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집에 도착한 것은 9시가 넘어서였다. '낮잠 동호회' 활동이라는 명목이 있다지만 너무 늦었다. 혼나지 않을까 각오하며 살포시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살살 닫았다.
"다녀왔습니다~……"
대답은 없었다. 현관 복도 할 것 없이 불이 꺼진 상태로 거실의 불빛만이 반쯤 열린 문에서 흘러나왔다.
신발을 벗다가 자기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뇌리에 아까 꾼 꿈이 떠오른 것이다. 어두운 복도와 거실 불빛. 미도리가 동생이라는, 꿈이기에 가능한 말도 안 되는 전개에 정신이 팔렸었지만 저 광경은 낯익은 본가 그 자체였다.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가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음소거 상태로 켜진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실내엔 아무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부모님과 언니 모두 있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거실에도, 부엌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창문가에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꿈과 달리 그곳에는 넓은 마당이 아니라 코앞에 세워진 담과 건너편 주차장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밖에 곰은 없었다.
창문 걸쇠를 확인하고 원래대로 커튼을 닫았다. 뒤로 돈 순간 누군가 서있는 것을 보고 정신없이 비명을 질었다.
"아악!?"
"뭐, 뭐야!? 깜짝 놀랐네~"
"어, 언니?"
벽에 손을 대고 불을 켠 것은 아야였다. 형광등 빛을 받은 언니는 어이가 없을 만큼 평소와 같았다.
"어두운 데서 뭐 한 거야? 아니, 언제 온 건데."
"금방……. 엄마 아빠는?"
"거래처 사람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 갔다고 메시지 보내놨잖아."
"아, 미안, 몰랐어."
"사야 저녁 안 먹었지? 뭐 먹을래?"
"아니…… 괜찮아. 나중에 대충 때울게,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방에 가려 한 순간 불이 꺼졌다.
놀랄 틈도 없이 누군가가 등 뒤에 철썩 들러붙었다.
"왜 날 두고 간 거야 사야."
시커먼 실내에서, 누군가 귓전에 속삭였다.

사야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자기 방이다. 아직 어둡다──시계를 보자 새벽 4시였다.
"──꿈이였구나."
정신이 들자 한 손이 누군가를 찾듯 침대 위를 더듬고 있었다. 살짝 찜찜함을 느끼며 팔을 당겼다. 악몽의 충격과 함께 곁에 아무도 없는 침대가 너무 넓게 느껴져 불안함마저 느껴졌다.
불안해하며 손가락을 얽어 잡아당기자 명확한 반응이 느껴졌다. 여기는 데이랜드가 분명한 모양이다.
어두운 천장을 올려보며 안정을 찾으려 하자 시야를 가로지르는 것이 있었다.
희미한 빛을 내며 공중을 걷는, 자기 발로 움직이기 시작한 별자리 같은 그것은 사야 위를 지나쳐 베란다와 이어진 창문을 빠져나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수수다.
튕기듯 일어나 창문에 달려가선 베란다로 나간다.
수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수수가 데이랜드에서 활동한다──.
한 번 알아채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사야는 그 날 점심까지 수수 12개체를 목격했다.
꼭 요정을 보는 눈이 생긴 것처럼 수수들은 차례차례 사야의 시야에 뛰어들었다.
집 안. 등굣길. 학교 여기저기. 생물이라고도, 인공물이라고도 하기 힘든 이형의 개체들은 누구 눈에도 띄지 않고 태양 아래를 활보했다.
수수들은 목적 없이 떠돌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애초에 그 진의를 알 수는 없다. 알았대도 슬립 워크상태가 아닌 사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수수도 사야에게 관심을 보이진 않았다.
수업중인 교실의 책상 사이를 느긋하게 떠다니는, 해마와 백파이프를 더해 반으로 나눈 것처럼 생긴 수수를 시야 한구석으로 쫓으며 사야는 복잡한 심경으로 생각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수수는 어디까지나 나이트랜드 내부의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애들한테 들은 말도 그랬고 본인의 경험으로 비추어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데이랜드에 나오게 되면 슬립 워커의 전제가 무너진다── 잠의 안팎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아니──그러고 보니.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히츠지와 두 번째로 만나기 직전. 히츠지를 찾아 학교를 떠돌던 사야는 몽롱한 의식 상태로 옥상에 가는 수수를 발견했었다.
그 때, 사야의 불면은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환각을 봐도 납득이 갈 만큼. 그러나 지금 사야는 수면장애때문에 고생하는 게 아니다.
일행에게는 이미 메시지를 보내뒀다. 수수가 보이는 건 역시 사야뿐이었지만 다급한 분위기는 전해진 모양이다.
사야 [방과 후엔 창고에 모이고, 일단 긴급 슬립워크해보지 않을래요?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을 하고 싶어요.]
란 [찬성]
히츠지[언제 어디?]
사야 [점심에 양호실]
란 [알겠습니다]
히츠지[ㅇ. 먼저 가서 침대 챙겨놓을게.]
4교시 끝을 알리는 종이 쳤다. 소란스러워질 반을 뒤로하며 사야는 서둘러 양호실에 갔다.
노크하고 문을 열자 양호교사가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것이 보였다. 살금살금 침대에 다가가 칸막이 커튼을 걷자 히츠지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기다렸지."
말을 걸었지만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았다.
"아…… 벌써 자는 거구나."
사야가 침대에 앉아도 히츠지는 깨어나지 않았다. 보드라운 머리칼을 침대 위에 흩뿌리곤 색색 숨소리를 내는 히츠지를 내려다보며 사야가 생각했다.
이렇게 히츠지가 자는 걸 가만히 보는 건 어쩐지 신선하다. 어쩌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슬립워크할 때는 금세 잠에 끌려들어가고, 처음 봤을 땐 정말 순식간이었다.
지금 이렇게 깨 있는 건, 일단은 잠을 제대로 잤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니 히츠지의 블랭킷 능력이란 것도 대단한 녀석이다.
흐암, 큰 하품이 나왔다. 슬슬 옆에 누워볼까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 틈으로 내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란이 들어와 있었다. 몰래 문을 잠그고 잰걸음으로 다가온다.
"제가 늦었죠. 얼른──"
말을 하다 만 란은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했다.
"아흐…… 실례. 얼른 처리하죠. 여길 오랫동안 차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양호 선생님의 점심시간을 뺏으면 미안하구요."
사야의 뒤를 이어 란도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왔다. 역시 보건실 싱글침대는 셋이 자긴 좁다.
"아이조메 선배, 괜찮겠어요? 안 떨어져요?"
"시끄럽게. 일단은 컴플렉스거든……."
"걱정되서 그래요, 근데……."
하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히츠지가 발하는 순수한 졸음이 양 옆에 누운 둘을 무자비하게 감쌌다.

고층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 여기저기에 불길이 일어났다. 총성이 산발적으로 터지고, 빌딩 벽에서 메아리친다.
전투 헬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간다. 사무실이 밀집한 곳에 장갑차와 병사들이 뛰어다니고, 전차가 포를 쏘면 건물들이 차례로 폐허가 된다.
나는 아래의 광경을 보고 떨었다.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 앞으로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집이나 학교는 무사할까──.
학교 하면, 그래, 히츠지는 무사할까. 그 애는 멍한 구석이 있어서 걱정된다. 얼른 데리러 가야한다. 하지면 여기서 어떻게 가야하지?
그 때, 옥상에 있는 전화가 울었다. 박물관에 있을법한 낡은, 빨간 전화.
"사야, 꿈이야."
"물론 알고 있어, 히츠지."
"정말로?"
"히츠지랑 얘기했더니 의식이 명확해졌어."
전화기 저편에서 히츠지가 의심스레 갸웃하는 모양이 보일 것 같았다.
코트를 흩날리며 란이 옥상에 뛰어내렸다.
"선배."
"호카게양, 명석한가요?"
"명석해요, 명석명석."
"정말인가요? 아니 됐어요, 저걸 봐요."
가리키는 곳을 보니 도시 저편에 빌딩보다 훨씬 높게 선 거대 수수가 걸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나아가는 원기둥 다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구름 속에 희미한 교각 같은 게 비쳐보였다.
"크다."
"네. 그리고 하나가 아니예요."
나는 란과 함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도시와 주변 황야에 장대한 크기의 수수가 떼로 걸어가고 있었다. 큰 강에 세워진 다리가 그대로 걸어 나가는 것 같았다.
"……수수, 점점 늘어나지 않아요?"
"틀림없이 그래 보이네요."
내가 란이랑 얘기하자 아직 들고 있던 수화기에서 히츠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한텐 잘 안 보이는데 뭐 하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다리 모양 거대 수수 위에 보다 작은 수수가 득실댔다.
다리 양 끝은 구름 탓에 희미하게 보인다. 한 쪽에서 슬금슬금 새로운 수수가 나타나 반대편을 향해 간다.
제각각에 꼴불견인 행진의 목적지를 보기 위해 나와 란은 걸어가는 다리에 다가섰다. 구름이 걷히자 다리가 바다 위에 걸쳐진 게 보였다. 완만하게 솟은 섬 위를 교각이 넘어가더니 더 앞을 향해 나아간다.
"바다 냄새가 나기 시작하네."
수화기에서 히츠지가 말했다.
"바다에 나왔으니까. 히츠지는 어디서 보고 있어?"
"그걸 잘 모르겠어. 여긴 어딜까?"
갑자기 란이 헉 소리를 냈다.
"설마. 말도 안 돼."
"왜 그러세요?"
"저 녀석들의 목적지. 어딘지 알 것 같아."
"어딘데요?"
"호카게양, 저 섬을 자세히 봐. 뭔가로 보이지 않아?"
교각이 건너가는 섬에 의식을 집중했다. 기묘한 섬이었다.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울퉁불퉁한 바위도 아니다. 섬의 윤곽은 섹시하다고 해도 될 만큼, 예를 들자면 그건 꼭 사람──.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히츠지?"
"왜에? 내가 뭐 했어?"
수화기가 손에서 미끄러지더니 아득히 먼 바다에 떨어진다.
섬이 아니었다. 히츠지였다. 콘파루 히츠지. 소중한 내 애인. 누워서 자는 히츠지의 몸을 넘어 수수들이 행진한다. 주위에 퍼진 바다는 어느새 물이 아니라 넓게 펴진 시트였다.
나와 란도 히츠지 양 옆에, 시트 위에 누워있었다. 로프로 묶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눈을 돌리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위에도 다리가 세워져 있었고, 그 무게가 나를 시트의 바다에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기력을 쥐어짜자 겨우겨우 몸이 움찔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났다. 몸 위에 세워진 다리가 기울어지고, 뒤집어지고, 대량의 수수와 함께 떨어진다.
소리쳤다.
"히츠지! 일어나! 이 녀석들 데이랜드에──"

사야는 몸을 잠에서 쥐어뜯듯 각성했다.
소리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앓는 소리만 난 모양이다. 강제로 눈을 떴을 때 특유의 몽롱한 생각과 온 몸에 뭔가가 들러붙어있는 듯 한 감각. 정신을 차리려 시도하면서 사야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콘파루양, 일어나."
쉰 소리로 말하며 잠든 히츠지의 어깨를 흔든다. 히츠지는 눈을 감은 채 표정을 찡그리고 신음했다.
"으응……"
눈을 뜨려 하는 히츠지의 몸에서 연기 같은 것이 살며시 올라왔다. 고개를 든 사야의 시야엔 침대 위에 펼쳐진 반투명 구조물이 보였다. 고치에서 우화하는 벌레처럼, 히츠지의 몸에서 나온 수수가 낮의 세계의 빛에 녹아든다. 모습은 금세 안 보이게 됐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 강한 기척이 사야에겐 아직 느껴졌다.
눈을 비비는 히츠지 건너편에서 란도 일어났다.
"호카게양…… 방금 뭐였어?"
"수수예요, 또 나왔어요."
사야의 말에 히츠지가 갸웃했다.
"나한테는 안 보였어. 어디서 나왔는데?"
"……콘파루양, 몸에서."
"내 몸?"
사야는 끄덕였다.
"수수가 데이랜드로 건너오고 있어── 우리의 잠을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