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라니…… 이상하게 볼 거라구? 치 짱은 엄청 미인이니까 남자친구라고 하면 될 텐데."
"난 괜찮아. 나한테 거짓말 하기 싫거든."
"고지식 하긴."
"일은 융통성 있게 잘 하니까 딱 맞지."
그러더니 머리가 짧은 여자는 긴 검은 머리 여자에게 쪽 키스 했다.
둘은 같이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서, 이제 8년차. 그렇게 작던 여자 아이는 올해 25살이 된다.
"하~, 아오이 꾹 안아줘~"
"네 네, 우리 어리광쟁이"
"기운 난다……. 영원히 안고 싶다……. 내일이 안 오면 좋을텐데……."
"괜찮아, 내일은 올 거야. 아무리 힘든 밤이라도 넘어설 수 있어."
"그렇게 긍정적으로 풀어도 말이지……"
움~ 하고 여자가 입술을 내밀자 검은 머리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입맞춤 했다.
"사랑해~ 아오이~"
"물론 나도 사랑해, 치 짱."
"음, 기운 난다……. 결혼 하자 아오이."
"벌써 했잖아."
그렇게 말하더니 약지 손가락을 보였다. 은 색 반지를 보고 여자는 히죽히죽 웃는다.
현관에서 쿵 쿵 하는 소리가 났다.
"하~ 진짜 뭐예요! 오늘이야말로 칼퇴근 하려고 했더니 퇴근 직전에 서류를 밀어붙였어요! 이 쪽은 잔업 수당따위 보다 연인이랑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소중하단 말이예요옷!"
씩씩대던 여자가 들어 온다. 머리카락을 풀며 거실에서 안은 둘을 보고
"아~!" 하고 소리 쳤다.
"왜 벌써 꽁냥대는 거예요오!"
"선착순이지."
"어제도 먼저 들어왔으면서!"
"지난 주는 네가 사흘 연속이었잖아."
"웃~ 웃~, 저도 안아 주세요~! 뽀뽀 해주세요~!"
꼭 어린 아이처럼 떼쓰는 그녀를 보고 검은 머리 여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팔을 벌렸다.
"이즈미, 자 이리 온."
"와~…… 아오이 양 좋아~< 사랑해요~"
"아오이, 그렇게 이 녀석 응석 안 받아줘도 돼. 다 큰 어른이잖아."
검은 머리 여자에게 들러붙은 채 짧은 머리 여자가 말한다.
"그치만 안쓰럽잖아. 바로크 벤자민은 일찍 닫으니까 늘 제가 제일 일찍 오니까."
"아냐 괜찮아. 아오이가 있어 주니까 매일 열심히 일할 수 있어. 아오이가 없으면 세상은 어둠이라구."
"완전 맞는 말이예요~…… 아~ 살아난다~……"
"이즈미 요즘 스미레 씨네 카페 손님들이랑 비슷해지는 것 같은데……"
"그, 그러지 마세요…… 그러는 치하루 양이야말로……"
"하, 난 빼 줘. 그렇게 글러먹은 사람이 아냐."
"자 싸우지들 말자."
여자가 둘을 끌어당겨 교대로 키스했다. 그러자 마자 잘 길들여진 애견처럼 둘은 얌전해졌다. 안심한 여자는 일어서서 머리카락을 뒤로 묶는다.
"저녁밥 다 됐어. 아니면 먼저 씻을래?"
""아오이(양) 먼저""
"그래 그래, 밥이지. 알았어~"
부엌으로 간 여자는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 전에 둘 다 화해 뽀뽀 해. 말 싸움 한 번에 뽀뽀 한 번. 약속 했지?"
""에~""
둘은 한 목소리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약속, 했지?"
하지만 여자가 다시 말하자, 둘 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아, 뭔가 아오이 맛이 나."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셋의 약지에선 반지가 빛난다.
밥을 담던 여자는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물뿌리개를 들고 거실 한 켠에 놓인 화분을 향한다.
그 곳엔 이삿날 옮긴 관엽식물── 바로크 벤자민이.
힘차게 쑥쑥 잎을 펼치는 그것은, 여자가 뿌려주는 물에 신음성을 내버릴 만큼, 앗, 앗, 위험햇…… 좋앗……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관엽식물은 수명이 없다.
30년이 넘어도 꺽꽂이만 해 주면 언제까지고 살아간다.
이 아파트와 카페 바로크 벤자민에 동시에 불이 나지 않는 한은.
"아오이 양, 젓가락 옮겨 둘게요."
"아오이, 접시 가져간다."
"아, 네~"
물뿌리개를 든 그녀는 뒤를 돌며 미소지었다.
8년 전, 두 여자 아이에게 동시에 고백하는 무모한 짓을 한 그녀는 확실히 스미레 씨의 조카이며, 그리고 욕심 많은 내 동생이다. 피는 못 속인다는 거지.
그 날의 소녀는 앞으로 영원히 외톨이가 되지 않는다.
그야 이렇게 멋진 여자가 곁에 둘이나 있으니까.
기운이 나는 마법은 셋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마법을 건 것이다.
바로크 벤자민의 꽃말은 '가족의 사랑, 부부의 사랑.'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백합 커플의 꽁냥꽁냥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완전 승리! 해피 엔딩!
마치며
평안하신지요, 미카미 테렌입니다.
데뷔작부터 줄곧 얘기한 이 인사의 기원은 당연하게도 마리미떼고 그럽니다. 진퉁입니다. 마리미떼가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계속 백합 소설 자체는 좋아했지만 당시의 라이트 노벨 신인상은 '여자 주인공'이나 '백합'에 안좋은 소문이 붙어서, 워너비였던 저는 도전할 만한 담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데뷔한 다음에 깨달은 겁니다. 출판 쪽에서 못 쓰면 동인에서 쓰면 되는 거 아냐……? 하고. 동인 완전 갓갓! 작가의 말이나 플롯에 퇴짜도 안 맞고!
이렇게 해서 제가 저를 위해 쓴 백합소설입니다. 솔직히 난산이었습니다. 쓰는 내내 몇 번이나 '백합은 무엇인가……?' 하는 심연에 빠질 뻔하면서도 고민하고, 그랬기에 스스로도 납득할 만한 걸 만들 수 있었다, 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때 시작된 관계가 중학교로 이어지고,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더니 사회인까지 이어진다. 쌓여가는 세월을 묘사하려면 한 권을 통째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 캐릭터들의 성장을 알아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그러면 감사 인사를. 이번 일러스트에 표지 디자인까지 담당해주신 유조니 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야말로 아오이 짱이 초등학생이었던 무렵 레벨로(너무 갔다) 지켜봐 와서, 요즘에 늘어난 그림 실력에 경악을 감출 수 없습니다.
또 DTP(Desktop publishing, 개인용 컴퓨터로 편집해 프린터로 출력하는 일 ;역주)부터 수많은 도움을 주신 코미야 씨께도 변함 없는 감사를. 에너지가 떨어졌을 때 백합 얘기로 타임 라인을 달궈 주신 AAA씨도 심리적으로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백합 만화를 그려 주시는 전 인류와, 콘노 오유키 선생님께 최고의 감사를!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는 치하루 짱. 좋아하는 아이의 유니폼을 보고 가슴 뛰는 치하루 짱도 너무너무 귀엽다.
"뭐, 귀여운 건 이해가 가지만요……."
"알바 열심히 하고 있었구나, 아오이."
"아오이 양은 예전부터 성실했으니까요."
이즈미 짱은 먼 눈길로 미소지었다.
"계속 노력했어요, 아오이 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올곧아서, 멋있어요."
치하루 짱도 힘차게 끄덕인다.
"……그렇지, 응."
"아, 저 나중애 유니폼 입은 아오이 양 찍을 거예요."
"뭐야 치사하게 나도 줘."
"그러죠. 한 장에 이천엔 부터예요."
"비싸!?"
둘이 사이 좋게 이야기 하는 중에 쟁반을 든 아오이가 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블렌드 커피와 오렌지 주스입니다."
"응, 땡큐……. 근데 뭔가 아오이가 존댓말 하니까 기분이 묘한데."
아오이도 웃었다.
"나도 그래 치 짱."
"……어"
눈을 피하는 치하루 짱의 얼굴이 빨갛다.
얼버무리려는 듯 이즈미 짱이 하하하 웃었다.
"아, 그럼 우린 적당히 있다 갈 테니까 아오이 양도 열심히 해요. 손님이 많은 것 같진 않지만 여긴 공부 해도 되는 곳인가요?"
"마스터한테 물어보고 올게."
아오이 짱은 금방 돌아왔다.
"둘이라면 몇 시간씩 있어도 된다는데. 귀여운 여자 애가 가게에 있으면 바이부스(분위기; 역주)가 초절정 좋아진다면서"
"초절정……?"
"바이부스?"
스미레 씨는 맑은 미소로 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 사람은 역시 우리 이모야.
"고맙게 허락까지 해주시고."
"그래, 알바 열심히 해 아오이."
"응. 둘 다 편히 있어."
작게 손을 흔든 아오이는 일하러 가려다가.
"아, 그치만 둘 다 나만 너무 보면 안 돼. ……부끄럽단 말야"
부끄럼을 얼버무리듯 주의 주는 아오이에게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은 '네에~' 하고 기운차게 손을 들고는 일하는 모습을 응시했다.
의외로 척척 움직여서 위기감이 없다. 그러고 보면 수공예 할 때의 아오이는 이런 느낌이었지.
치하루, 이즈미 둘은 정말로 아오이를 보러 온 것 뿐인지 유니폼을 입은 아오이를 감상하며 오늘 숙제를 시작했다.
이래저래 하는 사이에 시간이 늦어지고, 별 일 없이 하루가 끝나려 했다.
아르바이트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가는 셋의 뒷모습을 봤을 때, 난 이대로 성불 해도 후회 없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안 되겠다.
이 셋의 연애가 어떤 끝을 낼지 볼 때까지는 아오이네 집과 이즈미네 집, 카페 바로크 벤자민에 동시에 불이 나도 죽을 수 없다!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은 그 후로도 이따금 카페에 들렀다.
둘이 간과할 수 없는 현장을 마주친 건 3개월 후. 여름 방학이 끝나고 아오이의 일이 궤도에 올랐을 때였다.
이 날은 금요일, 다음 날이 휴일인 것도 있어서 오래 있던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은 저녁 7시 넘어서 불온한 손님이 모이는 걸 보았다.
퇴근하고 온 언니들이 "나 힘들어 아오이 짱~"하며 여고생에게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네 네, 고생하셨어요 사토 씨, 타카하시 씨." 라며 미소짓는 아오이 짱을 보고 언니들은 "아~ 미소녀 여고생의 미소에 치유된다~"며 낯빛이 되살아난다.
좀비에 가까운 그녀들을 상대하는 아오이 짱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가만 있지 못 한 건 이즈미 짱이었다.
"뭐, 뭔가요 저 사람들…… 글러먹은 어른 전시회인가요!?"
"아오이 짱은 사랑받으니까 말이지."
스미레 씨가 "자" 하고 주문한 쿠키를 테이블 위에 두러 왔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건 치하루 짱. 한 편 이즈미 짱은 매서운 눈으로 스미레 씨를 쳐다봤다.
"마스터, 여긴 뭐하는 가겐가요…… 고양이 카페도 아니고." (일본어로 수受를 뜻하는 네코에는 고양이라는 의미도 있다 ;역주)
"공攻들이 모인다고? 저 녀석들은 그냥 글러먹은 녀석들인데, 너 얘기 참 재밌게 하네."
"재미 없어요. 설마 아오이 양한테 이상한 짓을 시킬 셈은 아니겠죠……"
이즈미 짱은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당장이라도 스미레 씨의 손을 물어뜯을 기세다.
한 편, 그런 청소년의 어린 정열을 앞에 둔 스미레 씨는 완전히 즐기고 있었다. 아 역시 이 사람도 글러먹은 어른이다.
"우린 자유 연애 주의를 표방하거든."
"아동 매춘으로 고소해서 가게를 통째로 날려버릴 거예요."
"얘도 참 무섭긴. 농담이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아오이한테 손 못 대게 할 거니까 안심 해. 아오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나도 어떻게 못 해주겠지만."
"그, 그게…… 무슨 말이예요. 따, 딱히, 저희랑 아무 상관도……"
조금 누그러진 이즈미 짱을 보고 스미레 씨가 웃었다.
"보시는 대로 우리 손님들 얼굴만큼은 괜찮거든. 내용물은 똥쓰레기 민달팽이지만. 아오이는 예전부터 연상이 좋아하는 타입이었잖아. 아오이 본인도 연상한테 동경은 좀 있는 모양이고."
"그런 건."
"……확실히."
끄덕인 건 치하루 짱이었다.
"아오이는 한창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 하나 짱을 잃었잖아. 그럴 수도 있겠어."
"그, 그건……"
이즈미 짱은 경악하곤 일하는 아오이를 봤다.
아오이는 퇴근한 OL같은 여자들과 친숙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건 아오이의 평소 모습이었지만 이즈미 짱의 눈에는 다른 게 보이는 모양이다.
"크으윽"
"이즈미, 그래도 전에 아오이가 누굴 좋아하건 상관 없다고 했었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예요 치하루 양! 상대는 어른이예요 어른! 아오이 양이 엉망진창으로 당해서 흠집이 나면 어떡해요!"
"그렇게 위험한 사람들로는 안 보이는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돼요!"
스미레 씨는 히죽히죽 웃는다.
"뭐 손님으로 오는 거면 언제든 환영이야. 그럼 편히 쉬다 가."
불길한 웃음을 남긴 스미레 씨가 떠나갔다.
이즈미 짱은 바들바들 떨었다.
저 이즈미 짱을 여기까지 몰아넣을 줄이야, 역시 나이는 괜히 먹은 게 아닌가…….
"……어떡할래요 치하루 양."
치하루 짱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난 딱히 상관 없는데."
"괜찮겠어요? 아오이 양의 어른의 익숙한 손놀림에 놀아나다가 고등학교 자퇴하고 밤거리로 사라져도 괜찮아요?"
"비약이 너무 심하잖아. 그럴 리가 있냐."
"흐~~~응. 냉정하시네요 치하루 양. 알겠어요, 좋아요, 저 혼자 여기 와서 아오이 양한테 마구마구 들이댈 테니까."
치하루 짱도 그 말은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들이댄다니, 너, 그건"
이즈미 짱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치만, 싫단 말이예요. 아오이 양이 제가 모르는 사람이랑 사귀는 건."
그걸 본 치하루 짱은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이즈미, 그럼 너……"
"네?"
이즈미 짱의 되물음에 치하루 짱은 입을 손으로 가렸다.
"……아무것도, 아냐."
"뭔데요."
"응, 알았어. 나도 아오이가 밤거리로 사라지는 건 싫으니까."
말하자 마자 이즈미 짱은 노트를 펼쳤다.
딱딱딱하고 샤프 심을 꺼내면서.
"그럼 시간대를 정하죠. 치하루 양이 부활동 안하는 날이랑, 제가 학생회 안 가는 날을 조정 해야겠네요."
"……어쩌다 한가한 날에 오면 안 되냐……"
헬쓱해진 치하루 짱이 끙끙댔다.
그렇게 해서 바쁜 여고생 둘은 열심히 카페에 오기 시작했다.
……스미레 씨는 이걸 노린 걸까.
"어서 오세요. 아, 이즈미 짱."
"안녕하세요, 오늘도 괜찮죠?"
"그럼 그럼. 늘 앉던 데 비어 있어."
이즈미 짱이 스미레 씨에게 도발당한지 1주일이 지났다.
역시 매일 다니는 건 어려웠던 모양이지만 지난 주만 세 번이나 왔으니 대단한 노릇이다.
아오이는 요즘 기분이 좋다.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안쪽 자리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는 이즈미 짱에게 커피를 내 가는 아오이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당연히 그걸 보는 이즈미 짱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숨길 수가 없었다.
아주 완전히 커플 상태다.
못 보는 동안 사랑이 커 간다지만 그 말대로인지, 지금의 둘은 그저 같은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무조건 행복한 모양이다. 결혼 하면 되지 않겠냐, 싶다.
집에 올 때마다 키스하던 때보다 친밀해 보이는 건 왜일까.
둘 다 마음이 커서 서로가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둘도 없는 사람인지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즈미 짱의 목적도 달성된 게 아닐까.
이즈미 짱은 '어중간한 마음으로 아오이에게 손을 뻗치기 싫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즈미 짱은 어른들이 아오이를 놀리는 걸 보고 질투 한다. 중학생 때는 없던 감정이다.
그러면 이즈미 짱이 더는 욕망에 휩쓸려서 아오이를 상처입히지도 않을 거고.
남은 건 이즈미 짱이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 문젠데…….
그건 그렇고 저렇게 행복 오라를 뿜어내면 당연히 스미레 씨도 알아 챈다.
카운터에서 컵을 닦던 스미레 씨는 돌아온 아오이에게 물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 친구?"
"네?"
아오이가 눈을 깜빡였다.
"이즈미 짱이 왜요?"
"사귀는 거 아냐?"
"네에!?"
놀란 아오이의 목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진다. 손님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고, 아오이는 "죄, 죄송해요"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변명한다.
"아, 아니예요. 저랑 이즈미 짱은 옛날부터 사이 좋은 친구고……. 아주 소중한 친구지만, 그런 건, 하나도……"
말 하면서도 아오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아마 수없이 키스했던 기억이 났던 거겠지.
지금도 이즈미 짱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 보곤, 뺨을 덮었다.
"……저, 왜 이렇게……"
라고 작게 혼잣말 했다.
"그래? 내 감도 아직 멀었네."
스미레 씨는 후훗 웃었다.
"쟤, 엄청 인기 많을 것 같던데 아오이 짱도 질투하는 거 아냐?"
"죄, 죄송해요, 그런 건 잘 몰라요. 이즈미 짱 인기 많을 것 같아요?"
대놓고 묻는 아오이의 말에 스미레 씨는 쿡쿡 웃었다.
"그야 저렇게 예쁘고 예의 바르잖아. 게다가 쟨 화사하니까 분명 남자보다 여자들이 좋아할 타입이야. 어디서 계속 고백 받는 건 아니려나. 같은 고등학교지?"
"그런, 데요……"
아오이는 멍한 눈으로 이즈미 짱을 쳐다본다.
"이즈미 짱은, 그런 얘기, 안 해줘서."
"내가 학생이었으면 저런 얠 좋아했을 지도 모르겠다."
"네? 스미레 씨가요?"
"그럼."
창가에서 책을 읽는 이즈미 짱은 그것 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혹시 연상을 동경하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여자 아이가 본다면 단숨에 사랑에 빠져버릴 정도로.
아오이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입술을 만졌다.
"……왜, 생각도 안 했을까."
당황한 듯 아오이는 중얼댔다.
그 표정은 여태껏 지어온 적 없는 것이었다.
붉은 뺨과 흔들리는 눈이 무엇보다 아오이의 마음을 나타내 주는 듯했다.
"……"
드디어,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서야, 라고 해야 할까.
아오이는 자기 마음과 마주하기 위한 여권을 얻은 것일 지도 모른다.
가슴에 따끔한 아픔을 느낀 아오이는, 가만히 이즈미 짱의 옆모습을 쳐다 본다.
분명, 자기 말고 다른 사람과 같이 걷고, 손을 잡고, 웃고, 그리고 키스하는 광경을 상상하고.
그리고.
'그건, 싫은데.'
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오이는 그런 자신에게 당황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즈미 짱 또한 아오이의 태도가 조금 바뀐 걸 느꼈다.
방에서 나한테 얘기해 준 것이다.
"……제가 뭔가, 한 걸까요?"
이즈미 짱은 전혀 자각이 없는 모양이다.
"눈도 안 맞춰 주고, 주문 받으러 올 때도 바로 가 버리고, 학교에서도 피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걸까요……"
하나 하나 짚어갈수록 이즈미 짱은 축축 쳐진다.
"진심인 걸까요……"
지금은 아직 굉장히 불안해 보이지만.
하지만 괜찮아 이즈미 짱.
대답은 조금씩 이즈미 짱의 바람에 다가가고 있으니까.
계속 어린 아이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어른이 되는 날이 온다.
계단을 오른 그 너머에 있는 건, 결코 아름답기만 한 풍경이 아니다.
질투심. 독점욕. 그런 자신의 추악한 마음을 훤히 드러낸 무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곳에선 절대 혼자가 아니다.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건 멋진 버진 로드가 되니까.
그 순간은 코 앞까지 닥쳐 있다.
계절은 가을을 넘어 겨울에 다가섰다.
그런 어느 날 치하루 짱이 웬일로 부활동 친구를 데리고 왔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아 넷이야. 좀 시끄러울 지도 몰라 미안."
"에~ 우리 안 시끄러운데"
"와 이 가게 뭔가 분위기 좋다~. 천장에 나무 보이는 거 멋지지 않아?"
"아~ 나 엄청 목말라~ 치하루가 쏴 줘라~"
"……벌써부터 시끄럽네…… 미안."
치하루 짱이 고개를 숙이자 아오이는 "괜찮아요" 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이즈미 짱이 없어서 안쪽 테이블로 안내해 주고, 주문을 받아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치하루 짱이 친구를 데려오는 건 처음이라 어쩐지 신기하다.
"치 짱, 부활동 할 땐 저런 느낌이구나."
소음 삼인방을 돌보는 치하루 짱은 꼭 네 자매의 맏딸같다.
어른스러운 건 알았지만 또래 애들이랑 비교하면 굉장히 침착하네~. 똑같이 어른스러운 이즈미 짱이랑 얘기하는 것 밖에 못 봤으니까, 나도.
아오이가 부활동 회의를 하는 테이블이 신경 쓰이는지 묘하게 힐끔대자.
"진심?"
"네?"
스미레 씨가 신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오이 짱이 짝사랑 하는 사람이지?"
"네? 아니예요, 치 짱은 소꿉친구고, 소중한 친구예요."
이즈미 짱 때와는 달리 아오이는 미소지을 여유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럼 다행이네. 지금은 아직 자기 마음을 모르는 모양인데, 조만간 쟤 고백받을 거야. 옆에 앉은 쟤한테."
아오이는 그만 굳어버렸다.
"엑?"
나도 깜짝 놀랐다. 확실히 듣고 보니 옆자리 애는 묘하게 몸을 자주 친다든가, 치하루 짱의 거리가 가까운데…….
스미레 씨는 전자 담배를 틱틱 흔들며.
"저렇게 멋있으니 어쩔 수 있나. 같이 있으면 다들 좋아할 거야. 저 또래 애들한테는 그런 사람이야. 예쁘단 건 참 좋은 일이야."
스미레 씨는 얼굴을 따졌다.
꼭 얼굴만 칭찬하는 것 같기에 아오이가 감쌌다.
"치 짱은 확실히 멋지긴 하지만 실은 엄청 다정하고, 부활동도 온 힘을 다하고…… 마음이 예쁜 거예요."
"그렇구나. 아오이 짱은 쟬 잘 아나 보네."
아오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중학생이 되고서 같이 놀러 다니지도 않았고. 고등학교에서도 전 치 짱을 늘 멀리서 보기만 했어요.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런데도 아오이는 기쁜 듯 표정이 풀어졌다.
"치 짱은 달릴 때 굉장히 예뻐서 방과후에 자주 봤었어요. 중학교 대회도 부끄럽다고 언제 하는지 안 가르쳐줬는데 혼자 보러 간 적도 있고……. 치 짱은 저한테 특별한 사람이예요."
몰랐다.
아오이가 치 짱을 그렇게 여겼을 줄이야.
멀리서 친구들이랑 웃는 치하루 짱은 예전에 보여줬던, 늘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아주 당당한 한 여자로 보였다.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고, 조금은 자기가 좋아진 걸까, 치하루 짱. 그러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오이에게 있어서는 저 멀리 있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쳐다 보는 아오이의 눈엔 동경의 빛이 어렸다.
그렇구나.
아오이는 내내 저런 눈으로 치하루 짱을 쫓아갔던 거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계속.
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를 배려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치만, 전 치 짱의 비밀을 얘기해 버려서……. 참을 수 없어서."
"비밀?"
스미레 씨가 그렇게 묻자 아오이의 얼굴이 붉어져간다.
초등학교 때는 잘 몰랐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 떠올리는 첫 키스의 기억. 그건 분명 가슴 속에 담은 보석과도 같이.
"소중한, 추억, 이예요."
"그래."
스미레 씨는 웃으며 아오이의 등을 쓸었다.
"첫사랑 이었구나."
아오이는 대답하지 않고 부끄러워 하기만 했다.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 말이 가시덩굴처럼 아오이를 죄였다.
몸부림 칠 때마다 달콤한 아픔이 마음에 흐를 만큼.
드디어 겨울이 왔다.
파자마 차림으로 관엽식물(나) 앞에 앉은 아오이 짱은 마음이 넘쳐흐를 것 같아보였다.
"나 지금까지 엄청 대단한 사람들이랑 같이 있던 거야. 하나도 몰랐어. 나 너무 둔하네."
아오이는 곤란한 듯 미소지었다.
"둘한테 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건, 무리인데."
그렇지 않아, 아오이.
아오이도 둘에게 지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야.
나는 전할 수 없다.
이 말을 전할 수 없다.
둘이 얼마나 아오이를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지.
나는 아는데. 5년동안 계속 지켜봤는데.
아오이는 처음으로 깨달은 첫사랑에 놀라, 두 사람이 자기와 안 어울린다는 생각에 포기하려고 한다.
인간 관계에 서툰 아오이가 지금까지 처럼 친구로 지내지 못 한다면.
세 사람의 관계는 여기서 없어지는 걸까.
치하루 짱도 이즈미 짱도, 어디서 좋은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과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걸까.
언젠가 아오이도 멋진 사람을 만나고, 다시 새 사랑을 하고.
그렇게 결혼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걸까.
그것도 정답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셋의 마음을 지켜봐 온 내 고집이다.
난 셋이 확실히 답을 냈으면 한다.
가장 좋은 미래를 고를 수 있게, 아오이의 등을 밀어주고 싶다.
그 결과 아오이가 어떤 선택을 하건 그 사랑을 이뤄주고 싶다.
그 날 밤, 나는 꿈을 꿨다.
"어, 여긴……?"
낯 익은 방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여긴 예전 내 방이다.
방 중간엔 사시 사철 코타츠가 놓여 있고,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고, 그리고 벽이 없었다. 사방이 영문 모를 하얀 공간과 이어져 있다. 모래사장 한 군데만 잔디가 자란 양 영 불편하다.
"꿈인가…… 꿈 꾸는 건 처음일지도."
코타츠에 발을 밀어넣고 깨달았다.
어!? 몸이 있어!
죽어서 크질 않았으니 당연히 고등학생의 몸이다. 죽었을 때처럼 교복을 입은 상태였다.
오오~, 이거 오랜만이네. 일어 서서 팔을 휙휙 돌린다. 관엽식물이 된지 어언 5년. 나는 오랜만에 동물로 돌아온 것이다.
"어……"
응?
돌아 보자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언, 니?"
그건 초등학생인 아오이였다.
"얼레, 아오이 너 쪼그만하네?"
아오이는 깜짝 놀라 내게로 달려왔다.
이런 이런.
"언니, 언니!"
"응석꾸러기네, 아오이."
"계속, 꿈에 한 번도 안 나왔잖아 언니. 드디어 만났어."
"어 그랬나. 이야 미안함다."
질책하는 듯한 눈빛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뭘까, 영혼이 식물에 붙잡혀 있는 건가……? 무섭게.
"그러지 말고 거기 앉아."
"응……"
아오이도 코타츠에 다릴 넣고 내 옆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쪼그만 아오이로 눈 보신을 하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아오이, 무슨 고민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네."
"어? 그, 그런가."
"그럼. 언니는 뭐든 다 알아. 아오이를 계속 지켜봐 왔는걸."
"에헤헤……"
힘 없이 웃던 아오이는 금세 고개를 숙였다.
"있지 언니."
"응."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몰라."
"응."
"근데, 그 사람은 대단해. 나 계속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는데……. 아직, 발끝만큼도 쫓아가질 못해서……"
"응."
"이런데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민폐겠지……. 엄청 인기 많은 사람인데. 세상엔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잔뜩 있으니까……."
"아오이는 누가 좋아?"
"그건…"
"뭐 어때, 오랜 만에 봤잖아. 자매 토크 하자. 자 말 해 봐."
"……이즈미 짱이랑 치하루 짱."
"둘이구나. 아오이는 욕심쟁이네."
"둘 다 좋아하는 건, 이상, 하지……한……"
"그 둘의 어디가 좋아?"
아오이는 더더욱 고개를 숙이고.
하지만 뺨은 따스한 색으로 물들였다.
"이즈미 짱의 머리카락이 좋아."
"응."
"치 짱의 냄새가 좋아."
"응."
"부드러운 이즈미 짱의 손가락이 좋아."
"응."
"치 짱이 웃을 때가 좋아."
"응."
하나 하나 맞장구 치며 아오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둘 다 아오이를 아주 좋아해."
"그럴, 까……?"
"그럼. 괜찮아. 언니는 뭐든 다 알아. 걔넨 꼭 네 고백을 받아 줄거야. 내 콜렉션 다 걸 수도 있어."
이게 꿈이라도 상관 없다.
모처럼 아오이를 만났으니까, 나는 아오이에게 모든 걸 말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관엽식물이 된 걸지도 모른다.
모에모에 시츄에이션을 만끽하는 게 아니라, 아오이의 행복을 이끌어주기 위해, 말이다.
"둘 중 누구를 골라도 꼭 행복해질 거야. 그 아이들이 아오이를 행복하게 해주고, 아오이가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거야."
아오이는 불안한 듯 나를 쳐다봤다.
"……나, 언니가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 언니가 없으면,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겠어……."
초등학생 그대로인 아오이는 매달리듯 둥근 눈에 내 미소를 비춘다.
"둘 다 착해서 고백하면 사귀어 줄 지도 모르지만…… 그치만 마음 한 켠에서 민폐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 무서워. 가슴 안 쪽이 꽉 죄여와서, 머리가 어질어질 해. 또 열이 나서, 둘이 걱정하게 만들고, 아프면 가게도 못 가게 되니까……. 나, 언니가 있어줬으면 좋겠어. 언니는 절대 날 혼자 두지 않으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오이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는다.
"언니는 이제 끝."
"에……"
"아오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건 치하루 짱이랑 이즈미 짱이야."
아오이는 검은 머리를 흔들며 내 소매를 붙잡는다.
"싫어, 그런 거, 겨우 만났는데."
"미안, 그래도 깨면 난 없을 거야. 화분에 뿌리 내린 식물이 아니니까, 아오이는 똑바로 걸어가야지."
"계속 외로웠어."
"아니지."
나는 웃으며 아오이의 코 끝을 눌렀다.
아오이는 "응?" 하며 고개를 든다.
"넌, 아니잖아."
"난……"
"즐거웠을 거야. 저렇게 멋진 친구가 있었으니까. 있잖아, 없어진 사람을 품진 마. 곁에 있는 사람을 떠올리면. 앞으로 찾아 올 밝은 미래를 믿고 나아갈 수 있다, 아닐까? "
치하루 짱은 썩 자주 우리 집엔 안 왔지만, 늘 아오이를 걱정해줬다. 학교에선 늘 만났다. 이즈미 짱은 언제든 아오이 곁에 서 있었다. 이즈미 짱도 아오이 덕에 고민을 덜어냈다.
그런 일들을 없었던 셈 쳐선 안 된다.
아오이는 줄곧 행복했다.
"내 말이 안 믿기지?"
"으응, 그렇지 않아. 언니를, 믿을게."
믿는다, 는 말이 너무나 아름답게 퍼져서 아, 아오이는 정말 착한 아이로 커 줬구나 싶었다. 모두 다 아빠, 엄마 그리고 친구들 덕분이다.
늘 곁에서 아오이의 슬픔을 같이 받아 줬는걸.
"언니……"
"사랑한다, 아오이."
"나도 사랑해, 계속 사랑해, 영원히 기억할거야."
아오이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쥐었다.
그 따스함은 내겐 벌써 잊혀져 가던 것이다.
누군가의 온기는 이렇게 기분 좋은 거구나.
"응, 고마워. 나도 잊지 않을게 아오이."
그 때 나는 떠올렸다.
죽기 직전에 본 것. 손을 잡고 걷던 초등학생 커플.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믿는 듯한 웃음을.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난──.
계속 그 아이들을──.
문득 보자 아오이는 고등학생이 돼 있었다.
키는 나랑 비슷했고.
나이도, 이젠 같다.
"알겠지, 아오이?"
"언니, 고마워…… 나 확실히, 확실히 말 할게."
"응, "
줄곧 안아 주고 싶었다, 아오이를 꼭 안아줄 수 있어서 나도 정말로 행복했다.
이제 남은 건 젋은 친구들한테 맡겨 볼까요.
"행복하렴, 아오이."
의식을 놓고서부터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만약 아오이가 누군가를 고르면, 남은 누군가한테 내가 가 줄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오이는 애인을 얻는 대신 친구를 잃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건 분명, 괴로운 선택이리라.
셋 중 누구든 우는 건 보고 싶지 않다.
그래도, 결말을 내긴 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백합 커플의 꽁냥꽁냥 생활을 지켜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 때 내 의식이 떠올랐다.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 아오이는 누군가와 전화하는 중이었다.
여자 아이를 불러 내는 모양이다.
희한하게도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잤는데 어째선지 아직도 아주 졸리다.
자기가 고백할 사람을 기다리는 아오이는 팽팽한 실 처럼.
하지만 어쩐지 굉장히 아름다웠다.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는 이런 마음일까, 하면서.
마지막까지 아오이를 지켜보겠다고 결심한 나는, 그 순간을 아오이와 함께 기다렸다.
그리고, 이전에 소녀였던 아이가 왔다.
아오이의 마지막 선택은──.
"저기, 미안해, 갑자기 불러 내서."
"웃지 말고 들어 주세요."
"……좋아, 해요."
"옛날부터, 아주 아주 옛날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요."
"당신이 곁에 있는 게 너무 기쁘고, 당신과 함께 있는시간이 좋고, 당신이 해주는 말이 좋고, 당신이 웃는 모습이 좋아요."
"미움받는 게 무서워서 계속 말 못했는데. 그치만 힘을 준 사람이 있어서……. 그러니까, 분명히 말 할게요. 용기 낼게요."
"앞으로 또 셀 수 없이 아프고, 쓰러지고, 민폐를 끼칠 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래도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저 수공예에 공을 들여서, 액세서리나 마크도 만들줄 알고, 바느질도 잘 하고…… 그리고, 저한테, 키스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랑 ■■■ 짱이 사이 좋게 지내는 게 싫으니까……"
"저 내내 어린애 같아서, 이런 마음을 깨닫는데 몇 년이나 걸렸지만, 그치만, 드디어 '좋아한다'는 마음을 알게 돼서."
머리카락을 기른 아오이 짱은, 땅딸막했던 체형도 겨우 1년만에 쑥 어른이 다 돼선 친척 아저씨들도 쉽사리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지 않는, 예쁜 소녀로 자랐다. 중학교 교복 효과일지도 모른다. 젊은 애가 입는 교복은 언제나 귀엽다. 응.
이대로 가면 몇 년 후엔 더 할 나위 없는 미소녀가 되겠지. 기대된다. 부디 초등학생 백합 커플에 정신이 팔려서 맨홀에 빠져 죽는, 정말이지 말같지도 않은 방법으로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래저래 해서 동생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던 나는 이 얼마나 행복한가!
게다가 나는 그런 동생에게 사랑받는 것이다.
물뿌리개 샤워를 머리부터 맞으며 몸도 마음도 녹아내린다.
"어때? 기분 좋아?"
아~ 이 맛에 산다~.
아오이 짱의 미소는 천사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이가 좋던 셋은 전부 같은 중학교에 갔다. 치하루 짱은 육상부, 아오이 짱은 수예부. 이즈미 짱은 귀가부지만 여전히 책벌레.
그리고, 자그마치 이 나, 우에다 하나도 성장한 것이다.
보아라 내 오의, 제2의 눈(세컨드 비전), 해방──.
그리고 경치가 확 바뀌었다.
여긴 아오이 짱의 방보다 한 층 더 넓다. 방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고, 거기엔 만화와 소설이 잔뜩 꽂혀 있다.
침대엔 크림색 이불이 깔려 있고, 인테리어와 코디네이트 할 것 없이 어쩐지 어른스런 느낌을 준다. 아오이 짱의 방에 잔뜩 전시돼 있던 인형도 하나도 없다. 게다가 TV나 게임기까지 놓여 있지만 거의 쓰인 흔적이 없다.
문이 찰칵 열린다.
"후~" 들어온 것은 이마를 드러낸 밝은 머리 색의, 이 또한 미소녀였다. 그렇다, 중학생이 된 미즈하라 이즈미 짱이다.
눈치를 채셨습니까.
나는 동생조차 아닌, 생판 남인 미소녀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능력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이 어찌…… 나, 죽은 후가 더 행복할 줄은…….
"아, 다녀왔어요 언니."
이즈미 짱은 영국 명품 물뿌리개를 들고 와서 물을 뿌린다.
아앗, 덕분에 물 먹는 쾌감도 두 배! 내 비밀스런 곳이! 깨끗이 씻겨서, 씻겨내려가버렷!
헉, 헉…… 물을 하루에 두 번이나 먹는 건 위험하군……. 아오이 짱과 이즈미 짱에게 마음이 꺾여서 기분 좋은 것만 쫓아다니는 천박한 암컷 식물이 되버릴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가 하면, 꺾꽂이 덕분이다.
엄마가 오래 키우려면 슬슬 솎아내야 해~ 라며 나를 꽃집에 데려갔을 때, 그러면요 하고 이즈미 짱이 어린 가지를 갖고 싶어했다.
찰칵찰칵 가지가 깎여나가는 건 미용실에서 머릴 자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지만 자른 머리카락을 심으면 내가 자라나는 건 살짝 무섭지. 식물 대단해.
그런 연유로 나는 둘로 늘었다. 의식은 공통이라 이즈미 짱의 방을 볼 수 있게 된 건 최근이지만 이제 아오이 짱이 물을 너무 줘서 뿌리가 썩어도 우선 피난할 곳인 생겼다는 거다.
이즈미 짱의 생활 리듬은 늘 일정하다.
"자, 그러면 얼른 끝내버리지요"
학교에서 온 이즈미 짱은 우선 숙제에 전념한다.
숙제가 없는 날도 다음 날 예습을 하는 모양이다. 그 다음은 저녁밥. 목욕하고 나서는 방에서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이 집의 넓이로 보아, 이즈미 짱은 좋은 집 아가씨인지, 학원을 몇 개쯤 가는 모양이다. 그리고 아오이 짱과 같은 학원에 지금도 다닌다.
"후~ 수고하셨습니다~"
기지개를 켠 이즈미 짱은 노트를 탁 덮었다. 끝난 모양이다.
그런 이즈미 짱과의 공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 뿐)이지만, 딱 하나 골치아픈 점이 있다.
방에서 나가고 식사와 목욕 세트를 끝내고 돌아온 이즈미 짱 말인데…….
그 차림새가 자그마치, 목욕 수건을 몸에 두른 것 뿐이다!
"덥다~ 더워~"
얘, 탈의실에 입을 옷을 안 가져가고, 방 안에서 갈아입는 것이다!
중학생 씩이나 되선! 그럴수가!
물론 목욕 수건을 풀면 거기엔 매끄럽고 탱탱한 미소녀의 전라가 있고, 게다가 코앞에서 갈아입는 것이다. 이게 매일 저녁마다. 여기는 천국입니까?
여자 아이의 알몸이 좋다는 게 아니라, 여자 아이들이 사랑하는 걸 좋아하는 나라지만 눈 앞에 맛있어 보이는 과실을 들이대면 손을 뻗어 버리는 건 불가항력이란 얘기지.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안 보려고 자제하는 중이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지……. 나는 내 이성을 믿을 수 없어. 왜냐하면 욕망대로 움직이다 죽었으니까…….
하지만 아오이 짱은 내가 확실하게 몸가짐을 교육해서 의외로 어렸을 때부터 이즈미 짱같은 행동은 안 했지만…….
젠장, 왜 쓸데없는 짓을 저지른거야! 인간이었던 나!
중학교 1학년이 되고 조금 지난 6월이다.
요즘 어쩐지 치하루 짱이 바쁜 모양이다.
병문안이라고 와서 쪽쪽대던 치하루 짱은, 이즈미 짱의 몸이 성장하면서 아프지 않게 돼 핑계가 없어졌는지 놀러 오는 빈도도 꽤 줄어들어버렸다.
일단 다른 이유도 있는 모양이다.
"부활동, 힘들지만 재밌다고 했었어."
그래 그래, 육상부에 들어갔다.
치하루 짱이 육상부, 어울리지~. 영양이나 날치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원래부터 운동을 좋아했으니까요~. 오히려 일요일에 방에 둘이서 꼼질꼼질 바느질하는 저희가 별난 사람같긴 하지만요."
"아하하, 그럴 지도 모르겠네……"
아오이 짱의 방에서 둘은 바느질을 했다. 오전에 사 온 재료로 솜인형을 만드는 것이다.
소녀 오브 소녀인 이즈미 짱과 마찬가지로 흑발 롱헤어 미소녀 아오이 짱이 같은 프레임에 찍히는 거, 뭔가 엄청 좋다. 백합 꽃밭이란 느낌.
그런 발칙한 망상을 하는 나는 미뤄 두고.
책상 위에 펼쳐진 설명 잡지를 보면서 이따금 고개를 갸웃 하는 이즈미 짱에게 아오이 짱이 충고해주곤 한다. 앗, "여긴 있지, 이렇게 하는 거야." 라며 손가락을 잡고 손을 얽으며, 앗, 앗. "주말에도 연습이라니, 치하루 짱도 그렇지만 선생님도 힘들겠다."
"그렇죠~.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전혀 다르니까요. 어쩐지 선배같은 게 갑자기 생긴 느낌이구요. 선후배 관계로 귀찮기도 하대서, 저는 부활동에 안 들어가길 잘 했어요."
"수예부는 다들 사이 좋은걸~"
"그건 아오이 양의 인덕이지요."
"에~ 그런 거 없어. 특별히 뭐 한 것도 없는데."
"제 말좀 들어 보세요 언니."
갑자기 날 들먹여서 깜짝 놀랐다.
뭡니까, 듣지요 듣지요.
"아오이 양 중학교에서 갑자기 인기가 늘었어요. 부드럽고 다정해서, 남자 여자 선생님 할 것 없이 다들 좋아해요"
실화냐, 저 맹한 아오이 짱이 인기를. 그렇군 그렇군, 그건 좋은 일이다.
"아냐 안 그래. 이즈미 짱이야말로."
"이야, 저는 그냥 그런 거 귀찮으니 됐어요. 쫓아 다니고, 모여 다니고, 반 안에서 지위를 높이려고 정치까지! 같은 건 초등학교 때 질려버렸으니까요. 중학교에선 은거예요, 은거. 사이 좋은 사람하고만 느긋하게 있을 거에요."
"중학교는 은거하긴 너무 일러~"
이즈미 짱은 농익은 얼굴로 헤헤헤 웃는다. 휴일을 아오이 짱과 둘이서 느긋하게 보내는 이즈미 짱은 확실히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솜인형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다 됐어요, 미니 아오이 양."
"그런 걸 만든 거야!?"
과연, 검은 머리칼에 땡그란 눈, 멍하니 열린 입, 더없이 지켜주고 싶어지는 총수의 느낌까지 아오이의 특징을 잘 잡았다.
나도 갖고 싶다.
"오늘이 아오이 양 시리즈가 생긴 날이예요. 앞으로도 계속 라인업을 추가해선 최종적으론 상품화를."
"무리라니까……"
"거짓말이예요. 안 한다니까요. 제가 아오이 양을 독점할 수 없게 되는걸요."
후훗 웃어 보인 이즈미 짱은 아오이 짱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동갑이 쓰다듬는데 얌전히 대놓고 있는 아오이 짱에게선 그야말로 수受의 관록이 느껴진다. 엄청, 두근두근 하게 된다.
실제론 동생이니까 누가 만지는 것도 자기가 만지는 것도 익숙한 거겠지만. 나도 자주 쓰다듬어 줬고.
"조금 의외였어요."
이즈미 짱이 조용히 말했다.
"치하루 양이 육상부에 들어간다고 정했을 때도, 아오이 양이 수예부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도. 왠지 둘은 같은 부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건."
아오이 짱은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좀, 이런 저런 일이 있었어."
"어머. 그랬어요? 저는 몰랐는데 무슨 일 있었나요?"
질문을 들은 아오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치하루 짱은 있지, 아오이가 수예부에 들어가면 나도 들어갈까, 랬었는데."
그건 뭐니 언니도 몰랐는데.
"늘 나한테 맞춰 주잖아 치하루 짱은."
"그건 주관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확실히 치하루 짱이 밖에서 안 놀게 된 건 내가 관엽식물이 되고 나서부터다.
아오이 짱은 그게 늘 신경쓰였던 걸까.
"그래서, 자기가 하고싶은 걸 안 참아도 돼, 라고. 치하루 짱은 내가 늘 주눅들어 있어서 곁에서 격려해줬던 거란 걸 아니까. 무리 안해도 돼, 라고."
이즈미 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면 치하루 양은?"
"아오이가 그렇다면, 이랬어."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아무렇지도, 라니……"
아오이 짱은 왜 이즈미가 그렇게 들이대는지 모르고 당황했다.
"나도 치하루 짱이랑 같이 있고 싶지만…… 그치만 난 벌써 치하루 짱이 한참이나 같이 있어줬으니까. 더 이상은 치하루 짱이 아까워. 치하루 짱이 달리는 모습은, 멋지단 말야."
"그런 얘길…… 아오이 양이 해 버리면 치하루 양은 완전 노력할 수 밖에 없잖아요……"
이즈미 짱은 눈을 치켜뜨고 아오이 짱의 뺨을 톡 때렸다.
"우…… 아무 말 안해서 미안, 이즈미 짱."
"아뇨, 딱히 저한테 보고해야 할 의무도 없으니까 괜찮지만요. 지금 때린 건 그냥 화풀이예요."
"화풀이……?"
"저, 가 볼게요."
솜인형을 꽈악 쥔 이즈미 짱이 일어섰다.
"치하루 양한테도 화풀이를 해야 할 일이 생겨서."
이즈미 짱은 뾰로통했다.
"저기, 화 났어? 이즈미 짱."
아오이 짱이 조심조심 묻자 이즈미 짱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상처받은 표정으로.
"화 안 났어요. 저는 그냥, 이 세상엔 산타가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거예요. 그러니, 이건 제 멋대로 부리는 어리광이예요."
혼자가 된 이즈미 짱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솜인형 만들기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 진도는 아까 전과 확연히 다르게 거의 나아가질 않았다.
"화풀이라니, 뭘까……"
나도 모르겠다.
무슨 의미였던 걸까.
중학교 1학년인 이즈미 짱의 마음 속 움직임은 나보다 훨씬 어른일지도 모른다. 뭐 그렇지. 난 단순하지. 애초에 식물이고.
세컨드 비전으로 이즈미 짱의 방을 들여다 본다. 마침 딱 들어왔을 때였다.
"정말이지."
씩씩대며 가방을 던진다.
히익, 이렇게 대놓고 화난 이즈미 짱은 처음 봐.
휴대폰을 꺼내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혀를 찬다.
어차피 상대는 치하루 짱이다. 아직 부활동중이리라.
"……딱히, 제가 이런 걸 해 봤자 어쩔 순 없겠지만."
목소리는 조금 식어 있었다. 혼자가 되고 화도 식은 모양이었다.
"정말, 단순한, 화풀이. ……한심해요."
이즈미 짱은 자기혐오하듯 그렇게 말하곤 옷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비밀 서고가 있다. 마리미떼같은 게 들어있는 것도 저 서고다.
이즈미 짱이 모은 백합 콜렉션이다.
그 중 한 권을 들고 슥슥 책장을 넘긴다.
마치 자기 마음을 재확인 하듯.
"…………"
한참 그러고 있던 이즈미 짱은 저녁 먹으라는 소리에 방에서 나갔다.
내던져진 만화가 궁금해서 손을 뻗으려 해보지만 무리였다. 나는 일체의 창작물을 즐길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미소녀 여중생들의 비밀을 훔쳐보는 것 뿐이다. 힘들다, 관엽식물 힘들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당연히 목욕 수건만 두른 이즈미 짱.
미소녀의 나체라니, 위험해. 저 눈부신 피부 광택이 태양광보다 광합성 잘 될 것 같다.
이즈미 짱은 머리를 벅벅 닦아내곤 목욕수건을 두른 채 침대에 누웠다. 우와, 각도적으로 이것저것 보일 것 같다. 내가 다 부끄럽네!
이파리를 새빨갛게 물들이는(안 바뀐다) 내 앞에서 이즈미 짱은 다시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응, 왜?'
이번엔 받았다.
"지금 괜찮나요? 할 말이 있는데요."
'갑자기 왜. 얘기는 학교에서도 할 수 있잖아…… 좀 무섭네.'
역시나 상대는 치하루 짱이다.
피곤한 건지 이즈미 짱의 영문 모를 압력을 경계하는 건지 치하루 짱의 목소리도 썩 밝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쳐도 통화 내용이 확실히 들리는 건 좋다. 관엽식물은 귀가 좋구나. 아니면 진동을 느끼는 걸까.
"오늘 아오이 양네 집에 갔었는데요."
'보고라도 하냐. 너네 사이 좋네.'
"……그렇죠, 굉장히 사이 좋아요. 매일 섹스하니까요."
전화기 저편에서 치하루 짱이 장대하게 사레들렸다.
말 한 이즈미 짱은 진지했다.
'너, 너어──'
"농담이예요. 치하루 양이 어쩐지 남 일 처럼 얘기해서 그만."
힘이 빠진 기색이 보였다.
'……너 ……여전하구나……'
"아오이 양 말대로 육상부에 들어갔다면서요."
치하루 짱은 한숨을 쉰다.
'그런 거 아냐. 애초에 테니스부나 육상부에 들어가려고 했어. 난 수예같은 건 안어울리고. 그런 건 아오이같은 소녀들의 취미야. 아오이한테 들어갈까 찔러본 건 그냥 변덕이었어.'
"이젠 아오이 양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나요?"
'아오이는 아오이야. 언제가 됐건 내 안에선 변함 없어.'
"좋아하지 않게 된 건가요?"
치하루 짱은 그 질문엔 대답 못했다.
이즈미 짱의 도발도 받아넘기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아오이도 중학생이야. 반에서 얘기도 하고 평소랑 다를 거 없어. 그냥 하루 웬종일 붙어있어봤자 어쩔 수 있는 것도 없고.'
"헤~, 흐응~, 그런가요~"
'사람 신경 쓰이는 말투로……'
"아뇨, 치하루 양이 아오이 양에게 품은 마음이 그 정도 밖에 안됐나 싶어서요."
'이상하게 시비 좀 걸지 마.'
진절머리 난 치하루 짱은 찍어누르듯 말했다.
'아오이는 소중한 친구야. 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애초에 이즈미랑은 상관 없잖아. 아오이랑 다른 부에 들어간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아뇨. 자기가 곁에 있는 게 폐를 끼치는게 아닌가 해서 몸을 뺀 아오이 양을 그대로 놔둔 거예요. 가엾잖아요. 계속 같이 있던 친구한테 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걱정하면서 지냈는데 그 불안을 내버려 두다니.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면 정말로 아오이 양이 폐를 끼쳤다는 건가요?"
거기서 한 호흡 멈추고.
이즈미 짱의 말은 순수하게 친구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하지만 그것 뿐만이 아닌 걸 나는 느꼈다.
단순히 친절하게 끼어든 레벨을 넘어서. 이즈미 짱은 어째선지 둘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 자체보다는, 두/사/람/의/관/계/를 향한 것일 지도 모른다.
아무 말 없던 치하루 짱은 꼭 변명 하듯.
'……아오이는 중학생이 되고서부터 한 번도 안 아팠어. 튼튼해졌어. 이젠, 됐잖아.'
이즈미 짱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선, 틀린 거에요."
언제 어디서든 표표히 웃던 이즈미 짱이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라면 분명, 저는"
저는…… 하고 말 없는 소리를 낸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미안, 목욕 하러 가래.'
"……그런가요."
이즈미 짱은 숨을 가다듬었다.
"죄송해요, 시간을 뺏어서."
'그 정도쯤 괜찮아. 이즈미도 친구고, 그리고……'
치하루 짱은 쉰 듯한 목소리로.
'아오이를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 말엔 확연한 친애의 감정이 있었다.
"……아니예요."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자.'
"안녕히 주무세요."
전화가 끊겼다.
이즈미 짱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향하곤 이마에 손을 댔다.
더없이 고민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이즈미 짱은 소꿉친구 두 사람이 엮였으면 하는 걸까.
나처럼 백합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단순한 취미라기엔 상당히 마음이 담겼다.
이즈미 짱은 파자마로 갈아입고 가방에서 꺼낸 솜인형을 소중히 책상 위에 놓고 침대에 앉았다.
가만히 아오이 짱 인형을 쳐다보는 이즈미 짱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뇌세포가 없는 식물인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오이 짱한테 놀러간 이즈미 짱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기 방에 들어오면 한숨을 쉬는 일이 잦다.
이즈미 짱은 무언가 고민하는 채로 시간이 흘렀다.
곁에 있던 나도 답답한 마음을 품은 채, 얘들은 중학교 2학년이 되고.
올 한 해 치하루 짱이 아오이 짱네 방에 놀러오는 일도 없었다.
갓 봄이 된 어느 날이었다. 이즈미 짱은 마침내 행동을 시작했다.
결심하는 데까지 1년 가까이 걸린 그 계획은 대체…….
"좋아."
천천히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이즈미 짱.
그 상대는 자그마치, 남자였다──.
"있죠 미야마에군. 계속 부탁하던 그거 말인데, 조건을 받아들이면 도와드릴게요. 맞아요. 아오이 양과 일일 데이트. 세팅해드릴게요."
뭐, 야, 잠깐!
우리 아오이 짱에게 남자를 들이대려는 건가, 이즈미 짱!
그건 백합충의 금기 아니냐!? 어!
"단, 제가 지정한 곳을 지정된 시간에 지날 것. 그리고 그 때는 애인처럼 행동하는 거예요. 네? 힘들다구요? 뭐 어때요, 와장창 차였지만 아오이 양과 한 번 데이트를 하게 되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헉, 미야마에 군은 그건가.
초등학생 때 아오이 짱한테 고백했던 학원의 남자 아이인가.
"알겠죠? 그럼 스케줄은 나중에 연락할게요. 네, 그러면 기대해 주세요. 네, 그럼."
저 쪽이 뭐라 말하는 것도 무시하고 전화를 삑 끊었다.
이즈미 짱은 깊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아오이 양, 치하루 양……"
합장하곤 아오이 짱이 있는 쪽에 고개를 숙였다.
뭘 하려는 거니 이즈미 짱…….
"하지만 이것 뿐이예요. 이렇게 안 하면 저는…… 전……"
뭉그러질 듯한 목소리로 신음하는 이즈미 짱은 못된 일을 꾸민다기 보다는 꼭 두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2주 후.
이즈미 짱 방이다.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이즈미 짱은 거친 안색으로 쿵쾅쿵쾅 들어왔다.
"나는 시킨 대로 했다!?"
또 한 명, 소심해보이는 안경 소년도 있다. 아마 미야마에 군이겠지.
마치 시치고산 때 입을 법한 나비넥타이 붙은 옷을 입었다. 평소에도 코난 코스프레를 하는 걸까. 아니면 데이트용 옷일까.
이즈미 짱은 발을 구르며.
"치하루 양이 오늘만 연습 코스를 바꾼다니 대체 그게 뭐하는 거예요! 왜 도로가 공사중이예요! 예!?"
"히익"
미야마에 군은 무시무시한 이즈미 짱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흐윽, 인생 최초로 여자 애 방에 왔는데 하나도 안 기뻐……. 미즈하라 양 너무 무서워, 오늘은 더 무서워……"
"당신을 보고 있었더니 어쩐지 짜증이 나서."
"너무해…… 데이트 중에도 뒤에서 악마같이 감시하는 눈길을 등 뒤에 날리고……. 역시 나 같은게 우에다 양이랑 한 번이라도 추억을 만들어보려고 한 게 실수였어……"
쓰러지며 우는 미야마에 군을 마치 돼지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그 말은 정말로 옳은 말이지만, 으윽, 아오이 양을 계속 밑에서 기다리게 할 수도 없고…… 아 정말, 치하루 양은 부활동 중이라 전화도 안 받고! 이제 이렇게 된 이상 엄마 흉내를 내서 학교에 전화를…… 큭, 하지만 여기로 부를 만한 구실이 없어요……!"
이즈미 짱도 완전히 당황한 모양이었다.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우선 상황을 정리해 보면, 미야마에 군과 아오이 짱이 데이트를 하는 내내 이즈미 짱이 미행&감시를 했고.
지금 이즈미 짱네 집에 일단 와서, 아오이 짱을 현관에서 기다리게 하는 중.
그리고 이즈미 짱은 무슨 수를 써서든 데이트 하는 현장을 치하루 짱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마음 대로 안 된 것 같다.
이게 1년동안 짠 계획의 전모다.
잘 이해도 안되고, 제대로 풀린 게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힘내라 이즈미 짱!
"이렇게 된 이상……알겠어요!? 전 부활동 중인 치하루 양을 부르러 학교에 갈 테니까 그 때까지 어떻게든 아오이 양과 좋은 분위기를 잡아 주세요! 그리고 제가 들어왔을 때 고백같은 걸 해서 아오이 양한테 집적거리세요! 그러면 저와 치하루 양이 줘 패서 말릴테니까요!"
"우에다 양과 단둘이 남겨진 데다가 여자한테 맞을 수 있다고……?"
미야마에 군이 군침을 꿀꺽 삼켰다. 이즈미 짱의 눈이 돼지를 보는 것에서 벌레를 보는 듯한 것이 됐다.
"……뭐 됐어요. 당신과 같은 공기를 마시게 될 아오이 양이 가여워서 못 버티겠지만 그것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학원에서 맨날 같은 공기 마신단 말이지."
괜찮아 이즈미 짱! 이 방의 공기는 내가 환시시킬테니까!
아 그래도 남자의 이산화탄소가, 남자가 내뱉은 독가스가 나를 침식…….
으윽, 괴로워, 슬퍼…… 하지만 이것도 모두 아오이 짱을 위한 일…….
아오이 짱은 맑고 깨끗한 산소만 마셔줬으면 하니까 내가 희생해서라도 아오이 짱의 순수함을 지켜야 해……. 아오이 짱, 언니 노력할게…….
그럼, 하곤 이즈미 짱이 나간 자리에 아오이 짱이 돌아왔다.
오늘 입은 건 흰 색 원피스. 끝내주게 귀엽다. 머리카락도 빙그르 모아둔 건 데이트용 같은 걸까. 너무 귀엽다.
"저기, 이즈미 짱 나간 모양이네. 금방 온다곤 했지만."
"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그러게!"
미야마에 군은 안경을 고쳐 쓰며 필사적으로 끄덕였다.
너 그렇게 당황하면서 잘도 아오이 짱이랑 데이트 했구나!
아오이 짱도 당황스러운 듯 웃는다.
"그럼 올 때까지 게임이나 빌려서 할까?"
"어? 아, 응! 그래! 슈퍼 나이스 아이디어!"
뼛속까지 수受인 아오이 짱한테 리드받다니…….
이즈미 짱은 아오이 짱과 치하루 짱을 붙여놓으려는 걸까. 그래서 일부러 남자랑 데이트하는 걸 보여서 질투하게 만들려던 걸까.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알 수 없는 건 이즈미 짱의 동기다. 왜 그렇게 까지 하는 걸까. 설마 극도의 커플충인가. 지지커플이 결혼 안하면 죽어버리는 병인가. 죄 많은 아이다.
이즈미 짱 방에서 아오이 짱과 미야마에 군은 나란히 게임을 한다. 스위치가 아니라 아직 위 유다. 마리오 카트였다.
이즈미 짱 본인은 썩 게임을 즐기지 않고, 거의 아오이 짱이 놀러왔을 때 전용으로 쓰고 있었다. 우리 집엔 낡은 휴대용 게임기밖에 없어서, 큰 화면으로 하는게 아오이 짱은 재밌는 모양이다. 자기 방에 TV가 있는 건 좋은 일이지~.
한 편, 미야마에 군은 옆의 아오이 짱이 신경쓰여서인지 전혀 게임에 집중하지 못했다.
애초에 아오이 짱도 반사신경이 사멸한 상태라 더럽게 못한다. 최하수 대전이다.
"재밌는데, 어렵네."
"그, 그러게! 슈퍼 극악 난이도네!"
그럴 리가. 50cc인데.(cc가 올라갈수록 게임이 빠르고 어려워진다. 50cc는 가장 낮은 난이도; 역주)
몇 번째인지 레이스가 끝나자 미야마에 군은 컨트롤러를 놨다.
"이, 있잖아, 우에다 양."
"왜애~?"
보는 사람이 긴장될만큼 떨리는 목소리로.
"……우에다 양은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비범한 긴장감이 옮은 건지 아오이 짱은 "그게" 하고 할 말을 잃었다.
"……아마, 없는거 같다."
"아마."
"응. 난 그런 건 잘 모르겠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하나도 변하질 않아서."
아오이 짱은 자조하듯 웃었다.
"아직 어린애라서 좋다거나 싫다거나, 사귀고 안사귀고 하는 건 잘 모르겠어서…… 미안해, 미야마에 군. 오늘도 모처럼 용기를 내 줬는데."
"아, 아냐! 나야 말로 신경쓰게 해서 미안! 그치만……."
미야마에 군은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진다.
"왜,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 같은 건 있지!?"
"그건 모두 다 즐거워. 남자 여자 상관 없이 이야기 하면 모두 즐거워. 미야마에 군도 그래."
"그 중에서 최고나 그 다음! 분명 순서라는 건 있잖아! 모두 다 최고란 건 말도 안 돼!"
"순서……."
미야마에 군은 열변했다.
"그 사람이 근처에 없으면 뭐 하는걸까 궁금하거나! 그 사람이 슬퍼하는 표정은 보고싶지 않거나!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있으면 어쩐지 쓸쓸하거나! 그런 느낌이 드는 사람, 있잖아!? 없는거야!? 없어!? 내가 아니더라도!"
아오이 짱의 입술이 아주 조금 달싹였다.
"…………있으, 려나……?"
그건 아마 내게만 들렸을 소리다.
아오이 짱의 뺨에 핏기가 돈다.
하지만 흥분한 미야마에 군은 눈치 못 채고 아오이 짱의 어깨를 잡았다.
부드러운 여자 어깨를!
"우에다 양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포기하겠지만! 그렇게 모르겠다고만 하면 말야! 언젠가 나한테도 기회가 오지 않을지 기대하게 된다고! 찰 거면 제대로 차 줘! 희망고문 하지 말고!"
"미, 미안, 그러려던 게."
미야마에 군을 올려보는 아오이 짱의 얼굴에 공포가 깃든다.
자, 잠깐만, 이거 좀 위헌한 거 아냐?
"저기, 우에다 양! 그럼 내가 안되는 이유는 뭐야!? 겁쟁이라서!? 오타쿠라서!? 이럴 때 멋진 말 한 마디도 못 하는 놈이라서!? 어? 어?"
"아, 아파 미야마에 군."
아오이 짱의 어깨를 잡은 미야마에 군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하와와와.
아오이 짱의 위기다.
이 상황 뭐야 난 어떡하면 돼!?
이파리 커터같은거! 못 쓰는거야!? 저 자식의 경동맥을 끊어버릴 만한 오의가 떠오르지도 않는 거야!?
유감이지만 오의는 떠오르지 않았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내쉬며 아오이 짱에게 육박하는 미야마에 군을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
누가, 도와줘요! 왕자님! 왕자님! 우리 공주님을 구해줘요~!
쾅! 하고 문이 열렸다.
그 곳엔!
"뒈져 짐승 새꺄!"
이즈미 짱!
휘둘린 가방이 미야마에 군의 뺨에 클린 히트. 미야마에 군은 데굴데굴 널부러지다 벽에 부딛혀서 멈췄다.
우연히도 미야마에 군이 이즈미 짱의 계획대로 움직이다 도를 넘었단 거다.
구하러 온 건 치하루 짱이 아니었지만. 그 순간의 이즈미 짱은 그야말로 왕자님 같았다.
정신을 차린 미야마에 군이었다.
아오이 짱 앞에서 아주 그야말로 훌륭한 도게자를 선보이곤, '이제 거슬리니까 나가'라는 이즈미 짱의 냉담한 한 마디에 쫓겨났다.
이건 여담이지만 미야마에 군은 머리를 밀어서 반성의 뜻을 보이고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착한 아오이 짱에게 용서받은 다음, 자기 발로 이즈미 짱의 꼬봉까지 전락했다던가.
앞으로 이 이야기에 미야마에 군을 포함한 남자가 등장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테니 완벽하게 잊어줬으면 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미야마에 군이 돌아간 후, 이즈미 짱은 아오이 짱을 꼭 끌어안았다.
"지인짜 미안해요 아오이 양…… 제 생각이 얕아서 아오이 양을 위험하게……. 긴고아(손오공이 머리에 쓴 그거; 역주)라도 채워뒀어야 했어요……"
"아, 아냐…… 조금 놀라긴 했지만 난 괜찮아, 멀쩡해."
아오이 짱은 이즈미 짱을 안심시키려고 웃어보인다.
아아, 그걸 본 나는 어쩐지 기쁜 것 같기도, 쓸쓸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죽어서 마구 울던 아오이 짱은 슬픔을 넘어서 이렇게 강한 아이가 된 거다.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착한 아이가.
어쩌면 치하루 짱도 같은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오이 짱이 자기 품에서 벗어난 걸 깨닫고 자기만의 길을 걸으려 한 걸까.
웃음을 본 이즈미 짱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오이 짱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만, 제 얘기를, 해도 될까요."
아오이 짱은 이즈미 짱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응."
이즈미 짱은 주먹을 꼭 쥐며.
말한다.
"저는 철이 들 무렵부터 여자가 좋았어요."
그 고백에 아오이 짱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즈미 짱은 떠듬떠듬 이어갔다.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은 친구 엄마였어요. 지금에 와선, 거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래서 온 세상의 책들을 읽어 보고…… 백합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책 속 이야기들은 모두 다 아름다워서 부러웠어요. 하지만 전 남들보다 조숙했던 만큼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빨리 깨달았어요. 학교에서 여자애들 끼리 있으면 이상한 소문이 나고, 놀림받고. 그런 걸 신경쓰는 소심한 저도 싫어서……."
"저는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 참으려고 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렇게 결심했어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아무한테도 말 안하고 숨긴 채 살자고. 그래서, 앞으로 12년. 열 살이 생각하는 12년 후는 너무 멀어서 평생 닿지 않을 미래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저는 아오이 양과 치하루 양을 만나서."
"어쩌면, 이 둘이라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했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특별하게 여겨서, 둘은 제 꿈같은 거였어요. 처음엔 곁에 있기만 해도 충분했는데. 하지만 둘이 점점 멀어지는 게 초조하고, 화가 나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전 못된 년이예요. 어릴 때의 순수한 마음은 없고, 앞으로 계속 살아갈 자길 위한 공범을 찾은 것 뿐이예요."
마음 속 외침을 토로한 이즈미 짱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꺽꺽대며 아오이 짱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계속 참으려고 했어요. 그치만, 계속 커져가는 마음이 아파서…… 아무한테도 말 못해서……. 미안해요, 아오이 양을 말려들게 해서, 치하루 양을 이용하려고 해서……. 정말, 죄송해요. 이제 이상한 짓 절대 안 할게요. 약속이예요. 그러니까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역겨워하지 말아주세요. 이기적인 소리만 해서, 죄송해요. 아오이 양 곁에 있고 싶어요. 친구로 남게 해 주세요."
이즈미 짱의 긴 독백이 끝나고.
아오이 짱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좀 놀란 것 뿐이야. 이즈미 짱을 역겨워하지 않아. 미워하지도 않아."
"그치만, 그치만."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대도,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해. 내…… 그, 가까운 사람도 그랬던 것 같구."
그렇게 말한 이즈미 짱은 슬쩍 관엽식물(나)을 봤다.
아니, 아니예요. 저는 백합책이 좋은 것 뿐이고……. 누굴 좋아하진…….
것보다, 사후 3년이 지나서 밝혀진 충격적 사실. 동생은 언니가 백합충인 걸 알고 있었다. 무진장 동요하는 중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이즈미 짱이다.
아오이 짱이 말했지만.
"……죄송해요, 아오이 양……."
이즈미 짱은 그치지 않았다.
아오이 짱은 어떡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중이다.
어떻게 해야 이즈미 짱을 안심시켜줄 수 있을지.
지금까지랑 똑같이 계속 친구야, 라고.
그 말은 설득력이 있을까.
코를 훌쩍이는 이즈미짱에게, 아오이 짱은 아주 잠깐 주저하곤.
뺨에 손을 댔다.
"……있잖아, 이건, 내 소중한 사람이 가르쳐 준, 마법이야."
설마.
"마법……?"
"응, 따뜻해지고, 기운이 나는 마법. 내가 힘들 땐 늘 곁에 있어준 사람이…… 넌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을 담은, 마법이야."
미소지으며 말하는 아오이 짱에게 있어선 배운 마법이겠지만.
어, 이즈미 짱한테 할 거야? 진심이야……?
그건…… 크리티컬이 아닐까……?
이즈미 짱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어라 말하려던 이즈미 짱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응석부리는 듯한 목소리로.
"……괜찮나요? 저한테."
"응. 그야 나도 소중한 이즈미 짱이 우는 건 슬픈걸. 그러니까, 확실하게 증명하는 거야. 이즈미 짱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이 무슨.
아오이 너는 마성의 중학생이니.
흑발 미소녀가 한 말에, 이즈미 짱은 마음을 맡기듯 눈을 감는다,
그리고──.
아오이 짱은 이마에 '쪽' 하고.
작게 입맞춤했다.
"앗……"
고개를 떼고 쳐다보기를 한동안, 이즈미 짱은 꺠달은 듯 이마를 두 손으로 잡았다.
"아, 아오이 양……"
바들바들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껏 없던 여유 없는 태도의 이즈미 짱을 보고 있자니 나도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자기가 뽀뽀하는 건 처음이라고 하지만, 이마 뽀뽀에 익숙한 아오이 짱은 옳지옳지 하고 이즈미 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여유 넘치는 공攻인 양…….
이즈미 짱은 촉촉한 눈으로 아오이 짱을 올려봤다.
"아오이 양……, 저……"
"괜찮아, 괜찮단다── 꺅"
두 손 손가락을 얽으며 체중을 싣는 이즈미 짱.
아오이 짱은 뒤로 벌렁 누웠다. 덮쳐지는 듯한 모양새다.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이 카펫 위에 흐드러진다.
"제, 제가, 해도 될까요, 그 마법."
"으, 응. ……괜찮아, 해도 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같지만 아오이 짱의 몸은 다시금 굳었다.
하지만 들뜬 이즈미 짱은 그걸 못 알아봤다.
새빨간 얼굴, 거친 숨결. 12년간 참아 온 자신을 털어놓은 소녀가, 아름다운 소녀에게 이마라곤 해도 키스받았다.
그 결과──.
"아오이 양…… 아오이 양, 아오이 양……."
두 팔로 지지하며 이즈미 짱은 아오이 짱을 덮고…….
그리고 귀여운 입술을 이마가 아니라 입술에 갖다 대고──.
"앗……"
아오이 짱이 놀란 소리를 냈다.
입술 뽀뽀다.
아오이 짱에겐 두 번째인, 그리고 아마 이즈미 짱에겐 처음일.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즈미 짱은 몇 번이고 입술에 키스했다.
달뜬 얼굴로 수 없이, 셀 수없이.
"아오이 양, 아오이 양…… 아오이양……"
완전히 고삐가 풀린 듯 마음을 들이붓는다.
"이즈미짱……"
여덟 번째 키스가 끝나자 이즈미 짱이 황홀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아오이 짱에게 체중이 실리지 않게, 허리춤 위에 무릎을 꿇으며.
입술을 손으로 훑었다.
아주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아끼듯.
"……아오이 양의 마법은, 굉장한 효과였어요."
"아으."
얼굴을 화끈 붉히며 아오이 짱은 미소지었다.
"나도…… 머리가 새하얘져버렸을, 지도……"
그 미소가 이즈미 짱의 마음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
"아오이 양."
이즈미 짱은 입술을 훑던 검지를 쿡 찔렀다. 손 끝으로 부드러운 감촉을 즐기며, 요염하게 웃다가──.
이즈미 짱은 헉 하곤 뭔가를 알아챘다.
흐릿하던 눈의 초점이 서서히 바로잡힌다.
랩 현상같은 신음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아, 아, 아, 아……"
"이즈미 짱?"
아직 깔려 있던 아오이 짱이 궁금한 듯 묻자 이즈미 짱은 토끼처럼 뿅 튀어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도게자했다.
"저, 저기, 이건, 그! 잠깐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그, 쇠송해요! 제가 무슨 짓을……!"
갑자기 부끄러워 하는 이즈미 짱을 보고 몸을 일으킨 아오이 짱도 다리 사이에 손을 두고선 붉게 물든 고개를 숙였다.
"아, 저기……"
하지만 이 어색한 분위기일 때 나가긴 싫었는지 용기를 쥐어 짜듯 말했다.
"……아냐, 이즈미 짱이 기운 나서 다행이야. 내 소중한, 친구잖아."
──친구.
그 말을 들은 이즈미 짱도 몸을 일으키며 얼굴에 만들어 붙인듯한 웃음을 지었다.
"아, 아하하, 그, 그렇죠, 아하하……"
"에헤헤."
"아하하"
"에헤헤……"
아오이 짱은 꼭 첫날 밤 새색시 같았지만 이즈미 짱의 등에선 식은땀이 콸콸 흘러 내렸다…….
아오이 짱은 그대로 "다음에 봐" 라며 떠나갔다. 이즈미 짱은 끝까지 억지 웃음으로 아오이 짱을 떠나보낸다.
그리고 방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머리를 쥐어 뜯으며 침대에 뛰어들었다.
아오이 짱 앞에서 꾸몄던 힘이 다한 모양이었다.
굴러다닌다.
"하느님 부처님 백합님! 제발 오늘 일을 없었던 걸로 만들어 주세요!"
유감이지만 저는 그저 관엽식물 인지라…….
"아악─ 아악─! 전, 전 대체 무슨 짓을! 아오이 양에게, 무슨 짓을! 아악─! 아악─! 내일 무슨 낯으로 학교를 가요!"
침대를 쾅쾅 때리는 이즈미 짱.
금세 지쳤는지 힘이 점점 약해진다.
하아아아아……, 깊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죽고 싶다…… 가급적 빨리, 아오이 양의 기억에서 사라지고파……"
이불을 당기고 몸을 말아선 머리까지 푹 뒤집어 쓴다.
답답해졌는지 금세 나왔다.
손발을 내던지고 천장을 보며 이즈미 짱은 백주몽을 꾸는 듯한 눈으로.
"소중한, 친구……라."
그 말엔 나른함, 그리고 일말의 쓸쓸함이 있었다.
아오이가 자기를 좋아할 리 없다. 그저 곁에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뿐이다. 그 이상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하지만, 이즈미 짱의 뇌수는 감촉을 기억해 버렸다.
"아오이 양의 입술……. 부드러웠지……."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 혼잣말은 물방울이 땅을 때리는 듯한 고요함에 빨려들어간다.
그 때였다. 벨 소리가 났다.
이즈미 짱은 화면을 보고 굳었다.
잠시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 휴대폰을 들었다.
"아…… 그으, 여보세요."
'웬일이야? 오늘 부실까지 왔다던데.'
"그건, 있잖아요─ 저어─……"
치하루 짱 전화였다.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그것도 전부 끝났다고 해야 할까요─……"
'어 그래. 그럼 됐고.'
"음~. 응~, 음~, 응~……"
'왜 그렇게 끙끙 앓아.'
"지금, 좀, 제 죄악감이랑 싸우는 중이예요……. 특히 치하루 양이면 더더욱……."
그야 마법을 걸었단 건 분명 치하루 양일테니까요……, 이즈미 짱은 전화기를 떨어트리고 중얼거렸다.
그래, 그 사람한테 넌 쪽쪽 한 거야 이즈미 짱.
두 소녀가 우리 동생을 두고 싸운다……. 루루루…….
당사자인 이즈미 짱은 참기 힘든 모양이다.
한 편, 치하루 짱은 진절머리를 내듯.
'뭐야…… 또 무슨 나쁜 짓 하냐…… 이제 중학생이니까 그런 건 적당히 끝을 내……'
"죄송한데 지금은 좀 감정의 수도꼭지가 고장났거든요, 설교는 나중에 해 주세요. 그것보다 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쓸 데 없는 소릴지도 모르지만, 이즈민 그런 이기적인 면을 안 고치면 친구 안 생긴다.'
"아무한테나 이렇게 말하는줄 알아요! 것보다 치하루 양에게 있어서 아오이 양은 어떤 존재인가요?"
'또 그거냐.'
"이번엔 진심이예요."
이즈미 짱의 목소리는 진지 그 자체였다.
'……'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전화기 저편의 치하루 짱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저에게 있어서 아오이는."
이즈미 짱이 제지했다.
"치하루 양이 세이 님이라고 치고."
'어……. 응?'
"아오이 양은 시마코씨 인가요, 시오리 씨인가요, 유미 씨 같은 건가요?"
'애초에 난 그렇게 멋있질 않은데……'
"예를 들어서요, 예를."
하지만 진지하게 대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치하루 짱은 한참 생각한 다음.
'모르겠어. 다른 사람으로 비유하는 건 어려워. 나한테 아오이는 아오이야. 동생이고, 친구고, 소꿉친구고…… 하나 짱의, 동생이야.'
"그럼."
이즈미 짱은 크게 내디뎠다.
치하루 짱의 안쪽까지.
"애인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는 건가요?"
'……'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이즈미 짱은 기도하듯 기다린다.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마침내 치하루 짱은 대답했다.
'없어. 당연히 없지. ……나랑 아오이는 여자잖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이즈미 짱의 팽팽했던 무언가가 뚝 끊기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어……'
치하루 짱의 목소리는 개운하지 않았다. 꼭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듯.
하지만 이즈미 짱은 알면서도 더 묻지는 않았다.
이미, 치하루 짱의 대답은 들은 것이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응……, 잘 자.'
전화가 끊긴다.
이즈미 짱은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곤 '으악~'하고 앓으며 천장을 쳐다봤다.
"치하루, 바보."
자기 뺨을 툭 때리곤 한 마디 더.
"나…… 바보……"
아마 이즈미 짱이 무언가를 결심한 건 이 날이었던 것 같다.
이즈미 짱이 분위기에 몸을 맡긴 행동에 죽고싶어질 만큼 반성하고, 치하루 짱과 의미심장한 내용의 통화를 끝냈을 때.
집에 온 아오이 짱 또한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공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네……"
그러게…….
미야마에 군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있지, 언니."
아주 자연스레 말하는 아오이 짱에게 내 목소린 가 닿지 않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나는 아오이 짱에게 웃어주고프다.
왜 아오이 짱? 하고.
"……중학생이 되고서부터, 다들 좋아하는 남자 얘기를 하게 됐어. 초등학교 때는 다들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한테도 맨날 묻는데, 없다고 대답하면…… 그러면 다들 날 어린애라고 하고…… 이상한 걸까, 나."
그렇지 않아.
이파리를 팔랑팔랑 흔들려 하지만 그것도 안 된다.
아오이 짱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 이제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상한 걸까……. 그치만 좋아한다는 게 뭘까……"
그러게 말이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를 제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아오이 짱이 제일 좋아.
산만한 생각을 혼잣말에 담아 흘려보내는 아오이 짱.
그 목소리가 조금씩, 촉촉해져 간다.
앗, 어라, 어라라.
아까까진 감성적이었던 아오이가, 꼭…….
"……이즈미 짱……"
주인님의 이름을 부르는 강아지 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책상에 엎드린 아오이 짱의 옆모습은, 멀리서 봐도 확연할 만큼 붉어져 있었다.
"치 짱의 마법……. 효과가 있어서 기쁘지만, 입술은 뭔가 아닌 것 같아~……"
아오이 짱은 눈을 감았다.
닥쳐 오는, 이즈미 짱의 도화선이 터지기 직전 같은 표정을 떠올렸는지 다시금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치만, 조금, 기분 좋았어."
아오이 짱은 아직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 인데도 가슴이 뛰어버릴 만큼 섹시했다.
"좋거나 싫은 건, 아직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런데 입술과 입술을 맞대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니…… 나, 변태인 걸까……"
이건…….
"이런 건, 이즈미 짱한테도, 치 짱한테도 말 못 해……"
친언니는 그런 말을 듣고 굉장히 비 도덕적 감정이 솟구친다.
아오이 짱이 한동안 끙끙대던 표정으로 지내는 걸 보면서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맛볼 배덕감은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어 다시 이즈미 짱이 아오이 짱 방에 놀러왔다.
저번만큼은 아니지만 꽤 텀이 길었네!
"시, 실례합니다."
이즈미 짱은 굳어 있었다.
"왜,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거야 이즈미 짱. 학교에서 매일 보면서."
"아니 뭔가, 저번 그 사건이 있어서……"
"아…… 그래"
알아챈 아오이 짱도 얼굴을 붉히며 숙였다.
둘은 방 문 앞에 머뭇머뭇 서 있었다.
이게 아오이 짱을 부끄럽게 하려는 이즈미 짱의 책략이라면 대단하지만 말한 쪽이 '으으윽' 하고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걸 보니 자기도 모르게 한 거겠지.
"……그래, 너랑 아오이가 사귀는 거였나. 훨씬 사이도 좋지. 알았어, 방해해서 미안하네. 난 이만 가 볼게."
"일단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이 이상 들어봤자."
"들어 주세요. 국어 점수는 제가 더 좋잖아요. 제가 순서대로 설명해 드릴테니까요, 자, 앉아 줘요."
"……점수가 무슨 상관인데……"
툴툴대며 치하루 짱은 다시 앉았다.
"조금 놀란 상황이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객관적인 면은 솔직히 굉장해. 난 흉내도 못 내겠어."
"그런가요, 그건 그렇다 치고…… 네, 순서대로 설명하면, 저와 아오이 양은 반 년쯤 전부터 육체적 관계를 가졌어요."
"이럴 때 또 농담이냐……. 1학년 때부터 하나도 안 바뀌네……"
"아뇨 이건 진짜예요."
"간다."
"관계래도 키스 하거나 가끔 몸에 손을 대는 정도예요!"
소매를 잡고 말리는 이즈미 짱.
치하루 짱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네 설명이 먼저 끝날지 내가 빡도는게 먼저인지 하는 승부가 되는데."
"스릴 넘치네요. 질 수 없죠."
치하루 짱은 벌써 한 방 먹은 듯했다.
자기 친구 둘이 그런 관계인 걸 알면 평범한 중학생으로선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니까, 전 계속 아오이 양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진지한 고백을 듣고도 치하루 짱은 턱을 괸 채.
"……전에 전화했을 때 확인하던 게, 그건가. 이즈미가 누구를 좋아하건 그건 나랑 별 상관 없어. 일일히 허락 안 받아도 돼."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몰라요."
이즈미 짱은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이즈미 짱은 한 번도 아오이 짱에게 '좋아한다'고 한 적이 없었다.
그 말에 치하루 짱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니라니…… 육체적 관계를 한다며."
"그렇긴 한데, 그런데…… 치하루 양이 아오이 양한테 키스했을 때, 저 하/나/도/싫/지/않/았/단/말/이/예/요."
이즈미 짱은 쥐어 짜듯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키스하는 걸 보면, 보통 그렇진 않잖아요. 질투 한다든가, 치하루 양이 미워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저…… 전, 역시 평범하지 않았어요. 아오이 양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둘이 키스하는 걸 보고 굉장히 가슴이 뛰었어요. 제가 키스했을 때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
"그래서 저, 머릿속이 엉망이라……. 둘이 키스하는 모습이 각인돼서, 잊혀지질 않아요."
그 말을 듣고.
치하루 짱은──.
"──난, 기분 나빴어."
이즈미 짱이 숨을 멈췄다.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듯.
이즈미 짱은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둘이 그런 관계라는 얘길 듣고, 굉장히, 기분 나빴어. 그래도 잘 어울렸으니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어. 이즈미는 예쁘고, 머리도 좋고, 어른스러워. 전에 전화했을 때도 사실은 싫었지만 이즈미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이즈미랑 있는 아오이는 즐거워 보였단 말야."
"그게 뭐예요."
치하루의 손을 잡은 이즈미는 분개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눌러 둔 채, 저한테 양보했다는 말인가요? 아오이 양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나요? 그동안 계속, 좋아했던 거 아니예요? 아오이 양은 '마법'을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 가르쳐 줬다고 했어요!"
"떠벌렸냐, 아오이."
"누가 그런 얘길 했는지는 안 물어봤어요!"
"난"
치하루 짱은 담아뒀던 감정의 수도꼭지를 조금 씩 풀어놓듯 한 마디씩 털어놨다.
"하나 짱이 죽어서, 굉장히 슬펐어."
엑.
나, 나 말야?
"그치만, 아오이도 계속 풀이 죽어서 내가 어떻게든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사실은 아오이를 달래는 척하면서 내가 격려받았어."
치하루 짱은 이즈미를 노려본다.
"내 국어 점수, 이즈미 만큼 안 좋아서 엉망인데, 상관 없지?"
"당연하죠. 독해력도 좋아구요."
이즈미 짱은 치하루 짱의 강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낸다.
"난 하나 짱을 좋아했어. 계속 좋아 했었어."
뭐.
뭣이라…….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 하나 짱 대신 아오이 곁에 있었어. '마법'도 사실은 하나 짱한테 배웠어. 그치만 그대로 계속 좋아할 수가 없었어. 열 나고 아픈 아오이를 병문안 가는 사이에 이번엔 동생 같던 아오이를 좋아게 돼서…… 이즈미가 이상한 책을 줘서 그래!"
"마, 마리미떼는 이상한 책이 아니예요!"
거기선 칼같이 부정하는 이즈미 짱. 나도 동감한다.
"언니가 없어졌다고 바로 동생을 좋아하는 건, 너무 가벼워서 바보같잖아!"
비보悲報. 나를 좋아한 기간은, 짧았다.
아니 좋은 일이지만…….
"내가 미워 죽겠다고! 막 비웃을 것 같아서 이즈미 한테는 절대로 들키기 싫었어!"
"그건 좀 웃기긴 하네요."
이즈미 짱은 치하루 짱의 손을 놓고 누구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좋아하게 되든, 상관 없잖아요. 좋아하던 사람의 동생을 좋아하게 돼도, 여자를 좋아한대도."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어. 너무 가벼워서,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어."
"저도 그랬어요. 아오이 양이 가르쳐 준 거예요."
"……그 녀석이."
치하루 짱은 입술을 깨문다.
"결국 들러붙어 있던 건 나였어. 아오이는 일어섰지만, 난 틀렸어. 아오이랑 같은 부활동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말하더라. '무리 안 해도 돼'라고."
"……그랬다죠."
"하나 짱의 뒤를 쫓아다닐 때랑 바뀐 게 없었어. 이번엔 아오이가 된 것 뿐이야. ……만약 아오이한테 애인이라도 생기면, 난 그 때야말로 아무한테도 기댈 수 없게 돼. 그렇게 생각했더니 내가 너무 한심해서 참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줄곧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리라.
이즈미 짱과 마찬가지로 치하루 짱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 결과 행동을 한 것이다.
지금의 이즈미 짱은 화가 가라 앉아 있었다. 치하루 짱을 쳐다보고, 그 마음을 받아주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그래서, 육상부에 들어갔어. 제일 힘들다던 800미터 달리기를 선택해서, 매일 매일 달렸어. 달리는 동안은 아무 생각 안 해도 되니까."
"주말에도 계속 하셨었죠."
"응. 한 눈 팔지도 않고. 아오이는 몇 번씩 놀러 오라고 했지만, 또 아오이한테 응석 부렸다간 또 점점 인간이 썩어갈 것 같아서, 계속 참았어. 내 발로 서게 돼야 한다, 고. 학교에선 만날 수 있으니까."
2년이나 마음을 꾹 닫아 뒀었다니.
힘들었을 텐데, 치하루 짱.
중학생 여자 아이의 고집으로, 뭐 하는 거냐며 비웃음 살 만한 일을 계속 마음에 담아둔 채. 하지만 너무나 소중한 그 마음을── 이즈미 짱 만큼은 꼭 이해해 주겠지.
"……하지만, 내가 그래서 아오이랑 이즈미가 사귀게 됐다면, 별로 상관 없었어. 내가 고른 길이니까, 꼭 참아야 한다고. 웃는 아오이가 내 곁에 없는 건, 좀, 싫지만."
어라, 하며 치하루 짱이 얼굴을 감쌌다.
어느샌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상하다, 왜"
"……그건, 치하루 양이 아오이 양을 좋아하기 때문이예요."
이즈미 짱은 치하루 짱의 옆에 앉아선 머리를 꼭 안아 줬다.
"울 만큼 좋아하면서…… 왜 얌전한 척 했어요……. 저라면 괜찮다고 마음에도 없던 소리까지 하곤……"
"딱히, 변명 하는 건 아냐.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어. 싫다고 울고 짜는 건 내가 덜 큰 부분이야. 달리면 그것도 없어져."
"업성지지 않아요, 아무리 달려도……. 그걸 느끼만 마음이 깎여나가기만 하고, 마음은 언제까지고 거기 남아 있는 거니까요."
이즈미 짱도 해 본 일인지라 자연스럽게 말했다.
어느 틈엔가 이즈미 짱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안긴 사람도, 안은 사람도, 모두 울고 있던 것이다.
"……앞으로, 어떡하실래요?"
"똑같아. 육상부에 뼈를 묻을 거야. 여기서 포기해 버리면 이번에야 말로 평생 내가 혐오스러워질 거야."
"아오이 양은."
"이즈미가 곁에 있어줄 거잖아."
"……"
그 때 이즈미 짱의 말이 멎었다.
이 대로는 안된다.
이즈미 짱은 굳게 생각했다.
그녀 또한 바뀌고 싶다고 바랬다.
안고 있던 치하루 짱의 머리를 놓고, 눈물을 닦고, 명확하게 말했다.
"저도,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오이 양네 집에 안 갈거예요."
치하루 짱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왜. 아니, 딱히 나한테 맞출 필요는."
"아니예요. 말 했잖아요. 두 분이 키스하는 걸 보고 가슴이 뛰었다고. 저도, 그런 제가 미워요."
이번엔 이즈미 짱의 손이 떨렸다.
"좀 더 정상적으로, 아오이 양을 좋아하고 싶은 거예요. 어설픈 마음으로 지금까지 아오이 양을 건드린 건, 몸만 보고 꼬인 남자들이랑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같이 있으면 분명 참을 수 없게 되 버릴테니까……."
이즈미 짱의 눈을 보며 치하루 짱은 살며시 손을 건드린다.
꼬옥, 손가락이 얽힌다.
"치하루 양과 얘기하고 알았어요. 저도 어린애 였어요. 자기도 모른 만큼, 아오이 양이나 치하루 양보다 훨씬 나빴던 거예요. 기분 좋은 걸 느끼는 것만 좋아서, 마음은 전혀 키우지 않았던 거예요. 이 대로 욕망에 휩쓸려 조금만 더 아오이 양을 넘봤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을 거예요."
치하루 짱은 얼굴을 붉히고.
"……역시 이즈미는, 어른인데."
"하나도요. 저는 백합의 세계에 미친 제가 아니라, 분명하게 '아오이 양'을 좋아해야만 해요. 세이 님이 아닌, 저 본인이."
그렇게 말하자 치하루 짱도 표정이 풀렸다.
"……그래. 그렇다면 응원할게. 그런데 아오이 한테는 뭐라고 할거야?"
"고등학교 수험 공부를 한다고 할 거예요. 같이 있으면 애욕愛欲에 휩쓸려 버릴 것 같다, 고도. 둘 다 진짜구요. 괜찮아요, 원래는 12년 참고 살려고 했으니까요, 이제 와서 1년 쯤."
하지만 치하루 짱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치만, 둘 다 아오이 곁에 없으면, 혹시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 때는""
치즈미 짱 또한 불안을 몰아내려는 듯 웃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몸도 마음도 완벽하게 성장한 제가 아오이 양의 마음을 돌려놓겠어요."
너무나도 시원스런 선언을 들은 치하루 짱이 뿜었다.
"역시 이즈미야. 언제건 자신감이 넘치는데."
"치하루 양은 괜찮나요? 전 치하루 양 말고 다른 사람한테 질 생각은 없는데. 가만히 있다간 저와 아오이 양이 결혼할 거예요. 내빈석에 앉아서 진심으로 저희를 축복해주실 건가요?"
"아직 지금은, 모르겠네."
치하루 짱은 눈물 자국을 닦으며 수줍어했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밉지 않게 된다면, 그 땐 말 할거야. 반드시. 하나 짱을 좋아했어. 그리고, 지금은 아오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그런가요."
이즈미 짱은 미소지었다.
"분하지만, 그 때는 저도 관엽식물같은 게 돼서 지켜보고 싶네요."
"왜?"
"그거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떠올린 미소로 이즈미 짱이 말했다.
"그 순간의 아오이 양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울테니까요."
치하루 짱은 집에 전화하고, 이즈미 네에서 자기로 했다.
지금까지 빈 시간이 없었던 것 처럼, 밤 늦게까지 많은 얘기를 했다.
그 대부분이 아오이 짱 얘기였고, 이렇게 참한 여자 아이 둘이 아오이 짱을 좋아해준 다는 사실에, 나는 자랑스러움마저 느껴버렸다.
두 사람은 언젠가 정말로 아름다운 여자가 되서 아오이 짱을 맞으러 가겠지.
꼭 신데렐라를 찾아가는 왕자님 처럼.
소녀가 어른의 계단을 올라기 시작한 그 무렵.
걸음이 늦은 우리 공주님도 또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을 자기 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언니."
올 해는 열이 39도 초반을 왔다갔다 하며 썩 내리질 않았다.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은 매일 병문안 하러 와 줬지만, 둘은 오래 있지 않아서 아오이 짱은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이즈미 짱이 있지, 내년엔 수험이라서 한동안은 키스같은 거 자제하재."
아오이 짱이 일부러 침댓가까지 가져 온 관엽식물(나)은 들어주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단하지, 벌써 앞 길까지 생각하고. 나 같은 건 다음 달도 모르겠는데. 이즈미 장은 대단하지."
아오이 짱의 외로움을 달래줄 순 없다.
나는 이미 아오이 짱을 쓰다듬어 줄 수도 없는 것이다.
"치하루 짱도 있지, 육상부 열심히 해서. 현 기록을 갱신할지도 모른대. 치하루 짱도 대단해, 언니."
아오이 짱은 천장을 보며 불안한 듯 조잘댔다.
"나, 또 외톨이가 돼 버리는 걸까."
아파서 마음이 약해진 것이겠지.
"치 짱도 이즈미 짱도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건 기쁜 일이니까. 그런데, 내가 외로워 하면 둘 다 걱정 할테니까…… 웃어야 해, 둘이 걱정하니까."
아오이 짱은 착한 아이다. 병문안 와 준 둘에게, 아오이 짱은 계속 웃어 보였다.
억지 웃음은 분명 뻔히 보였겠지만.
"나 혼자서만 이대론 건 싫은데."
눈물이 고인다.
하지만 아오이 짱은 울음소릴 내지 않고 참는다.
아오이 짱이 착해서, 치하루 짱도 이즈미 짱도 그런 포용력 덕에 좋아하게 된 거다.
"둘이 먼저 가 버리지 않게, 나도 열심히 할 테니까."
하지만 아오이 짱은 이대로는 싫다고 한다.
아오이 짱은 착새거, 남의 마음을 헤아려줄 줄 아는 아이인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가슴이 죄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니가 없어도, 나, 열심히 할게."
지금 당장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치하루 짱이나 이즈미 짱도 친동생처럼 느꼈는데, 그런데도 역시 내게 가장 소중한 건 아오이 짱이다.
"혼자서 뭐든 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테니까."
그러지 않아도 돼, 라며 응석 부리게 안아주고 싶다.
어른이 되지 않아도 돼, 라며 끌어안아주고 싶다.
하지만, 아/오/이/짱은 분명하게 미래를 향하는 것이다.
또래와 비교해서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하품이 날 만큼 느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응원해주고 싶다.
많이 상처 입고, 안 좋은 경험을 겪고, 외로워 하고, 괴로워 할 미래에 스스로 맞서기로 한 동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