 보이면 친구가 떠나가지 않을지가 무서웠던 것이다. 혹시, 그렇게 된다면, 정신은 불안해지고, 그리고 친구가 또다시 멀어진다는 부정적 반복이 일어나리라 확신했다. 자아를 지키기 위해선 겉으로만 명랑한 모습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니조노 마오리는 후루츠키 미카와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전체적으로 망설임이 없는 태도에, 화가 나면 직설적으로 내뱉는다. 죄다 질렸다는 듯 한 한숨이 버릇이었다.
부모가 의사와 병원 경영자인 아가씨라는 소문에 반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었지만 친구는 적은 듯 했다.
후루츠키 미카는 엄청난 노력 끝에 바깥 세상에 적응했다. 아이돌 활동에 있어서도 수업은 뒷전으로 노래를 외우고, 안무 스텝을 연습하고, 기초 체력을 단련했다. 한 편 니조노 마오리는 바깥 세상에 적응하려는 기색조차 없이 쉽사리 과제를 달성했다. 들은 바로는 어려서부터 피아노, 노래, 발레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후루츠키 미카가 몇 시간이고 연습한 스텝을 틀리는 곁에서 니조노 마오리는 손쉽게 새 스텝을 외웠다.
둘의 거리는 썩 좁혀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어떻게 인수분해를 한대도 공통 인자가 나오질 않는 것이다. 후루츠키 미카는 니조노 마오리를 인식에서 치우기로 했다. 억지로 다가가면 반발하고, 균열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 것이다. 후루츠키 미카의 그런 태도에서 눈치를 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조노 마오리도 별반 친하게 지내려 하진 않았다.
그런 둘이 친구親友가 된 것은 우연의 산물이었다. 입학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후루츠키 미카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아침 연습 중이었다. 아이돌 부가 연습 때 쓰는 옥상에 누구보다 일찍 와서 말없이 스텝을 밟는다. 안무 암기가 다른 부원보다 늦었기에 나서서 하는 것이다.
"그 스텝 반 템포 늦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니조노 마오리가 서 있었다.
"네가 왜 여길?"
"알람시계가 고장 났나봐, 평소보다 빨리 울려서. 다시 자기도 뭐 하고 아침 공기나 쐴까 싶어서 왔어. 늘 이 시간에 있어?"
니조노 마오리의 질문에 후루츠키 미카는 거북해진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연습해도 눈에 띄는 결과가 안 나오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응."
작게 끄덕인다.
"흐음~, 괜찮으면 좀 도와줄까?"
"응?"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다.
"모처럼 같은 유닛이니까 이 기회에 좀 더 교류를 하면 좋잖아?"
"그치만 니조노 씨가 번거롭지 않아?"
"번거롭기는. 아이돌 활동은 그냥 심심풀인데."
아이돌을 꿈으로 삼은 자신이 아이돌 활동을 장난이라고 결론짓는 사람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사실이 후루츠키 미카를 충격에 빠트리고, 안색을 흐리게 만든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아냐, 괜찮아……"
그러면서도 눈물이 흘러나온다.
"혹시…… 내가 기분 나쁜 말 했어? 그럼 미안해, 잘못했어……"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나, 아이돌이 되는 게 꿈이야……. 그래서 니조노 씨랑 날 비교했다가. 그냥 좀 기분이 그래서……"
침묵에 당황한 나머지 본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뭐야, 그런 거면 내가 프로듀스 해 줄게."
대화가 생각치도 않던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래도, 나, 안무도 전혀 못 외우니까……"
"아~니~야~, 아이돌에게 바라는 건 완벽한 안무도, 노래도 아냐. 못 해도 되니까 노력하는 모습이야. 관객은 그 모습에 자기를 겹쳐보고 공감해. 그런 면으로 보면 나보다 네가 훨씬 아이돌에 맞아."
"그런…… 걸까."
내심 아이돌에 잘 맞는다는 말에 굉장히 기뻤다.
"그래! 일단 말투랑 머리모양을 아이돌처럼 만들어야지. 잠깐 생각 좀 할게."
이렇게 니조노 마오리에 의한 후루츠키 미카 프로듀스가 시작됐다. 가장 처음 주목한 것은 머리모양이었다. 지금까지 길게 길렀던 머리를 트윈 테일로 묶어서 단숨에 귀여운 느낌을 주는데 성공했다. 병약하게 느껴지는 흰 피부도 한 몫 한다. 다음은 1인칭이다. 지금까지 써 왔던 '나'를 '미카'로 바꿈으로 어리광 캐릭터를 확립한다. 이 때도 작은 키의 도움을 받아 효과가 더 커진다.
후루츠키 미카의 캐릭터를 계기로 P-VALUE의 분위기는 변했다. 아이돌다운 사람이 중심에 섰다는 사실에 자기가 아이돌 그룹에 소속했다는 자각이 커졌기 때문이다. 후루츠키 미카와 니조노 마오리를 시작으로 아침 연습에 모두가 참가하게 되고, 지역 아이돌 대회에도 나갔다.
그 후로 둘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우정을 키워갔고, 마침내 안팎 할 것 없이 단짝으로 보는데 이르렀다. 후루츠키 미카는 행복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반짝이는 3년이었다. 자기 안에 아이돌의 빛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힘든 것은 그 후로부터였다. 아이돌 부를 졸업함과 동시에 아이돌이라는 정체성을 빼앗긴, 평범한 인간이 된다. 후루츠키 미카는 이미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는 상태였다. 아이돌로서 영원히 빛나고 싶었다.
어머니는 공부를 우선하라고 했지만 공부할 시간은 오디션 연습에 쏟아 부었다. 진로 희망 조사서에는 큰 글자로 '아이돌'이라고 적었다. 교사는 나중에 틀림없이 후회하리라고 경고했고, 어머니는 자기가 잘못 키운 거라고 후회했다. 그 때마다 '미카는 모~두의 아이돌이 될 테니까, 괜찮아미카!' 라며 귀여운 목소리로 반론했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힘이 되 준 것은 니조노 마오리였다. '미카 짱이라면 우주 제일의 아이돌이 될 수 있어, 미카 짱은 내가 봐 온 누구보다도 귀여워'라는 말을 퍼부어서 후루츠키 미카의 자신감을 유지시켰다. 그 말에 들뜨는 것이다. 혹여나 니조노 마오리가 없었다면 우울증에 걸리고 아이돌을 향한 길을 포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디션에 몇 번을 떨어지고, 부모가 아무리 포기하래도 니조노 마오리의 말을 들으면 자신은 빛날 수 있다는 자신이 솟아났고, 또 한 걸음 내딛을 의욕이 생겨난다.
여러 불합격 끝에 마침내 한 오디션에 합격했다. 마침내 붙잡은 한 줄기 지푸라기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소속 사무소는 도쿄에 있었고, 교토 소재 의대에 진학하는 니조노 마오리와는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둘은 아쉬움을 삼키며 포옹하고, 다시 만나리라 약속하며 헤어졌다. 후루츠키 미카는 다음에 만났을 때는 대세 아이돌이 돼 있으리라 단언했다.
사무소에 들어가서 가장 처음 한 것은 레슨비 징수였다. 약 반 년은 매월 레슨비에 수입이 마이너스 상태지만 그 후로는 활동이 시작되고 서서히 수입이 들어온다고 매니저가 약속했다. 눈앞에 보이는 밝은 미래에 가슴이 떨리던 후루츠키 미카는 그 말을 믿고 온 힘을 레슨에 쏟아 부었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후루츠키 미카를 기다리던 것은, 비정한 현실이었다.
반 년 가량이 지난 어느 날 후루츠키 미카는 사무소가 도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미 경영 상태는 불안했고, 조만간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던 사무소 측은 데뷔하지 않은 신인 아이돌 후보를 착취하곤 도망쳤다. 남겨진 것은 레슨비로 쓴 빚과 박살난 정신뿐이었다. 반년동안 이뤄낸 실적은 거의 없었고, 이적도 못 했기에 자유롭게 활동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완전히 붕괴했다.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오디션에 맞서야만 했다. 심지어 생활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와 함께 아이돌 활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더 안 좋은 사실은 고독하다는 것이었다. 홀로 상경했기에 주위엔 친구가 없었고, 같이 연습할 아이돌 후보도 없다. 오디션 연습이 재미를 잃었다. 자연스레 웃을 수 없게 됐다. 억지로 웃으려 했지만 표정이 일그러질 뿐이다. 거울 속 일그러진 표정을 보자 슬퍼졌다. 마침내 복통까지 찾아온다. 그런 상황 속에선 오디션에 합격할 리가 없었다.
니조노 마오리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실행할 수는 없었다. 여러 번 연락을 하려 했지만 아직 사무소가 망했다는 사실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말하기가 무서워 미뤄두다 보니 어느 샌가 열심히 아이돌 활동을 한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거짓말은 점점 부풀어 쉽사리 무너뜨릴 수 없을만큼 커졌다. 진실을 말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헤어질 때는 그토록 자신만만했는데, 지금은 한 번 웃어 보이기조차 고생하게 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후루츠키 미카 안에서 니조노 마오리는 일종의 우상idol이 돼 있었다. 그 우상에게 어울릴만한 아이돌이 되어야만 한다, 빛나야만 한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꿈은 이제 강박관념의 영역까지 도달했고, 그것이 무한하게 미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의 거리에서 무한은 갑작스레 유한으로 변한다.
"미카 짱!"
낯익은 목소리다. 니조노 마오리의 목소리. 돌아보자, 그곳에 있었다.
"아앗!? 마오링!"
마오링은 니조노 마오리의 별명이다.
"미카 짱! 얘기 들었어. 사무소가 도산했다며! 괜찮아?"
니조노 마오리는 소문으로 후루츠키 미카의 처지를 안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거짓말은 그 한 마디에 모두 무너졌다.
"……마오링 말이 맞아미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영업용 말투가 나왔다.
후루츠키 미카는 니조노 마오리를 자취방으로 안내한다. 어색해서 다시 본 기쁨조차 입 밖에 낼 수 없다. 그렇다고 침묵을 지키지도 못하며,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솔직히 떠듬떠듬 말 한다.
"왜 얘기 안 했어!?"
흐느끼는 후루츠키 미카를 니조노 마오리가 끌어안는다.
"이렇게 된 걸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서……"
그 후에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무소에게 배신당한 충격, 인간 불신, 무력감, 자기혐오, 열등감, 안좋아지는 건강, 줄어가는 잔액, 도쿄에서 느낀 고립감, 이따금 자신이 미쳐간다고 느낀다는 사실.
"괜찮아!"
니조노 마오리는 힘차게 선언한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돌볼 거니까!"
"네에!?"
의미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야. 나한테는 돈이 있어. 무진장하게. 부모님한테 얘기하면 얼마든 받을 수 있어. 그 돈으로 미카 짱을 돌볼 거야. 아이돌 활동에만 집중하면 돼."
니조노 마오리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제안이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잖는가. 하지만 후루츠키 미카에게 있어서 이 제안이 자신의 존재 의의를 땅에 떨어트리는 듯 한 느낌이었다. 여기서 사회학적 고찰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후루츠키 미카의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문화 배경 하에 일종의 원죄를 짊어지고 사는 듯한 모양새였다. 게다가 돈을 조금이라도 받으면 사회가 게으름뱅이라는 낙인을 찍을 우려가 있었다.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경계한 것이다.
"응? 왜 그래?"
니조노 마오리는 천진난만하게 미소 짓는다.
"모처럼 얘기해준 건 고마운데, 저기……"
거절하려 했을 때 초인종이 울린다.
말을 하다 만 후루츠키 미카는 현관에 가 문을 연다.
"언니!お姉さま"
엄청난 힘으로 문이 열리고 밖에서 소녀가 들어왔다. 후루츠키 미카와 꼭 닮은 얼굴이었지만 그보다도 더 작다. 그 이름은 후루츠키 미야. 후루츠키 미야의 동생이지만 부모가 이혼하고서부터 만난 적이 없었다.
"미야 짱!? 왜 여깄어?"
후루츠키 미카는 당황한다.
"왜 여깄냐구요?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겠어요! 전 당신이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왔어요. 당신은 악마에게 지배당한 상태예요. 아이돌이라는 악마에게! 아이돌! 아, 이 얼마나 꺼림칙한 단어인지요. 아이돌 때문에 가정이 무너졌고, 지금 그야말로 아이돌 때문에 언니가 파멸에 치달은 지금! 자, 언니,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요. 사무소가 도산한 건 천운이었던 거예요. 아이돌 따위는 그만두고 정상인의 세계로 돌아가요!"
후루츠키 미야는 정열적으로 말했다. 아이돌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생각에 이 세상에서 아이돌을 없애리라고 결심한 것이다. 언니가 아이돌이 되려 한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듣고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카 짱, 손님?"
기다리다 지친 니조노 마오리가 현관에 나왔다.
"안녕하세요, 미카 언니의 동생 후루츠키 미야입니다."
"미카 짱 동생 있었구나."
"응…… 중학교 때 이혼하느라 헤어졌지만……"
"하지만 전 더없이 언니를 그리워했답니다. 그런데 그 쪽은?"
"난, 니조노 마오리야. 고등학교 때 미카 짱이랑 같이 아이돌 활동을 했었어."
"아이돌……"
후루츠키 미야가 이를 우드득 간다.
"네년이 언니를 파멸시켰군요!"
"에엥!?"
니조노 마오리는 당연하게도 당황한다.
"언니는 적당한 대학에 들어가서 적당히 취직하고 결혼해서 행복한 인생을 살았어야 했어요! 그런데! 이게 뭐예요! 아! 이렇게 비침하고 더러운 데서 혼자 외로이 썩어가다가 그 끝에 인생이 망했어요 파멸이예요! 패배자라구요! 손 써 볼 도리도 없다구요!"
"그렇지 않아."
니조노 마오리가 고요하게 반박한다.
"뭐어? 뭐라고 지껄이는 건가요!?"
"그렇지 않다고 했어. 왜냐하면, 내가 돌볼 테니까."
니조노 마오리가 한 말이 후루츠키 미야의 머릿속에 침투하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진심인가요?"
"당연히, 진심이야."
"……지랄하고 자빠졌네!"
후루츠키 미야가 벽을 힘껏 찼다. 그 충격에 꽃병이 떨어져 깨진다.
"언니를 부추겨서 파멸에 이르게 해놓고 이제는 장난감으로 삼겠다고!? 어!? 어차피 질리면 버릴 거잖아! 언니도 언니야! 이딴 년한테 기생해서 살 셈이야? 얼마나 더 몰락할 셈이예요? 이제 당신의 아이돌 놀이는 지긋지긋해요! 현실을 직시하세요!"
성격이 뒤집힌 양 후루츠키 미야가 난동을 부린다. 그 모습이 그야말로 곧잘 화내는 젊은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뭐!?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에 맞서는 니조노 마오리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다. 둘 사이에 날 선 분위기가 감돈다. 언제 벼락이 쳐도 이상하지 않다.
일촉즉발인 분위기 중간에 선 것은 후루츠키 미카였다.
"……나가"
가만히 말한다. 작은 소리였지만 험악한 표정이다.
"미카 짱, 하지만"
"언니……"
방금까지 감돌던 분위기는 어딜 갔는지 둘은 후루츠키 미카를 달래려 한다.
"그만 하고 나가라고!"
둘을 억지로 밖으로 밀어낸 다음 문을 잠갔다. 밖에서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현실을 직시……하라……"
후루츠키 미카는 패기 없이 웃는다. 그 마음은 빠득 소리와 함께 부러졌었다. 니조노 마오리의 제안에 자존심이 부러지고, 후루츠키 미야의 주장에 자기가 얼마나 재능이 없는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섞여 자신이 지금 위치한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 현실을 직시하자. 내가 아이돌이 될 수 있을리 없지. 불가능을 향해 도전하면 할수록 상처만 깊어지지. 이제, 여기서 그만 하자. 끝내자. 모두 다.
후루츠키 미카 안에 있었을 반짝임이 사라졌다. 아이돌을 만나고 아이돌 활동을 통해 키워왔을 반짝이는 빛이 사라졌다.
아이돌이 아니게 되면, 그 끝은 모든 것의 끝이다.
후루츠키 미카는 좁은 베란다에 의자를 끌고 와서 올라선다. 밖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는 좁은 길과 빈 짱, 특이할 것 하나 없는 풍경이지만 아름답다고 느꼈다. 베란다에는 수없이 나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기분이 편해져서, 다행이다.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쉰 후루츠키 미카는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다.
몸은 중력 가속도를 따라 낙하한다. 7층, 약 21미터 높이에서의 추락, 착지시 속도는 시속 70킬로미터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내던진 것과 마찬가지다. 온 몸을 타고 흐르는 충격이 혈관을 터트리고 뇌세포를 죽인다. 인생 최대의, 그리고 최후의 고통이 순간적으로 밀어닥쳤다가 사라진다.
후루츠키 미카는 죽었다.
하지만 이 죽음은 끝이 아니다. 출발 지점이다. 여기서부터 '아이돌'이 시작된다.
니조노 마오리와 후루츠키 미야는 후루츠키 미야가 죽는 소리를 들었다. 안 좋은 예감에 서둘러 뛰어가 보자 피투성이의 후루츠키 미카가 쓰러져 있었다. 인간이라 보단 불법투기된 대형 폐기물같다. 니조노 마오리는 의대생인 만큼 의식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 턱을 들어 기도를 확보한다. 행동은 냉정했지만 머릿속은 새하얬다. 강습 때 강제로 외운 행동을 생각 없이 따른다. 한 편 후루츠키 미야는 응급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무력함을 곱씹는다. 의대생이 아닌 인간은 무력하다.
도플러 효과에 음 높낮이가 바뀌어가며 구급차가 달려왔다. 구급 대원이 후루츠키 미카를 차에 태운다. 친족인 후루츠키 미야가 같이 탄다. 니조노 마오리도 친족이라고 거짓말 했다.
후루츠키 미카의 시신이 가게 된 곳은 니조노 마오리의 부모가 경영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이 병원이 선택될 필연성은 없다. 가까이 있던 여러 병원 중 받아줄 수 있던 곳이 여기뿐이었던 것이다. 이 우연이 우주 만물의 운명을 바꾸게 된다.
"임종하셨습니다."
최첨단 심폐소생술을 한바탕 다 해 본 후에 결론이 내려졌다. 담당의는 애시당초 틀렸다고 생각했었기에 예상 그대로였다.
그 말을 들은 둘은 입을 쩍 벌렸다. 옆에서 보면 더없이 멍청한 표정이지만 친한 사람이 죽었을 땐 이런 표정을 짓는 법이다.
후루츠키 미카의 죽음은 둘을 미치게 하는 데에 충분했다. 제일 처음 미친 것은 니조노 마오리다.
"아빠, 제발! 부탁이야!"
병원을 경영하는 부모에게 전화한다. 딸을 끔찍이 아끼기에 대번에 그 말을 들어준다. 그녀의 부탁은 수술실에서 의사를 내보내고 니조노 마오리가 들어가는 것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생겨난 광기는, 보통 사람이라면 영적(스피리추얼) 해결을 찾게 한다. 하지만 과학 교육을 받은 유물론자다. 유물론자가 미치는 방향은 기술 발달에 기대하는 쪽이다. 니조노 마오리는 미래 기술이 후루츠키 미카를 부활시키리라 확신했다. 아니, 확신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기술이 후루츠키 미카를 살려낼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화장하게 되면 방도가 없다. 재를 원래 몸으로 되돌릴 기술은 몇 천 년이 지나도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 꽉 틀어막은 영역이다. 어떻게든 몸을, 특히 뇌를 수십 년 단위로 보존해야만 한다. 니조노 마오리에겐 그것을 실현할 수단이 있었다.
니조노 마오리는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고 후루츠키 미카의 머리카락을 면도기로 밀어간다. 매력 포인트였던 포니테일이 무참하게 바닥에 떨어진다. 훤히 드러난 머리 피부는 이미 검게 죽었다. 후루츠키 미카의 희고 아름다운 피부는 산소 부족으로 죽은 세포 탓에 탁한 갈색으로 변했다.
이어서 니조노 마오리가 꺼낸 것은 메스다. 메스로 머리의 얇은 피부를 절개한다. 혈액순환은 이미 멎었기 때문에 피가 나진 않는다. 복숭아 껍질을 벗기듯 솜씨 좋게 벗겨낸다. 머리를 감싼 근육에 갈색 혈관이 얽혀 있다. 메스로 이마부터 뒤통수까지 근육을 절개하고 핀셋으로 잡아 옆으로 연다. 거무튀튀한 적갈색 근육 섬유 저편에 하얀 두개골이 보인다. 꼭 생전의 미카짱의 피부같다. 니조노 마오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근육은 관자놀이까지 옆으로 벌어졌다. 그 과정에 거추장스러운 귀는 절단됐다.
지금부터가 진짜라고 해도 좋다. 두개골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으며, 보통 뇌수술 때는 조각의 틈새를 절개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부 다 절개해야만 한다. 니조노 마오리는 전동 드릴을 꺼내 점액 투성이인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다. 우선은 이마 조금 위, 축구할 때 헤딩하는 부분 근처다. 그리고 좌우 관자놀이와 뒷덜미 위쪽에 구멍을 뚫고 전동 톱으로 구멍들을 잇는 선을 긋는다.
카가가가가각, 끼기기기기긱. 니조노 마오리는 뇌수술 방법을 책에서 읽었기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론과 실천은 다르다. 두개골을 찢어내는 톱은 엄청난 진동을 만든다. 들고 있기만 해도 이마에서 땀이 배어나온다. 니조노 마오리는 그 힘을 버티고 냉정하게 톱을 들었다. 저 뼈 아래에는 후루츠키 미카의 본질, 그녀가 그녀인 증거, 그녀의 모든 의사, 감각, 행동의 원천, 너무나도 소중한 세포 덩어리인 뇌가 있는 것이다. 실수해서는 안 된다. 니조노 마오리는 이 시점에 완전히 미쳤기에 후루츠키 미카의 죽음을 문제 삼지 않았다.
두개골이 절단된다. 저 안쪽에 보이는 것은 연한 핑크색 뇌다.
"미카 짱, 미카 짱은 여기로 생각 했었어? 여기로 날 봐 왔어? 여기 네가 있었어?"
니조노 마키는 중얼중얼 내뱉으며 두개골을 절단한다.
"후후훗, 이상하지. 미카 짱의 뇌는 미카 짱도 본 적 없는데. 내가 처음으로 봤네."
이윽고 두개골 윗부분이 완전히 제거된다. 후루츠키 미카의 머리는 반쯤 옆으로 갈라져서 뇌가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그 영향을 받은 표정근이 잘려 후루츠키 미카의 입은 떡 벌어져 있었다. 살아 있었다면 결코 지었을 리 없는 표정이다. 자신의 행동 탓에 그런 표정을 짓게 한 점을 니조노 마오리는 더없이 미안해했고,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여기까지 오면 뒷일은 간단하다. 후루츠키 미카의 뇌를 액체질소 통에 넣어서 보존한다. 그리고 그걸 부활시킬 기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철퍽. 니조노 마오리는 후루츠키 미카의 머릿속에 손을 넣었다. 중지와 약지를 뇌와 두개골 사이에 찔러 넣고 빈틈을 만들어서 강제로 네 손가락을 넣는다.
쳐법쳐법꾸륵. 손가락으로 뇌 밑을 더듬는다. 꽃망울 같은 후각구와 교차하는 시신경을 촉각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단단한 뼈를 찾아낸다. 척추 끄트머리다. 척추 끄트머리를 감싸듯 중지와 약지로 마름모를 만든다.
니조노 마오리는 심호흡을 한 후에 단숨에 팔에 힘을 주고 뇌를 들어올린다. 구직구직구뷰븃! 지벅, 푸즈즈즈즉 하는, 뇌와 몸을 잇는 혈관이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뇌와 함께 안구도 뽑혀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남은 것은 말 그대로 텅 빈 눈의 후루츠키 미카 뿐.
부쥭! 치걱! 꾸르륵! 니조노 마오리는 더 힘을 준다. 뇌와 함께 척추 신경까지 나왔다. 고구마를 캐는 모양새다. 척추 신경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혈관이 덤으로 따라온다. 그런 데엔 신경을 쓰지 않고 니조노 마오리가 턱을 한 손과 턱으로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척추 신경을 잡아 뽑았다. 낚싯줄에 걸린 생선을 당기는 듯 한 냉정함이다. 역시 의대생이다.
척추는 남김없이 뽑혀 나왔다. 니조노 마오리는 두 손으로 뇌와 척추를 안고 미리 준비해둔, 액체질소가 든 금속 병에 첨벙 집어넣는다. 그 때 손에 액체질소가 묻어 전치 1주일의 동상을 입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병뚜껑을 닫고 공기가 새진 않는지 확인한다. 이제 괜찮다. 적절히 얼어붙은 후루츠키 미카의 뇌는 장소만 확보되면 몇 세기는 버틴다. 앞으로는 어떻게든 부활시킬 기술을 만들어 내면 된다.
장례식, 그것은 슬프다.
장례식을 하는 사람이 백 살쯤 되면 안 슬플 때도 있지만 10대라면 슬프다.
장례식을 하는 사람이 막대한 유신을 남긴 노인이면 기쁠 수도 있지만 무일푼의 젊은이면 슬프다.
장례식을 하는 사람이 자살로 죽었을 때는 정말로 정말로 슬퍼서 장례식장은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후루츠키 미카는 위 세 가지 항목에 다 해당하기 때문에 장례식장은 최대한으로 슬펐다.
수많은 사람이 울었다. 부모, 동생, 고등학교 아이돌 활동 동창, 아르바이트 동기. 이제 '괜찮아미카!'라며 근거 없는 자신을 보여준 이가 죽어 버렸다. 후루츠키 미카는 꿈을 향하다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꿈 꿔온 우주 제일의 아이돌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좌절시킨 것은 죽음이라는, 우주 최악의 존재다. 모든 이가 울고 소리치고, 머리를 쥐어뜯지만 니조노 마오리만이 메마른 웃음을 보였다. 전 아이돌부 동창들은 너무 슬퍼서 미친 거라고 이해했다. 정확한 통찰이다. 기뻤다. 자신에게 사명이 생긴 것이. 후루츠키 미카를 되살린다는 사명을 가진 것이 기뻤다. 지금까지 부모의 압력에 의사가 되는 길을 걸어왔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마음을 억누르며 매일 공부했다. 이제는 공부할 이유가 생겼다, 의사가 될 이유가 생겼다. 후루츠키 미카를 살려내는 것이다.
시신에는 니조노 마오리가 잘라낸 흔적 없이, 기술자의 손에 깔끔히 고쳐embalming졌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귀와 뇌가 사라진 시신을 본 기술자가 신이 나서 자신의 이상이던 궁극의 시신을 만들기 위해 멋대로 모양새를 바꾼 것이다. 기술자로서는 반해버릴 만큼 잘 만들어졌으니 그야말로 온 세상에 통용될 기술의 결정이라 할 만 하다. 하지만 유족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보긴 힘들다.
이 사실 때문에 장례식 후에 마찰이 생겼다. 후루츠키 미카의 동생 후루츠키 미야가 니조노 마오리의 멱살을 잡은 것이다. 너무 크게 변해버린 시신을 보고 훼손됐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년아! 언니에게 무슨 짓을 했어!?"
온갖 허세를 끌어모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분노를 담아 니조노 마오리의 상복을 잡아챈다.
후루츠키 미야의 눈물이 절로 날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니조노 마오리는 냉소했다.
"미카 짱? 미카 짱은 괜찮아. 내가 부활시켜줄 거니까."
히죽히죽 웃는 니조노 마오리를 본 후루츠키 미야의 자제심은 마침내 제동을 잃고 주먹을 들었다. 그 운동량은 너무나 적었기에 니조노 마오리의 육체는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왜 맞는지 모르는 상태로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언니를 시간했구나! 이 변태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후루츠키 미야는 언니를 잃은 슬픔 끝에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를 상황에 빠졌다. 그저 눈앞에 있는 이가 미워서 참을 수 없었다.
계속 맞으면서도 니조노 마오리는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너도 언젠가 분명히 알게 될 거야. 기다려 줘. 미카 짱을 만나게 될 테니까."
자신을 때리는 후루츠키 미야에게 다정히 말 하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손 대지 마!"
후루츠키 미야는 니조노 마오리의 손이 오물이라도 되는 양 뿌리치고 거리를 둔다.
커지는 소란에 무슨 일이냐며 구경꾼이 몰려온다. 후루츠키 미야의 부모도 왔다.
"언젠가, 이 빚을 꼭 갚아주겠어요!"
후루츠키 미야는 니조노 마오리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나가기 직전에 속삭였다.
Ⅱ
후루츠키 미카가 죽은 지 5년, 인류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시작은 태양이었다. 태양 표면에 생기는 곰보 자국, 흑점 개수가 급속도로 증가한 것이다.
흑점이란 태양 내부의 자기력선이 불거진 자국이다. 태양은 지구와 마찬가지로 자기장이 존재하지만 기체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자전에 의한 유동이 심하며, 자기력선은 복잡하게 엮여 있다. 북극이 S극, 남극이 N극으로 고정된 지구와 달리 태양 자기력선은 미로처럼 별 안팎을 자유롭게 움직인다. 흑점은 자기력선이 태양 내부에서 외부로 나올 때 발생한다. 흑점이 증가하는 것은 태양의 자기장 활동이 활발해졌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움직이는 자기력선은 이내 겹친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교차한 자기력선이 융합하고 새로운 자기력선이 된다. 새 자기력선은 태양 표면에 부딪혀 대폭발을 일으킨다. 플레어다. 한 편 위쪽에 남은 자기력선은 볼 장을 다 봤다는 듯 사라지며 선물 삼아 대량의 에너지를 남긴다. 에너지는 주위에 있는 플라스마의 운동 에너지로 바뀌고, 구슬치기 하듯 외부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다. 코로나 태양 방출이다.
플레어는 썩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이 때 방출된 플라스마가 지구 대기와 충돌하면 오로라가 생겨난다. 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플레어는 비정상적으로 대규모였다. 갑작스럽게, 아무 전조도 없이 평소보다 1만 배는 큰 슈퍼 플레어가 발생한 것이다.
플레어의 피해는 세 단계로 나뉜다. X선이나 자외선 등의 자기파, 입자 방사선, 마지막으로 플라스마가 쏟아지는 코로나 질량 방출이다. 가장 먼저 광속인 전자파가 지구에 도착한다. 전자파는 강력한 에너지로 전리층을 구성하는 원자 속 전자를 끌어낸다. 포화한 전자 탓에 단파가 흡수되고 지구상의 모든 무선은 사용 불가능해진다.
그 때, 니조노 마오리는 미국에서 개최되는 재생의학 국제학회에 출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나리타공항에서 출발한지 30분, 비행기는 이미 성층권에서 안정적으로 비행한다. 니조노 마오리는 논문을 읽으며 꾸벅꾸벅 졸았지만 조종실에선 큰 소동이 일어났다. 항공관제 센터와의 무선이 끊긴 것이다. 동시에 공중 충돌 방지 장치도 꺼졌다. 온 세상의 공항에서 대 혼란이 일어났다. 공중 접촉사고, 활주로에서 일어난 충돌로 불길이 여럿 솟았다. 대형 제트기는 복엽기와는 다르다. 눈으로만 보고 조종하기가 힘든 것이다.
"승객 여러분 기체에 결함이 생겨 본편은 나리타 국제공항으로 회항합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기장의 방송에 승객들이 술렁인다. 주변의 긴장에 니조노 마오리도 눈을 떴다. 하지만 큰 혼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때까지는.
제트기가 크게 돌아 나리타공항으로 회항하던 도중에 태양에서 방출된 대량의 입자 방사선이 지구에 도착했다. 지상은 두꺼운 대기층에 막혀서 영향이 적었지만 성층권을 나는 비행기까지 지켜주기엔 대기층이 얇았다.
"승객 여러분 중에 의사 분 계신가요?"
스튜어디스가 큰 소리로 외친다.
"인턴인데요."
니조노 마오리가 손을 든다.
"따라와 주세요."
스튜어디스를 따라 조종실에 들어간다. 제복을 입은 여자가 계속 구토한다. 개중엔 피도 섞여 있었다.
"기장님인데, 갑자기 속이 메스꺼우신 것 같아서……."
홀로 남은 부조종사는 설명하는 스튜어디스 곁에서 신경질적으로 조종한다.
"지병이 있으신가요?"
기장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젓는다. 지병이 아니면 대체 뭘까…….
"큰 일이예요! 승객분이!"
다른 스튜어디스가 창백한 낯으로 뛰어왔다. 객실에서도 사람들이 줄줄이 쓰러진다고 한다. 증상은 구토, 설사, 탈모 등이라고 한다.
"말도 안 돼!? 그건…… 피폭 증상이잖아!"
니조노 마오리는 누구에게랄 것 없는 외침을 터트린다.
"피폭!!"
조종실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다.
그 순간 굉음을 일으키며 비행기가 크게 기울었다. 번개가 직격한 것이다. 심지어 위에서. 보통 번개는 구름 안에서만 발생하지만 구름은 비행기 아래에 있다. 번개는 성층권 위, 전리층에서 쳤다. 플레어의 X선이나 자외선에 의해 전리층이 가열되고, 대규모 대류가 발생해서 전자 밀도가 높은 전리층과 지구 자기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전류가 생겨난 것이다.
"뭐 하는 거야! 똑바로 조종 하란 말야!"
니조노 마오리가 부조종사를 거세게 채찍질한다.
"저어……, 기계가 맛이 간 것 같은데……."
신참으로 보이는 부조종사는 반쯤 패닉 상태였다.
"농담이지!?"
"비상 착수 하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세요……."
니조노 마오리는 자기 자리를 향했다. 통로는 토사물과 설사에 범벅이 돼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조종사들이 피폭되고, 비행기들이 추락했다. 전투기나 폭격기도 낙하하며 탑재돼 있던 핵폭탄이 지상을 오염시켰다. 국제우주정거장 우주비행사들은 모두 사망했다.
비행기가 급속도로 낙하하자 몸무게가 가볍게 느껴진다. 수면이 보인다. 비행기 그림자가 점점 커지고, 파도를 일으키며 착수한다.
이 순간 니조노 마오리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익사나 피폭이 아니라 후루츠키 미카를 향한 걱정이었다. 후루츠키 미카의 뇌는 지금도 액체질소에 담겨 병원 지하에 단단히 보관된 상태지만 만약 자신이 여기서 죽으면 조만간 쓰레기로 버려질 것이다. 절대로 죽을 수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어서! 나가세요! 침몰해요! 침몰한다구요!"
탈출시키는 부조종사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해치로 찬 물이 들어온다. 이대로 가다간 익사한다며 승객들도 허둥대기 시작하자, 피투성이 토사물이 허공을 메운다. 니조노 마오리는 쏟아지는 토사물을 팔로 막아내며 탈출구를 통해 해치로 나갔다. 수면의, 구명보트가 될 미끄럼틀에 들러붙는다. 비행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승객이 반도 탈출하기 전에 들어찬 물에 기울어진다. 말려들면 다 죽는다며 미끄럼틀을 떼 냈다.
미끄럼틀 위에서 니조노 마오리는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섬이 보인다. 여긴 아마 치바 앞바다일 것이다. 곧 배가 올 줄 알았지만 무선과 GPS를 쓸 수 없기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물과 음식이 없는 상태로 밤이 찾아왔다.
해가 저물어도 썩 어두워지지 않았다. 하늘에 핑크색으로 빛나는 띠가 살아있는 커튼처럼 울렁인다. 오로라다. 플레어 세트의 3탄이며 가장 큰 재해를 일으키는 코로나 질량방출이 마침내 지구에 와 닿은 것이다. 자기장 구슬치기로 날아온 태양 주변 플라스마가 엄청난 속도로 지구에 담뿍 쏟아진다. 보통 지구 자기장에 막히기 때문에 북극과 남극에만 떨어지는 플라즈마가 자기장을 떨쳐내고 온 세상에 쏟아진다. 플라즈마는 대기중 전자와 충돌하곤 빛이 된다. 한 편 지구 자기장은 너덜너덜해졌다. 자기력선이 술 취한 야마타노 오로치의 모가지마냥 어지럽다. 지구 자기 폭풍이다. 변동하는 자기장은 온 세상의 전선과 가전제품에 유도 전류를 과도하게 흘려보내 합선시킨다. 이 순간 전 지구의 도시가 어둠에 가라앉았다.
병원의 인공호흡기가 정지해서 환자는 더없이 괴롭게 죽어간다. 신호등이 꺼지고 보행자는 차에 치여 더없이 고통스럽게 피를 흘린다. 게다가 최악의 사태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났다. 냉각 장치가 정지하고, 외부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상태로 지구상의 원자력 발전소가 차례로 멜트다운을 일으킨다. 게다가 인근 주민에게 신속히 경고해야 하지만 통신이 두절된 상황 하에선 불가능했다. 초기에 불을 끌 수 없었기 때문에 원자로는 끝없이 불타며 방사능을 흩뿌렸고,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죽어갔다.
니조노 마오리는 이 대 재해에 살아남았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근성이라고밖에 형언할 수 없다. 후루츠키 미카를 향한 마음이 그녀를 구한 것이다. 운이 좋았는지 체질 때문인지 피폭 증상은 없었다. 하지만 암이 걱정된다.
인류 문명도 살아남았다. 근성인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됐건 살아남았다. 남겨진 자들에게 남은 것은 가혹한 세계였다. 처리되지 않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능이 흩날린다. 플레어에 의한 입자 방사선이 만들어낸 질소산화물은 오존층을 파괴했고, 피부암을 일으키는 자외선이 그대로 쏟아졌다. 가열된 전리층에 의해 대기 대류가 빨라져서 이상기후가 빈번해졌다. 온난화도 빨라졌다. 이것은 태양에서 온 자기장이 강해졌기 때문에 은하에 난무하던 은하우주선이 들어올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은하우주선은 대기와 충돌해서 구름의 핵으로 변한다. 은하우주선이 늘어나면 구름이 많이 생겨 햇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한랭해지고, 줄어들면 구름도 적어지기 때문이 온난해지는 것이다.
태양관측위성은 전자파 때문에 고장이 나서 플레어 데이터를 입수할 수 없었다. 흑점의 수는 줄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플레어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고, 서둘러 위성을 쏘아 올려야 했지만 기초가 다져질 때까지 5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쏜 위성의 관측으로 인류는 더 무서운 사실을 밝혀냈다. 거대 플레어는 끝나기는커녕 아직도 현역이었다. 5년 전의 플레어 이후로 지구를 직격하지는 않았지만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대한 플레어가 빈번했던 것이다. 태양은 불안정한 혹성으로 돌변했다. 신기하게도 그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슈퍼 플레어의 원인 후보로 꼽히는 것이 태양에 다가가는 천체다. 천체와 태양간의 자기장이 엮여서 생겨난 에너지가 플레어를 일으킨다. 한 때는 방랑 혹성이나 왜성같이 어두운 천체가 태양 근처에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지만 철저한 관측이 천체설을 부정했다. 관측은 더 기묘한 사실을 밝혀냈다. 태양 부근의 플라스마를 살펴보면 자기력선의 동향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기력선이 허공에 먹힌 듯 끊긴 것이다. 끊긴 자기력선은 연에 달린 실처럼 흔들리며 엮여 있었다. 현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이었다. 자기력선은 N극에서 나와 S극에 빨려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관측이 시사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자기단극자(모노폴)다. S극만, 혹은 N극만 존재하는 소립자가 태양 자기력선 끝에 붙어있을 가능성이다. 현대 물리학적 패러다임에 있어서 모노폴은 우주 초기 확장 때만 발생한다. 만약 그 곳에 발생했다손 쳐도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널리 퍼져 더없이 드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관측되니 무어라 할 말이 없다. 플레어는 태양 주위에 대량으로 존재하는 모노폴에 의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어느 샌가 '모노폴 슈퍼 플레어'라는 명칭이 정착했다.
인류의 생존에 있어 중요한 점은 '모노폴 슈퍼 플레어'가 앞으로도 지구를 직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오존층이 파괴된 현재 지구에 일어나는 두 번째 직격인 인류뿐만이 아니라 지구 생명체의 대 멸종을 의미했다. 당장이라도 대책을 짜내야만 한다.
소란스러운 의논이 펼쳐졌다. 옐로스톤 화산을 폭발시켜 나온 에어로졸로 지구를 지킨다는 대규모 계획부터 무료로 모자를 나눠주는 소규모 계획까지, 심지어 인류의 유전자를 조작해 수생 인류로 진화시키자는 기괴한 계획까지 포함하면 761가지 계획이 후보로 채택됐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실행된 것은 유전자공학과 우주공학을 합친 것이었다.
계획의 요지는 방사선과 자외선에 버티면서 그것들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유전자 공학으로 만들어낸 공생 세균이었다. 방사선에 버티는 유전자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후에 발견된 균류에 있었다. 같은 유전자를 여러 개 복사하는 능력이 있으며, 방사선에 의한 손상이 일어나면 여러 유전자중 최대 공약수에 해당하는 유전 정보를 뽑아내서 대응하는 것이다. 또, 방사선 그 자체를 활동 에너지로 삼을 수도 있었다. 대 자외선 방어책은 적도의 멍게나 갯가재가 갖고 있었다. 적도는 자외선 방사가 강하기 때문에 세포 내부에 자외선 흡수 물질을 채워 넣은 것이다. 그리고 식물의 엽록체 유전자를 개량해서 기존에 에너지로 쓸 수 없었던, 파장이 짧은 자외선까지 에너지로 쓸 수 있게 됐다. 세 유전자를 합친 것이 '신 기관(Novum Organum)'이다. '노붐 오르가눔'은 공생 세균이며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처럼 고등생물의 세포소기관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이후에 의미가 확장되어 '노붐 오르가눔'과 공생하는 고등생물 자체를 '노붐 오르가눔'이라 칭하게 된다.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지구 궤도에 여러 소행성을 띄워서 '노붐 오르가눔'의 거처로 삼는다. 중심이 되는 생물은 카본 나노 튜브가 섞인 실을 뿜는 거미와 식물처럼 땅에 피어나는 해파리다. 해파리는 나이테처럼 밖을 향해 성장하고, 안쪽은 조금씩 굳어진다. 해파리 안에 거미가 들어가 거친 진공 환경의 방어막으로 삼는다. 거미는 카본 나노 튜브가 섞인 실을 뿜어 지구에 온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처럼 소행성과 지구가 이어지는 것이다. 저 실을 지주 삼아 여러 실이 방사형으로 펼쳐지고, 해파리가 지탱하면 일종의 공중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사라진 오존층 대신 해파리와 거미 공동체로 자외선을 막는 것이 계획이었다. 더없이, 미덥지 못한 계획이다. 유전자 개조 생물에게 맡기다니 한심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모노폴 슈퍼 플레어'에 피해를 입은 인류는 예산이 없었기에 거대한 방패를 만드는 등의 대규모 사업은 불가능했다. 기껏 해봐야 자기복제 생물을 투입하는 수밖에 없다. 그 외에 가능한 거라면 무료로 모자를 나눠주는 정도다.
이렇게 '노붐 오르가눔' 계획이 시작됐다. 도중에 기묘한 사실이 밝혀졌다. '모노폴 슈퍼 플레어'가 일어난 지 4년 3개월 후에 켄타우로스 자리 알파성계가, 6년 후에 땅꾼자리 바너드별이, 7년 6개월 후엔 사자자리 울프 359가, 8년 후에는 큰곰자리 랄랑드 21185가 슈퍼 플레어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관측된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알파성계는 지구에서 약 4.4광년, 바너드별은 약 6광년, 울프 359는 약 7.8광년, 랄랑드 21185는 약 8광년 떨어져 있다. 즉, 태양에서 '모노폴 슈퍼 플레어'가 일어난 순간, 주위 항성도 슈퍼 플레어가 발생한 셈이다. 뉴스를 들은 물리학자는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관측이 알리는 것은 이 우주에 있어서 국소성의 원리가 깨졌다는 사실이다. 어느 지점에서 일어난 현상이 중간에 있는 공간을 통하지 않고 먼 곳에 즉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상대성이론을 거슬러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바뀔 수도 있다. 물리학자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서로의 뺨을 꼬집었다. 자기가 꿈을 꾸는 게 아니냐는 의문에 준거한 행동이었지만 잠에서 깨는 이는 없었다. 그 후에도 시리우스A, 시리우스B, 고래자리 BL성, 고래자리 UV성이 뒤를 이었다. 온 우주의 항성에서 동시에 슈퍼 플레어가 일어난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인류가 한 줌도 이해 못할 사건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주적 공포에 전율했다.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좀 더 낮은 곳에서 찾아왔다. 우주가 아니라 하늘이다. 오존층을 대신한 '노붐 오르가눔'은 순조롭게 성장했다. 너무 많이 자랐다.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활발해진 태양에서 나오는 방사선과 자외선을 영양 공급원 삼아 우글우글 늘어나선 하늘에 떠 있는 숲을 만들어갔다. 자세히 보면 구름보다 높은 곳에 거대하고 얇은 회색 연 같은 게 보이리라. 공중 생태계의 기반이 되는 해파리다. 해파리는 무수한 지느러미를 만들고 성층권의 강풍에 올라 수십 년은 날 수 있었다. 그런 생애 중에 지구를 몇 바퀴씩 돌면서 단위생식으로 자손을 늘려갔다. 해파리와 공생하는 것이 거미다. 거미는 튼튼한 실로 지표면에 내려왔다가 영양분을 해파리로 옮겼다. 소행성과 이어진 기둥은 이제 거대한 나무처럼 변한 상태다. 굳어진 해파리에서 어린 해파리 폴립 수만 개가 돋아나 눈처럼 지표면에 쏟아졌다. 이제 힘들어진 것은 지표 생태계다. 안 그래도 태양 플레어 때문에 약해졌는데 수많은 거미에 해파리 따위가 수없이 몰려온다. 거미는 육식이며, 먹잇감을 산 채로 소화액으로 녹여 마신다. 인류도 먹잇감이 됐다. 먼저 기둥에 가까운 적도 부근 도시가 괴멸했다. 고층 빌딩은 거미 둥지로 적당했기에 거미줄로 수십 겹 둘둘 말렸다. 카본 나노 튜브가 들어간 실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새 건축물이 되어, 도시는 비정상적 경관을 이뤘다. '노붐 오르가눔'의 천적은 없었다. 자외선 때문에 외출할 때 모자를 챙겨 써야 하는 인류는 적이 되지 못했다. 거대 해파리를 항공모함 삼아 성층권을 오가기에 바다도 산도 성벽이 될 수 없었다. '노붐 오르가눔'은 적도 부근을 본거지 삼아 남북으로 세력을 뻗어갔다. 기존 생물의 에너지는 결국 광합성을 하는 식물에게 의존하며, 광합성은 가시광만을 에너지로 쓸 수 있다. 즉, '노붐 오르가눔'은 기존 생물보다 몇 배는 활발히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저 폭발적인 번식력과 활동력을 통해 '노붐 오르가눔'은 온 지구에 퍼졌다. 이제 인류, 아니 기존 생물의 열세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런 힘든 상황에 눈길도 주지 않은 니조노 마오리는 후루츠키 미카 부활 작업에 매진했다. 인류 멸망이 코앞까지 닥쳤기에 미래 기술에 매달리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부활시킬 수밖에 없었다. 방사선 피폭을 맞은 몸은 암이 진행되는 중이지만 부활을 위한 기술 연습을 자기 몸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면 일석이조였다.
그리고, 마침내, 후루츠키 미카는 되살아나게 된다. 죽음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였다. 그와 동시에 우주사를 지배하는 '아이돌'의 탄생이기도 했다.
Ⅲ
대체? 뭐지?
어둠 속에서 혼란에 빠졌다.
흐릿한 감각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감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조금씩 초점이 맞는다. 이건, 통증이다. 통증에 초점이 맞고 나니 다른 감각이 합쳐진다. 통증이라는, 확고한 감각을 발판 삼아 다른 감각에 의미를 부여한다. 빛, 소리, 냄새. 감각이 합쳐진 결과, 자신이라는 존재가 부상한다. 그녀는 자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한 번 손을 놨다간 감각이 다시 흩어지고 어두운 해저에 떨어지리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시각이 명확해진다. 뿔뿔이 흩어졌던 정보가 하나로 이어진 후 상을 자아낸다. 그녀는 그것이 외부라는 점을 알아챈다.
어두침침한 실내였다. 수술실일까. 수많은 의료기구가 빼곡히 들어찼지만 죄다 먼지를 뒤집어썼으니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모양이다.
"미카 짱, 보여?"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 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불러도 될지를 모르겠다. 얼굴을 보면 틀림없이 초로에 접어든 여자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양이 기묘했다. 수많은 파이프가 꽂혀있었기 때문이다. 파이프는 가슴, 배, 등에 꽂혀 있었다. 굵기가 3센티미터쯤 되는 파이프 수십 개가 몸에 박혀 있었다. 심지어 완전히 결합된 게 아닌지 이따금 틈새에서 검붉고 더러워보이는 액체가 흘러나온다. 두 발 대신 끄트머리에 바퀴가 둘 달린 의족이 달려 있었고, 바퀴는 움직일 것도 아닌데 끽~찰칵, 끽~ 찰칵 소리를 내며 공회전을 한다. 하지만 가장 비정상적인 것은 머리였다. 머리가 크게 도려진 상태였다. 오른편 앞머리에 테니스 공만한 결손이 보였다. 거칠게 수술했는지 상흔에는 딱지가 여러 겹 덮여 있었다.
비정상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인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무언가, 아주 따스한 것을.
"마오링……"
그녀는 떠올렸다. 자신이 누구냐는 사실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그토록 좋아하던 니조노 마오리를. 눈앞의 여인은 니조노 마오리다. 많이 변했지만 흔적은 남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후루츠키 미카. 아이돌이 못 된 채 꿈을 잃고, 혼란에 빠진 끝에 죽은 인간이다.
"마오링. 여긴 어디야? 왜 그렇게 됐어? 난, 대체……"
후루츠키 미카는 끝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그리고 목소리가 변했다는 점을 느끼고, 경악한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목소리인가, 개구리를 강제로 조련해서 악기로 만든 목소리같지 않은가.
"미카 짱, 생각나는 마지막 기억이 뭘까?"
니조노 마오리가 부드럽게 묻는다.
"나, 자살했어. 혼란스러웠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었어……"
그 때는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 생활에 대한 고뇌, 니조노 마오리의 제안, 동생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충격 탓에 혼란에 빠진 후, 현실을 들이대자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미카 짱, 넌 그 때 죽은 거야."
후루츠키 미카는 당황했다. 죽었어? 죽었다는 게 무슨 소리지? 자신은 지금 생각을 한다. 고로 도출되는 결론은 살아있다는 사실이며, 죽은 것이 아니다. 니조노 마오리에게 반론한다.
"아냐, 죽었어. 죽었다가, 살아났어. 미카 짱 이 거울을 잘 봐."
후루츠키 미카의 눈앞에 거울을 가져다 준다. 그곳에는 자신이 비쳐야 했다. 트윈 테일에 리본을 묶은 귀여운 소녀가. 하지만, 그곳에 비치는 것은…….
도축장 폐기물. 예를 들자면 가장 비슷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늘어진 내장 더미다. 축 늘어진 장 틈새에 콩팥이 대충 끼어 있다. 장 틈새로 보이는 얇은 금속 코드가 꿈틀꿈틀꿈틀꿈틀, 선충처럼 끊임없이 움직인다. 늘어진 장이 붙은 곳은 수정처럼 둥글고 투명한 구체다. 수정구에서 나와 훤히 드러난 근육이 테이프처럼 장을 받친다. 놀랍게도 공중에 떠 있는 수정구이기에 장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수정구 윗부분에는 풍선처럼 팽팽히 부푼 게 있었는데 그것이 수정구를 띄우는 듯했다. 풍선은 살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동맥과 정맥이 그물처럼 퍼져선 이따금 숨을 쉬는 양 몸을 움직인다. 풍선은 위였던 것이다. 한계치까지 늘어난 위다. 위를 부풀리는 것은 폐였다. 위 뒤편에는 기생생물처럼 폐가 딱 달라붙어 위에 공기를 공급한다. 후루츠키 미카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찾았다. 자신감을 잃었을 때도 자기 얼굴을 보며 웃어주면 기운이 났기에. 하지만 얼굴은 아무 데도 없었다. 대신에 찾은 것은 수정구 속 적갈색 뇌와 그 옆에서 바쁘게 좌우로 굴러가는 눈알뿐이었다.
"이게 뭐람? 악질적인 현대미술?"
후루츠키 미카는 무덤덤하게 내뱉는다. 복잡하게 늘어진 장 안쪽에 있을 성대가 떨린다.
"그게, 너야. 미카 짱. 내가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죽음에서 돌아온 존재."
니조노 마오리가 넋을 잃고 속삭인다. 후루츠키 미카는 다시 한 번 거울을, 그 속에 비치는 내장 대박람회를 본다. 이게 자신이란 말인가.
"어때, 귀엽지? 정말 귀여워, 다시 아이돌이 될 수도 있을 거야……"
귀여워? 이게? 살갗도 얼굴도 없는, 산산 조각난 시체를 대충 끼워맞춘 이게?
하지만 후루츠키 미카도 이해했다. 이 싱싱한 내장 덩어리인 자신이 귀엽다는 사실이.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인가? 보통 사람의 생각이 아니다. 사실 후루츠키 미카의 뇌 일부는 니조노 마오리의 뇌였던 것이다. 동결된 뇌의 일부가 결손 됐다. 결손을 메꾸기 위해 니조노 마오리는 자신의 뇌를 후루츠키 미카에게 이식했다. 그 순간, 니조노 마오리가 후루츠키 미카를 편집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후루츠키 미카 본인에게도 흘러들어간 것이다. 그렇기에 후루츠키 미카는 자신이 어떤 모습이건 편집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귀여워……. 귀여워……. 이 얼마나 귀여운가……. 후루츠키 미카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몇 번이고 되뇐다. 크나큰 호감의 감각이 밀려온다. 니조노 마오리가 응원해주던 시절을 떠올린다. 덕분에 아이돌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사무소에게 속아 넘어간 후 갈 길을 잃은 끝에 자살했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것쯤 뭐 어때, 살다 보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한두 번쯤 죽는 게 뭐 어때서. 흘린 눈물만큼 강해지는 거야. 비 온 뒤에 땅이 굳고 인생사 새옹지마다. 겨우 이정도로 꿈을 포기해선 안 된다. 아이돌이 된다. 우추 최고의 아이돌이 될 테다!
후루츠키 미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니조노 마오리의 뇌 일부와 융합한 결과, 두 뇌는 물 만난 물고기, 딱 들어맞는 테트리스 블록 같은 것이 됐다. 니조노 마오리는 후루츠키 미카의 실존에 기반을 주었다. 후루츠키 미카는 마침내 자신에게 존재 이유를 부여하는 이를 자기 안에 받아들인 것이다.
"마오링!"
후루츠키 미카가 외친다.
"가르쳐 줘! 이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 몸으로 춤추고 노래할래, 아이돌이 되고 싶어! 무슨 일이 벌어지건 무대 위에 서고 싶은걸!"
"미카 짱……"
니조노 마오리는 눈물을 머금는다. 기뻤다. 수십 년 동안 후루츠키 미카를 부활시키기 위해 힘을 쏟아왔지만, 자살한 사람을 부활시키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이냐는 의심이 늘 가슴 속 한켠에 자리했다. 살아나자마자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자살하면 어떡하냐는 고민에 매일 밤 잠 들 수 없었다. 사람을 수없이 죽이고, 배를 가르곤 장기를 뽑아낸 끝에 만들어낸 후루츠키 미카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귀여웠지만 그럼에도 불안했다. 미카 짱이 만족할까, 아이돌 활동을 다시 시작해줄까, 반신반의 하면서도 부활시킨 끝에, 더없이 기쁘게도 아이돌로서의 꿈과 희망에 가득 찬 후루츠키 미카를 다시 보는 데 성공했다.
그럼 후루츠키 미카는 이 몸으로 어떤 레슨을 받을지 아주 흥미 깊은 문제지만, 그 전에 명칭을 확인해 두자. 그녀는 이후에 아이돌로서의 재능을 꽃피워간다. 아이돌로서의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며 '제2세대 아이돌'로 부르기로 하자. 자살 전의 후루츠키 미카가 '제1세대 아이돌'이며, 사후에 부활을 이룩한 그녀가 '제2세대 아이돌'이 되는 셈법이다.
'제2세대 아이돌'은 니조노 마오리의 지도하에 연습을 이어간다. 기본적인 이동수단은 위를 이용한 공중부유와 폐를 이용한 공기배출이다. 이 미미한 추진 수단이 내는 최고 속도는 기껏 해봐야 시속 3킬로미터다. 위는 부식성 가스에 부풀어 공중에 뜰 수 있다. 성능이 썩 좋은 것이라 원리로서는 성층권까지 다다를 수 있다. 식사는 체외소화방식이다. 장에서 직접 소화액을 뿜고, 녹아내린 음식을 흡수하는 것이다. 공중을 천천히 나는 해파리, 그것이 '제2세대 아이돌'에게 주어진 생태다. 그렇게 나약한 존재지만 호신 수단은 존재한다. 신경 잭 코드, 해파리 독침처럼 뾰족한 끈 두 개. 이것은 오리지널 후루츠키 미카의 척추신경이었던 것이다. 이 코드를 다른 생물의 뇌에 꽂으면 의사를 빼앗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그 마지막은 면역기능을 변경해서 상대의 몸을 자신의 일부로 삼을 수 있는 대단한 물건이다. 이 기능을 이용하면 수명과 상관없이 반영구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대단한 기관이다. 물론 세포 속에 '노붐 오르가눔'이 공생하며, 자외선과 방사선 내성도 가진다.
비행기에서 피폭되고 걸린 암에 침식당하는 니조노 마오리 또한 자기개조를 행했다. 후루츠키 미카를 부활시키기 위한 실험체로 자기 자신을 썼기 때문에 '제2세대 아이돌'보다 훨씬 구식 육체였다. 애초부터 인간스러운 육체는 죄다 껍질에 불과했으며 육체 안에서 제 기능을 하는 것은 뇌 뿐이었다. 다른 기관은 암이 전이한 탓에 죄다 뽑아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 대신 남의 기관을 빌렸다. 요즘 세상엔 빈사 상태에 빠진 인간이 수없이 많이 생겨나기에, 머리를 쪼개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하고 배를 갈라 기관을 훔쳤다. 하지만 암에 걸리지 않은 정상적인 기관은 거의 없는데다 있어도 후루츠키 미카를 위해 챙겨뒀기 때문에 자신이 쓸 기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훔친 기관을 기운 누더기 모양새가 됐다. 누더기 기관은 보통 기관보다 훨씬 성능이 낮았다. 남의 기관을 강제로 연결한 것이니 방도가 없다. 성능이 낮은 기관을 일반적인 수준까지 활동시키기 위해 거대화시킨다는 단순한 수단을 사용했다. 그 결과 폐, 위, 식도, 소장, 대장, 췌장, 간, 신장 등을 서랍 속에 대충 쑤셔 박은 듯한 덩어리가 완성됐다. 니조노 마오리는 거대한 트레일러에 기관 덩어리를 틀어박고, 뇌가 있는 자기 육체와 파이프로 이었다. 세월이 흘러 파이프가 녹슬기 시작했는지 틈새로 액체가 흐르는 듯했지만 후루츠키 미카를 부활시키느라 신경쓰이지 않았다. 트레일러 표면에는 얇은 피부를 배양한 후 '노붐 오르가눔'을 공생시켜 자외선과 방사선을 에너지원으로 삼았다. 트레일러를 움직이고 생명을 유지할 에너지를 공급받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기에 이따금 시체를 먹으러 원정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트레일러에는 흡반이 달린 무한궤도가 딸려 있었다.
'제2세대 아이돌'은 몸을 움직이는 법을 배운 후 아이돌 활동의 일환으로 니조노 마오리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이들의 본거지는 도쿄, 아키하바라였다. 이 시대는 이미 일본 대부분을 '노붐 오르가눔'이 지배 하였으며, 정부나 자치체는 붕괴했다. 고층 빌딩을 기반삼아 빠르고, 길고, 튼튼함 세 박자를 갖춘 카본 나노튜브 거미줄이 여기저기에 깔린 데다 하늘엔 거대한 해파리가 여럿 떠서는 지상과 실로 엮여 있었다. 해파리 폴립은 눈처럼 위에서 쏟아져내리며 하늘을 수놓았다. 몇 안 남은 인간들은 거대 해파리의 그림자 밑에서 시궁창쥐처럼 몰래 살았다. 플레어의 거친 활동에 인류는 지구상에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도태되어 간다.
둘의 산보는 평범한 데이트가 아니었다. 주요 식량으로 쓰이는 시체나 빈사상태의 인간을 모아서 잡아먹는 아이돌 활동이었다. 인간들은 대부분 하수도나 복잡한 거미줄에 얽힌 빌딩 깊은 곳에 둥지를 틀고 산다. 니조노 마오리가 거대한 몸으로 건물째 부수면 들어 올린 돌 밑 쥐며느리마냥 우왕좌왕 도망쳤다. 이따금 반격하는 개체도 있었지만 트레일러에 달린 기관총으로 벌집을 만든 후 맛있게 먹었다.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자경단'이라 일컬었다.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철저한 반反 테크놀로지 주의자인 동시에 전통주의자였다. 저 좋던 과거의 아키하바라를 되찾는다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옛날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는다. 전통의 아이콘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이 테크놀로지를 거부하는 이들은 가혹한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기 몸에 로우 테크놀러지를 심었다. 팔, 허벅지, 배에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스프링을 삽입해 스프링의 탄력으로 등산용 밧줄이 달린 화살을 날린다. 화살을 거미집에 건 후에 밧줄을 당기며 점프한다. 되풀이함으로서 재빠르게 이동하는 것이다. 주된 무기는 화염병과 마체테, AK소총이다. 이들은 '노붐 오르가눔'을 꾸준하게 한 마리씩 죽여갔다.
당연히 인간을 먹는 니조노 마오리와 '자경단'은 대립한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노붐 오르가눔'을 제 몸에 받아들인 니조노 마오리를 인류를 배반한 자로 단정 짓고는 숙적으로 삼았다. '자경단'은 공중에 뜬 해파리 내부에 둥지를 틀고 이따금 니조노 마오리의 본거지인 고층 빌딩에 강습해 공격하기를 여러 차례. 니조노 마오리도 대항하기 위해 기관총, 레이저 총, 암시 장치 등의 부속장비를 갖췄다. '자경단'은 근대 장비를 쓰는 니조노 마오리를 이길 수 없었기에 지금은 휴전 상태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렇게 미묘한 휴전 상태는 '제2세대 아이돌'의 등장에 그 균형을 잃게 된다. 후루츠키 미카를 부활시키기 위해 폭주하던 니조노 마오리는 꿈이 이루어진 후에 빈틈투성이로 변했다. 무적같던 니조노 마오리에게 약점이 생긴 것이다. 그 사실을 '자경단'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움직임도 모르고 둘은 즐거운 아이돌 활동을 했다. 오늘은 웬일로 인간이 많이 모인 소굴을 찾아서 신선한 살점을 얻으려 했다.
"마오링~ 한 마리 도망쳐."
니조노 마오리가 트레일러로 인간들을 깔아뭉개 핏덩이로 만드는 도중에 한 마리가 도망쳤다. 아이다.
"제발요! 딸은! 딸 만큼은!"
부모로 보이는 인간이 두 손을 들고 앞에 나선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눈물 콧물이 폭포처럼 흐른다.
"음~ 어린 애면 그냥 넘어가줘야 하나~, 살려 줄게."
"네! 정말요!?"
"거짓말."
냉혹한 선고와 함께 총알이 아이들과 부모를 꿰뚫는다.
"우와~ 마오링은 의외로 무자비하네."
"그래? 미카 짱이랑 같이 있어서 그런지 힘을 많이 줬네."
니조노 마오리는 원격 조작으로 인간들은 한 데 모으더니 파이프를 살점에 꽂아 체액을 빨아들인다. '제2세대 아이돌'은 고깃더미 위에 자리를 잡고 소화액을 뿌리더니 장을 펼쳐 질척해진 살점을 흡수한다. 잔혹하리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돌 세계는 험악한 약육강식의 세계니 도리가 없다. 둘은 격렬하게 아이돌 활동을 이어오다 보니 어느샌가 밤이 돼 있었다. 평소의 니조노 마오리라면 말도 안되는 사건이었다. 태양에서 쏟아지는 자외선 방사가 없는 밤은 기존 생물이 활동하는 시간이었다. 당연히 인간들도 야행성으로 변했기에 위험성이 커진다. 아이돌 활동에 정신이 팔리면 생각지도 못하는 데서 실수를 하는 법이다.
"너희들의 잔혹한 흉행에 끝이 왔다!"
기운찬 소리가 울려 퍼진다.
"누구냐!?"
니조노 마오리는 깜짝 놀라 살점을 떨어트렸다.
"우리는 '자경단'! 아키하바라의 평화를 지키는 자!"
어느 샌가 수십 명이 포위하고 있었다. 자외선을 막기 위해 얼굴엔 온통 붕대를 감고 고글을 꼈다. 오른 손엔 마체테, 왼 손에는 AK소총, 그리고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수놓인 티셔츠를 장비했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몸에 갈고리가 달린 화살이 보일랑 말랑 한다.
"미카 짱, 물러나 있어."
니조노 마오리는 급소인 뇌를 트레일러에 집어넣었다.
"우리의 성지에서 너희들의 사악한……커헉!"
'자경단' 돌격대장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트레일러에 깔려 내장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공격 공격! 사격 개시!"
'자경단'이 AK소총을 겨누려 한 시점에 이미 니조노 마오리가 진영에 돌진한다. 벽에 부딪힌 계란처럼 손쉽게 인간의 생명이 사라진다. 진영 한가운데에서 급속도로 스핀이 걸린 트레일러 탓에 인간이 하늘을 난다. 돌면서 기관총과 레이저 총을 난사하고, 피부를 찢고, 살을 부수고, 피를 흘리게 만든다. 전력 차는 불 보듯 뻔했다. 이 시점에 도박을 시작하면 승산비(odds ratio)는 니조노 마오리가 이길 것을 나타내리라. 하지만…….
"어이쿠, 막 움직이다가 친구가 죽으면 어쩌려구요."
맙소사, 뒤에서 몰래 다가온 '자경단'원이 '제2세대 아이돌'을 붙잡은 것이다. 장에 마체테를 들이대면 손도 못 쓴다. 애초에 손이 없지만.
"미카 짱!"
회전을 정지한 니조노 마오리 위에 '자경단'이 개미처럼 우글우글 올라탄다.
"하하핫! 이제 사악한 괴물들도 끝……악!"
'제2세대 아이돌'은 자신을 잡은 단원에게 강력한 소화액을 뿌렸다. 멈칫한 틈에 도망친다.
"이 새끼! 죽여 버린다!"
"미카 짱! 도망쳐!"
단원이 뒤에서 '제2세대 아이돌'을 베려는 것을 본 니조노 마오리가 몸통박치기를 감행한다. '제2세대 아이돌'은 위를 부풀려 하늘 높이 떠서 전장 탈출을 꾀하지만 '자경단'이 자기 몸을 니조노 마오리의 캐터필러 틈새에 끼워 넣었기 때문에 기계의 동작이 멎는다. 지금이 기회라는 양 니조노 마오리의 몸체에 지향성 소형 폭탄이 설치되고, 구멍이 뚫린다. 구멍을 향해 던져진 화염병탓에 거대한 장기는 찜통 속에 들어간 꼴이다. 니조노 마오리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하지만 '자경단'이 상처에 들어가 맨손으로 장기를 쥐어뜯는다. 귀중한 동물성 단백질을 얻었다는 사실에 환희하며 두른 붕대를 풀고 니조노 마오리의 장기를 물어뜯는다. 니조노 마오리는 산 채로 먹힌다. 내부를 조려내는 동시에 맨손으로 장기를 쥐어뜯겨 먹히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
니조노 마오리는 먹히면서도 필사적으로 기관총을 쐈다. 코앞에서 발사된 총알이 모여든 인간들의 머리를 해시드 비프로 만든다. 동료들이 살점과 피, 똥덩어리가 되는 걸 보고서도 '자경단'의 기세는 여전했다. 오히려 더 열심히 니조노 마오리의 장기에 모여든다.
'제2세대 아이돌'은 상공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먹히며 죽어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자경단'중에 낯익은 사람이 하나 있는 걸 봤다. 오래 전 동생이었던 후루츠키 미야다. 피부암에 따른 종양이 얼굴을 울룩불룩 부풀게 했지만 흔적은 남아 있다. 그녀는 니조노 마오리의 장기에 달려드는 이들 맨 앞에 있었다. 형광봉처럼 마체테를 휘둘러 장기를 찢어발긴다. 그러는 와중에 니조노 마오리 인생 마지막 노력의 산물인 총알이 다가든다. 후루츠키 미야의 눈알이 있었음직한 부분에 주먹에 들어갈 만치 큰 구멍이 뚫리고, 물보라처럼 뇌가 터져 나온다.
동생이었던 이의 죽음을 보면서도 '제2세대 아이돌'의 마음속에는 슬픔 한 점도 생기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커다란 분노. 가장 사랑하는 이를 살해당한 분노뿐이었다.
"다 죽일 테다, 전부, 구축할 테다!"
다음 아이돌 활동 방침이 정해졌다. 복수다. '자경단'에게 더없는 고통과 죽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Ⅳ
복수라고 해봤자 지금의 '제2세대 아이돌'은 무력했다. 니조노 마오리라는 보호자를 잃은 그녀는 공중에 떠다니는 비닐봉투와 마찬가지다. 바람이 불면 저기로 둥둥 여기로 둥둥 제멋대로 흘러간다. 이래선 먹고 살기조차 힘들다. 아이돌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한 층 더 발전해야만 한다. '제2세대 아이돌'에서 '제3세대 아이돌'로 자가 개혁하는 과정이 없으면 시대에 뒤쳐진다.
아이돌의 성장에 필요한 것은 생체재료다. 그리고 '제2세대 아이돌'은 '노붐 오르가눔'의 일종인 거미를 주목했다. 카본 나노튜브가 섞인 튼튼한 실을 뿜는 그 거미다. 인간의 사체를 먹고 온갖 곳에 수없이 번식하며, 바위를 부수면 우글우글 기어 나온다. 밀리미터부터 시작해서 미터 단위로 크기도 다양해졌다.
'제2세대 아이돌'은 죽은 척으로 거미를 꼬여냈다. 멍청한 거미는 대놓고 걸려들었고, 장을 물어뜯는다. 그 때 신경 잭 코드가 달려들어 몸속에 파묻히고, 미래의 양식으로 삼는다. 목표는 실을 뿜는 기관, 출사돌기다. 다른 기관을 소화시켜 출사돌기만 남기고 온 몸 구석구석에 붙인다. 이것이 '제3세대 아이돌' 완성이다. 제2세대와의 차이는 위나 장, 폐 사이로 고개를 내민 수십 개의 출사돌기 뿐인 마이너 체인지였으나 이 기관의 유무에 기동성이 크게 변한다. 돌기에서 힘차게 배출되는 실을 얽고, 되감으면 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다. '자경단'의 화살 이동법을 흉내 낸 것이지만 카본 나노튜브가 섞인 실은 보다 튼튼하기에 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실은 또한 무기로도 쓸 수 있었다. 피아노선보다 훨씬 강하고 얇기 때문에 인간의 목, 팔, 다리 따위를 손쉽게 슥삭 잘라낼 수 있는 것이다. 아직 방어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는 없지만 함정을 깔 수는 있었다. '자경단'이 자주 다니는 데에 맛좋은 시체를 두고 주위에 실을 편 게 전부인 인스턴트 함정이었지만 놀라울 만큼 효과적이었다. 함정에 손발을 잃고도 살아남은 인간은 또 다른 함정에 재료로 쓰였다. 빈사상태인 자를 구하려는 인간의 심리로 다가온 동료들을 차례대로 살해한다.
'제3세대 아이돌'은 통과점에 불과했다. 아이돌이라면 좀 더 앞에 나서야 했다. 언제나 초심으로. 현재에 만족해선 안 되는 것이다. 몇 십 명쯤 죽였다고 만족하는 것은 어설픈 아이돌이다. 더 많은 인간을 살육해야만 한다. 아이돌 수준을 올리지 못 하면 시대의 바람에 짓눌리고 만다.
'제4세대 아이돌'의 재료로 쓰인 것은 인간이었다. 급소인 뇌를 방어하기 위해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라는 원칙처럼 수많은 뇌로 덮으면 된다. '아이돌'은 살해한 인간의 뇌 속 신경회로를 바꿔서 완전 수동적 노예로 만들고, 카본 나노 튜브제 피막을 덮은 신경으로 이었다. 노예 뇌로 하여금 자신의 뇌를 방패처럼 덮게 한다. 의식에서 출발한 신호가 노예 뇌를 구동시키고, 뇌들에 제각기 존재하는 자의식은 억압당한다. 거대한 뇌 덩어리가 된 '제4세대 아이돌'은 강력한 이동기관을 필요로 했다. 이곳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사용했다. 인간의 손이나 발 따위를 방사형으로 붙여 고속으로 굴리는 것이다. '자경단'에게서 빼앗은 AK소총이나 마체테를 들렸기에 구르면서도 공격할 수 있었다. 당연히 눈이나 코, 혀를 비롯한 감각기관, 소화기관도 액세서리처럼 몇 십 개씩 달았다. 코디 차림새도 완벽하다.
카본 나노튜브 실, AK소총, 마체테를 장비한 '제4세대 아이돌'은 마침내 '자경단'과 전면전을 벌였다. '자경단' 본거지는 대류권과 성층권 사이에 뜬 거대 공중 해파리다. 해당 지점은 대류권 계면이라 불리며, 거대 플레어 발생 전에는 늘 초속 30미터를 넘는 제트기류가 흘렀다. 지금 풍속은 그 몇 배로 올라갔다. 원인은 오존층 파괴다. 오촌층은 자외선을 흡수해서 대기 온도를 낮춘다. 상층인 오존층이 달아오르면 대기 상태는 위가 따뜻하고 아래는 차갑기 때문에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성층권에서는 바람이 쉽사리 불지 않게 된다. 거대 플레어에 오존층이 파괴된 후에 성층권의 대기 안정성도 파괴됐기 때문에 제트 기류 풍속도 올라갔다. 거대 공중 해파리는 빨라진 제트기류에 연처럼 실려 공중에 뜬다. 수많은 거미줄이 지상에 내린 닻으로 변해 떠내려가지도 않는다.
'제4세대 아이돌'은 부패 가스를 위에 채워 뜬 후에 실을 이용해 하늘 위로 잽싸게 올라갔다. 거대 공중 해파리 아랫부분에는 버섯 같은 폴립이 수십은 붙어 있다. 인간들은 폴립 사이에 둥지를 짓고 살았다. 폴립이 성장하고 아래로 내려가면 둥지는 위에 있는 미숙한 폴립으로 이동한다. 유해한 자외선은 해파리 본체가 막고, 폴립 틈바구니에서는 공기나 열도 보존됐다. 거미들도 같은 곳에 기어들어오기에 '자경단'은 같은 자원을 노리는 라이벌이었다. 거미들이 아기를 곧잘 잡아먹고, 피부암도 한 몫 하기에 평균수명은 매우 짧았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 있었다. '제4세대 아이돌'이 올 때까지는.
'제4세대 아이돌'의 습격에 '자경단'은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다. 지상에서 가해지는 공격은 경계했지만 설마 상공으로 오지는 않으리라고 허투루 본 것이다. 방심은 금물이다. 아이돌 상에 평면적 견해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 것이다. 요즘 아이돌은 만나러 갈 뿐만이 아니라 만나러 오는 것이다. 유행에 뒤쳐진 죄는 목숨으로 갚아야만 한다.
"크아아아악!"
폴립 틈새에서 비명이 터진다. 요즘 시대에 뒤쳐진 '자경단'은 '제4세대 아이돌'의 압도적 아이돌 오라 앞에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습격 전에 일주일 정도 편안히 일광욕을 즐기며 '노붐 오르가눔'으로 얻는 에너지를 비축했다. 아이돌에게 있어서 휴일은 귀중한 것인데, 그녀는 푹 쉬는 쪽이었다. 휴일도 아이돌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다. 지금 이 순간 충전해 둔 에너지를 발산한다. 중요한 것은 일과 휴식을 명확히 나누는 것이다. 일할 때는 열심히 움직여서 인간을 죽여야만 한다. 그녀는 연습대로 스텝을 밟고, 실을 뿜고, AK 소총을 난사하고, 마체테로 목을 날렸다. 인간들은 '제4세대 아이돌'의 민첩한 안무와 귀여움에 비명을 질렀다. 그런 환성 속에서 '제4세대 아이돌'은 자신이 반짝이며 빛난다는 사실을 명확히 실감했다. 이것이야말로 전력을 내던진 아이돌 활동이다.
사람들의 환성이 잦아들고 앙코르를 청하는 소리도 없이 학살이 끝났다. '제4세대 아이돌'은 뒤풀이로 빈사상태에 빠진 인간들의 장기를 보수용으로 강탈하고, 살점을 먹고, 피를 마셨다. 속이 시원했다. 몇 년이고 준비한 끝에 아이돌 활동은 대성공을 이룬 것이다. 내게 주는 선물로 작은 집을 손에 넣자. 마침 '자경단'이 지내던 폴립 틈새가 있었으니 그곳을 개조해서 한 번 자기 취향으로 만들어보자.
'제4세대 아이돌'은 무기력하게 시간을 낭비했다. 이른바 번 아웃 증후군이었다. 아이돌 활동 방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처음 거둔 대성공에 흐려진 눈은 성공에 붙박여 새로운 한 발을 뗄 수 없게 된다. '아이돌'은 셀프 프로듀스가 기본이었다.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특기를 개척하는 것도 모두 자신에게 달렸다. 그런데 '제4세대 아이돌'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이돌로서 정말 하고 싶었던 건 뭘까. 그것은 춤과 안무로 관객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이다. 결코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다. AK소총을 연사해선 안 됐다. 빈사 상태인 이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 내선 안 됐다. 그 점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으나 '제4세대 아이돌'은 잊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늦은 순간에 기억해내고 말았다. 팬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을 죽였던 것이다. 팬은 아이돌의 본질이다. 팬이 없으면 아이돌은 아이돌이 아니다. 아이돌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팬들의 보완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아이돌 활동을 하느라 아이돌의 본질을 파괴하다니 블랙 코미디다.
지상을 뒤져보긴 했지만 '자경단'의 괴멸에 인간들이 가진 세력권은 크게 후퇴한 듯 보였다. 이젠 도쿄 부근에 인간이 살 곳은 없었다. 어딜 가도 거미, 거미, 거미, 해파리, 거미, 해파리. 운 좋게 찾아낸 인간은 대부분이 거미에 산 채로 기생당해서 먹히고 있었다. 기존 생태계는 붕괴했으며, 바퀴벌레조차 거미 앞에서 쇠퇴하는 듯했다.
팬을 찾아야 한다. 만나러 가는 아이돌에서, 만나러 오는 아이돌, 그리고 찾으러 가는 아이돌을 향한 성장. 요즘 세상에 팬을 만나러 가기만 해선 아이돌이 성립하지 않는다. 찾으러 가야만 한다. '제4세대 아이돌'인 채로 장거리 이동은 적절하지 않았다. '아이돌'은 시대에 발맞춰 자기 혁신한다. 이렇게 '제5세대 아이돌'이 태어났다.
'제5세대 아이돌'은 거대 공중 해파리를 신체 기반으로 삼았다. 몸길이 700미터쯤 되는 해파리를 자기 몸으로 만들기 위해 개조한다. 해파리 중심의 위 점막에 뇌를 고정하고, 온 몸에 신경을 퍼트렸다. 기동성이라고는 풍압에 뜨는 것뿐이었기에 부낭을 만들고 부패 가스를 주입해 기구로 만들었다. 해파리는 바람을 거슬러 날지 못하는 부유동물(플랑크톤)이었지만 뇌 컨트롤로 잡은 키, 부패가스 분사, 바닷물을 밸러스트로 삼아 바람에 자유로운 유영동물(넥톤)이 됐다. 촉수 끄트머리에 안구를 장착해 상공에서도 지상을 관찰 가능하게 한다.
마침내 '제5세대 아이돌' 세계 투어 데뷔다. 비행기 차량 전철 무엇 하나 없이 해파리를 타고 속 편히 홀로 떠나는 여행. 목표는 팬이 될 수 있는 존재의 발견. 태양풍은 점차 빈발하고, 밤에는 오로라가 빛나고, 자외선에 죽은 생물 탓에 일어난 적조가 바다를 메우고, 동물 뿐만이 아닌 식물마저 '노붐 오르가눔'이 대신하는 이 시대에 그녀는 지구상에 단 하나 뿐인 아이돌이었다.
일본 횡단 투어를 시작으로 세계로 뻗어간다. 류큐제도의 섬을 훑어가며 이동하고, 유라시아 대륙에 입성했다가 오세아니아로 남하한다. 스리랑카 섬 외곽에는 지구궤도 소행성에서 뻗은 거미줄이 내려왔고, 그곳을 중심으로 굳은 해파리가 성층권을 감싼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태양 빛이 해파리에 가로막혀 조금 흐린 날처럼 어슴푸레한데, 더 자세히 보면 위나 소화기관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굳은 해파리는 죽은 게 아니라 지상에 뻗은 더없이 긴 촉수로부터 수분을 공급받아 살아간다. 적도 부근의 굳은 해파리에서 기류에 흔들리다 찢겨 나간 파편이 새로운 개체로 변해 남북으로 떠나는 것이다.
적도 부근은 굳은 해파리에 자외선이 막히기 때문에 기존 생태계가 회복한 상태가 아닐까. 그러나 '제5세대 아이돌'의 예상은 낙관이었다. 적도에 다가갈수록 성층권에서 내려온 촉수에 잡아먹힌 생물 탓에 사막의 바다가 넓어지고 있었다. 고등생물이 전멸했기 때문에 플랑크톤이 대량으로 생겨나고, 그 시체를 먹을 이가 없는 채 썩어간다. 푸른 바다는 사라지고 진창 같은 수면이 끝없이 펼쳐졌다.
천공에서 내려온 촉수가 '제5세대 아이돌'을 잡아먹으려고 쫓아오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오세아니아를 벗어난다. 그 후에 수백 년에 걸쳐 유럽이나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를 순회하지만 팬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팬이 하나도 없는 데서 라이브를 벌이는 것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든 면이 있다. '제5세대 아이돌'은 그런 슬픈 일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보다 정신이 안정될 계획을 세웠다. 팬을 창조하려 한 것이다. 찾아올 시대는 아이돌이 직접 팬을 만들어내는 게 기본이 되는 것이다.
팬을 만들려 해도 요즘 세상엔 재료가 없다. 척추동물은 생선조차 해파리에게 남획당해서 멸종 위기였다. 넘쳐나는 것은 거미와 해파리 뿐, 팬으로 삼기에는 심각하리만치 못미더운 생물이다. 개중에서 비교적 나은 건 거미이리라. 사실 복잡한 집을 짓는 거미는 곤충 따위의 다른 절지동물과 비교해서 불완전하나마 복잡한 신경절을 보유한다. 일반인이라면 거미로 지적 생물을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초절정 귀엽고 천재적인 '아이돌'의 생각은 달랐다. 거미와 해파리를 사이좋게 합친 것이다.
지성을 만들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그러려면 뉴럴 네트워크를 만들면 된다. 뉴럴 네트워크는 뇌신경의 작용을 모델화한 것이다. 신경세포는 전설의 역할을 맡은 뉴런과 안테나 역할을 맡은 시냅스로 나뉘어 있으며, 뉴런에서 오는 전기신호는 시냅스 틈을 전달물질 방출의 형태로 통과해서 다른 뉴런으로 전해진다. 이 때 시냅스에 있어서 입력 신호에 따라 전달 효율이 달라진다. 학습은 이 전달 효율의 변화에 해당하는 것이다. 전달 효율의 변화 중에는 효율을 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낮추는 것도 존재한다. 또, 정보의 흐름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출력된 정보를 상류 입력층에 되먹임(피드백)할 수도 있다. 인간의 뇌 속에는 약 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이런 구조를 만들고 있으며 그 결과 더없이 복잡한 정보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해파리에는 중추신경이 없었다. '아이돌'은 그 대신 해파리 그 자체를 신경세포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인간의 뇌에 있어서 신경세포는 이온 농도를 이용해 구동하는 전위변화로 정보를 전달하지만 해파리 신경세포는 내부 거미의 움직임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촉수와 갓 부분이 접속된 해파리 네트워크를 만들고, 촉수 속에 거미를 드글드글 번식시킨다. 다른 해파리에서 자극이 전해지면 거미의 흥분은 차례로 이어진 거미에 넘어가는 형식으로 정보가 전파된다. 그러면 학습에 의한 강화는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 생물의 뇌에는 자주 쓰이는 신경세포에 '희돌기신경교세포(올리고덴드로글리아)'라는 세포가 얽혀들어 정보전달속도가 올라간다. 올리고덴드로글리아의 절연으로 전선에 피복이 씌인 것처럼 효율적인 정보전달이 가능해진다. 해파리 신경세포에 있어서 올리고덴드로글리아의 역할을 맡는 것은 거미줄이다. 자주 쓰이는 해파리 안에는 거미줄이 쳐지고, 거미가 줄을 건드리면 진동이 순식간에 퍼져서 정보가 빠르게 전달된다. 이런 해파리를 수천억 마리 번식시켜 온 지구의 하늘과 바다에 배치해 지구 규모의 거대 뉴럴 네트워크를 창조하려는 계획이다. 지구 팬 화 계획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수천억 마리의 해파리 신경세포를 만들 때 한 마리씩 수작업을 할 시간이 없다. 가령 한 마리를 하루 만에 만든다손 쳐도 천억 마리를 완성하기에 약 3억년이 걸리고 만다. 그토록 오랫동안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욕지기가 나온다. 그래서 증식을 해파리 자체에 맡기기로 했다. 젊을 때는 생식에 에너지를 쏟고, 나이가 들면 신경세포로서 서로와 접속하는 라이프 사이클을 설계한 것이다. 태어났을 때는 몇 센티미터 크기지만 자라면 몸길이가 약 100미터가 되고, 근처 해파리 신경 세포와 접촉하면 접속하게 된다. 이를 반복하면 네트워크 자기 조직화가 시작되며, 남은 것은 환경에서 들어오는 데이터에 적합해져서 지성이 생겨난다는 계산이다.
300년이 지난 후에 지구는 해파리에 뒤덮였다. 바다, 하늘 할 것 없이 둥둥 떠다니는 갓과 종횡부진 뻗는 촉수뿐이다. 자세히 보면 반투명 촉수가 맥동한다. 그 속에 검은 것이 움직인다. 거미다. 거미가 정보를 나른다. 거미는 해파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죽은 해파리를 먹는 역할도 행한다. 태양 방사로 에너지가 주어지고, 네트워크는 풀가동 한다.
이 네트워크는 학습을 반복한 후에 지성의 편린을 보였다. 성층권까지 확대된 제트 기류를 몇 만 년이라는 지표指標로 약하게 만들어 폭풍우를 잠재우고, 우주 공간에 수천만 년 이라는 지표로 바닷물을 뿌려 지축을 움직이고 계절을 없앴다. 지구는 안정적인 기후로 변했다. 태양 방사를 주된 에너지원으로 삼는 해파리 네트워크에는 괜한 환경 변동따위가 필요 없는 것이다. 한 편, 생태계 환경을 너덜너덜하게 찢어발기자 기존 생물들에게는 지옥으로 변했다.
그 무렵 '아이돌'은 마이너 체인지를 거듭해 제11세대가 됐다. 그런 그녀에게 해파리 네트워크는 흡족한 팬이라 할 수 없었다. 네트워크의 지성은 의식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해파리 네트워크는 지성을 보유했다. 하지만 비유적으로 표현해서, 얼굴 없는 지성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기쁨이라는 감정에 형광봉을 흔들고, 분노의 감정으로 앞자리 사람을 걷어차고, 무슨 일이 있어도 표를 얻고 싶은 마음에 암표 경매에 거금을 쏟아 붓는 등 내부의 이유와 행동이 이어져 있다. 반면 해파리 네트워크는 내부 상황과 행동은 이어져 있으나 그것은 이유가 아니었다. 네트워크의 행동은 늘 전체로부터 전해지는 출력의 결과이며, 또한 전체는 학습한 결과 상시 변동한다. 즉, 개별적인 감정이나 구체적인 이유가 어떤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네트워크 전체가 처리한 정보의 결과가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는 '아이돌'에게 있어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인간의 뇌를 모델삼아 해파리 네트워크를 만들었지만, 존재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이질적 지성이었던 것이다. 의식은 늘 구체적인 이유나 감정이 충만하다. 그 연속체가 '나'인 것이다. 해파리 네트워크에 '나'는 없었다. '아이돌'은 해파리 네트워크에 공포를 느꼈다. 라이브 하우스를 메운 관객들이 사실 좀비였을 때만큼 큰 충격이다. 게다가 요즘은 해파리 네트워크가 '아이돌'의 존재를 파악하고 자신들의 존속을 파괴할 가능 성이 있는 것으로 삼아 공격을 시작했다. 관객석에서 창이 날아오는 셈이다.
수천만 년간 노력을 거듭한 끝에 아무래도 팬을 창조하는 시도는 실패한 모양이다. 아이돌 경력이 긴 것 치고는 팬은 여전히 없다. 이제 그만 아이돌을 때려칠까 싶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아이돌 활동에 전념했던 빛나는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다. 안무가 성공하는 후련함,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느끼는 오싹함, 환성을 들었을 때 느끼는 감동, 자신이 빛난다는 실감을. 나는 아이돌이 좋다. 아이돌이 되고 싶다. 꿈을 꿈인 채 끝내기 싫다. 그런 마음을 품고 오늘도 아이돌 활동에 전념한다.
지구 생물로서 미증유의 발전을 이룬 해파리 네트워크였지만 허무하게 사라지게 된다. 수천 년간 이어진 플레어의 비정상 활성화가 마침내 끝난 것이다. 자기장 에너지를 과잉 방출한 반동인지 흑점 개수는 단숨에 줄어들고, '노붐 오르가눔'의 에너지원이 될 자외선과 방사선은 감소했다. 이 때만을 기다린 듯 오존층은 재생하고, 에너지 공급을 자외선에만 의존하던 해파리 네트워크는 와해된다. 지구 각지에서 해파리 신경세포의 죽음이 이어졌다. 에너지 공급이 정체된 해파리는 갈색으로 변하고 조직이 떨어져 나간다. 공중에 훌륭히 구축한 그물망이 무너지고, 신경 전달물질이었을 거미가 해파리의 시체를 먹어치운다. 그럼에도 네트워크는 지성으로 위기에 대항하려 했다. 수소 가스 기구를 만들어 전리층까지 올라가 오존층에 의한 영향을 줄이거나, 프로판 가스를 만들어 오존층을 파괴하려 했다. 만약 시간이 충분했다면 유효한 대항책이 세워졌으리라. 그러나 태양 활성화 정지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다. 산소 부족으로 파괴되는 뇌처럼 해파리 네트워크는 끊어지고, 전체로서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게 됐다. 마침내 지성을 발휘할 집합이 유지 불가능해진다. 지구 한랭화도 악영향을 끼쳤다. 태양 자기장의 저하에 은하 우주선의 지구 유입이 증가하고, 이를 핵으로 발생한 구름에 반사능反射能이 올라간 것이다.
남극과 북극 빙하가 다시금 만들어지고 시대는 빙하기에 접어든다.
태양 활동 진정화와 빙하기는 '아이돌'에게도 위기였다. 그녀 또한 '노붐 오르가눔'으로 에너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해파리 네트워크만큼 대규모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기에 한동안은 죽은 해파리를 먹으며 버텼다. 이는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얼마든 넘쳐나는 시체 또한 언젠가는 사라진다. 절전형 몸으로 드레스 업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아이돌'은 제12세대에 접어든다. 이 세대는 히키코모리 아이돌이었다. 몸을 빙하로 덮고 인공근육을 지느러미처럼 뻗어 파력발전으로 에너지를 공급했다. 근육은 전기자극을 가하면 움직이지만 거꾸로 움직임으로 전기를 발생시킬 수도 있던 것이다. 다른 영양소는 심해에 그물 같은 촉수를 뻗어 플랑크톤을 걸러내 섭취했다.
'제12세대 아이돌'은 지구 생태계가 회복될 때까지 히키코모리 생활을 했다. 그렇게 약 3억년이 흘렀다. 그동안 심해에 숨어 '노붐 오르가눔'의 학살을 피한 일반 생물들이 바다를 메우고 다시금 지상에 진출했다. 가장 먼저 발을 내딛은 것은 새우나 게 등의 갑각류였는데, 곤충과 비슷한 소형화와 다양화로 진화의 길을 걸어 나갔다. 갑각류를 따라 말미잘이 지상 진출에 성공했다. 말미잘은 고착생활을 접고 강인한 근육으로 잽싸게 움직였다. 방사형 촉수를 다리 삼아 갑각류가 보이면 수십 개나 되는 다리를 꾸물꾸물 움직여 중앙에 있는 입으로 덮쳤다. 그 후에도 해삼, 조개류가 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 적응방산이 일어나자 막으로 활공하거나, 굳어서 삽처럼 변한 촉수로 구멍을 파는 말미잘 등이 생겨났다. 지금이 기회라는 듯 '제12세대 아이돌'은 히키코모리 생활을 깨고 나와 '제13세대 아이돌'이 됐다. 온 몸을 말미잘의 자잘한 촉수로 감싸서 육상은 물론 표면장력을 이용하면 물 위도 달릴 수 있었다.
'제13세대 아이돌'은 이번에야말로 팬을 창조하려 했다. 예전에는 지구 규모의 뇌를 만든다는 까다로운 짓을 하려다 실패했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계획을 이어가리라 다짐했다. 이번 계획은 기존 진화 메커니즘을 완전히 같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말미잘을 보호하고 비의식적인 행동을 취하는 말미잘을 죽이는 것이다. 이를 반복하면 언젠가 의식을 보유한 종이 생길 것이다. 몇천만 년 걸릴지 모르겠지만 이토록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어찌 됐건 원리는 인간이 태어났을 때와 같은 방법이니까.
하지만 실행에 옮긴 결과 아무래도 그림의 떡으로 끝날 모양이었다. 애초에 의식적인 행동은 무엇인가. 만약 말미잘 자신이 가진 의식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탐구를 시작한다면 편하겠지만 그러지 않으니 진화시키려는 것이다. 의식적인지 아닌지는 말미잘의 내면을 해석해야만 알 수 있다. 말미잘임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애초부터 무모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근본적 파탄이 도래했다. '모노폴 슈퍼 플레어'가 다시금 덮쳐온 것이다. 모처럼 지상에 가득 찼던 말미잘, 새우, 게, 해삼, 조개 외 기타 등등 친구들은 플레어에 멸종했다. '제13세대 아이돌'은 실망했다. 이후, 바다 위에 만든 생체 망원경에 의한 관찰로 '모노폴 슈퍼 플레어'는 이번에도 우주 전체에 일어났음을 확인했지만 예외가 존재했다. 최근 3억년 사이에 발생한 아직 어린 항성은 어째선지 플레어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어찌 됐건 지성화한 말미잘을 팬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실패한 것은 명확하다.
아무래도 외우주로 나설 때가 온 모양이다. '아이돌'은 결심했다. 모국을 떠나자마자 갑자기 인기가 폭발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외우추로 가려면 걸맞는 준비가 필요하다. 옛날 같았으면 비자나 여권을 준비했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귀찮은 신청 없이도 거대한 에너지만 있으면 멀리 갈 수 있다. 문제는 필요한 에너지가 너무 큰 것이다. 말미잘 시체의 화학 에너지로는 아무리 용을 써도 필요한 양이 되지 않는다. 뭔가 더할 나위 없이 엄청난 짓을 해야 한다.
'아이돌'은 출발 삼아 대량의 생체소재 지구자전발전위성을 정지궤도 그 위로 쏘아 올렸다. 정지궤도보다 높은 궤도에서는 공전주기가 자전주기보다 느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위성의 공전 속도와 지구 자기장의 회전 사이에 간극이 생기고, 전자 유도를 이용한 발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론상으로 발전을 통해 얻어지는 에너지는 지구 자전속도 저하에 의해 균형이 잡힌다. 개개의 발전량은 아주 적지만 모든 위성을 합치면 방대해진다.
1만 년간 발전이 이어졌다. 그 간 얻은 에너지는 생체위성 성장에 쓰였다. 위성에서 진공에 적응한, 실 같은 점균이 발생해 서로를 얽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는 생체위성 집합체에 의해 토성같은 고리가 생겼었는데, 이들 위성이 서로 얽혀 굳자 실체 있는 거대한 링으로 변해갔다. 충분히 링을 고정한 후에 점균 실은 지상에 뻗기 시작했다. 지표면에 도착한 점균은 지면을 꽉 부여잡는다. 링과 지구의 회전 간극에 점균은 뻗어간다. 이 뻗어가는 과정을 이용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발전으로 얻은 에너지는 어디에 쓰이는가? 반물질 제조다. 링 내부를 입자 가속기 삼아 매일 꾸준히 반물질을 만들어낸다. 매일 반복한 것이 성과를 얻는 점은 체력 단련이나 반물질 제조나 마찬가지다. 아이돌에게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데서 매일 노력하는 것이다. 만들어진 반물질은 자기장을 통해 물질과 접촉하지 않도록 귀중하게 보존한다. 이 반물질이 외우주로 떠나는 여행에서 활력의 근원이 된다.
외우주 원정에는 반물질 제작뿐만이 아니라 신체개조도 필수도. 여행 준비를 하느라 3세대가 지났지만 다음 '제17세대 아이돌'로 준비가 끝난다. '제17세대 아이돌'은 소행성에 구멍을 뚫고 그 자리에 자기 뇌나 근육, 혈관을 배양했다. 점균이나 벼룩 따위로 이루어진 미니 생태계도 장비했다. 이들은 손상된 '제17세대 아이돌'의 기관을 치료하거나, 암으로 변한 세포를 제거한다.
준비는 충분하다. 남은 것은 반물질이 예정된 양만큼 쌓이기를 기다릴 뿐이다. 만들어진 반물질은 '제17세대 아이돌'의 뱃속에 실려 물질과 쌍소멸을 통해 추진 연료가 된다. 그러나, 흘려듣기 힘든 소식이 전해졌다. 태양계 주변 항성의 광량이 낮아지고 있던 것이다. 영문 모를 플레어가 일어나면 영문 모를 광량 저하가 일어난들 어떻냐는 의견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광량 저하는 마치 역병처럼 부근 항성에 퍼졌다. 그 속도는 의외로 빨라서 광속의 수 퍼센트에나 달한다. 광량이 저하한 항성은 이윽고 소멸한 듯 보이지 않게 됐다. 계산으로는 수천 년 안쪽으로 이 현상이 태양계까지 도달하게 된다.
반물질은 다 채우지 못했지만 '제17세대 아이돌'은 일정을 앞당겨 외우주로 출발하기로 했다. 영문 모를 역병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이유가 어쨌건 가까이 하기 싫다. 반물질이 떨어지면 다른 성계 행성에 착륙하고, 그 행성의 자전 에너지를 받아 가면 되겠지. 바이바이, 지구. 바이바이, 태양계. 돌아올 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아이돌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
'제17세대 아이돌'이 태양계를 출발한지 2천년 후에 어떤 역병이 태양계에 도달했다. 그 정체는 밀리미터 크기의 극소 기계무리였다. 기계무리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소행성대,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그 외 카이퍼 벨트 천체에 들러붙어 분해하기 시작했다. 태양계에 있는 모든 물질을 이용해 다이슨 스피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 기계는 어느 행성의 지적 생명체가 '모노폴 슈퍼 플레어'에 의한 멸망을 막기 위해 개발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만든 기계는 지금만큼 세련된 것이 아니었지만 슈퍼 플레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는 절대명령이 내려졌다. 기계들은 그 명령을 따라 플레어를 막을 가능성이 높은 자손들을 만들어간다. 라마르크적 진화의 반복으로 몇 세대고 몇 세대고 이어졌을 무렵에 행성을 해체하고 혹성 주위에 다이슨 스피어를 만들어 슈퍼 플레어를 막을 수 있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행성을 해체하는 과정에 기계를 만든 종족은 멸종한다. 스스로 번식하고 개량하는 기계들은 제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모성계 행성에 다이슨 스피어를 씌우는데 성공한 기계들은 이윽고 다른 성계로 떠난다. 이들 기계는 자의식을 갖지 않았다. 그저 절대 명령을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강력한 프로세스에 지나지 않았다. 절대 명령은 슈퍼 플레어를 막는 것이지 모성계에만 해당하는 명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계들은 다른 성계로 날아가 다이슨 스피어 건설을 확대하려 했다. 경량화를 위해 추진 기관 없이 다이슨 스피어에서 나오는 레이저 빔을 맞는 반동으로 움직였다. 감속할 필요도 없이 목표한 행성에 충돌하면 현지 자원을 이용해 증식하고, 다이슨 스피어로 만들었다. 여태까지 슈퍼 플레어나 '노붐 오르가눔'의 대두를 버텨온 지구의 생명에도 이들은 약간 힘겨웠던 모양이다. 지표 깊숙이 숨은 박테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이 멸종했다. 사실 토성의 위성 엥켈라도스에 기조력에 의한 열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생물이 소소하게 살고 있었지만 이 또한 멸종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아이돌'은 외우주에서 내키는 대로 아이돌 활동을 이어갔다. 반물질이 떨어지면 행성에 착지해 가뿐히 천 년쯤 쉬고 다음 원정을 떠났다. 생명이 진화한 행성도 썩 드물진 않았고, 그럴 때는 생체 물질을 빌려 세대를 업그레이드 했다. 지구 진화로는 상상도 못 할 생물이 우주에는 다양하게 존재했다. 예를 들어 지하수의 미세한 금속을 자신의 재료로 삼아 늘어선 결정대수結晶大樹군이 있었다. 대수들이 사는 행성은 타원형 궤도였기 때문에 연 1회 규칙적인 태풍이 불어오고, 그 때 자기 파편을 날려 새로운 자손의 핵으로 삼아 생식하는 것이다. 중력이 너무 가벼운 행성에서는 살아있는 거대 모기망 같은 것이 대기 중의 작은 동물을 포식했다. 이 생물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는데, 필요에 때라 융합하고 이탈을 반복해 알아서 커스터마이즈가 가능했다. 늘 바람이 부는 행성에서는 풍력 에너지로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을 유지하는 생물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드물게 지성을 보유한 생물도 존재했다. '아이돌'은 이들과 교역하고, 전쟁 또한 했다. 하지만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팬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라이브도, 악수회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생각하기조차 우스우리만치 방대한 시간이 흘렀다. 그 경험 속에서 '아이돌'은 마침내 깨닫는다. 팬은 어떻게 하면 생기는지. 의식이란 무엇인지를.
Ⅴ
의식이란 뭘까?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얻은 생물학적 기능의 하나라는 게 해답 중 하나다.
정말일까?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 간단한 실험을 해 보자. 당신의 스마트 폰으로 아이돌 리듬게임을 켜 보자. 개중에서 제일 좋아하고 수없이 플레이한 곡을 아무 생각 없이 플레이 해 보시지. 최고점을 갱신에 성공했는가? 그럼 이제 같은 곡을 다시 해 보자. 하지만 이번에는 의식을 강화해야 한다. 매 번 어느 손가락을 움직이고 어디를 탭할지 상세하게 생각하며 플레이 해 보자.
아마 아무 생각 없이 플레이했을 때보다 점수가 훨씬 낮아졌을 것이다. 의식을 생성하는 데에 여분의 에너지가 쓰였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정보 처리 기능의 성능이 떨어진 것이다. 의식은 이따금 효율을 떨어트린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려면 일일이 의식을 만드는 방법은 하이 리스크 노 리턴이다.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것 치고 얻는 게 없다. 그런 기능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리가 없다. 사자가 덮쳐왔을 때 무섭다고 생각하며 도망치는 것보다 내면 형성 없이 도망치는 게 몇 배나 빠른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의식이란 나면서부터 가진 생물학적 기능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의식은 후천적으로 개인에게 전수되는 문화적 기능이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의식이란 문명에 의해 개인에게 다운로드 된 소프트웨어다, 라고.
그럼 문제는 의식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어떤 방법으로 다운로드 되는가 이다. 잘 들어라. 잘 읽어라. 지금 여기에 그 답을 적을 테니.
의/식/은/아/이/돌/을/통/해/개/인/에/게/다/운/로/드/된/다.
우리가 아이돌을 볼 때 곧잘 자기 동일시 한다.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고 토크 하는 아이돌에게 자신을 겹쳐 보고, 그 노력을 평하며 내일부터 자신도 노력하자는 마음을 먹는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동일시'는 팬의 의식이 아이돌의 의식을 향해 동일해지려는 점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팬이 아이돌에게 감동하고, 형광봉을 흔들고, 매력에 빠지고, 자신의 내면에 아이돌의 대용품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처음으로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이돌은 애당초 아이돌이 좋기 때문에 아이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의 연쇄가 일어난다. 아이돌 팬이 아이돌이 됨으로서 의식의 증식과 전달이 일어난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돌은 협의가 아닌 광의다. 의식의 전달을 하기 위해서 TV에 나올 필요는 없다. 우리 학교 아이돌도, 친구 사이에서 아이돌로 여겨지는 사람도 상관없다. 또, 현실의 인물 뿐만이 아니라 픽션 상의 존재도 의식을 전달할 수 있다. 아이돌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은 의식을 전달하는 밈(meme)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은 아이돌에 열중한 결과 처음으로 탄생한다. 일반적으로 사춘기에 이르기까지 의식이 생겨나지만 운 없이 평생 의식이 없는 사람도 있다.
후루츠키 미카나 니조노 마오리도 고등학교 시절 아이돌 활동으로 수많은 사람의 의식을 만들어왔던 것이다.
전 후루츠키 미카였던 '아이돌'은 깨달았다. 아이돌의 존재에 필요조건이 의식의 존재라는 점이 아닌, 의식이 존재할 필요 조건이 아이돌의 존재인 것이라고. 그리고 또한 아이돌의 존재를 의식 가능한 정보 처리 능력을 지닌 생물이라면 의식을 다운로드 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아이돌 활동의 방침이 변했다. 진화에 개입해 의식을 탄생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 처리 능력을 지닌 생물에게 가 동일시하기 쉽게 해당 생물과 비슷한 몸이 되고, 아이돌 활동을 한 것이다. 이렇게 팬이 생겨나고, 의식이 생겨났다. 수억 년에 걸친 아이돌 활동은 마침내 성과를 맺은 것이다. 이따금 이성異性생물과 대립이 생겨 행성을 통째로 파괴해야만 할 사태와 직면했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아이돌에게 바라는 것은 완벽한 안무, 노래, 의식 창조가 아니라 못 해도 되니까 노력하는 모습이다. 행성 백 개나 천 개쯤 파괴한대도 내일부터 또 노력하면 된다. 그 후로도 '아이돌'은 온 우주의 행성을 순회한다. 우주 각지에서 의식이 생겨나고, 그 의식은 충족된다.
약 1조년 후, 우주가 죽기 시작했다. 암흑 에너지에 의한 우주의 가속적 팽창으로 물질이 흩어지고 더 이상 새 별이 태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무렵의 '아이돌'은 제747억 587만 1916세대였지만 은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운 우주를 만들기로 했다.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고, 블랙홀을 만들어낸 것이다. 블랙홀은 무한히 깊은 공간의 구멍이자, 밖에서 보면 유한한 크기지만 안에서 보면 무한히 넓어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다. '아이돌'은 거기서 블랙홀을 하나 더 준비해 두 블랙홀을 절묘한 컨트롤로 충돌시켰다. 이 때 발생한 충격은 내부 우주에 공간 왜곡으로 전달됐다. 공간 왜곡은 우주 배경 복사로서 이후에도 계속 기록으로 남는다. 어느 날 지적 생명체가 진화하고 우주 배경 복사를 관찰했다. 컴퓨터에 기록된 우주 배경 복사 데이터는 정보 생명체로서 준동한다. '아이돌'은 자신의 정보를 우주 배경 복사로 다음 세대의 우주에 전달한 것이다. 정보 생명체가 된 '아이돌'은 미디어에 스며들어, 그 속에서 의식 전달을 개시한다.
'아이돌'은 자신을 증식시키며 무수한 우주를 순회하고 무수한 의식을 만들어갔다. 그러던 중 우주의 증식은 시간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프레임은 한 우주에서 본 관점에 지나지 않으며 다우주의 관점으로는 자기 자손이 자기 선조였다는 사실이 곧잘 있는 것이다. 다우주는 일방적인 트리형 구조를 취한 것이 아니라 그물망 모양, 리좀형 구조였다. 이 구조는 무언가와 비슷했다. 그렇다, 뉴럴 네트워크다.
다우주는 우주를 신경 세포 삼아 정보처리를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충분한 정보 처리 능력을 지닌 존재는 아이돌에 빠져 의식을 얻을 수 있다. 다우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돌'의 활동을 인식한 결과 다우주는 팬이 되고, 의식을 가졌다. 다우주가 의식을 지닌 결과 우주도, 은하도, 성계도, 항성도, 행성도, 대륙도, 바다도, 박테리아도, 분자도, 원자도, 쿼크도 아주 엷지만 의식을 가지게 된다. 모두 아이돌이 너무 좋은 것이다.
다우주의 의식은 과거로 향해 자신이 존재하게 만들 공작을 개시했다. '아이돌' 출신 우주의 시간 방향을 뒤틀어 과거와 미래가 고차원에서 겹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모노폴 슈퍼 플레어'의 원인이었다. 과거와 미래의 행성이 자기 자신과 고차원에서 접촉했기 때문에 자기력선이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플레어가 발생했다. 3차원에 갇힌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자기력선이 튀어나온 듯 보였기 때문에 모노폴이 원인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어린 항성에 플레어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상호작용할 과거의 자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우주의 공작은 더욱 미묘한 부분까지 미쳤다. 후루츠키 미카가 고등학생일 때, 니조노 마오리의 알람시계를 빨리 울려 둘을 접근시키고, 후루츠키 미카에게 아이돌로서의 자신감을 심었다. 또, 후루츠키 미카가 자살했을 때 구급차를 니조노 마오리의 부모가 경영하는 병원으로 가게 했다. 이것이 '아이돌'의 탄생과 다우주 의식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다우주가 의식을 가진 상황에는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조화를 이룬다. 자유의 적으로 여겨지는 물리 법칙과 인과 법칙이 사실은 다우주 전체에 의한 자유로우며 의식적인 결단이기 때문이다. 또, 타임 패러독스도 일어날 수 없다. 과거와 미래는 의식이라는 관점으로 조화를 이뤄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우주의 의식은 '아이돌'의 출신 우주를 지나 과거로 향했다. 그리고 무수한 우주를 넘어, 후루츠키 미카로 비롯된 의식은 어느 한 우주에 당도했다. 이곳이 터미널이었다. 더 가면 정보 감쇠가 심각해져서 의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 우주에서 의식의 정보는 어느 한 소설의 형태가 된다. 후루츠키 미카라는 한 소녀가 최고의 아이돌이 될 때까지 노력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마지막까지 읽은 독자는 후루츠키 미카에게 공감하고, 자기 동일시 하고, 의식을 생성하리라.
독자란, 당신이다.
당신도 이제 이 소설 제목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최/초/이/자/최/후/의/아/이/돌'/이/란/당/신/이/다. 당신은 후루츠키 미카가 그 유래인 의식을 잇는 마지막 존재이며, 동시에 시간적으로는 최초인 존재다.
당/신/은/이/우/주/에/서/유/일/하/게/의/식/을/가/진/존/재/다.
이 소설 머리에 당신에게 사명이 있다고 했다. 이제는 이해했을 것이다. 당신의 사명이란 의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이돌이 되어야만 한다. 아이돌이 되어 남을 빠지게 하고, 공감시키고, 자기 동일시 시켜서 의식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수수를 쓰러트린 후로 사야의 밤엔 다시금 잠이 찾아들었다.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이 거짓말인 양 집이건 학교건 졸리면 쉽사리 잠에 빠진다.
오히려 너무 많이 잔다고 해도 될 정도다. 요 반 년간 필사적으로 졸음의 파도에 올라타려한 게 버릇이 됐는지 수업 중에도 잠깐 긴장을 풀면 쉽사리 잠에 빠진다. 그럼에도 잠 못 드는 채 몽롱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몸이 다시 잠에 익숙해질 때까지 1주일 정도 걸렸다. 늦은 진도를 따라잡기가 썩 어려울 줄 알았지만 양호 교사에게 이야기하자 담임과 하는 상담에 같이 가 줬다. 보충수업 안이 나오고 공부 계획이 정해지니 가족들에게 보일 면목이 서게 됐다.
"안색 많이 좋아졌네."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서려는 사야를 찬찬히 뜯어보던 언니 아야가 말했다.
"진짜?"
"다크서클이 연해졌어."
"그래도 아직 좀 남았어……"
"언니는 의외로 좋아해. 쇠약한 느낌이라."
"쇠약하단 말이야! 진짜로!"
삐친 사야를 보고 깔깔 웃은 언니는 거실에 돌아갔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는 학교건 집이건 가시방석 같았지만 냉정해지고 나니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잠만 제대로 자면 인생은 대충 잘 풀린다── 반 년간의 지옥을 헤쳐 나온 사야가 얻은 교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야의 마음 속에 초조함 같은 것이 점점 커져갔다. 갈증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처음엔 이해할 수 없던 감각이 평범하게 잠든다는 사실을 향한 불만이란 걸 알았을 때 사야는 경악했다.
혼자 잘 때보다 콘파루 히츠지와 동침하는 게 훨씬 깊고 편하고 기분 좋게 잠들었던 것이다.
수상쩍은 침구점 창고에서 다섯이 뒤엉켜 잤던 세 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저들과 자고 싶다. 슬립 워크 하고 싶다. 그 갈증을 자각한 순간 사야의 걸음은 자연스레 사카이모리 침구점으로 향했다. 지난 방문부터 약 2주가 지난 날이었다.
"어서 와요. 올 거라고 믿었어요."
침구점의 문을 두들긴 사야를 기다렸다는 듯 란이 맞았다.
"몸은 좀 어때요?"
"엄청 좋은데── 근데, 뭔가, 부족해서."
란은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럴 만도 해요."
"네……?"
"들어가서 얘기 하죠. 다들 모였어요."
줄선 침구와 높은 선반 사이를 지나 사야는 또다시 슬립 워커들의 침실에 들어섰다.
"어, 사야찌!"
제일 처음 본 카에데가 싱글벙글 손을 흔든다. 미도리와 히츠지도 소파에 앉아 사야를 돌아봤지만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란의 재촉에 같이 앉은 사야에게 미도리가 말한다.
"많이 참으셨네요. 역시 호카게 씨가 네버 슬리퍼라서 저희보다 더 잘 참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뜻이야?"
"한 번 슬립 워크 하면 중독돼요. 그냥 자는 것보다 훨씬 편히 잠드니까."
"뭣……"
넷의 안색을 살피지만 놀리는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그, 슬립 워크가…… 중독성이란 뜻?"
"뭐 대충 그런 셈이죠."
란이 툭 내뱉는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사야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다 짜고 나한테 사기 친 거야? 슬립 워크 중독으로 만들려고!? 어이가 없네 진짜──"
"어쩔 수 없어."
히츠지가 던진 말에 사야는 순간 조용해졌다.
"……어쩔 수 없다니, 뭐가."
"다 그렇게 돼. 나랑 동침한 사람은."
"다……"
사야는 다시금 테이블 둘레에 앉은 이들을 둘러본다. 란, 카에데, 미도리,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말없이 끄덕인다.
"그래도 있지 사야, 사기 치려고 한 건 아니었어. 왜냐하면── 먼저 내 침대에 들어온 게 너였으니까."
"뭐? 아니지, 내가 자려고 했는데 콘파루 씨가 멋대로"
"내가 자는데 사야는 멋대로 키스했었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
열이 뻗쳐 한숨을 쉬자 히츠지는 사야에게 손을 건넸다.
"……뭔데?"
"장황설은 됐어. 정말로 편안하게 자고 싶었던 거지? 지금도 그렇잖아?"
"그건."
"괜찮아── 이리 와."
그렇게 말한 히츠지는 눈을 감더니 후우 소리와 함께 힘을 뺐다.
사야의 시야가 어찔하며 흔들린다.
"아, 아."
소리가 멀어진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히츠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빨려들 듯 소파에 쓰러졌을 땐 이미 사야는 의식을 잃었다.
흔들리는 코끼리 위에 앉아 있자니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 떠올리기가 힘들어진다. 여자들이 앞길에 뿌린 금화와 꽃을 살포시 밟으며, 코끼리는 펼쳐진 논 위를 간다.
"속이다니 너무했잖아."
그렇게 비난했지만 날 무릎 위에 누인 히츠지는 기죽지 않고 쿡쿡 웃는다.
"속이지 않았어, 사랑하는 내 님."
"아무 말도 안 했어."
"안 물어봤는걸."
히츠지는 과일 쟁반에서 포도를 들어 무어라 더 항변하려는 내 입에 가져다 댄다. 매끄럽고 촉촉한 감촉이 입술을 따라 목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맛이 안 나."
"어머 아쉽게도."
백아白亞 궁전을 뒤로 한 우리 행렬은 밀림으로 나아간다. 오늘 밤 우리는 호랑이를 잡는 것이다. 목과 배에 흑단 갑옷을 두른 물소를 타고 호랑이 총을 짊어진 가신들이 행렬 선두를 차지한다. 저 멀리 눈을 뒤집어 쓴 산봉우리를 붉게 물들인 태양이 저물자 그 대신 횃불이 길 위의 금화를 반짝이게 했다.
느긋한 여행에 졸음이 몰려온다. 꾸벅꾸벅 졸기 직전에 짝 소리 나게 뺨을 맞았다.
눈을 뜨니 어느 샌가 란과 미도리를 태운 다른 코끼리가 옆에 와 있었다. 란이 든 작은 채찍 끄트머리로 때린 모양이다.
"아파. 왜 그랬어."
"자면 안 돼요 호카게 양."
"왜."
"슬립 워크 중에 잠들면 나이트 랜드가 집어삼켜요."
"집어삼키면?"
"나이트 랜드에서 잠든 슬립 워커는 두 번 다시 데이 랜드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조심하세요."
미도리가 무서운 소리를 별 것 아닌 양 던졌다.
"자세를 바로잡으세요. 오늘 잡을 호랑이는 강해요."
란이 말 한 호랑이가 수수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나도 이미 이해했다. 란은 총신을 세 개 엮은 장총을 들었는데 내 손에도 같은 무기가 있었다. 란과 나는 넉넉한 남장, 미도리와 히츠지는 얇은 천에 베일이라는, 무희 같은 옷이었다.
"카에데는 어디?"
"여깄어~"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여섯 팔에 제각기 언월도를 든, 온 몸이 새파란 여신상이 행렬 뒤에서 땅을 울리며 걸어오는 중이었다.
"세 보여."
"긋치~?"
밀림 안에 들어서자 횃불이 채 밝히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밤하늘의 별을 은사로 이은 거미집 같은 수수가 나타났다. 호랑이를 전혀 안 닮았지만 움직임은 어딘가 동물처럼 매끄러운 것이었다.
피에 굶주린 여신으로 변한 카에데가 돌진해서 수수와 부닥친다. 뒤를 이어 장총이 일제히 불을 뿜고 밀림을 붉게 물들여간다.
"……얼버무려도 안 넘어가!"
히츠지는 소파에서 눈을 뜨자마자 소리지르는 사야를 귀찮다는 표정으로 밀어냈다.
"모처럼 편히 자게 해 줬는데."
"고마워! 누가 재워 달랬어!"
히츠지를 향한 따스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사르르 사라진다. 열에 달떴을 때 꾸던 꿈은 열이 내렸을 때 기억 안 나는 것처럼. 깨 있을 때는 좋아하지도 뭣도 아닌 여자.
히츠지도 마찬가지로 삐친 듯 입을 삐죽 내민 사야에게서 멀어져갔다.
카에데와 미도리도 소파에서 일어났다. 란은 위아래로 휙 돌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본 잠버릇은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커피와 다과의 효과로 의식이 점차 명확해진다. 이번 과자는 부르봉에서 나온 루만도와 초코리에르였다.
검고 쓰고 뜨거운 액체를 들이키며 사야가 묻는다.
"우리, 이번엔 뭘 한 거야?"
"무슨 소리야?"
"저번에 나한테 기생한 수수를 쓰러트린 건 이해했어. 근데 이번엔? 그것도 누구한테 기생한 거야?"
"그렇죠. 나이트 랜드는 이어져 있으니까 어디 사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모르는 누군가가 불면증이나 악몽에서 풀려난다고 생각하면 조금쯤 기분 좋아지지 않나요?"
"수수가 그렇게 많은 거구나."
"몽마, 인큐버스, 서큐버스, 부쉬양스타(Būšyąstā), 샌드맨…… 꿈을 부르는 마물의 전승은 오래 전부터 전 세계에 존재했어요. 인간의 꿈에 기생하고 늘어나는 실체 없는 존재. 슬립 워커는 줄곧 이들과 싸워 왔어요. 저희 집안도, 사카이모리 양네 집안도."
점잖은 표정으로 말하는 란을 노려봐준 다음 사야가 말했다.
"속아서 중독된 게 진심으로 충격이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수면 중독 이예요. 처음으로 콘파루 양과 동침한 순간부터 호카게 양의 운명은 정해진 거예요."
한동안 말없이 생각한 후 사야는 마지못해 입을 연다.
"뭐…… 됐어, 어차피 잘 건데 못 자는 것보단 훨씬 나아."
란부터 시작해서 미도리, 카에데, 히츠지를 향해 눈길을 돌린 사야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같이 할 게……. 나 같은 사람 끼워넣었다가 무슨 일 생겨도 난 책임 못 진다."
나도 모르게 도와달라는 듯이 히츠지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히츠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잘 생각해보면 당사자한테 도움을 청해봤자 말이 안 된다. 굳이 따지자면 상대가 피해자니까.
"저기, 호카게 씨는 어떤 침대를 좋아하고 그런 거 있나요?"
미도리가 묻는다.
"침대도 좋고 이불도 좋고. 베개 내용물이나 시트 재료같이 원하시는 침구를 가르쳐 주시면 어지간해선 준비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얘가 기재 담당 이랬었지──. 바뀐 화제에 내심 안심하며 사야는 고개를 틀었다.
"음~……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 불면증 때문에 침대도 바꾸고 해 봤는데 결국 전부 소용없었고."
"아 그렇군요. 그럼 지금 제일 좋아하는 침구는 히츠지 짱이겠네요."
"뭣……"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소리를 듣고 말을 잇지 못하는 사야에게 새 칫솔을 내밀며 미도리가 미소 지었다.
"자기 전에 양치하는 게 좋아요. 그건 드릴게요."
"싱크대 먼저 쓸게."
히츠지가 가방에서 꺼낸 양치 세트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칫솔을 든 채 잠시 굳어있던 사야였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란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 본격적으로 자는 거예요. 몇 시간쯤……"
"그러게, 일단 3시간 정도로 해 둘까. 개인차는 있지만 수면은 거의 90분을 주기로 얕아졌다 깊어졌다를 반복하니까 슬립 워크도 그 시간을 기준 잡으면 스무스해요."
시계를 본다. 4시 반. 3시간 후면 어두워져 있을 때다.
"집은 괜찮아? 자기 전에 연락하는 게 좋아."
카에데도 휴대폰으로 뭐라 타이핑하며 말했다. 사야도 조언에 따라 언니에게 늦어진다는 메시지를 보내두기로 했다.
받은 칫솔로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군 후에 침대로 갔다. 각자 웃옷을 벗고, 리본이나 타이를 끄르고, 옷깃과 소매 깃을 푼 후에 양말을 벗고 잘 준비를 한다. 제각각 옷을 넣을 바구니가 있어서 거기에 벗은 걸 넣는 듯하다.
"자, 이걸 쓰세요."
사야는 미도리에게 바구니를 받고 머뭇머뭇 웃옷을 벗었다. 미도리는 시트를 새로 갈고 침대 옆 테이블 자명종을 맞추는 등 바쁘게 움직인다. 위를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서큘레이터 각도를 조절하기에 따라서 위를 쳐다보니 높은 천장에 업소용 대형 에어컨이 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부는 바람이 직접 침대에 맞지 않게 조절하는 모양이다.
카에데가 제일 먼저 침대에 뛰어들었다.
"사야찌, 다 됐어~? 누워 누워."
"으, 응."
거리 파악을 못 하겠네! 처음 보는 사람이 같이 자자고 했을 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까. 그냥 같이 자는 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준비하다보니 점점 긴장이 고조된다.
"실례……합니다."
"들어와 들어와~"
머뭇머뭇 침대에 오른다. 시야가 낮아지자 침대 위는 썩 넓게 느껴졌다. 퀸 사이드 침대 세 개를 빈틈없이 붙인 위에 주문제작으로밖에 안 보일 드넓은 시트가 덮여 있다. 그 위에 크고 작은 베개가 여럿 굴러다니고, 가지각색의 담요니 여름 이불이 마구잡이로 놓여 있다.
"다섯 명이 자니까 더울 지도 모르겠지만 배엔 뭐 덮어두는 게 좋아. 꾸룩꾸룩 하게 되니까."
위를 보고 누워서 큰 베개에 머리를 얹는다. 다른 넷도 사야를 둘러싸듯 제각기 다른 자세로 눕는다. 모두 머리를 사야 쪽에 향한 게 공통점이었다.
미도리가 손을 뻗어 리모컨을 누르자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좀 떨어진 커피 테이블 위의 작은 조명만이 부드러운 빛을 발한다.
히츠지가 곁에 있으니 금세 잠 들 줄 알았지만 썩 졸리지 않았다. 불을 끈 후에도 마음이 붕 떠서 잘 수가 없다── 꼭 수학여행 온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여자들만 모여서 잔다는 상황도 비슷하다.
"……저기"
사야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예전처럼 단숨에 잠들진 않네요."
"콘파루 양, 오늘은 천천히 가는 거야?"
란이 누운 채 묻자 히츠지가 답한다.
"모처럼 사야가 와 줬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그 뭐랄까 빨리 못 자서 안달하는 건 아깝잖아?"
"이런 식으로 같이 자는 건 처음인걸요."
"맞아 맞아."
"콘파루 양의 블랭킷 능력은 대단해요. 평소엔 억누르지만 하려고만 하면 끝없이 넓어지거든요."
"이래봬도 누르는 실력이 는 거야."
히츠지가 어쩐지 자랑스레 말한다. 란이 사야를 향해 미소 짓는다.
"걱정 말고 마음 편하게 가져. 곧 졸려 올 테니까 거기에 몸을 맡겨. 어려운 생각은 안 해도 돼. 평범하게 자면 돼……"
"평범하게 자는 방법은 이미 잊었는데요."
사야의 불평에 히츠지가 말한다.
"얘기하고 있어도 괜찮아. 무슨 수를 쓰든 내가 있으면 다들 확실하게 잠드니까."
"그러게요. 모처럼이니 궁금한 게 있으면 이번 기회에 물어보세요. 궁금한 것투성이잖아요."
란의 말에 사야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럼…… 이런 건 언제부터 시작한 거예요?"
"슬립 워커요? 같은 역할이었던 사람은 고대부터 있었다나봐요. 저희 집안에는 헤이안(서기 794~1185년; 역주)시대에 교토에서 베개맡의 주술 운운하는 문서가 전해져 와요."
"선배 가문에?"
"맞아요. 집이 신사거든요. 사카이모리 가와 오래 전부터 교류가 있었는데──"
"전 점장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제가 서둘러 침구점을 이어야 했거든요."
미도리가 이어가듯 말한다.
"란 짱은 슬립 워커의 지식을 물려받아서 둘이 시작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저랑 란 짱 밖에 없었어요."
"콘파루 씨랑 토키시마 씨는?"
"나랑 히츠지찌 둘 다 수수한테 당하게 생긴 걸 리더랑 미도리가 구해줬어. 그러니까 사야랑 같은 경위지."
"그렇구나……"
대화가 끊기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다시금 입을 열었을 때, 사야의 말투는 약간 흐리멍덩한 것이었다.
"왜 여자만 모였나 싶었거든요, 처음에."
"……네"
란의 맞장구도 간격이 조금 늘어진다.
"이렇게 같이 잔다고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싶지만 지금은"
"네에……"
"그래서 생각했어요. 여기엔 여자뿐이지만 슬립 워커가 달리 있으면, 그러면 거기서도 똑같이 여럿이 하면, 어딘가엔 남자만 모여 자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요."
"맞아! 그거."
카에데가 힘차게 외쳤다. 약간 발음이 뭉개졌지만.
"엄청 보고 싶어. 남자만 모인 슬립 워커. 뭣하면 내가 책 낼게. 동인지."
"봐 보고 싶어요, 그 책."
"어~ 그건 좀."
"그럼 왜 얘길 꺼냈어요……"
"그건, 그러니까, 왜……"
영양가 없는 이야기도 한 몫 해서 사야도 점점 멍해졌다. 의식이 머리 중심을 향해 떨어지는 듯한, 현기증과 비슷한 감각이 생겨난다. 그것을 느낀 듯 히츠지가 속삭인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 한 마디가 방아쇠가 된 건지 사야의 의식은 그 직후에 잠에 빠져들었다.
저 산 골짜기에 용 한마리가 사는 것을 마을 이들은 오랫동안 아무도 몰랐다. 어느 해질녘 약장수 하나가 서둘러 가려고 마른 계곡을 지나려했을 때 그곳에 커다란 도마뱀이 누운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약장수는 한껏 긴장했지만 용은 눈을 반쯤 뜨고 흥미 없는 듯 한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불꽃 숨결로 숯이 되지도, 긴 목을 뻗어 단숨에 삼키지도 않으리라 안심한 약장수는 흠칫대며 용에게 다가갔다. 용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당신은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시냐고 묻자 용이 대답한다. 이 계곡에서 백합꽃이 안 핀 지가 오래다. 너도 알겠지만 용은 꽃을 먹는 것이다. 나는 백합 꽃을 먹고 기천년을 살아왔지만 꽃이 피지 않는다면 방도가 없다. 이제 이 불모의 계곡에서 썩어갈 뿐이다.
허무하게 설명하는 용의 비늘은 아름다운 흰 색, 긴 꼬리와 날개 끄트머리는 연한 황록색. 눈은 짙은 노랑으로 빛난다. 저 모습을 본 약장수가 말했다. 자기를 한 번 돌아보라고. 계곡의 백합을 다 먹어치운 당신은 꽃 그 자체가 된 것이라고.
약장수가 내민 손거울을 들여다 본 용이 말했다. 과연 그랬군, 먹을 꽃이 없어질 만 하다. 내가 이미 백합이었구나. 하지만, 과연, 그러면 앞으로 어떡해야 하리오. 오랜 세월동안 백합 먹는 대룡大龍으로 살아왔기에 다른 삶을 모른다. 인간이여, 알고 있다면 가르쳐 주지 않겠는가. 그 말을 마칠 무렵에 용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마른 계곡이었던 곳은 눈길 닿는 곳 모두 백합 꽃밭이 돼 있었다. 이게 거기서 따 온 백합꽃이야. 나는 콘파루 히츠지에게 한 송이 백합을 내밀었다.
히츠지는 백합을 받아 들더니 눈을 감고 얼굴을 가져다 댔다.
"향이 좋네. 너무 진해서 머리가 어찔거려."
"괜찮은가? 내 사랑, 나를 안아주는 빛나는 양모야, 누워도 된단다. 풀이 요가 되어 우리를 부드러이 안아줄 테니. 꽃 먹는 도마뱀의 잠자리보다 좋은 침대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테니."
"내 소중한 사야, 정말로 대단해. 하지만 그건 다음에 해요."
"왜 그러니. 이 백합 계곡에 우리 둘 뿐인데 뭐가 부끄러울까."
"아, 사야, 그대, 들고 있는 거울을 보아요."
그 말에 나는 손거울을 들여다본다. 은색 표면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내 사랑아?"
"손 줘 봐 사야."
시키는 대로 내민 내 손 검지를 히츠지가 잡아 늘리자 손가락은 아무 저항 없이 늘어난다. 10센티, 20센티, 아픔도 위화감도 없이 늘어난다. 문득 깨달은 나는 외쳤다.
"앗!? 꿈이다!"
"헉."
사야는 너무 큰 충격에 눈을 떴다. 어두운 창고를 커피 테이블 위의 조명이 비추고, 침대 위엔 넷이 누워 있다. 고요한 숨소리 사중주에 사야의 거친 숨소리도 섞여든다.
쭈뼛쭈뼛 옆에 누운 히츠지에게 시선을 향한다.
히츠지는 자면서도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사야의 가슴팍에 얹는다.
"안 끝났잖아…… 도망가지 마……"
세상이 휘청 돌더니 사야는 다시금 잠 속에 끌려들어갔다.
나는 콜로세움의 메마른 모래에 뺨을 처박고 쓰러졌다. 추가 달린 전투용 그물이 발버둥 칠수록 엮여든다. 상대 검투사가 삼지창을 들자 객석이 와 끓어오른다.
마무리를 지으라고 외치는 관객들. 귀빈석의 황제가 손을 들자 소란은 썰물처럼 사라졌다. 몇 천 명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황제의 손이 엄지를 아래로 내리그이자 관중이 다시금 환성을 터트린다.
검투사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꼼짝도 못하는 내 곁에 오더니 삼지창을 내 등에 박아 넣었다.
아프진 않다. 숨 쉬기가 어려울 뿐.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은 충격과 안타까움에 눈물이 흐르려 하자 검투사가 말한다.
"어, 저기, 괜찮아? 사야찌."
"……어?"
고개를 들자 검투사 복장을 입은 카에데가 숙여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창에 찔린 줄 알았는데 온데간데 없다.
"토키시마……씨."
"맞아 사야찌. 겨우 잡았네. 이건 꿈이야. 이해 돼?"
"방금 알았, 는데, 숨을, 못 쉬겠."
"갑갑하대. 미도리~"
사이렌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투기장 모래 위로 구급차가 달려오더니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건 구급대원 옷을 입은 미도리였다. 모래에 무릎을 대고 나에게 말 한다.
"괜찮아요, 흔히 있는 일이예요. 데이랜드 쪽에서 배 위에 손 같은 걸 얹으면 살짝 갑갑한 느낌이 꿈속에서 증폭된 다음 심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거예요. 진정하고 천천히 심호흡을 해 주세요."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렇게요. 갑갑할 땐 당황하지 말고 숨 쉬는 데에 집중해 주세요."
"으, 응."
"꿈속에서 질식하지도 않고, 최악의 경우라도 그냥 깨고 끝이에요. …… 이제 괜찮아 보이네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어느 샌가 모래 위에 두 발로 서 있었다. 가득 찼던 관객석엔 아무도 없다. 남은 건 귀빈석의 황제뿐이다.
황제── 토가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히츠지가 살포시 모래 위로 내려섰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올려다본다.
"꿈이라고 가르쳐 줬는데 도망치는 건 너무하잖아."
"미안해. 너무 놀라서 그만."
뾰로통한 표정도 귀엽다고 생각하며 히츠지의 이마에 키스한다.
"엄멈머."
카에데가 눈을 크게 뜨곤 얼빠진 소리를 낸다.
"어, 어? 원래 그렇게 사이 좋으셨나요?"
깜짝 놀란 듯 묻는 미도리를 본 나와 히츠지가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터트린다.
"맞아. 왜 그런 걸까."
"그렇단 말이지. 왜 그러려나."
"아~, 그렇구나~"
카에데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다. 어쩐지 재밌어 보인다.
"사야, 자면서 꿈을 꾼다는 사실을 깨닫는 간단한 기술을 가르쳐 줄게. 레슨 1이야."
"응 가르쳐 줘. 히츠지 선생님."
"명석몽을 꾸는 유명한 방법이야. 자기 손을 보는 거지."
"손?"
나는 그 말대로 두 손을 펼쳐 내려다본다.
"일상에서 자기 손만큼 익숙한 건 거의 없지? 그런 것 치고는 모양이 굉장히 복잡해. 아마 손을 보면 적당하게 뇌에 부담이 걸린다고 보거든. 그 때 손가락을 잡아당기고 그러면 아무 저항 없이 변하니까 꿈을 꾼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어."
"진짜네!"
두 배로 길어진 검지에 깜짝 놀라 소리친다. 당기던 손을 놓자 청소기 전선을 정리하는 것처럼 슈룩 원상복귀 됐다.
"처음에 했던 것처럼 거울을 보는 것도 좋아. 꿈속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거울이 정상적으로 비치지 않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기억해 둘게."
"손을 갖고 노는 건 꿈속에서 변신하는 훈련 시작점으로도 좋다고 봐. 익숙해지면 이런 것도──"
그렇게 말 한 카에데는 힘차게 두 팔을 뻗었다. 순식간에 깃털이 자라나더니 대충 3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맹금류의 날개가 생겨난다. 지금 투기장 모래 위에 있는 건 사람 얼굴에 새 몸통이 달린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카에데는 날갯짓으로 모래를 흩날리며 떠올랐다. 구급차 지붕에 내려앉더니 비늘 달린 발톱이 차체에 손쉽게 구멍을 냈다. 괴물의 무게에 타이어 네 개 다 터지더니 차체가 가라앉는다.
"흐흥~ 어때?"
"엄청…… 예뻐."
"그치~"
내 감탄에 카에데는 새가슴을 으쓱댔다.
미도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카에데 양, 너무 우쭐거리지 마세요."
"안 그랬거든!"
"그건 그렇고…… 리더는 어딨어?"
히츠지가 주위를 두리번대며 돌아본다.
"여기 있어요."
의외로 가까이에 그 답이 있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란이 모래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후드가 달린 망토에 큰 활과 화살집을 멨다.
"이것 좀 보세요."
그렇게 가리킨 곳을 보자 모래 위에 작은 흔적이 수없이 남아있었다. 지네처럼 다리가 많이 달린 게 기어간 흔적으로 보였다.
"이게 뭐예요."
"호카게 씨에게 기생한 수수 발자국 이예요."
란이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서 끝장내려고 했는데 이상을 알아챘는지 도망친 모양이에요."
"도망친 거면 이제 수수한테 안 시달린다는 뜻?"
"그러면 좋겠지만 가만있으면 다시 와요."
시원스레 내뱉은 란의 말에 내 기쁨이 무로 돌아갔다.
"혹시 눈치를 챈 게 제가 꿈에서 나가서 그런 건가요."
"그것도 있겠지만 마음 쓰지 마세요. 수수는 원래 슬립 워커를 경계하니까요. 어찌 됐건 쫓아가면 끝이에요."
"맞아 맞아, 그러니까 빨리 가자!"
카에데가 재촉하듯 날갯짓한다.
"네. 호카게 씨, 이 투기장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풍경이예요. 마침 좋은 기회니 저 벽을 없애 보죠."
"어, 제가요?"
당황해서 되물었다. 주위를 빙 둘러싼 건 벽이라기 보단 거대한 건축물이다. 절구 모양 관객석은 언뜻 봐도 튼튼한 석조인지라 없애라고 해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레슨 2예요.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나이트 랜드의 모든 것은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해요. 부수자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부서져요. 지우개로 지우든, 폭탄으로 터트리든, 빔으로 녹이든. 상상하기 쉬운 방법이면 충분해요."
상상하기 쉬운 방법……. 투기장 가로 걸어가 벽을 만졌다. 거슬거슬하게 손바닥에 전해지는 돌의 감촉. 태양에 달궈졌을 텐데도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잡을 것 하나 없이 솟아오른 벽에 손가락으로 네모 모양을 그린다. 돌 위에 얇은 선이 새겨지기에 손톱을 끼워서 잡아당겨 봤다. 벽돌만 한 돌이 쑥 빠지곤 모래 위에 떨어진다.
그 순간 주위 벽이 지지대를 잃은 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붕괴는 쉼 없이 점점 더 힘차게 도미노처럼 넓어진다. 관객석에 귀빈석까지 10초도 안 돼서 모래 위에 흩어졌다.
덮쳐오는 엄청난 모래 먼지에 얼굴을 가리기 전에 세찬 바람이 뒤에서 불어왔다. 뒤를 보자 카에데가 모래먼지가 범접하지 못하게 큰 날개를 펼치고 날갯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너지는 돌들은 모래 속에 파묻히고, 어느 샌가 주위는 끝없는 사막으로 변했다.
"어때."
큰 일 해 낸 심정으로 묻자 히츠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없네~"
"에엑."
"얼마든지 더 호화로울 수 있었을 텐데."
"대단해보이면 장땡이 아니예요. 처음 한 것 치곤 잘 했다고 봐요."
미도리가 응원해줬지만 충격 탓에 감사인사도 못 했다.
"화려할 필요는 하나도 없지만 상상력의 폭을 일부러 넓혀두면 꿈속에서 자유도가 높아져요. 꿈이 단조로워지는 건 위험하다는 신호니까 대충이나마 기억해 두세요."
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진 않았지만 끄덕였다.
"어쨌건 이제 시야가 넓어졌어요. 수수를 쫓아갈 수 있겠네요."
란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발자국이 투기장이 있던 곳을 넘어 저 멀리 있는 모래 위에도 새겨져 있었다.
"그럼 가 볼까요. 이번엔 탈 것을 만들어 보죠. 호카게 씨, 한 번 해 보세요."
"만든다니…… 이번엔 어떡하면?"
"레슨 3이예요. 꿈속에선 뭐든 만들 수 있어요. 무기, 도구, 탈것까지. 당신의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 하엔 뭐든지. 아까랑 똑같아요."
"복잡한 건 어려운데, 복잡하다는 생각을 안 하면 의외로 쉬워."
카에데가 끼어들었다.
"무슨 뜻인데?"
"음~ 어, 예를 들어 총을 만들고 싶잖아? 그런데 총은 사실 구조가 꽤 복잡하거든.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어?"
"안 돼."
"그치. 그런 데에 걸리면 말짱 황이야.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오는 것쯤 된다고 대충 생각해보면 쉰게 만들 수 있어."
"그렇구나……?"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이동수단을 떠올리려 했다. 자동차…… 비행기…… 썰매……. 떠올랐다 사라지는 막연한 이미지 중에 하나를 잡아 디테일을 살리려 시도한다.
쿵쿵대며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리길래 고개를 들었다. 다섯 마리 말이 서 있었다.
"……나왔다."
카에데는 안심해서 혼잣말을 내뱉는 나를 재밌어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막인데 낙타가 아니네?"
"아, 그렇구나…… 그까진 생각 못 했어. 다시 해야 할까."
"이것도 좋잖아. 멋진걸."
이번엔 히츠지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래도 말발굽은 모래 위로 뛰기 힘들지 않아?"
"땅을 바꾸면 돼."
그러더니 히츠지는 쓰고 있던 월계관을 던졌다. 떨어진 데서부터 모래 위에 풀이 돋아난다. 순식간에 녹색 융단이 펼쳐지곤 모래를 덮어간다. 수수의 발자국이 있던 부분에는 색색깔 꽃이 피었다.
"이제 됐다. 가자!"
우리는 말 등에 올라탔다. 카에데도 변신을 풀고 인간이 되선 구급차 지붕에서 내려왔다. 말을 타 본 적도 없는데다 안장이니 등자니 하는 것도 없지만 꿈속이기에 아무 불편 없이 올라탈 수 있었다. 딱 한가지 문제만 빼고──.
"어? 어라~?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후후훗! 웃긴다!"
제각기 웃음소리가 터진다. 내가 만든 말에 타면 영문을 모르겠지만 뒤로 돌아 버린다. 즉, 진행 방향 반대인 꼬리 쪽을 보면서 말을 타게 되는 셈이다.
"사야, 너, 엄청 꼬였구나!"
신나서 말 한 히츠지가 자기 말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말이 단숨에 달려 나가고 누구 할 것 없어 환성이 터진다. 나도 고무감이 충동질하는 대로 웃었다.
맑던 하늘은 어느 샌가 푸름 얽힌 밤빛으로 변했다. 그래도 주위는 충분히 밝아서 잘 안보이고 그러진 않았다.
지평선에서 큰 달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운,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달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달밑에서 거꾸로 말을 탄 채 웃고 떠들며 달려간다.
몇 분인지, 며칠인지, 몇 달인지가 지나고 앞쪽에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목을 얽어 만든 철사 예술품처럼 생긴 그것은 여러 다리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우리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발자국에서 차례차례 꽃봉오리가 부풀고 꽃이 피어난다.
"저게 나한테 딸린 수수──?"
"그런가 보네요."
"좀, 크지 않아?"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수수의 크기가 점점 커져간다. 학교 건물만한 거대 조형물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풀밭 위를 맹진한다. 마침내 말이 따라잡은 후에 옆에 가니 크기 차이에 압도당할 것만 같다.
"사야! 겁먹지 마!"
히츠지가 발굽 소리에 지지 않는 소리로 외친다.
"네가 겁먹을수록 수수도 강해져!"
"아, 알겠어……"
말은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섭다.
"이걸 어떻게 쓰러트리…… 으악!?"
수수 옆에 달린 다리가 일제히 들리더니 주위를 쓸어냈다. 땅이 움푹 패고 말들이 차례대로 넘어진다.
공중에 뜬 내 몸을 뭔가가 잡았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다시금 괴물 인면조가 된 카에데가 나를 발톱으로 잡고 있었다.
카에데가 힘차게 날갯짓 하고, 땅이 쑥쑥 멀어진다. 수수 등 위에서 카에데가 발톱을 풀었다.
내려앉은 등판에는 긴 털이 돋아 있는 게, 거대한 장모종 강아지 같았다. 복사뼈까지 쑥쑥 빠진다. 밑에서 봤던 기계같은 느낌과는 달리 생물같은 게 의외였다.
카에데가 내 옆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었다.
"고, 고마워."
"오케오케"
"다른 애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미도리가 등에 올라탔다.
"굿 잡이었어요 카에데 양."
"긋치."
새처럼 끽끽 웃는 카에데 뒤에서 히츠지가 두둥실 떠오른다.
"아 사야, 무사했네."
"안 무사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히츠지는 안 도와줬잖아."
"사야는 그 정도에 안 당하잖아. 나, 아주 잘 아는 걸."
듣고 보면 맞는 말이다. 히츠지와 함께 있으면 뭐든 지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늘을 난다든가.
마음속에서 떠올린 순간 아무 전조 없이 발이 떠올랐다.
"악!"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제어에 실패하고, 위아래가 팩 돌았다. 위엔 수수의 등판, 밑에 하늘이 펼쳐진다. 다음 순간 나는 낙하하기 시작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히츠지와 애들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끝없이 이어진 푸르른 허공에 빨려드는 공포에 비명을 지르기 직전, 목덜미를 잡혔더니 낙하가 갑자기 멈췄다.
"소질이 있네요, 호카게 씨."
목을 뒤틀어 돌아보니 날 잡은 건 란이었다.
"레슨 4는 하늘을 나는 방법, 이었는데, 벌써 터득한 거예요?"
"모, 모르겠어. 갑자기 떠올라서."
"꿈속에서 나는 건 쉬워요. 특별하다는 생각 말고 평소에 걷고 말하는 것처럼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비결 이예요."
"당연히 토키시마 씨처럼 날개가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맞으면 날개든 뭐든 써도 돼요. 하지만 아무 것도 없이 날려고 해도 날 수 있어요. 방금처럼 당황해서 제어에 실패하면 움직임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가니까 최대한 빨리 익숙해져야겠죠."
나중에 찾아봤을 때 그런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이조메 란이 입에 담았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단순한 환자 모임이 아닌 듯했다.
"우리 슬립 워커는 비밀리에 사람들의 잠을 지키는 활동을 해요. 일반적으론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람의 잠은 수수의 위협을 받고 있거든요."
"수수……"
"당신이 자면서 쓰러트린 거예요. 수면의 수에 짐승 수 자로 수수睡獸."
"저기 란. 그렇게 한 번에 설명하면 안될 것 같은데? 사야 짱 굳어버렸는데."
"어차피 쉽사리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 가랑비처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단숨에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좀 거칠지 않을까."
"난생 처음 보는 당신에게 갑자기 키스하는 사람인걸요."
"그건 그래."
"잠깐!"
항의하는 사야였지만 란은 들은 체도 안 하며 말을 이었다.
"슬립 워커는 수수를 퇴치하는 게 목적이지만 개중에도 사람마다 잘 맞는 역할이 있어요. 당신의 소질은 아마 네버 슬리퍼. 꿈의 영향과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는 불면자는 그 수가 적은데, 수수와 싸울 때 중요한 전력이 돼요. 그러니 호카게 씨── 도와주시지 않을래요?"
"가, 갑자기 그래도 말이지."
"네, 물론."
사야가 거부하리라 예상했던 양, 란은 성급하게 끄덕였다.
"믿어 달라기엔 힘들겠죠. 설득에 시간을 쏟을 생각은 없어요. 내키면 여기로 와 주세요."
그러면서 건넨 것은 두꺼운 포인트 카드였다. '사카이모리 침구점'이라는 가게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멍하니 카드를 쳐다보는 와중에 히츠지가 말했다.
"이제 일어나주지 않을래? 이불을 못 접겠어."
"어, 응……"
시킨 대로 일어서고, 다리가 아파 휘청대는 사야 앞에서 히츠지는 익숙한 솜씨로 이불을 개서 안아들었다.
란은 사야에게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 하룻밤 자고 생각해 보세요. 무사히 잠들 수 있다면, 말이지만."
협박 같은 말을 남기고 아이조메 란은 돌아 나선다.
"내일은 다들 여기 있거든. 안녕~"
히츠지도 란을 따라 나가고, 옥상에는 사야 혼자만이 남겨졌다.
"뭐냐고……"
미묘한 굴욕감을 느끼며 뻗대고 선 옥상에 종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 샌가 6교시가 끝나 있었다.
다음날 방과 후, 사야는 포인트 카드에 적힌 침구 점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어제는 결국 잠들 수 없었다. 분하게도 아이조메 란의 말 대로였다. 사야의 불면은 변함없었고, 히츠지 옆에서 맛본 깊은 잠은커녕 선잠까지도 갈 수 없었다.
도와주면, 편안한 잠을 자게 해줄 수 있다── 란이 한 말만 들으면 신빙성이 없었지만 히츠지가 함께 있다면 또 달랐다.
슬립 워커니 수수니 하는 수상한 이야기는 둘째 치고 저 감미로운 잠만큼은 진실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야는 적혀 있는 주소를 향해 간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 사카이모리 침구점은 실존하는 모양이었다. 미리 전화를 걸어봤지만 자동 응답은커녕 뚜르르 소리만 이어졌다. 주소만 믿고 지도 어플을 켠 채 걷다 보니 점차 인기척이 적은 구역에 들어섰다.
"진짜 여기 맞나……?"
태반이 문을 닫은 어두컴컴한 상점가를 지나자 창고만 늘어선 무미건조한 곳을 배경으로 이따금 커다란 트럭이 보도를 긁을 듯 달려간다. 흐린 날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점점 불안해진다.
──나 괜찮으려나. 별로 안 괜찮지. 아니, 어라? 어제 그 얘기 뭐지? 슬립 워커? 그런……설정인가?
롤플레잉 놀이를 하는 걸까…… 연극 같이? 그런 거면 알아서 했으면 좋겠는데, 난 별로 안 땡기고. 이 불면증을 어떻게 해결 안 하면 아무 것도 못 하고. 협력…… 협력이라면 뭘 해야 하는 걸까. 정말로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걸까. 그 선배, 아무 말이나 한 거였으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래도 키스한 건 큰일이지. 약점을 잡혔어…….
침울하게 생각에 빠져 걷던 사야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주위 건물과 썩 다를 것 없는 지붕이 검은 커다란 창고가 보였다. 지도에 나오는 목적지는 아무래도 여기인 모양이다. 출입구는 셔터가 닫혀 있었고, 건물 앞 주차장은 금 간 콘크리트 사이로 잡초가 자라 있었다. 셔터 옆에 작은 문이 있는데 '사카이모리 침구점'이라고 덤덤한 간판이 걸려 있다.
문에 다가가 안을 엿본다. 문에 유리창이 달려 있지만 안이 어두워서 잘 안 보였다.
인터폰도 없어서 한동안 고민한 다음 노크했다.
대답은 없었다. 안에서 누가 움직이는 기척도 없다.
시험 삼아 손잡이를 돌려보자──열려버렸다.
"실례합니다~……"
떠듬떠듬 말을 던지며 안에 들어간다.
"저기요오……?"
문 안쪽은 짧은 통로였다. 철제 록커와 말라죽은 화분, 먼지를 뒤집어 쓴 석유난로가 벽 쪽에 붙어 있다. 통로 왼편에 있는 미닫이 문은 출입구 쪽과 이어져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 불 켤 스위치가 없나 벽 쪽을 자세히 쳐다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야!"
생각지도 못한 부름에 펄쩍 뛴다. 뒤를 보자 문가에 콘파루 히츠지가 서 있었다. 사야의 얼굴을 보자마자 히츠지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우와, 얼굴이 왜 이래!"
"뭐어!?"
순수한 매도에 울컥하는 사야. 히츠지는 익숙하게 팔을 뻗어 통로의 불을 켠다.
조명 아래에서 가만히 사야를 들여다보곤 말한다.
"다크서클이 엄청난데. 잘 못 잤어?"
"어제 내 얘길 듣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계속 못 잤다니까!"
"나랑 잤을 때는 좀 더 깔끔했었잖아."
천연덕스럽게 말 한 히츠지는 사야보다 먼저 안에 들어간다. 둘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와 줘서 기뻐. 너 같은 아이를 합류시키고 싶어도 대부분 안 믿어주거든."
"딱히 믿은 게……"
히츠지가 어느 틈에 꺼낸 열쇠로 다른 입구를 열었다.
"도와줘. 이 문 무겁거든."
"어. 응."
시키는 대로 손을 뻗어 무거운 문을 둘이서 끌어당긴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히츠지는 시커먼 데로 들어가더니 또 불을 켰다.
높은 조명에 매달린 조명이 가까운 데서부터 순서대로 켜진다.
그곳은 그야말로 침구 시장, 아니면 테마파크 같았다. 거대한 창고에 일정 간격으로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인 침대나 이불, 해먹이 그득히 늘어서 있었다.
히츠지는 사야 앞에 서서 침구 사이를 걸어간다.
"어때? 이런 거 처음 보지."
어쩐지 자랑하듯 말하는 히츠지.
"아닌데."
"뭐? 어디서 봤어?"
"이케아* 침구 매장."
그 대답에 히츠지는 김이 빠졌다는 듯 입술을 빼쪽인다.
"사야는 귀엽지가 않아."
"미안하게 됐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침구에 사야도 엄청난 규모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그 끝까지 가자 눈앞에 매트리스나 이불 등이 포장 그대로 놓인 선반이 천장까지 벽처럼 쌓인 게 보였다.
미궁에 들어온 느낌을 받으며 선반 사이의 통로를 걸어가다 보니 갑자기 트인 공간이 나왔다. 사방이 거대한 선반에 둘러싸인 중앙에 침대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엔 독서 등이나 만화, 학교 교과서 등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소파 세트 테이블에는 과자 봉지와 머그컵. 한 구석에는 싱크대와 가스렌지, 그리고 냉장고와 식기 선반이 갖춰진 부분이 있었다.
"화장실은 저기야."
히츠지는 오른 편 선반 끄트머리를 가리킨 다음 커피 테이블 위의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소파에 가방을 던지고 싱크대에서 컵을 설거지한다.
"사야는 물 좀 끓여 줄래?"
"엥."
"다른 애들 올 때까지 차나 마시면서 기다리려고. 커피도 괜찮고."
"……알겠어."
가스레인지 위의 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을 켠다. 테이블 위의 바구니엔 찻잎 캔과 인스턴트커피가 모여 있었다.
"마시고 싶은 거 아무 거나 골라."
그 말을 듣고 카모마일을 골랐다. 잠이 잘 온다는 허브티다. 집에서는 아무리 마셔봤자 효과가 없었지만.
주전자에서 삐 소리가 나서* 티포트에 티백을 넣고 물을 붓는다. 히츠지는 나무로 만든 과자 쟁반에 전병을 올려 왔다.
"'미왕 쌀 과자*'?"
"달콤 짭짜름해서 어디든 잘 어울리거든."
차를 따르자 허브 향이 올라온다. 히츠지의 머그컵은 금색에 양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야의 컵은 손님용인지 깔끔한 흰색. 이건 정말 IKEA에서 싸게 파는 걸 본 것 같다.
소파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침묵에 버티지 못한 사야가 물었다.
"여긴 뭐야."
"우리 침실. 업무용으로도 쓰이고."
"업무면, 슬립 워커…… 랬었나."
"맞아. 돈을 받을 때도 있으니까 진짜 일이야."
그 말을 들은 사야는 놀랐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본다. 확실히 창고 건물을 비롯해서 롤플레잉이라기엔 너무 거창하다.
"그럼, 진짜구나. 그, 수수나, 그런 거."
"그럼."
"그, 그래."
"불안한 표정이야."
히츠지가 놀리듯 말했다. 순간적으로 받아칠까 싶었지만 상황을 받아들이질 못해서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고개를 숙인 사야를 향해 히츠지가 아까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갔다.
"다들 모이면 설명해 줄게. 걱정하지 마."
설탕옷이 얹힌 전병을 하릴없이 먹고 있자니 곧 창고 저 멀리에서 타박타박 걸음소리가 다가왔다.
곧 선반 미로 사이에서 소녀가 튀어나왔다. 안경을 끼고 얌전해 보이는, 사복을 입은 소녀였다.
"아~ 죄송해요 늦었……어, 아직 둘 뿐이네?"
"당황할 것 없어, 점장."
히츠지가 말했다.
"콘파루 씨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어? 이 분은?"
"아, 안녕하세요……"
"얜 사야 짱. 나이트키스트고, 신입 후보."
"아,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사카이모리 미도리라고 해요."
소녀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인다.
"미도리 짱은 있지, 이 침구점 후계자야. 그래서 점장."
──점장, 이라.
뒤따른 것은 뭔가가 콘크리트 위로 미끄러지는 좌악 소리였다.
미끄러져 들어온 건 포니테일 소녀였다. 사야나 히츠지와는 다른 고등학교 교복에 파카를 덧입었다. 발꿈치에 바퀴가 달린 힐리스*를 신었다는 사실에 사야는 조금 놀랐다. 초등학생 때 유행했던 걸 고등학생이 돼서도 신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안뇽~. 어, 신입?"
"응, 맞아. 사야, 얘는──"
"토키시마 카에뎀다. 안뇽안뇽."
자기소개 직후에 아이조메 란이 다른 통로 쪽에서 가만히 들어왔다.
"다 모였네요."
"와!"
사야를 포함한 넷이 흠칫거리는 걸 본 체 만 체, 란은 깔끔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을 둘러싼 이들의 분위기에 사야도 알아챘다. 이 팀의 보스는 란이다.
IKEA(이케아): 북유럽 조립식 가구 판매점. 뭔가 크고 뭔가 많다.
주전자에서 삐 소리가 나서: 안에서 물이 끓으면 삐 소리가 나는 주전자. 정식 명칭을 모른다.
병원 복도는 너무 복잡했고, 벽 쪽에 늘어선 가죽 포장 벤치엔 많은 사람이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그 사이를 가르듯 나서지만 나를 보려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벽에 붙은 덕지덕지 붙은 전염병 예방 포스터엔 악몽에서 깨면 반드시 뜨거운 커피로 양치하라고 적혀 있었다. 커피 자판기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고, 아이들이 입을 헹군 커피를 옆에 붙은 세면대에 뱉어낸다.
진찰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 옷을 입은 애인이 고개를 내민다.
'다음 분' 애인이 그렇게 말 하곤 날 알아본다.
"어머, 늦게 왔네."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끌어안고 평소처럼 키스한다. 입을 뗀 애인이 꾸짖듯 말했다.
"커피 맛이 안 나는걸."
"태어나서 한 번도 마신 적이 없거든."
"그러면 위험해. 저기 좀 봐봐."
애인이 내 뒤를 가리킨다. 돌아보자 그렇게 많던 환자는 한 명도 없고, 다리가 수없이 달린 수수가 긴 복도에서 다가오는 중이었다.
"네 잠에 끌려 온 거야. 물러서 있어. 내가 해치울 테니까."
"괜찮아. 나도 저 정도는 해치울 수 있어."
덜걱덜걱 다리를 움직이며 들이닥치는 수수 앞에 노란 컬러콘을 놓아 길을 막는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자 뜨거운 커피가 나왔고, 나는 종이컵 째로 수수에게 던졌다. 수수는 흐물대며 녹아서 바닥에 펼쳐졌다.
"어때?"
의기양양하게 돌아보자 애인은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그만 넋을 일고 만다. 콘파루 히츠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 누구야?"
"뭐어!?"
충격과 함께 깨어난 사야가 가장 처음 본 것은 위에 올라타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콘파루 히츠지의 얼굴이었다.
꿈속에서 느껴졌던 사랑이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처럼 희미해진다. 콘파루 히츠지는 표정 변화 없이 사야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갸웃한다. 사야는 기가 죽으며 말문을 연다.
"아, 안녕."
"안~녕?"
그렇게 답하는 콘파루 히츠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도 안 되는 사야는 쩔쩔 맸다.
"저기…… 일어나도 될까요."
"안녕히이 주무셨어욧."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얘 뭐야 무서워. 옆에서 아까 본 3학년이 사야의 시야에 끼어든다.
"호카게 사야 씨."
"네, 넷!"
어떻게 내 이름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쳐다보는데 어느 틈엔가 3학년의 손에 사야의 학생수첩이 들려 있었다.
"2학년 C반 13번 호카게 씨. 왜 여기 왔는지 가르쳐줄 수 있을까."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도 허락을 구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돌려주세요, 수첩."
"똑바로 대답하면 돌려줄게. 심문하는 거야."
"심문이라니."
콘파루 히츠지가 몸을 쭉 내밀어 얼굴을 들이댔다.
"사야라고 하는구나. 어디서 봤었나?"
"저번에, 양호실에서……"
잠시간 눈을 굴리다가 손뼉을 짝 치는 콘파루 히츠지.
"아! 그 때 그!"
"마, 맞아."
"그 갑자기 키스한 얘야!"
갑작스런 돌직구를 맞은 사야는 변명할 말 한마디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앗 앗, 그건, 그러니까."
"키스……? 무슨 얘기야?"
3학년이 수상쩍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다.
"죄…… 죄송했습니다!!"
사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소리쳤다. 밑에 깔려 도망칠 수 없는 사야는 그 말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 많이 심한 불면증이었구나."
무릎을 꿇고 이유를 다 설명한 사야에게 3학년이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다라."
"네…… 어째선지 콘파루 씨가 곁에 있으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서."
"히츠지라고 불러. 나도 사야라고 부를게."
"앗, 그렇게 미국인처럼 거리를 좁힐 순 없는데."
약간 어이없어하는 사야를 향해 미소 지으며 히츠지는 말한다.
"키스했는데?"
"윽."
"미국인이라도 처음 본 사람한테는 키스 잘 안하죠."
"으윽."
"총 맞아도 할 말 없죠."
"재판 감이죠."
"그,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싱글싱글 웃는 히츠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사야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선수先手 콘파루, 동침."
히츠지가 갑자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응?"
"후수後手 호카게, 키스."
"큭."
히츠지는 장기 해설 흉내인지 뭔지 진지한 척 말을 잇는다.
"선수 콘파루, 낮잠. 후수 호카게, 요바이*."
"아, 아직 밤은 아닌데."
빈사 상태로 떠듬떠듬 반박 같지 않은 반박을 시도하는 사야를 보다 못했는지 3학년이 끼어들었다.
"콘파루 양, 그 쯤 해 두죠. 호카게 씨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꿈속에서 콘파루 양과 친했던 거죠?"
"아 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이해해요. 데이 랜드와 나이트 랜드 사이엔 그런 모순이 이따금 있으니까요."
"어……네?"
갑작스러운 뜻 모를 말에 당황한 사야에게, 이번엔 3학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것보다 몇 가지 자세히 물을 게 있어요. 호카게 씨,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요."
몸 상태는…… 좋았다. 아주 좋다. 잔 시간은 아주 잠깐일 텐데 머리속이 아주 맑다.
"굉장히 좋아요. 졸리지도 않고."
"불면은 얼마나 이어졌나요?"
"작년 가을부터 슬슬 시작하더니 완전히 못 자게 되고…… 그러니까, 이제 6개월쯤 지났으려나."
"6개월!"
"반년이나!? 우와, 그럼 힘들었겠다."
히츠지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렇게 불면상태가 이어지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사고 수준이 떨어졌을 텐데요. 그런데도 매일 학교에 왔었어요?"
"어찌어찌 걷고 말하기는 가능해서……. 수업은 못 따라가서 성적이 거의 바닥이었지만."
둘이 고개를 마주한다.
"얘, 네버 슬리퍼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콘파루 양, 실제로 동침을 했을 때 어땠어요?"
"완전하진 않지만 나이트 랜드에서 명석*활동 가능했던 것 같다. 수수를 쓰러트려서 깜짝 놀랐는걸."
"저기…… 무슨 얘기?"
둘은 사야에게 시선을 향한 다음 감정하듯 가만히 쳐다본다. 위축된 사야를 관찰하며 히츠지가 말했다.
"초대해 볼래?"
"괜찮겠어요? 콘파루 양 입장에서."
히츠지가 끄덕인다.
"알겠어요."
3학년은 이제껏 들고 있던 학생수첩을 사야에게 돌려주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아이조메 란. 콘파루 양과 마찬가지로 슬립 워커입니다."
"슬립…… 워커?"
아이조메 란이 당황하는 사야에게 말했다.
"당신에겐 소질이 있다고 봐요. 그것도 아마 희귀한 네버 슬리퍼의 재능이. 어때요, 저희를 도우면 편안한 잠을 제공해드릴 수 있을 텐데요."
이하 역주
요바이: 밤에 잠자리에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 성적 뉘앙스도 포함한다.
명석: 明晳. 판단력이 명확하다, 똑똑하다 등의 의미. 꿈속에서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아는 자각몽을 명석몽이라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