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세상에 별은 빛난다
stars twinkle in tomorrow world
츠카사 저
뭇슈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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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유키

아버지가 남긴 마술을 쓰는 소녀.

작다.

 

사카키 호노카

목적이 있어 여행하는 소녀.

몸매가 좋다.

 

페라

유키의 아버지가 남긴 펭귄형 사역마

12월 찬바람을 견디며 꼭 붙어서 잡담을──


목차

서장
제 1장 위치 라이프
제 2장 유키와 호노카
제 3장 펭귄 비박
제 4장 종말의 마녀
종장


서장
세계가 멸망했습니다.
뭐 오늘도 변함없이 하늘은 푸르고, 귀엽게 생긴 구름이 떠다니고, 따스함과 서늘함이 섞인 5월 바람은 기분 좋고, 강변에 피는 들꽃은 예쁘지만.
하지만 역시 이 도시──내가 혐오하는 세계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

기분 좋은 햇살 아래 타박타박 차도 중간을 걷는다.
차는 없으니 문제없다. 도로엔 까맣게 탄 오토바이나 연쇄 충돌 탓에 박살난 승용차만 방치된 상태.
평일 대낮부터 교복을 입고 차도를 활보하는 여고생에게 잔소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고생의 패션에서 탈선한 '예스러운 나무 지팡이'를 든 내게 호기심 담긴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없다.
이 도시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마도 나 하나.
죽은 인간이라면 수없이 많다. 그것도 아주 우글우글.
지금도 도로변──빌딩 그림자 속에 득실득실.
흔들흔들, 휘청휘청.
허술한 발걸음으로 배회하는 시인(屍人)들.
다들 옷은 넝마짝. 창백한 피부가 얼룩지듯 벗겨져 검붉은 살점과 하얀 뼈가 드러난 상태다.
──아무리 봐도, 역겹습니다. 움직이는 시체란 건.
햇빛을 싫어하는 저들은 낮이면 저렇게 그늘진 곳을 서성인다.
다만, 싫어할 뿐이지 딱히 약점은 아니다.
먹잇감이 보이면 양지로도 나온다.
지금도 한 마리씩 슬금슬금 나를 향해──.
"쀼이쀼이!"
그 때 어깨에 걸친 학교 가방에서 북슬북슬한 회색 조류──아기 펭귄이 고개를 빼고 높은 소리로 우짖는다.
"페라, 조용히 하세요. 알고 있으니까."
꽈악.
나는 '사역마'를 억지로 가방 속에 들여보낸 다음 손에 들고 있던 긴 나무 지팡이를 반 바퀴 빙그르 돌렸다.
빨간 돌이 박힌 지팡이 끝을 발밑에 굴러다니던 파편에 콕 찍었다.
그리고 염원하며 속삭였다.
"움직여줘."
왈칵 하고 몸에서 힘이──체온이 빨리는 감각.
지팡이를 통해 내 '열'이 전해지자 무게가 10킬로는 됨직한 파편이 두둥실 떠올랐다.
지팡이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 파편을 내 머리위에서 돌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붕붕대며 퍼지는 와중에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늘에서 나온 시인들 탓에 앞뒤 할 것 없이 막혔다.
바람에 섞여 생물이 썩어가는 냄새가 퍼져온다.
나는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옆으로 휘둘렀다.
부앙!
원심력이 더해진 파편이 지팡이의 움직임을 따라──난다.
콰앙!
파편이 직격한 시인의 머리가 비산했다.
나는 그대로 몸까지 돌려 날아다니는 파편으로 다른 시인까지 떨쳐낸다.
퍼퍼퍽 철퍽 와장창 쿵쾅──!
연이어서 터지는 소리. 흩날리는 검붉은 혈액. 누르스름한 뇌수.
파편은 기세를 살려 하늘로.
──마지막 하나.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시인을 향해 파편을 힘차게 떨어트렸다.
우직!
머리가 정수리부터 박살나고 몸엔 파편이 박힌 시인이 무릎부터 바닥에 기우뚱 너부러진다.
머리를 잃은 다른 시인들도 실이 끊긴 듯이 털썩털썩 쓰러졌다.
시인은 머리──뇌를 파괴당하면 움직일 수 없다. 단순한 시체가 된다.
──그럼 이 틈에.
나는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여기서 나가면 주위에 높은 건물은 없다. 정오인 지금 시인이 밀집할 그늘은 적다.
머릿속으로 비교적 안전할 루트를 그리며 나는 죽은 도시를 거닌다.
이 멸망한 세계에 내가 아직 살아있을 수 있는 건 시인들을 물리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얼마 전까진 나 자신도 몰랐지만…… 난 보통 인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쀼이?"
다시 가방에서 고개를 내민 아기 펭귄형 사역마──페라에게 나는 웃어 보인다.
"이제 괜찮아요. 얼른 볼일만 보고 저택으로 돌아가요."
이번엔 페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쁜지 미소 짓는 페라를 보자 내 표정도 풀린다.

이 도시에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인 나는── 마녀.
오늘도 그럭저럭, 재밌게 삽니다.


제 1장 위치 라이프

4월 7일 화요일.
자 오늘부터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고등학생의 삶이 시작됩니다.
중학교 때보다 불쾌한 나날이 되겠습니다.
아침에 출발하며 본 일기예보를 패러디해서 나──미나토 유키는 인생예보를 가슴속에서 말해본다.
하나도 재미없다. 웃어넘길 수도 없다.
4월 하늘은 이렇게 푸르고 벚꽃은 아름다운데 심경은 전혀 밝아지지 않는다.
아빠, 전 언제까지 참으면 되나요?
다른 학군 학교에 입학하는 걸 완강히 거부한 아버지──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무뚝뚝한 표정을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물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
아빠에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약한 부분을 보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빠랑은 5년 넘게 불화상태니까.
입학 때문에 얘기한 게 오랜만에 나눈 대화다.
'……아빠, 나 가능하면…… 요코하마 …… 기숙 사립 고등학교──'
'안 돼. 이 집을 떠나선 안 된다.'
대화라고 해봤자 이게 전부다.
이유를 말할 틈도 없었다. 이유를 물을 틈도 없었다.
결론이 나온 이상 무슨 말을 더 해봤자 비참해질 뿐이다.
아빠에게 동정당하는 건 싫다. 아빠 앞에서 센 척 하는 게 내게 남은 유일한 자존심. 그래서 그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역시 후회된다.
다른 학생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지각 직전에 등교했지만── 교문을 지나, 건물에 들어서고, 교실과 가까워질수록 다리가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오늘은 시업식.
하지만 지난 입학식 때 내가 앞으로 누구와 고등학교 생활을 보낼지는 이미 알았다.
초, 중학교 때와 거의 똑같은 면면.
나를 비웃어온 사람들.
변한 건 없다. 모든 게 그대로 최악──.
"……정말, 발전이 없네요."
교실 앞에 도착한 나는 복도에 떡하니 놓인 책상과 의자를 보고 작게 투덜댔다.
책상에 이름이 적히진 않았다.
하지만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 교실에 들어가 보면 분명 내 책상만 없을 것이다.
문이 닫힌 교실에선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틀림없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하며 들떠있을 것이다.
──책상에 낙서라도 해주면 알기 쉬울 텐데.
저들은 증거를 남기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도저히 성장이라곤 하지 않는 얼간이들인데, 이런 부분에서만 영리해지는 것이다.
드라마나 만화처럼 알기 쉬운 왕따는 '여기'에 없다. 왜냐하면 왕따는 나쁜 짓이니까. 누구든 자기가 악당이 되긴 싫은 법이니까──.
모두들 '일반인'인 채로 나를 비웃는다.
──……정말, 최악입니다.
딩-동-댕-동.
책상 앞에 서 있자니 종이 쳤다.
"왜, 무슨 일 있냐?"
뒤에서 말을 걸기에 돌아보자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 선생님이 서 있었다.
──분명 담임선생님…….
"저, 이게── 아마 제 책상 같은데요……"
용기를 낸 나는 아주 자그마한 기대를 담아 책상을 가리켰다.
이제 전해졌을 것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어른이니까,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 빨리 안에 들여놔. 벌써 종 쳤다."
그는 모르는 척, 귀찮은 표정으로 말한다.
그저 책상과 의자가 교실 밖에 나온 것뿐이다. 구체적인 악의의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선생님도 '저쪽'에 가담한다. 그러면 아무 일도 없는 셈이니까…….
──역시, 똑같다. 내 일상은 변함없다.
대단한 희망을 품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낙담한 나는 뒤로 돌아 걸어 나간다. 교실에서 멀어진다.
"어, 야! 어디 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조퇴할게요."
온갖 것을 '진지하게' 대하는 게 갑자기 멍청하게 느껴진 나는 대충 변명했다.
선생님은 쫓아오지 않았다. 뭐라 말을 더 하지도 않았다.
내 변명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게 덜 귀찮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면 그런 대로 나한테도 편하다.
오늘은 시업식이랑 HR뿐이라 성적에 영향은 없다.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일부러 웃음거리가 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는 합리적으로 선택했다고 내게 핑계를 댔다.
하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얼굴이, 눈가가 뜨거워진다.
──왜 나는,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까요.
나는 '강한'선택을 한 걸 텐데…… 가슴 속에 점점 후회가 들어찬다.
어떻게 변명한들 내 자신에게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허세를 부리고, 달관한 척을 해도, 나는 안다. 내가──도망쳤다는 사실을.
도망치는 건 나쁜 짓이 아니라고, 부드럽고 달디단 말을 흔히 듣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도망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도망치면 '패배'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혐오하는 것들에게 지기 싫었다. 하지만──.
시야가 울렁이고, 뜨거운 물방울이 뺨에 흐른다.
──분하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우는 모습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고개를 처박고 걷다, 걷다, 걷다보니── 어느새 우리 집 앞이었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서양식 저택. 훌륭한 석조 건물이지만, 담쟁이덩굴이 벽을 뒤덮고, 금간 창문은 안에서 나무 판자로 막아── 밖에서는 어떻게 봐도 귀신의 집이다.
이런 집에 사는 탓에 초등학교 때부터 내 별명은 '마녀'였다.
게다가 아빠는 '마술사'를 자칭하며 오컬트쪽 의뢰를 비싼 값에 해결하는, 수상한 직업의 소유자다.
근처 어른들은 아빠를 사기꾼이라 불렀다. 학교에서는 나를 마녀라며 놀렸다.
놀림 받고, 괴롭힘 당하는 매일.
나는 아빠에게 이상한 일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포기했고, 아빠와의 대화도 멈췄다.
그러고부터 한동안 나는 아빠와 달리 '정상'이라고, 마녀 같은 게 아니라고 열심히 어필 해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를 '비웃고 싶은'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유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 연장선상에 현재가 존재한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진 않게, 버텨내는 매일.
중학교 2학년 2학기── 아주 짧은 시간동안 '그 아이'와 즐겁게 보내기도 했다.
'유키~! 또 보자~!'


뇌리를 스치는 건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손을 흔드는 소녀와…… 작별 인사.
그녀와 보낸 시간은 꿈처럼 스쳐갔고, 빛을 잃은 매일이 다시 나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오늘, 나는 마침내 도망쳤다. 절대 지기 싫은 것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면 아빠한테 더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전부 솔직히 얘기하자. 더는 싸울 수 없다고. 이제는 무리라고, 다 말해버리자.
그렇게 결심하고 집에 들어갔지만, 눈에 띈 것은 거실 테이블 위의 쪽지.
"……일 때문에 한동안 집을 비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란 말이죠."
이 얼마나 최악의 타이밍인가.
늘 아귀가 맞질 않는다며 한숨을 쉬고, 쪽지 옆에 놓인 것을 쳐다본다.
그것은 '입학 선물'이라고 적힌 선물 봉투. 내용물은 돈이 아닌지, 부자연스럽게 빵빵했다.
"오늘은 입학식이 아니라 시업식이지만요."
쓴웃음과 함께 선물봉투를 들고 뒤집었다.
손바닥에 톡 떨어진 것은 작은 아기펭귄 인형이 달린 스트랩.
"──와, 귀엽다."
회색 털이 몽실몽실하게 귀여운 아기 펭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이 튀어나왔다.
"펭귄…… 인가요."
휴대전화도 안 사주면서 스트랩이라니──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근질대는 감정이 솟구친다.
──펭귄이 좋다고 했던 건 유치원 때잖아요.
아직 엄마가 살아계셨을 때, 온 가족이 함께 간 수족관에서 본 황제 펭귄. 그게 너무 맘에 들어서 한 때는 펭귄 그림이 있는 것만 사 달라 했었다.
아빠에게 있어서 나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받아 드릴 테니까…… 돌아오시면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나는 어디 멀리 있을 아버지에게 말하고, 휴대폰이 없는지라 학교 가방에 펭귄 스트랩을 달았다.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도 못하고──.

*

4월 8일 수요일.
나는 결국 오늘도 학교에 간다.
이미 도망친 탓에 어제보다 발걸음이 무겁다.
하지만 아직 어떻게든 싸워야 할 이유가 있다.
난 가방에 달아놓은 펭귄 스트랩을 살며시 잡았다.
이건 '입학 축하'선물로 받은 스트랩. 그러니까 이 펭귄과 함께 하루쯤은 학교에 가야지만 아빠의 선물을 제대로 받은 실감이 날 것 같아서다.
등굣길은 평소와 똑같다. 강변길에 핀 벚꽃이 아침 해에 반짝인다.
──하지만 아마도, 그 때 이미 시작됐던 것 같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나는 게 들렸지만 어디서 사고가 났나보다 하는 생각뿐이었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다행히 교실 밖에 내 책상과 의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게 '다행'인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눈에 안 띄게, 최대한 조용히 교실 문을 연다.
어제처럼 웃음소리가 나질 않고 웅성임의 파도만이 나를 둘러쌌다.
교실엔 벌써 학생들 태반이 있었지만 저들은 패거리별로 모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거 실화냐……?"
"주작 빳다죠 쉬바."
"동영상이 있는데──"
한 마디씩 들려오는 말소리. 혼자 자리에 앉은 학생들도 휴대폰 화면을 집어삼킬 듯 쳐다본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걸까요.
하지만 휴대폰도, 친구도 없는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등교 전에 늘 보는 아침 방송은 특별한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창가에 모인 여자들 중 하나가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앗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저 애는 내가 혐오하는 것 중 하나. 초등학교 때부터 곧잘 같은 반에 배정되는 요네지마 양.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를 비웃는 사람. 비웃을 이유가 없으면 만드는 사람. 아마 어제 책상을 꺼낸 것도 요네지마 양이 한 짓.
"──아, 미나토 양도 우리 반이었구나~ 어제 없어서 몰랐네~"
입가에 역겨운 미소를 띄우며 부자연스럽게 말한다.
"…………"
나는 말없이 눈을 돌리고 복도 맨 뒤쪽 자리에 앉았다.
표정과 말, 모든 것이 비웃을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진저리가 날 만큼 잘 안다.
"에~!? 무시해~!? 너무해앵~ 그러다 친구 없는 찐따 고딩되면 어떡해?"
큰 소리로 피해자 흉내를 내는 그녀였지만, 근처에 있던 애가 휴대폰을 보며 "와 미쳤네!? 이거좀 봐!"라고 하자 "뭔데 뭔데~?" 라며 그리로 갔다.
역시 무슨 큰 사건이 난 모양이다.
앞으로도 매일 나 같은 건 잊어버릴 만한 사건이 일어나면 좋을 텐데.
이뤄질리 없는 걸 잘 알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이 좀 지나 수업 종이 치고, 담임선생님이 왔다. 나를 슬쩍 보더니 바로 눈길을 돌렸다. 반응은 이게 끝.
"자 다들 앉아~"
시치미를 떼는 표정으로 잘난 척 명령하는 선생.
소란이 사라지고, 아침 HR이 시작됐다. 출석 확인과 전달사항 몇 가지를 말하고는 더 이상 나를 보려고도 않고 교실을 나섰다.
이 다음은 1교시인 수학.
교실 구석에 앉은 내겐 교실 분위기가 잘 보인다.
많은 애들이 수업을 듣는 척 휴대폰을 만진다.
"어이, 수업 중에──"
그걸 깨달은 선생이 주의를 주려고 한 순간──.
콰앙!!
굉음이 나기에 나는 깜짝 놀라 쪼그라들었다.
──깜짝…… 놀랐어요. 뭐지……?
심장이 쿵쾅대는 걸 느끼며 소리가 난 창문 쪽을 쳐다봤다.
우리 교실은 1층에 있고, 창밖으로는 교문과 이어진 길, 그리고 운동장이 보인다.
언뜻 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쳐다보고 깨달았다. 꽉 닫힌 철제 교문 옆에서 연기가 난다. 자세히 보니 교문 옆에 기울어진 자동차가 조금 보였다.
"사고……?"
누가 그렇게 내뱉자 침묵이 깨지고, 소란이 커졌다.
"조용히들 해! 일어서지 말고!"
수학 선생이 일어나려는 학생들을 막고 창가로 간다.
조금만 늦었다면 다들 창가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앉은 채 목을 빼서 창문 너머를 쳐다보고, 옆자리와 소곤소곤 떠들었다.
잠시 후에 교문으로 선생 두 명이 달리듯 다가간다. 트레이닝복을 입었으니 체육 선생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교문이 아니라 옆의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
무슨 '목소리'같은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라 단정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의 나열이었기 때문이다.
교실의 소란이 커진다.
창밖으로 상태를 보던 수학선생의 안색이 변했다.
그 때 출입문에서 트레이닝복을 입은 선생이 혼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트레이닝복의 한쪽이 빨간색으로 물든 상태였다.
소란이 사그라진다. 교실이 적막에 휩싸인다.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를 못 한 것이다. 나도 모른다. 그러니 입을 열 수가 없다.
또 한 명, 이번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 선생이 교문으로 달려간다.
"어, 담임 쌤이다……"
학생 중 누군가가 내뱉었다.
분명 그는 아까 HR때 봤던 담임선생. 뒷모습이지만 착각할 거리는 아니다.
그는 휘청대는 트레이닝 복 선생에게 달려가 부축하려 했지만…….
"────!!"
또 그 소리다.
나는 안다. 아까 들은 것은…… 남자가 지른 비명이라는 것을.
담임선생이 절규한다. 트레이닝 복 선생에게 잡히고, 그대로 바닥에 깔려 버둥버둥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직후에 담임선생의 목 근처에서 빨간 체액이 안개처럼 솟아올랐다.
두쿵, 두쿵, 두쿵──.
심장 소리가 시끄럽다. 손이 떨려 들고 있던 샤프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휘청, 어색한 움직임으로 빨간색 범벅이 된 트레이닝복 선생이 일어섰다.
잠시 후에 쓰러져있던 담임선생도 비칠대며 일어선다.
무사해서 다행이다──라 할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멀리서도 확연히 창백한 안색이라 도무지 무사해보이진…… 살/아/있/다/곤/볼/수/없/었/으/니/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교실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마 다른 교실에서도 일제히.
다들 동시에 지른 비명과 일어나는 소리가 합쳐져 학교가 흔들렸다.
다른 반 학생들이 복도를 달려가는 걸 보고 몇 명이 따라서 교실을 뛰쳐나갔다. 이번엔 수학 선생의 제지도 효과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태반의 학생은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교문 옆 출입문에서 온 몸에 피범벅을 한──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걸 본 순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내 자리는 복도쪽 맨 뒷자리. 정확히 문 옆.
난생 처음 보는 필사적인 표정을 지은 요네지마 양이 멍하니 서있던 나를 짜증에 가득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꺼져!"
힘에 나가떨어진다.
다리가 접질린 나는 넘어졌다. 무릎과 팔꿈치가 아프더니, 그 직후에── 등을 밟혀서 숨이 턱 막혔다. 수많은 신발이 나를 차고, 짓밟는다. 피하려는 사람은 없다.
비상사태니까, 나니까 상관없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리라.
변명을 할 수 있다면, 올바르게 보일 이유만 있다면 이 사람들은 더없이 끔찍한 짓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아파, 아파, 아파──제발 그만해.
몸을 옹송그리고 폭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린다.
짓밟는 발이 사라지고, 사위가 고요해져도 통증 탓에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서, 이대로 있다간 위험하다는 위기감이 몸을 움직였다.
"으윽……"
팔다리와 배에서 느껴지는 둔통을 참으며 나는 책상에 매달려 일어선다.
아무 소리가 안 나서 알곤 있었지만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수학 선생도 애들을 따라 나선 모양이다.
두쿵, 두쿵──.
심장은 아직 크게 뛴다. 창문을 보자 '움직이는 시체'는 건물 코앞까지 몰려온 상태였다.
저건 뭐야? 누구? 현실인가? 꿈이 아니라면 잘못된 거야. 하지만 아파.
온 몸이 너무 아프다. 등이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팔이 아프다. 무서워. 무서워무서워무서워. 아파무서워괴로워──.
아, 또 누군가 잡혔다. 교복을 안 입었으니 아마…… 선생.
왜 막아주지 않는 걸까. 선생인데. 어른인데. 저 사람들은 언제든지 날 구해주지 않는다. 물렸다── 피다. 피, 피, 피── 정말로 붉은──.
"아…… 아……"
말이 잘 안 나온다. 떨리는 손길로 가방에 교과서를 허겁지겁 채워넣는다.
──나, 뭐 하는 거지…… 왜 돌아갈 준비를…… 맞아요, 돌아가야…… 빨리 도망쳐야…….
돌아가자, 돌아가자돌아가자돌아가자── 도망쳐야해도망쳐야해도망쳐야해──!
제대로 생각을 못 하는 상태로 묵직해진 가방을 걸쳤다. 아기 펭귄 스트랩이 살짝 흔들렸다.
──돌아가……도망쳐? 아니 어디서? 교문엔 저 사람들이…….
교실을 나서려던 순간 걸음이 멎었다.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갈 수 없어? 그럼 어떻게어떻게어떻게──.
밖은 위험해. 1층도 위험해. 이제 곧 저게 들어와. 도망쳐야해── 그럼 위? 빨리 도망쳐야해── 하지만 아마 다른 애들도──.
밖이 안 된다면 일단 위로. 안 된다면 더 먼 건물로── 어찌 됐건 여기 머무르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하지만…… 도망친 곳엔 분명 '모두'가 있다. 요네지마 양이 있다. 날 계속 비웃고, 무시하고, 짓밟아온 사람들이 있다──.
무섭다. 저 움직이는 시체만큼, 나를 비웃는 학생들이.
그래서 움직일 수 없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복도에서 난 소리에 몸을 깜짝 움츠렸다.
가깝다── 움직이는 시체는 이미 건물 안에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 오지 마!
"윽……"
나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하지만 교실 문은 안쪽에서 잠글 수 없다.
대신 책상을 문 앞으로 옮기고 2층으로 쌓아 쉽사리 못 들어오게 만들었다.
목덜미를 살며시 스쳐간 바람에 창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사적으로 창문을 죄다 닫고, 잠가 두었다.
"헉…… 헉…… 헉……"
왜…… 왜 이런 일이──.
거칠고 빠르게 헐떡대며, 나는 교실 창가 제일 뒤쪽에 주저앉았다.
안고 있던 가방에 고개를 처박고 두 손으로 내 몸을 끌어안았다.
달리 지금 가능한 행동이 떠오르질 않았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멀리서 비명이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꿈이라면 당장 깼으면 좋겠다. 깨라 깨라, 깨 줘──.
제아무리 빌어도 깨어나질 않는다. 애원하다 지친 나머지, 나는 아마 이대로 죽을 거라고 머리 한구석에서 생각했다.
하지만── 꽉 눌린 귀가 아파져도, 끝은 찾아오지 않는다.
귀가 너무 아파서 힘을 살짝 뺐다.
"────!!"
각오는 했지만 비명이 갑작스레 손가락 틈새로 쏟아져서, 더 쪼그렸다.
가깝다── 아마, 창밖이다.
들린 이상 무서워도 확인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창 밑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살펴봤다.
"헉……!?"
비명이 터지려 하기에 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건물 바로 앞, 화단 건넛길에서 여학생이 공격당한다. 시뻘게진 교복을 입은, 창백한 낯빛의 남학생에게 잡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요네지마 양.
여학생이, 내가 혐오하는 인물임을 깨달았다.
이런 광경을 바란 적도 있었으리라. 혐오하는 모든 것이 붕괴하는 꿈. 나를 비웃는 이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망상──.
그럼 역시 이건 내 꿈인 걸까. 하지만 깨질 않는다. 몸은 아직도 아프다.
그리고…… 전혀 기쁘지 않다.
꿈이 이뤄졌는데도 전혀 가슴 벅차지 않다.
그저, 무섭고 무섭고 무섭고── 두려울 뿐.
남학생이 요네지마 양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안돼애애애애앳! 하지── 꺄아아아아아아악!!"
절규하는 그녀의 눈알이 바쁘게 구른다.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뛰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나는 아직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가 떨어졌을 때의 공포와 고통이 되살아난다.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보지마보지마보지말아주세요……!
그녀의 목에서 피가 힘차게 터져 나오더니 창문에 쏟아졌다.
붉게 문든 광경 저편에서 그녀는 눈을 휘꺼덕 까뒤집고── 움직임이 멎었다.
안심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무서운데, 더 이상 그녀가 비웃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남학생이 휘청대며 일어섰다. 어색한 움직임으로 나를 향해 온다.
얼굴은 긁힌 자국 투성이에, 뺨의 살점이 큼직하게 떨어져 나갔다. 백탁색 눈과 새파란 살갗은 시체 그 자체다.
그는 입가로 붉은 피를 흘리며 창문을 향해 다가왔다.
"힉──"
엉덩방아를 쿵 찧고, 그대로 뒤로 기었다.
싫어. 싫어싫어싫어──.
하지만 뒤에서 난 큰 소리에 나는 굳었다.
뒤를 보자 책상으로 막아둔 문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복도에도 틀림없이── 움직이는 시체가 있다.
퍽── 피투성이 창문을 창백한 손이 두들긴다.
도망칠 곳이 없다. 심지어 다리도 풀려 일어날 수도 없다.
쨍그랑!!
두 번째 공격에 유리가 깨졌다. 파편을 맞으면서도, 남은 유리에 살점이 긁혀나가는데도 움직이는 시체는 교실로 밀고 들어온다.
뒤에는 아까 죽은 요네지마 양도 보인다── 경직된 표정 그대로, 마치 웃는 듯 한 표정으로 '죽었으면서 움직이는' 그녀를 본 나는 쉰 소리를 내뱉었다.
"아직도…… 절 비웃는 거군요."
분했다. 죽을 때까지 비웃음 당하는 나 자신이.
하지만, 손 쓸 도리가 없다.
그렇게 포기한 순간, 내 이해를 더 뛰어넘은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느낀 것은 눈부심.
왜 그런가 하고 눈길을 돌리자 가방에 메여있던 펭귄 스트랩이 눈부신 빛을 떨치고 있었다.
"어……?"
빛이 점점 커지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쿵…… 뭔가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머리 위로 자잘한 파편 같은 것이 후두둑 떨어졌다.
조심조심 눈을 떴다.


"하?"
눈앞에, 거/대/한/황/제/펭/귄/이/서/있/었/다.
황제 펭귄은 원래 큰 편이지만 내 앞에 선 것은 그 몇 배는 컸다. 머리가 1층 천장을 뚫고 나가서, 떨어지는 파편 사이로 검고 맑은 눈망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뭐람── 저, 드디어 미쳐버린 걸까요?
환각인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펭귄은 사라지지 않았다. 
"푸~"
약간 낮은 소리로 거대 펭귄이 울었다.
바로 옆엔 창문으로 들어온 움직이는 시체.
상황이 너무 정신 나가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뭐예요! 시체가 움직이고, 거대 펭귄이 나타나는데 역시 이건 꿈 아니예요!? 꿈이면 빨리 끝나주세요! 빨리 빨리 빨리──.
상황 그 자체에게 화를 내며 손등을 꼬집었다.
하지만 그저 아플 뿐이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이 짓밟힌 몸은 아직도 욱신대며 아팠다.
고통으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엉망진창인 현실은 끝나지 않는다.
"푸~"
펭귄은 내게 말하듯 울더니 커다란 부리를 열었다. 그리곤 그대로 숙이며 내게 머리를 들이댄다.
"어? 어……?"
──뭘 하려는…….
큰 입이 머리 위로 다가오고, 나는 의아해했다.
가방 째로 온 몸이 펭귄의 부리에 끼었다.
"어어? 잠──"
잠깐만. 잠깐잠깐잠깐──!
몸이 힘차게 들린다. 목에선 으햐악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머리 한편에서 문득 펭귄이 생선을 집어삼키는 이미지가 스쳤다.
"자── 잠깐만요! 잠깐만! 그만──"
펭귄은 나를 물고 위를 쳐다봤다. 그곳은 2층 교실. 나도 거꾸로 뒤집어진다.
"아."
아래엔 거대한 황제 펭귄의 검고 깊은 식도가──.
꿀꺽.

그렇게 저는 거대 펭귄에게 통째로 먹히고 말았습니다.


2

차닥, 차닥──.
움직이는 시체가 득실대는 도시를 거대한 황제 펭귄 한 마리가 걸어간다.
잘딱잘딱 짧은 걸음으로 천천히── 그러면서도 착실히 목적지라도 있는 양 거침없이 걸어간다.
그것은 너무나 비정상적인 광경.
하지만 생존자를 찾아 배회하는 시체들은 펭귄이 안 보이는 것처럼, 옆을 지나도 반응하지 않았다.
펭귄은 곳곳에서 차가 불타는 대로변을 지나 벚꽃이 핀 강변을 통해, 고급 주택이 늘어선 언덕길을 올라, 부지가 한 층 더 큰 낡은 저택 앞에 멈췄다.
주변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움직이는 시체가 없었다.
"푸~"
펭귄이 낮은 소리로 울었다.
그러자 닫혀 있던 철문이 저절로 끼이이익 열렸다.
펭귄은 차닥차닥 걸어 저택 부지에 들어갔다. 그러자 문은 또 저절로 움직이더니 철컹 소리를 내며 닫히곤 잠겼다.
현관 앞으로 온 황제펭귄은 위를 보고 목을 꿀렁대더니 배를 흔들었다.
그리고 힘차게 숙이더니── 입에서 한 소녀를 내뱉었다.


3

──저, 죽었었죠? 죽은 거죠?
어둡고 미적지근한 어둠 속에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죽었으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여긴 아마 거대 펭귄의 뱃속. 그런데 어째선지 숨이 쉬어지고, 오히려 편하기까지 하다.
아까부터 주기적으로 흔들린 데다, 나를 감싼 온기가 합쳐져 졸음을 불렀다.
"흐암……"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한 순간, 주변의 어둠이 요동쳤다.
"어?"
몸이 뒤집히는 감각.

철퍽!

어렸을 때 워터 슬라이더를 탄 기억이 스쳤다.
그 순간을 연상시키는 가속도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는 어둠 속에서 한 바퀴 돌았다.
엉덩이에 꿍 하는 충격.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빛.
갑자기 밝은 곳에 던져진 나는 눈이 부셔 인상을 썼다.
빛 속에 보이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음침한 저택. 혐오스러운 우리 집.
살아 있어? 저, 살아 있나요? 정말?
"푸~"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거대한 황제 펭귄이 서 있었다.
"히익──"
아까 '먹힌' 기억이 떠올라 나는 깜짝 움츠렸다.
그런 내 앞에서 황제 펭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단순한 수축이 아니다. 온 몸이 줄어듦과 동시에 성체成體가 '젊어'진다.
"뭐, 뭐에요……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 나는 읊조린다.
"쀼이쀼이!"
겨우 몇 초 만에 조그매진 아기 황제 펭귄은 커다랬을 때와는 다른, 높고 귀여운 소리로 울었다.
그걸 본 나는 황제 펭귄이 나타난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때…… 펭귄 스트랩이……"
설마 아빠에게 받은 스트랩에 달린 펭귄이 '이것'인 걸까.
"쀼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30센티쯤 되는 아기 펭귄이 긍정하듯 울었다.
날개를 파닥대더니 몸을 양 옆으로 흔드는 펭귄.
"……귀여워."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왔다.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털과 짧은 날개, 맑고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힘껏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하지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뻗은 내 손을 피하듯 펭귄이 현관을 향해 차닥차닥 걸어갔다.
그러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현관이 저절로 열리더니 펭귄이 저택 안에 들어갔다.
"아…… 자, 잠깐만요!"
나도 퍼뜩 일어나 펭귄을 쫓아갔다.
오래된 저택이라 현관은 홀 형태고, 커다란 골동품 추시계가 지금도 추를 흔들며 시간을 알린다.
아기 펭귄은 그 추시계 앞에 탁 멈춰 섰다.
"저, 저기……"
떠듬떠듬 말을 걸었다.
그러자 펭귄은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짧은 부리로 추시계 받침 부분을 콕 쪼았다.
대앵─…….
그러자 정시도 아닌데 추시계가 울리더니── 추가 들어있는 자리 앞판이 벌컥 열렸다.
"쀼이쀼이!"
그 안을 가리키듯 펭귄이 울었다.
"……뭔가 있나요?"
펭귄에게 질문하는 나는 아직 제정신인가 생각하며, 몸을 굽혀 추시계 안을 들여다봤다.
"아."
흔들리는 추 너머에 막대기 같은 것이 걸려 있다. 그리고 바닥판 위엔 새하얀 봉투가 있었다.

그것은 아빠가 남긴 편지.
막대기로 보인 것은 예스러운 나무 지팡이.

'유키, 네가 이 편지를 읽었다는 건, 사방에 시인이 넘쳐나는 상황이겠지. 나는 그 때를 대비해 네게 '마술'을 남긴다.'

이 날, 세상은 멸망했고── 나는 진짜 마녀가 됐습니다.


4

"벌써 한 달인가요……"
강변길을 걸으며 마음을 담아 말했다.
시업식 다음 날, 이 도시는── 인간의 세계는 치명상을 입고, 조금씩 죽어갔다.
첫 날 밤엔 아직 TV가 나왔지만 모든 방송국에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라고 적힌 화면만 표시됐다. 아빠 방에 있던 낡은 라디오를 처음 써 봤지만 잡음만이 들렸다. 인터넷이라면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집엔 컴퓨터가 없고, 스마트 폰이 있는 아빠가 없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이틀째에 가스가 안 나오는 걸 알았다. 사흘째 밤에 정전, 복구 안 됨.
이따금 멀리── 집 밖에서 뭔가가 충돌하는 소리나 자동차 엔진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나흘째엔 잠잠해졌다.
2주 후…… 집 밖에 나가보자 살아있는 인간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이제는 5월.
아름다운 핑크빛 꽃이 피었던 벚꽃도 푸르른 잎이 무성하다.
오늘은 아주 맑지만 6월이면 장마가 시작된다. 햇빛이 줄면 시인들은 낮에도 밖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멀리 가려면 지금…… 인걸까요."
그렇게 말하곤 왼손에 든 '전리품'── 빵빵하게 들어찬 비닐봉투를 내려다본다.
안에는 휴지나 비누, 샴푸 같은 소모품. 이것들은 평소에 가던 편의점에서 얻은 것이다.
편의점은 물자 보급 장소로서 꽤 편리하다. 밖에서 안이 어떤지 거의 다 보여서 시인을 먼저 처리하고 안을 안전하게 탐색할 수 있다.
음식은 없었지만 이만한 소모품을 얻었으니 성과는 충분하다. 이제 해가 지고, 도시의 '그림자'가 짙어지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위험한 지점은 이미 지났으니 앞으로는 비교적 편한 길이다. 강변길은 둑 위에 나 있어서 해가 잘 들기 때문에 낮에는 시인이 거의 다가오지 않는다. 만약 근처에 있어도 시야가 넓어서 바로 보인다.
하지만 나무 지팡이를 든 오른 손에는 자연스레 땀이 배인다.
──시인 대처법은 익숙해졌지만 역시 밖은 긴장됩니다…….
시인을 쓰러트림에 있어 이제는 거의 저항감이 없다. 저것은 모양만 사람인 무언가니까. 짐승조차 아닌, 생명 없는 것들이니까.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쉽게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움직이는 시체와 친지의 얼굴을 겹쳐 보며 공격을 망설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대다수의 인간은 원래 '적'이었다. 게다가 자기들이 악당이 되지 않게, 복수당하지 않게 비겁하게 공격하는 사람뿐이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훨씬 알기 좋다.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나도 주저 없이 반격할 수 있다.
머리를, 뇌를 파괴하면 '승리'할 수도 있다.
그저 '지지 않기'에 매달리던 지난달의 일상과는 천양지차다.
뭐 물론…… 공격당하는 건 무섭고, 가능하면 싸우고 싶지도 않지만.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예전엔 그렇게 싫어하던, 기분 나쁜 우리 집이 그립다. 돌아가면 1주일은 틀어박혀서 뒹굴뒹굴 대고 싶다.
──지금 읽는 소설 뒷권도 궁금하고요…….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그림자는 확실하게 경계한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간 나도 허무하게 시인이 될 테니까.
하지만, 이렇게 외줄타기 하는 삶일지라도 전보다는 훨씬 편하다.
나를 비웃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정말이지 시원하다.

탕!!

그 때, 어디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 한 소리가 났다.
"!?"
숨을 들이켠 나는 걸음을 멈췄다.
"쀼이?"
어깨에 멘 가방이 흔들리더니 귀여운 아기 펭귄── 사역마 페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이 없고 차도 없는 도시는 보통 아주 조용하다. 시인들이 으으 소리를 내긴 해도 그건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만 낸다.
그러니 큰 소리는 꽤 먼 곳까지 퍼진다. 그것은 죽은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물질과 같다.
탕탕!!
또 들렸다. 이번엔 연속해서 났다.
"이건……"
나는 두리번댔다.
이 주변은 주택가라 건물이 적다. 둑 위에서라면 꽤 먼 곳까지 보인다.
죽은 도시는 평소와 같다. 하지만 하늘엔 날아다니는 새떼가 보인다.
다다다다다다다다다!!
이번엔 소리가 조금 변했다.
세계가 종말하기 전에, 치안이 나쁜 나라를 다룬 뉴스나 영화에서 곧잘 들은 소리.
강 하류 쪽 공원 주위에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총소리?"
직접 들은 건 처음이지만,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생각해왔다. 만약 이 나라에 아직 생존자가 있다면 아마 총기를 보유한 사람이리라고.
일본에서 평범하게 살아오던 사람들은 시인을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시인은 인간보다 힘이 아주 세니까. 다가오면 거의 끝이다. 시인을 쓰러트리려면 멀리서 머리를 파괴할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술로 파편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나 같은 '마녀'뿐이다.
누구든 쓸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생각나는 건 총 정도.
지금 이 도시에 온 누군가는 총기 같은 걸 소유했기 때문에 요 한 달을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
──경찰이나 자위대일까요? 아니면 혼란한 판국에 총을 얻은 사람일지도. 뭐 어느 쪽이건…….
"피하는 게 낫겠죠……?"
가방에서 고개를 내민 페라에게 혼잣말처럼 물었다.
"쀼이?"
하지만 아기 펭귄은 귀엽게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페라와 말이 안 통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 아이는 아빠가 나를 위해 남겨준 사역마니까. 내 명령에 따라 주지만 내 뜻에 간섭하지 않는다.
맑고 검은 눈이 '직접 정하라구?'라는 듯 느껴진다.
"그치만…… 위험한 사람이면 어떡해요? 아니…… 보통 사람이라도 안 돼요. 제 존재를 알게 되면 분명 화 낼 거예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그럼에도 나는 페라에게 내 생각을 쏟아 부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이 도시에, 저만이 '안전지대'를 소유하고 있는데, 저는 아무도 구하지 않았어요. 무서워서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거나…… 그 때는 마술을 쓸 줄 몰랐다거나…… 그럴듯한 이유는 있지만── 실제로는, 저한테는 '구하고 싶은' 사람이 이 도시에 아무도 없었을 뿐이예요."
그래서 나설 수 없었다. 나서지 않았다.
'결계'가 쳐져서 안전한 저택을 나설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아빠를 욕하는 이웃들이 혐오스러웠으니까. 나를 비웃는 사람들이 미웠으니까.
"쀼이……"
내 참회를 얼마나 이해했을지, 페라는 조금 작은 울음소리로 맞장구 쳤다.
"그러니, 누가 됐건 절 혐오할거예요. 저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을 혐오할 거구요. 그런 제가 모르는 사람을 구하러 나설 이유가 있나요? 구한 사람이 욕을 하기라도 하면 제 손해가 아닐까요?"
페라의 눈에 비친 내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을 혐오……해도, 전/부는 아니지 않나요?
"……"
뇌리를 스치는 건 꿈만 같은 1주일.
중학교 때 유일하게 사귄 '친구'와의 즐거운 추억.
분명 전부는 아니었다. 내겐 아빠 말고도 싫지 않은 사람이 있다.
여기서 낯선 이방인을 무시하면, 이 단 하나뿐인 예외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일단, 보기만 하러 가 볼까요."
이건 대화가 아니라 결론.
"쀼이!"
페라는 힘차게 납득의 울음소리를 냈다.
장소는 아마 아까 새가 날아간 공원 근처.
다다다다다다다다──!!
울려 퍼지는 총소리는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5

강변길의 하류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 집은 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빙 돌아가는걸 넘어 완전한 탈선.
한참을 가자 나무에 둘러싸인 넓은 공원이 보였다.
총소리는 아직도 산발적으로 났다.
둑에서 쳐다보자 공원 주위에 수많은 시인이 모여 있었다.
──엄청난 수…… 총소리가 근처 시인을 불러 모은 거겠어요.
총이라면 시인을 없앨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 이상으로 시인을 모아서야 의미가 없다.
아마 총이 있는 경찰 같은 경우도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렸으리라.
"아──"
찾았다.
공원 중앙 근처 미끄럼틀 위에 자리 잡은 사람이 보였다.
그냥 우락부락한 남자를 상상했지만 그 사람은 여자 같았다. 게다가 입은 옷은 교복처럼 보인다.
그녀는 병사들이 멜 법한 큰 총을 벨트로 어깨에 걸치고, 두 손으로 잡은 권총을 주변 시인에게 조준했다.
탕! 탕!
건조한 총소리가 두 번 나더니 미끄럼틀을 기어오르려던 시인 둘이 균형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어쩐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시인이라면 이미 일상의 일부지만 '총을 쏘는 소녀'라는 장면은 더없이 비현실적이다.
언뜻 봤을 때 그녀는 총을 아주 잘 다뤘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시인의 습성을 잘 파악했다는 증거다. 시인은 움직임이 느리지만 특히 위아래로 움직일 때 이런 특징이 아주 강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시인의 수는 계속 늘어나, 조만간 실패할 것이 뻔했다.
어째서 저런 상황이 됐는지 눈길을 돌려보다 공원 입구에 쓰러진 소형 바이크를 발견했다.
──분명 저 바이크가 고장 나던지 어쨌던지 해서 멈추고, 시인에 둘러싸인 거겠네요.
라고 냉정히 상황을 분석하는 나 자신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저…… 냉정한 사람이네요. 진짜 마녀처럼."
위험에 처한 소녀를 보고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내게 남이라는 것은 먼 존재였다.
하지만…… 딱히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안 든다. 그래서 '가능할 것 같으면 구하자'는 마음으로 구출 방법을 생각해본다.
시인이 저렇게 모여 있으면 파편으로 하나씩 머리를 깨 봤자 언 발에 오줌 누기. 돌파구를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지쳐버린다. 그러면──.
나는 옆에 흐르는 강을 쳐다봤다. 조잡하긴 해도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어떻게 해결될지도 몰라요."
전리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둑을 내려갔다. 그리고 강가에서 들고 있던 지팡이 끄트머리를 물에 참방 담갔다.
"떠 줘."
바라면서 속삭이자 내 열이 지팡이를 통해 물에 전해진다.
강을 흐르는 물과 내가 이어졌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수면이 크게 솟아오르고, 강의 일부가 구형 물덩이가 되어 떠올랐다.
일시적으로 강에 큰 구멍이 뚫리고, 강바닥이 들여다보였다.
남겨진 물고기들은 파닥파닥 뛰었지만 이내 주변의 물이 흘러들어 강의 빈 부분을 채웠다.
소용돌이치는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은 박리된 강 덩어리.
"영차……"
지팡이를 수직으로 들자 거대한 수구는 내 머리 위로 움직이더니 둥실대며 멈췄다.
조금 무리를 한 지라 몸이 무겁다. 하지만 저 소녀를 구하기 위해선 물이 이 정도는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수구를 띄운 상태로 영차영차 둑을 올랐다. 여기서 넘어지면 말 그대로 물거품이다. 어찌어찌 비닐봉지를 놔둔 곳까지 와서 둑 반대편── 공원의 상황을 확인했다.
소녀는 아직 미끄럼틀 위에서 닥쳐오는 시인들과 전투중이다.
──음, 저 '높이'라면 아마 괜찮겠죠.
지팡이를 앞으로 눕히자 내 머리 위에 떠 있던 수구도 약간 앞으로 움직였다.
그 상태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기 가만히 계세요!!"
총성이 멈춘 틈에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일이 거의 없던 지라 목이 아팠다.
소녀가 이 쪽을 쳐다봤다. 대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는 나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지팡이를 쥔 손에서 힘을 빼고── 마술을 유지하는 '이미지'를 무산시킨다.
커다란 물덩어리가 퍽 터진다.
해방된 물은 단박에 둑을 다고 내려가더니 공원으로 힘차게 흘러들었다.
물줄기에 먹히고 밀려가는 시인들.
하지만 미끄럼틀 위의 소녀는 격류에 쓸려가지 않는다.
물이 지나가자 그녀 주위의 시인은 소탕돼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임시방편. 시인을 쓰러트린 게 아니기 때문에 금세 다시 모인다.
"빨리요! 지금 이리로 오세요!"
다시 한 번 큰 소리를 치자 멍하니 있던 소녀는 정신을 차린 모양으로 미끄럼틀을 내려 나를 향해 달려왔다.
둑과 공원 사이에 있던 시인은 아까 터진 물줄기에 전부 떠내려갔다. 지금이라면 시인의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다.
──이, 이제 어떡하죠…….
다만…… 나는 다가오는 소녀를 앞에 두고 긴장에 굳어졌다.
구하긴 했지만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예상도 안 된다.
마술을 쓰는 모습을 봤으니 적어도 마술에 관한 질문은 피할 수 없겠지.
"쀼이!"
페라가 경고성을 냈다.
내 존재를 알아챈 시인들이 나를 향해 움직인다.
그녀와는 더 이상 얽히지 말고 나도 도망쳐야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허둥지둥 비닐봉지를 주워들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한 순간──.

"유키!"
──엥?
이/름/을/불/린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뛰어서 둑을 올라오는 소녀는 헐떡대며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허억…… 허억…… 아── 역시 유키구나……"
벨트로 큰 총을 어깨에 걸치고, 오른 손에 권총을 든 교복 소녀.
그녀는 긴 머리칼을 바람에 흩날리며 희희 웃는다.
"야호…… 오랜만."
흙먼지에 지저분해도 저 얼굴을 착각할 리가 없다.
"호노카……"
나도 그녀의 이름을 내뱉는다.
사카키 호노카──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한 친구의 이름.
다시는 못 만나리라 생각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부터 포기했다. 그건 일주일짜리 행복한 꿈이었다고. 하지만──.
"다행이다…… 살아 있었구나. 근데 아까 그건 뭐야? 물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와── 그 펭귄 혹시 진짜야? 뭐야 너무 귀엽잖아!?"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호노카.
아무리 봐도 그녀는 꿈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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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9

20

호카게 아키는 문득 눈을 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데운 실내 온도는 땀이 날 정도였지만 일어나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자기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은, 넓은 객실에서 자 보려고 했지만 잠은 안 들고, 꿈속에서 또 가위에 눌렸었는데 갑자기 이불을 뺏기고, 내던져지나 싶더니…… 그 충격 탓에 깬 것일까. 이런 애매한 기억도 급격히 희미해지더니 이내 떠올릴 수가 없어졌다.
세수를 하려고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사야 방 앞을 지났지만 동생의 인기척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동생을 본 것 같은 흐릿한 기억이 남았다. 어쩐지 즐거워보였다. 언니가 가위에 눌렸는데도 꺅꺅거리기에 묘하게 짜증이 났지만── 평소의 무뚝뚝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층에 내려가 세면장에서 세수했다. 아주 오래 잔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머릿속이 깔끔했다. 방에 들어가다가 현관을 쳐다봤다. 사야의 신발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친구를 보러 간다고 했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 들은 사야의 밝은 웃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의외긴 했지만 친구랑 있을 때는 그런 성격일지도 모른다.
아키는 샌들을 대충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연보라와 노랜 색이 섞인 노을이 예상치도 않게 아름다워 한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평온한 저녁 분위기가 온 도시를 감싸 안았다. 아키 뒤, 집 안에서도 소리가 난다. 아무래도 부모님도 잠에서 깬 모양이다.
저녁 먹을 때까진 돌아올까──. 아키는 현관 앞에 선 채 사야를 무의식적으로 찾으며 황혼 속의 마을을 쳐다보았다.

사카이모리 침구점 침실에선 세 사람이 동시에 의식을 되찾았다. 소파 위에서 서로에게 기대 잠들었다……기 보단 아주 잠깐 기절한 듯 한 감각이었다. 잠시 끊긴 기억에 당황하다, 세 사람은 깨달았다. 이번엔 오랜만에 셋 다 저항 없이 잠들었었다.
그럼 해낸 걸까. 사야와 히츠지가 수수를 쓰러트리고 도둑맞았던 잠을 되찾아준 걸까.
세 사람은 서로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소파에 몸을 맡겼다. 가운데 앉은 란의 어깨 좌우로 카에데와 란의 머리가 걸쳐진다. 눈을 감고, 이번엔 본인의 의지로 잠들러 간다. 히츠지의 능력만큼은 아닐지라도 동료들이 함께 한다는 안심감이 셋을 착실하게 잠 속으로 데려갔다.
지금 나이트랜드는 어떻게 돼 있을지 셋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아직 그곳에 사야와 히츠지가 있다면 데리러 가야한다.
눈꺼풀 뒤편의 어둠에 반짝대며 빛나는 모양이 생겨난다. 잠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것은 서서히 나이트랜드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변해갔다.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닫힌 커튼 너머의 창밖은 고요했고, 방 안은 어두웠다.
손을 뻗어 곁을 더듬는다. 살갗의 온기가 손끝에 느껴져 겨우 안심했다.
데이랜드에서 나이트랜드를 거쳐 도착한 이곳이 과연 어떤 곳일지 아직 모르지만, 아직은 수수의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녀가 눈을 뜨고, 꼼질거리는 게 느껴졌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보이지 않아도 그녀가 미소 짓는 걸 안다. 커튼 틈새로 비쳐드는 희미한 빛이 반사되어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빛났다. 사람의 모양을 한 야수가 그곳에 누워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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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20. 11. 12.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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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날 수 없다──. 이 두려운 결론을 받아들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날아도 뛰어 봐도, 뺨을 꼬집어도 손가락을 늘려도, 무슨 수를 써도 나이트랜드에서 나갈 수 없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트랜드는 분명, 완전히 소멸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인간의 잠을 잇는 집합적 무의식── 이란 해석이 맞다면 나이트랜드에서 사람들을 다 쫓아내도 데이랜드에 깨어있는 인간의 의식이 나이트랜드를 놔 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남겨진 나이트랜드를 꿈꾸는 마지막 두 사람. 우리는 잠을 빼앗은 대가로 잠 속에 갇힌 것이다.
어쩌면 어느 한쪽만 일어나는 건 아직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쪽이 남겨진다. 어느 한 쪽이 반드시 희생되는──데드락Deadlock이다.
"큰일 났네. 동반자살 할까."
포기하는 심정으로 뱉은 내 말에 히츠지가 고민에 잠겨버렸다.
"……그래. 좋아."
"예스 하지 말라고."
"그치만 나 혼자서만 깨어나는 건 싫어. 같이 사라지는 게 나아."
"나도 그렇긴 하지만 말이야……"
매트리스 위에 앉아 몰려오는 수수의 벽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한동안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생각을 너무 해서 또 졸려졌어."
히츠지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까지 이 상태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기에 나도 절제 없이, 히츠지에게 머리를 가져다 댔다.
"히츠지는 좋은 냄새가 나. 꿈속에서도."
"사야도 그래. 알고 있었어?"
"몰랐어. 땀 냄새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참 좋더라."
히츠지가 내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대, 간지러워진 나는 목을 움츠렸다.
"야아~."
"안심되는 냄새. 곁에 있으면 엄청 푹 잘 수 있어."
어쩌지도 못하고 냄새를 맡게 두던 내 머릿속에 뭔가가 번득였다.
"…………그래."
나는 바로 옆에 둥글려진 시트를 집어 들었다. 무한한 넓이로 보이던 시트인데 막상 들어보자 아주 평범한 사이즈였다.
일어나는 나를 히츠지가 올려본다.
"동반자살?"
"안 한다니까. 잠깐만 있어봐."
시트를 펼쳐 폭신한 매트리스 위에 깐다.
"뭐 할 거야?"
"잘 거야."
"여기서!?"
나는 기억과 상상력을 일으켰다. 늘 내가 쓰던 베개가 두 손 위에 생겨났다. 히츠지에게 패스해주곤 내가 쓸 것을 하나 더 만들었다.
"내 베개라 좀 그런데."
"어, 이거 사야 베개야?"
히츠지가 베개를 끌어안더니 냄새를 맡았다.
"진짜네."
"야! 그러지 마, 부끄럽잖아."
나도 모르게 항의하며 다시금 상상력으로 침구를 만들어냈다. 얇은 여름 이불. 시트 위에 베개를 두고, 이불을 깐 나는 히츠지를 불렀다.
"이리 와. 빨리 안 자면 무서운 게 올 거야."
"그게 무슨……"
"슬립 워크 중에 잠들면 나이트랜드에 빨려 들어간다── 분명 그랬었어."
"으응."
"이판사판으로 그걸 이용해보자. 어쩌면 수수가 데이랜드를 나이트랜드로 덮어쓰듯이 우리 슬립 워크가 나이트랜드를 데이랜드로 뒤집어놓을지도 몰라. 동반자살이건 탈출이건 우리가 직접 경험하게 되겠지만."
눈을 땡그랗게 뜬 히츠지의 손을 잡은 나는 이불 위에 앉았다. 폭신폭신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말했다.
"미안해. 기껏 해봐야 이런 생각밖에 안 나네.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해줘."
"아니. 사야와 함께라면 어떤 악몽이라도 괜찮아."
히츠지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말했다.
"이번엔 히츠지가 재워줘. 평소처럼."
"알겠어, 사랑스런 사야."
히츠지가 이불 속에 들어왔다. 한 이불에, 두 베개를 두고 서로를 마주본다. 히츠지의 눈 속에서 내가 보였다.
"──잘 자, 히츠지."
"안녕히 주무세요, 사야──"
히츠지가 눈을 감고 힘을 빼자 금세 졸음의 블랭킷이 나를 감싸 안았다.
사방팔방에서 수수가 몰려오는 종말 같은 풍경 속에서 우리는 나이트랜드 속으로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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