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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확실히 잠이 들게 됐다.

수수를 쓰러트린 후로 사야의 밤엔 다시금 잠이 찾아들었다.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이 거짓말인 양 집이건 학교건 졸리면 쉽사리 잠에 빠진다.

오히려 너무 많이 잔다고 해도 될 정도다. 요 반 년간 필사적으로 졸음의 파도에 올라타려한 게 버릇이 됐는지 수업 중에도 잠깐 긴장을 풀면 쉽사리 잠에 빠진다. 그럼에도 잠 못 드는 채 몽롱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몸이 다시 잠에 익숙해질 때까지 1주일 정도 걸렸다. 늦은 진도를 따라잡기가 썩 어려울 줄 알았지만 양호 교사에게 이야기하자 담임과 하는 상담에 같이 가 줬다. 보충수업 안이 나오고 공부 계획이 정해지니 가족들에게 보일 면목이 서게 됐다.

"안색 많이 좋아졌네."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서려는 사야를 찬찬히 뜯어보던 언니 아야가 말했다.

"진짜?"

"다크서클이 연해졌어."

"그래도 아직 좀 남았어……"

"언니는 의외로 좋아해. 쇠약한 느낌이라."

"쇠약하단 말이야! 진짜로!"

삐친 사야를 보고 깔깔 웃은 언니는 거실에 돌아갔다.

불면증에 시달릴 때는 학교건 집이건 가시방석 같았지만 냉정해지고 나니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잠만 제대로 자면 인생은 대충 잘 풀린다── 반 년간의 지옥을 헤쳐 나온 사야가 얻은 교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야의 마음 속에 초조함 같은 것이 점점 커져갔다. 갈증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처음엔 이해할 수 없던 감각이 평범하게 잠든다는 사실을 향한 불만이란 걸 알았을 때 사야는 경악했다.

혼자 잘 때보다 콘파루 히츠지와 동침하는 게 훨씬 깊고 편하고 기분 좋게 잠들었던 것이다.

수상쩍은 침구점 창고에서 다섯이 뒤엉켜 잤던 세 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저들과 자고 싶다. 슬립 워크 하고 싶다. 그 갈증을 자각한 순간 사야의 걸음은 자연스레 사카이모리 침구점으로 향했다. 지난 방문부터 약 2주가 지난 날이었다.


"어서 와요. 올 거라고 믿었어요."

침구점의 문을 두들긴 사야를 기다렸다는 듯 란이 맞았다.

"몸은 좀 어때요?"

"엄청 좋은데── 근데, 뭔가, 부족해서."

란은 몇 번이고 끄덕였다.

"그렇겠죠. 그럴 만도 해요."

"네……?"

"들어가서 얘기 하죠. 다들 모였어요."

줄선 침구와 높은 선반 사이를 지나 사야는 또다시 슬립 워커들의 침실에 들어섰다.

"어, 사야찌!"

제일 처음 본 카에데가 싱글벙글 손을 흔든다. 미도리와 히츠지도 소파에 앉아 사야를 돌아봤지만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란의 재촉에 같이 앉은 사야에게 미도리가 말한다.

"많이 참으셨네요. 역시 호카게 씨가 네버 슬리퍼라서 저희보다 더 잘 참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뜻이야?"

"한 번 슬립 워크 하면 중독돼요. 그냥 자는 것보다 훨씬 편히 잠드니까."

"뭣……"

넷의 안색을 살피지만 놀리는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그, 슬립 워크가…… 중독성이란 뜻?"

"뭐 대충 그런 셈이죠."

란이 툭 내뱉는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사야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다 짜고 나한테 사기 친 거야? 슬립 워크 중독으로 만들려고!? 어이가 없네 진짜──"

"어쩔 수 없어."

히츠지가 던진 말에 사야는 순간 조용해졌다.

"……어쩔 수 없다니, 뭐가."

"다 그렇게 돼. 나랑 동침한 사람은."

"다……"

사야는 다시금 테이블 둘레에 앉은 이들을 둘러본다. 란, 카에데, 미도리,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말없이 끄덕인다.

"그래도 있지 사야, 사기 치려고 한 건 아니었어. 왜냐하면── 먼저 내 침대에 들어온 게 너였으니까."

"뭐? 아니지, 내가 자려고 했는데 콘파루 씨가 멋대로"

"내가 자는데 사야는 멋대로 키스했었지."

"그게 무슨 상관인데!?"

열이 뻗쳐 한숨을 쉬자 히츠지는 사야에게 손을 건넸다.

"……뭔데?"

"장황설은 됐어. 정말로 편안하게 자고 싶었던 거지? 지금도 그렇잖아?"

"그건."

"괜찮아── 이리 와."

그렇게 말한 히츠지는 눈을 감더니 후우 소리와 함께 힘을 뺐다.

사야의 시야가 어찔하며 흔들린다.

"아, 아."

소리가 멀어진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히츠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빨려들 듯 소파에 쓰러졌을 땐 이미 사야는 의식을 잃었다.




흔들리는 코끼리 위에 앉아 있자니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 떠올리기가 힘들어진다. 여자들이 앞길에 뿌린 금화와 꽃을 살포시 밟으며, 코끼리는 펼쳐진 논 위를 간다.

"속이다니 너무했잖아."

그렇게 비난했지만 날 무릎 위에 누인 히츠지는 기죽지 않고 쿡쿡 웃는다.

"속이지 않았어, 사랑하는 내 님."

"아무 말도 안 했어."

"안 물어봤는걸."

히츠지는 과일 쟁반에서 포도를 들어 무어라 더 항변하려는 내 입에 가져다 댄다. 매끄럽고 촉촉한 감촉이 입술을 따라 목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맛이 안 나."

"어머 아쉽게도."

백아白亞 궁전을 뒤로 한 우리 행렬은 밀림으로 나아간다. 오늘 밤 우리는 호랑이를 잡는 것이다. 목과 배에 흑단 갑옷을 두른 물소를 타고 호랑이 총을 짊어진 가신들이 행렬 선두를 차지한다. 저 멀리 눈을 뒤집어 쓴 산봉우리를 붉게 물들인 태양이 저물자 그 대신 횃불이 길 위의 금화를 반짝이게 했다.

느긋한 여행에 졸음이 몰려온다. 꾸벅꾸벅 졸기 직전에 짝 소리 나게 뺨을 맞았다.

눈을 뜨니 어느 샌가 란과 미도리를 태운 다른 코끼리가 옆에 와 있었다. 란이 든 작은 채찍 끄트머리로 때린 모양이다.

"아파. 왜 그랬어."

"자면 안 돼요 호카게 양."

"왜."

"슬립 워크 중에 잠들면 나이트 랜드가 집어삼켜요."

"집어삼키면?"

"나이트 랜드에서 잠든 슬립 워커는 두 번 다시 데이 랜드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조심하세요."

미도리가 무서운 소리를 별 것 아닌 양 던졌다.

"자세를 바로잡으세요. 오늘 잡을 호랑이는 강해요."

란이 말 한 호랑이가 수수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나도 이미 이해했다. 란은 총신을 세 개 엮은 장총을 들었는데 내 손에도 같은 무기가 있었다. 란과 나는 넉넉한 남장, 미도리와 히츠지는 얇은 천에 베일이라는, 무희 같은 옷이었다.

"카에데는 어디?"

"여깄어~"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여섯 팔에 제각기 언월도를 든, 온 몸이 새파란 여신상이 행렬 뒤에서 땅을 울리며 걸어오는 중이었다.

"세 보여."

"긋치~?"

밀림 안에 들어서자 횃불이 채 밝히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밤하늘의 별을 은사로 이은 거미집 같은 수수가 나타났다. 호랑이를 전혀 안 닮았지만 움직임은 어딘가 동물처럼 매끄러운 것이었다.

피에 굶주린 여신으로 변한 카에데가 돌진해서 수수와 부닥친다. 뒤를 이어 장총이 일제히 불을 뿜고 밀림을 붉게 물들여간다.




"……얼버무려도 안 넘어가!"

히츠지는 소파에서 눈을 뜨자마자 소리지르는 사야를 귀찮다는 표정으로 밀어냈다.

"모처럼 편히 자게 해 줬는데."

"고마워! 누가 재워 달랬어!"

히츠지를 향한 따스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사르르 사라진다. 열에 달떴을 때 꾸던 꿈은 열이 내렸을 때 기억 안 나는 것처럼. 깨 있을 때는 좋아하지도 뭣도 아닌 여자.

히츠지도 마찬가지로 삐친 듯 입을 삐죽 내민 사야에게서 멀어져갔다.

카에데와 미도리도 소파에서 일어났다. 란은 위아래로 휙 돌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본 잠버릇은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커피와 다과의 효과로 의식이 점차 명확해진다. 이번 과자는 부르봉에서 나온 루만도와 초코리에르였다.

검고 쓰고 뜨거운 액체를 들이키며 사야가 묻는다.

"우리, 이번엔 뭘 한 거야?"

"무슨 소리야?"

"저번에 나한테 기생한 수수를 쓰러트린 건 이해했어. 근데 이번엔? 그것도 누구한테 기생한 거야?"

"그렇죠. 나이트 랜드는 이어져 있으니까 어디 사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모르는 누군가가 불면증이나 악몽에서 풀려난다고 생각하면 조금쯤 기분 좋아지지 않나요?"

"수수가 그렇게 많은 거구나."

"몽마, 인큐버스, 서큐버스, 부쉬양스타(Būšyąstā), 샌드맨…… 꿈을 부르는 마물의 전승은 오래 전부터 전 세계에 존재했어요. 인간의 꿈에 기생하고 늘어나는 실체 없는 존재. 슬립 워커는 줄곧 이들과 싸워 왔어요. 저희 집안도, 사카이모리 양네 집안도."

점잖은 표정으로 말하는 란을 노려봐준 다음 사야가 말했다.

"속아서 중독된 게 진심으로 충격이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수면 중독 이예요. 처음으로 콘파루 양과 동침한 순간부터 호카게 양의 운명은 정해진 거예요."

한동안 말없이 생각한 후 사야는 마지못해 입을 연다.

"뭐…… 됐어, 어차피 잘 건데 못 자는 것보단 훨씬 나아."

란부터 시작해서 미도리, 카에데, 히츠지를 향해 눈길을 돌린 사야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같이 할 게……. 나 같은 사람 끼워넣었다가 무슨 일 생겨도 난 책임 못 진다."







루만도



초콜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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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2. 15. 01:22

07


일어난 넷을 따라 사야도 흠칫흠칫 일어났다.

카에데가 붙은 세 침대에 가면서 물었다.

"있지 리더 오늘도 이 침대 써?"

"사야찌가 있으니까 바꿔도 되지 않을까 해서."

"아…… 호카게 씨, 결벽증 같은 거 있나요? 없죠. 괜찮겠어요."

"왜 물어본 거예요. 말하기도 전에 정해버리는 건 좀 별론데요."

"콘파루 양을 끌어안고 잤으니 결벽증은 아니잖아요."

"으……윽……"

나도 모르게 도와달라는 듯이 히츠지에게 눈길을 보냈지만 히츠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잘 생각해보면 당사자한테 도움을 청해봤자 말이 안 된다. 굳이 따지자면 상대가 피해자니까.

"저기, 호카게 씨는 어떤 침대를 좋아하고 그런 거 있나요?"

미도리가 묻는다.

"침대도 좋고 이불도 좋고. 베개 내용물이나 시트 재료같이 원하시는 침구를 가르쳐 주시면 어지간해선 준비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얘가 기재 담당 이랬었지──. 바뀐 화제에 내심 안심하며 사야는 고개를 틀었다.

"음~……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 불면증 때문에 침대도 바꾸고 해 봤는데 결국 전부 소용없었고."

"아 그렇군요. 그럼 지금 제일 좋아하는 침구는 히츠지 짱이겠네요."

"뭣……"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소리를 듣고 말을 잇지 못하는 사야에게 새 칫솔을 내밀며 미도리가 미소 지었다.

"자기 전에 양치하는 게 좋아요. 그건 드릴게요."

"싱크대 먼저 쓸게."

히츠지가 가방에서 꺼낸 양치 세트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칫솔을 든 채 잠시 굳어있던 사야였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란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 본격적으로 자는 거예요. 몇 시간쯤……"

"그러게, 일단 3시간 정도로 해 둘까. 개인차는 있지만 수면은 거의 90분을 주기로 얕아졌다 깊어졌다를 반복하니까 슬립 워크도 그 시간을 기준 잡으면 스무스해요."

시계를 본다. 4시 반. 3시간 후면 어두워져 있을 때다.

"집은 괜찮아? 자기 전에 연락하는 게 좋아."

카에데도 휴대폰으로 뭐라 타이핑하며 말했다. 사야도 조언에 따라 언니에게 늦어진다는 메시지를 보내두기로 했다.


받은 칫솔로 양치를 하고 입을 헹군 후에 침대로 갔다. 각자 웃옷을 벗고, 리본이나 타이를 끄르고, 옷깃과 소매 깃을 푼 후에 양말을 벗고 잘 준비를 한다. 제각각 옷을 넣을 바구니가 있어서 거기에 벗은 걸 넣는 듯하다.

"자, 이걸 쓰세요."

사야는 미도리에게 바구니를 받고 머뭇머뭇 웃옷을 벗었다. 미도리는 시트를 새로 갈고 침대 옆 테이블 자명종을 맞추는 등 바쁘게 움직인다. 위를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서큘레이터 각도를 조절하기에 따라서 위를 쳐다보니 높은 천장에 업소용 대형 에어컨이 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부는 바람이 직접 침대에 맞지 않게 조절하는 모양이다.

카에데가 제일 먼저 침대에 뛰어들었다.

"사야찌, 다 됐어~? 누워 누워."

"으, 응."

거리 파악을 못 하겠네! 처음 보는 사람이 같이 자자고 했을 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까. 그냥 같이 자는 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준비하다보니 점점 긴장이 고조된다.

"실례……합니다."

"들어와 들어와~"

머뭇머뭇 침대에 오른다. 시야가 낮아지자 침대 위는 썩 넓게 느껴졌다. 퀸 사이드 침대 세 개를 빈틈없이 붙인 위에 주문제작으로밖에 안 보일 드넓은 시트가 덮여 있다. 그 위에 크고 작은 베개가 여럿 굴러다니고, 가지각색의 담요니 여름 이불이 마구잡이로 놓여 있다.

"다섯 명이 자니까 더울 지도 모르겠지만 배엔 뭐 덮어두는 게 좋아. 꾸룩꾸룩 하게 되니까."

벌써 바로 누운 카에데가 말했다.

다음으로 란이 침대에 올라왔다. 위에는 민소매, 아래엔 숏팬츠로 깔끔한 복장이었다.

"갈아입었네요."

"교복에 주름지니까. 호카게 씨도 잠옷 가져와도 돼. 미도리한테 준비해달라고 해도 되고."

"아니 아직 같이 한다고 안 정했는데……"

사야가 우물우물 반론하고 있자니 히츠지가 옆에 힘차게 앉으며 침대를 흔들었다.

"아직도 반항하는구나, 사야."

그런 히츠지는 어느새 차이나 느낌 나는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미도리! 너도 빨리."

"아 네~"

취침 환경이 만족스러워졌는지 란의 부름에 미도리도 침대에 올라왔다. 다섯이 다 모여도 침대엔 여유 공간이 남아서 돌아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호카게 씨는 가운데로 가 줘."

란의 말에 사야가 당황한다.

"네? 저?"

"그럼 당연하지. 사야가 주인공인 파티잖아. 자 얼른."

히츠지도 재촉하기에 사야는 침대 한가운데로 밀렸다.

"어…… 어떡해요?"

"내키는 자세로 누워 주세요. 그냥 눕거나, 엎드리거나, 옆으로든 뭐든. 다키마쿠라 쓰세요?"

"아니, 필요 없어…… 아마."

위를 보고 누워서 큰 베개에 머리를 얹는다. 다른 넷도 사야를 둘러싸듯 제각기 다른 자세로 눕는다. 모두 머리를 사야 쪽에 향한 게 공통점이었다.

미도리가 손을 뻗어 리모컨을 누르자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좀 떨어진 커피 테이블 위의 작은 조명만이 부드러운 빛을 발한다.

히츠지가 곁에 있으니 금세 잠 들 줄 알았지만 썩 졸리지 않았다. 불을 끈 후에도 마음이 붕 떠서 잘 수가 없다── 꼭 수학여행 온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여자들만 모여서 잔다는 상황도 비슷하다.

"……저기"

사야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예전처럼 단숨에 잠들진 않네요."

"콘파루 양, 오늘은 천천히 가는 거야?"

란이 누운 채 묻자 히츠지가 답한다.

"모처럼 사야가 와 줬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그 뭐랄까 빨리 못 자서 안달하는 건 아깝잖아?"

"이런 식으로 같이 자는 건 처음인걸요."

"맞아 맞아."

"콘파루 양의 블랭킷 능력은 대단해요. 평소엔 억누르지만 하려고만 하면 끝없이 넓어지거든요."

"이래봬도 누르는 실력이 는 거야."

히츠지가 어쩐지 자랑스레 말한다. 란이 사야를 향해 미소 짓는다.

"걱정 말고 마음 편하게 가져. 곧 졸려 올 테니까 거기에 몸을 맡겨. 어려운 생각은 안 해도 돼. 평범하게 자면 돼……"

"평범하게 자는 방법은 이미 잊었는데요."

사야의 불평에 히츠지가 말한다.

"얘기하고 있어도 괜찮아. 무슨 수를 쓰든 내가 있으면 다들 확실하게 잠드니까."

"그러게요. 모처럼이니 궁금한 게 있으면 이번 기회에 물어보세요. 궁금한 것투성이잖아요."

란의 말에 사야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럼…… 이런 건 언제부터 시작한 거예요?"

"슬립 워커요? 같은 역할이었던 사람은 고대부터 있었다나봐요. 저희 집안에는 헤이안(서기 794~1185년; 역주)시대에 교토에서 베개맡의 주술 운운하는 문서가 전해져 와요."

"선배 가문에?"

"맞아요. 집이 신사거든요. 사카이모리 가와 오래 전부터 교류가 있었는데──"

"전 점장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제가 서둘러 침구점을 이어야 했거든요."

미도리가 이어가듯 말한다.

"란 짱은 슬립 워커의 지식을 물려받아서 둘이 시작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저랑 란 짱 밖에 없었어요."

"콘파루 씨랑 토키시마 씨는?"

"나랑 히츠지찌 둘 다 수수한테 당하게 생긴 걸 리더랑 미도리가 구해줬어. 그러니까 사야랑 같은 경위지."

"그렇구나……"

대화가 끊기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다시금 입을 열었을 때, 사야의 말투는 약간 흐리멍덩한 것이었다.

"왜 여자만 모였나 싶었거든요, 처음에."

"……네"

란의 맞장구도 간격이 조금 늘어진다.

"이렇게 같이 잔다고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싶지만 지금은"

"네에……"

"그래서 생각했어요. 여기엔 여자뿐이지만 슬립 워커가 달리 있으면, 그러면 거기서도 똑같이 여럿이 하면, 어딘가엔 남자만 모여 자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요."

"맞아! 그거."

카에데가 힘차게 외쳤다. 약간 발음이 뭉개졌지만.

"엄청 보고 싶어. 남자만 모인 슬립 워커. 뭣하면 내가 책 낼게. 동인지."

"봐 보고 싶어요, 그 책."

"어~ 그건 좀."

"그럼 왜 얘길 꺼냈어요……"

"그건, 그러니까, 왜……"

영양가 없는 이야기도 한 몫 해서 사야도 점점 멍해졌다. 의식이 머리 중심을 향해 떨어지는 듯한, 현기증과 비슷한 감각이 생겨난다. 그것을 느낀 듯 히츠지가 속삭인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 한 마디가 방아쇠가 된 건지 사야의 의식은 그 직후에 잠에 빠져들었다.




저 산 골짜기에 용 한마리가 사는 것을 마을 이들은 오랫동안 아무도 몰랐다. 어느 해질녘 약장수 하나가 서둘러 가려고 마른 계곡을 지나려했을 때 그곳에 커다란 도마뱀이 누운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약장수는 한껏 긴장했지만 용은 눈을 반쯤 뜨고 흥미 없는 듯 한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불꽃 숨결로 숯이 되지도, 긴 목을 뻗어 단숨에 삼키지도 않으리라 안심한 약장수는 흠칫대며 용에게 다가갔다. 용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당신은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시냐고 묻자 용이 대답한다. 이 계곡에서 백합꽃이 안 핀 지가 오래다. 너도 알겠지만 용은 꽃을 먹는 것이다. 나는 백합 꽃을 먹고 기천년을 살아왔지만 꽃이 피지 않는다면 방도가 없다. 이제 이 불모의 계곡에서 썩어갈 뿐이다.

허무하게 설명하는 용의 비늘은 아름다운 흰 색, 긴 꼬리와 날개 끄트머리는 연한 황록색. 눈은 짙은 노랑으로 빛난다. 저 모습을 본 약장수가 말했다. 자기를 한 번 돌아보라고. 계곡의 백합을 다 먹어치운 당신은 꽃 그 자체가 된 것이라고.

약장수가 내민 손거울을 들여다 본 용이 말했다. 과연 그랬군, 먹을 꽃이 없어질 만 하다. 내가 이미 백합이었구나. 하지만, 과연, 그러면 앞으로 어떡해야 하리오. 오랜 세월동안 백합 먹는 대룡大龍으로 살아왔기에 다른 삶을 모른다. 인간이여, 알고 있다면 가르쳐 주지 않겠는가. 그 말을 마칠 무렵에 용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마른 계곡이었던 곳은 눈길 닿는 곳 모두 백합 꽃밭이 돼 있었다. 이게 거기서 따 온 백합꽃이야. 나는 콘파루 히츠지에게 한 송이 백합을 내밀었다.

히츠지는 백합을 받아 들더니 눈을 감고 얼굴을 가져다 댔다.

"향이 좋네. 너무 진해서 머리가 어찔거려."

"괜찮은가? 내 사랑, 나를 안아주는 빛나는 양모야, 누워도 된단다. 풀이 요가 되어 우리를 부드러이 안아줄 테니. 꽃 먹는 도마뱀의 잠자리보다 좋은 침대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테니."

"내 소중한 사야, 정말로 대단해. 하지만 그건 다음에 해요."

"왜 그러니. 이 백합 계곡에 우리 둘 뿐인데 뭐가 부끄러울까."

"아, 사야, 그대, 들고 있는 거울을 보아요."

그 말에 나는 손거울을 들여다본다. 은색 표면에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내 사랑아?"

"손 줘 봐 사야."

시키는 대로 내민 내 손 검지를 히츠지가 잡아 늘리자 손가락은 아무 저항 없이 늘어난다. 10센티, 20센티, 아픔도 위화감도 없이 늘어난다. 문득 깨달은 나는 외쳤다.

"앗!? 꿈이다!"




"헉."

사야는 너무 큰 충격에 눈을 떴다. 어두운 창고를 커피 테이블 위의 조명이 비추고, 침대 위엔 넷이 누워 있다. 고요한 숨소리 사중주에 사야의 거친 숨소리도 섞여든다.

쭈뼛쭈뼛 옆에 누운 히츠지에게 시선을 향한다.

히츠지는 자면서도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사야의 가슴팍에 얹는다.

"안 끝났잖아…… 도망가지 마……"

세상이 휘청 돌더니 사야는 다시금 잠 속에 끌려들어갔다.



나는 콜로세움의 메마른 모래에 뺨을 처박고 쓰러졌다. 추가 달린 전투용 그물이 발버둥 칠수록 엮여든다. 상대 검투사가 삼지창을 들자 객석이 와 끓어오른다.

마무리를 지으라고 외치는 관객들. 귀빈석의 황제가 손을 들자 소란은 썰물처럼 사라졌다. 몇 천 명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황제의 손이 엄지를 아래로 내리그이자 관중이 다시금 환성을 터트린다.

검투사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꼼짝도 못하는 내 곁에 오더니 삼지창을 내 등에 박아 넣었다.

아프진 않다. 숨 쉬기가 어려울 뿐.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은 충격과 안타까움에 눈물이 흐르려 하자 검투사가 말한다.

"어, 저기, 괜찮아? 사야찌."

"……어?"

고개를 들자 검투사 복장을 입은 카에데가 숙여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창에 찔린 줄 알았는데 온데간데 없다.

"토키시마……씨."

"맞아 사야찌. 겨우 잡았네. 이건 꿈이야. 이해 돼?"

"방금 알았, 는데, 숨을, 못 쉬겠."

"갑갑하대. 미도리~"

사이렌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투기장 모래 위로 구급차가 달려오더니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건 구급대원 옷을 입은 미도리였다. 모래에 무릎을 대고 나에게 말 한다.

"괜찮아요, 흔히 있는 일이예요. 데이랜드 쪽에서 배 위에 손 같은 걸 얹으면 살짝 갑갑한 느낌이 꿈속에서 증폭된 다음 심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거예요. 진정하고 천천히 심호흡을 해 주세요."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렇게요. 갑갑할 땐 당황하지 말고 숨 쉬는 데에 집중해 주세요."

"으, 응."

"꿈속에서 질식하지도 않고, 최악의 경우라도 그냥 깨고 끝이에요. …… 이제 괜찮아 보이네요."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어느 샌가 모래 위에 두 발로 서 있었다. 가득 찼던 관객석엔 아무도 없다. 남은 건 귀빈석의 황제뿐이다.

황제── 토가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히츠지가 살포시 모래 위로 내려섰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올려다본다.

"꿈이라고 가르쳐 줬는데 도망치는 건 너무하잖아."

"미안해. 너무 놀라서 그만."

뾰로통한 표정도 귀엽다고 생각하며 히츠지의 이마에 키스한다.

"엄멈머."

카에데가 눈을 크게 뜨곤 얼빠진 소리를 낸다.

"어, 어? 원래 그렇게 사이 좋으셨나요?"

깜짝 놀란 듯 묻는 미도리를 본 나와 히츠지가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터트린다.

"맞아. 왜 그런 걸까."

"그렇단 말이지. 왜 그러려나."

"아~, 그렇구나~"

카에데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댄다. 어쩐지 재밌어 보인다.

"사야, 자면서 꿈을 꾼다는 사실을 깨닫는 간단한 기술을 가르쳐 줄게. 레슨 1이야."

"응 가르쳐 줘. 히츠지 선생님."

"명석몽을 꾸는 유명한 방법이야. 자기 손을 보는 거지."

"손?"

나는 그 말대로 두 손을 펼쳐 내려다본다.

"일상에서 자기 손만큼 익숙한 건 거의 없지? 그런 것 치고는 모양이 굉장히 복잡해. 아마 손을 보면 적당하게 뇌에 부담이 걸린다고 보거든. 그 때 손가락을 잡아당기고 그러면 아무 저항 없이 변하니까 꿈을 꾼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어."

"진짜네!"

두 배로 길어진 검지에 깜짝 놀라 소리친다. 당기던 손을 놓자 청소기 전선을 정리하는 것처럼 슈룩 원상복귀 됐다.

"처음에 했던 것처럼 거울을 보는 것도 좋아. 꿈속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거울이 정상적으로 비치지 않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기억해 둘게."

"손을 갖고 노는 건 꿈속에서 변신하는 훈련 시작점으로도 좋다고 봐. 익숙해지면 이런 것도──"

그렇게 말 한 카에데는 힘차게 두 팔을 뻗었다. 순식간에 깃털이 자라나더니 대충 3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맹금류의 날개가 생겨난다. 지금 투기장 모래 위에 있는 건 사람 얼굴에 새 몸통이 달린 아름다운 괴물이었다. 카에데는 날갯짓으로 모래를 흩날리며 떠올랐다. 구급차 지붕에 내려앉더니 비늘 달린 발톱이 차체에 손쉽게 구멍을 냈다. 괴물의 무게에 타이어 네 개 다 터지더니 차체가 가라앉는다.

"흐흥~ 어때?"

"엄청…… 예뻐."

"그치~"

내 감탄에 카에데는 새가슴을 으쓱댔다.

미도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카에데 양, 너무 우쭐거리지 마세요."

"안 그랬거든!"

"그건 그렇고…… 리더는 어딨어?"

히츠지가 주위를 두리번대며 돌아본다.

"여기 있어요."

의외로 가까이에 그 답이 있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란이 모래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후드가 달린 망토에 큰 활과 화살집을 멨다.

"이것 좀 보세요."

그렇게 가리킨 곳을 보자 모래 위에 작은 흔적이 수없이 남아있었다. 지네처럼 다리가 많이 달린 게 기어간 흔적으로 보였다.

"이게 뭐예요."

"호카게 씨에게 기생한 수수 발자국 이예요."

란이 일어나며 말했다.

"여기서 끝장내려고 했는데 이상을 알아챘는지 도망친 모양이에요."

"도망친 거면 이제 수수한테 안 시달린다는 뜻?"

"그러면 좋겠지만 가만있으면 다시 와요."

시원스레 내뱉은 란의 말에 내 기쁨이 무로 돌아갔다.

"혹시 눈치를 챈 게 제가 꿈에서 나가서 그런 건가요."

"그것도 있겠지만 마음 쓰지 마세요. 수수는 원래 슬립 워커를 경계하니까요. 어찌 됐건 쫓아가면 끝이에요."

"맞아 맞아, 그러니까 빨리 가자!"

카에데가 재촉하듯 날갯짓한다.

"네. 호카게 씨, 이 투기장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풍경이예요. 마침 좋은 기회니 저 벽을 없애 보죠."

"어, 제가요?"

당황해서 되물었다. 주위를 빙 둘러싼 건 벽이라기 보단 거대한 건축물이다. 절구 모양 관객석은 언뜻 봐도 튼튼한 석조인지라 없애라고 해도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레슨 2예요.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나이트 랜드의 모든 것은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해요. 부수자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부서져요. 지우개로 지우든, 폭탄으로 터트리든, 빔으로 녹이든. 상상하기 쉬운 방법이면 충분해요."

상상하기 쉬운 방법……. 투기장 가로 걸어가 벽을 만졌다. 거슬거슬하게 손바닥에 전해지는 돌의 감촉. 태양에 달궈졌을 텐데도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잡을 것 하나 없이 솟아오른 벽에 손가락으로 네모 모양을 그린다. 돌 위에 얇은 선이 새겨지기에 손톱을 끼워서 잡아당겨 봤다. 벽돌만 한 돌이 쑥 빠지곤 모래 위에 떨어진다.

그 순간 주위 벽이 지지대를 잃은 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붕괴는 쉼 없이 점점 더 힘차게 도미노처럼 넓어진다. 관객석에 귀빈석까지 10초도 안 돼서 모래 위에 흩어졌다.

덮쳐오는 엄청난 모래 먼지에 얼굴을 가리기 전에 세찬 바람이 뒤에서 불어왔다. 뒤를 보자 카에데가 모래먼지가 범접하지 못하게 큰 날개를 펼치고 날갯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너지는 돌들은 모래 속에 파묻히고, 어느 샌가 주위는 끝없는 사막으로 변했다.

"어때."

큰 일 해 낸 심정으로 묻자 히츠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없네~"

"에엑."

"얼마든지 더 호화로울 수 있었을 텐데."

"대단해보이면 장땡이 아니예요. 처음 한 것 치곤 잘 했다고 봐요."

미도리가 응원해줬지만 충격 탓에 감사인사도 못 했다.

"화려할 필요는 하나도 없지만 상상력의 폭을 일부러 넓혀두면 꿈속에서 자유도가 높아져요. 꿈이 단조로워지는 건 위험하다는 신호니까 대충이나마 기억해 두세요."

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진 않았지만 끄덕였다.

"어쨌건 이제 시야가 넓어졌어요. 수수를 쫓아갈 수 있겠네요."

란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발자국이 투기장이 있던 곳을 넘어 저 멀리 있는 모래 위에도 새겨져 있었다.

"그럼 가 볼까요. 이번엔 탈 것을 만들어 보죠. 호카게 씨, 한 번 해 보세요."

"만든다니…… 이번엔 어떡하면?"

"레슨 3이예요. 꿈속에선 뭐든 만들 수 있어요. 무기, 도구, 탈것까지. 당신의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 하엔 뭐든지. 아까랑 똑같아요."

"복잡한 건 어려운데, 복잡하다는 생각을 안 하면 의외로 쉬워."

카에데가 끼어들었다.

"무슨 뜻인데?"

"음~ 어, 예를 들어 총을 만들고 싶잖아? 그런데 총은 사실 구조가 꽤 복잡하거든.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어?"

"안 돼."

"그치. 그런 데에 걸리면 말짱 황이야.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오는 것쯤 된다고 대충 생각해보면 쉰게 만들 수 있어."

"그렇구나……?"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이동수단을 떠올리려 했다. 자동차…… 비행기…… 썰매……. 떠올랐다 사라지는 막연한 이미지 중에 하나를 잡아 디테일을 살리려 시도한다.

쿵쿵대며 모래를 밟는 소리가 들리길래 고개를 들었다. 다섯 마리 말이 서 있었다.

"……나왔다."

카에데는 안심해서 혼잣말을 내뱉는 나를 재밌어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막인데 낙타가 아니네?"

"아, 그렇구나…… 그까진 생각 못 했어. 다시 해야 할까."

"이것도 좋잖아. 멋진걸."

이번엔 히츠지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래도 말발굽은 모래 위로 뛰기 힘들지 않아?"

"땅을 바꾸면 돼."

그러더니 히츠지는 쓰고 있던 월계관을 던졌다. 떨어진 데서부터 모래 위에 풀이 돋아난다. 순식간에 녹색 융단이 펼쳐지곤 모래를 덮어간다. 수수의 발자국이 있던 부분에는 색색깔 꽃이 피었다.

"이제 됐다. 가자!"

우리는 말 등에 올라탔다. 카에데도 변신을 풀고 인간이 되선 구급차 지붕에서 내려왔다. 말을 타 본 적도 없는데다 안장이니 등자니 하는 것도 없지만 꿈속이기에 아무 불편 없이 올라탈 수 있었다. 딱 한가지 문제만 빼고──.

"어? 어라~?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후후훗! 웃긴다!"

제각기 웃음소리가 터진다. 내가 만든 말에 타면 영문을 모르겠지만 뒤로 돌아 버린다. 즉, 진행 방향 반대인 꼬리 쪽을 보면서 말을 타게 되는 셈이다.

"사야, 너, 엄청 꼬였구나!"

신나서 말 한 히츠지가 자기 말 엉덩이를 찰싹 때린다. 말이 단숨에 달려 나가고 누구 할 것 없어 환성이 터진다. 나도 고무감이 충동질하는 대로 웃었다.

맑던 하늘은 어느 샌가 푸름 얽힌 밤빛으로 변했다. 그래도 주위는 충분히 밝아서 잘 안보이고 그러진 않았다.

지평선에서 큰 달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운,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달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달밑에서 거꾸로 말을 탄 채 웃고 떠들며 달려간다.

몇 분인지, 며칠인지, 몇 달인지가 지나고 앞쪽에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목을 얽어 만든 철사 예술품처럼 생긴 그것은 여러 다리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우리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발자국에서 차례차례 꽃봉오리가 부풀고 꽃이 피어난다.

"저게 나한테 딸린 수수──?"

"그런가 보네요."

"좀, 크지 않아?"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수수의 크기가 점점 커져간다. 학교 건물만한 거대 조형물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풀밭 위를 맹진한다. 마침내 말이 따라잡은 후에 옆에 가니 크기 차이에 압도당할 것만 같다.

"사야! 겁먹지 마!"

히츠지가 발굽 소리에 지지 않는 소리로 외친다.

"네가 겁먹을수록 수수도 강해져!"

"아, 알겠어……"

말은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섭다.

"이걸 어떻게 쓰러트리…… 으악!?"

수수 옆에 달린 다리가 일제히 들리더니 주위를 쓸어냈다. 땅이 움푹 패고 말들이 차례대로 넘어진다.

공중에 뜬 내 몸을 뭔가가 잡았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다시금 괴물 인면조가 된 카에데가 나를 발톱으로 잡고 있었다.

카에데가 힘차게 날갯짓 하고, 땅이 쑥쑥 멀어진다. 수수 등 위에서 카에데가 발톱을 풀었다.

내려앉은 등판에는 긴 털이 돋아 있는 게, 거대한 장모종 강아지 같았다. 복사뼈까지 쑥쑥 빠진다. 밑에서 봤던 기계같은 느낌과는 달리 생물같은 게 의외였다.

카에데가 내 옆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었다.

"고, 고마워."

"오케오케"

"다른 애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미도리가 등에 올라탔다.

"굿 잡이었어요 카에데 양."

"긋치."

새처럼 끽끽 웃는 카에데 뒤에서 히츠지가 두둥실 떠오른다.

"아 사야, 무사했네."

"안 무사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히츠지는 안 도와줬잖아."

"사야는 그 정도에 안 당하잖아. 나, 아주 잘 아는 걸."

듣고 보면 맞는 말이다. 히츠지와 함께 있으면 뭐든 지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늘을 난다든가.

마음속에서 떠올린 순간 아무 전조 없이 발이 떠올랐다.

"악!"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제어에 실패하고, 위아래가 팩 돌았다. 위엔 수수의 등판, 밑에 하늘이 펼쳐진다. 다음 순간 나는 낙하하기 시작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히츠지와 애들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끝없이 이어진 푸르른 허공에 빨려드는 공포에 비명을 지르기 직전, 목덜미를 잡혔더니 낙하가 갑자기 멈췄다.

"소질이 있네요, 호카게 씨."

목을 뒤틀어 돌아보니 날 잡은 건 란이었다.

"레슨 4는 하늘을 나는 방법, 이었는데, 벌써 터득한 거예요?"

"모, 모르겠어. 갑자기 떠올라서."

"꿈속에서 나는 건 쉬워요. 특별하다는 생각 말고 평소에 걷고 말하는 것처럼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비결 이예요."

"당연히 토키시마 씨처럼 날개가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맞으면 날개든 뭐든 써도 돼요. 하지만 아무 것도 없이 날려고 해도 날 수 있어요. 방금처럼 당황해서 제어에 실패하면 움직임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가니까 최대한 빨리 익숙해져야겠죠."

어느 샌가 내 발은 다시금 땅을 향했다.

히츠지와 애들이 두둥실 떠올라선 나와 란 곁으로 모여든다.

모두 모이는 걸 기다렸다가 입을 연 란.

"자── 그럼 저 수수를 잡아 보죠."

란이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내 활에 메긴다. 끼릭댈만큼 당겼다 놓자 화살이 일직선으로 수수 등판 한중간에 꽂힌다.

수수가 포효한다. 전자악기 소리 비슷했지만 울음소리라고 본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카에데는 날개를 접고 급강하 한다. 발톱이 달린 네 다리가 떨어지는 힘을 담아 수수의 몸에 박히고, 찢어발긴다. 털이 흩어지더니 다리인지 골격인지 모를 게 쏟아진다.

히츠지가 두 주먹을 부딪히자 거친 쇳소리가 났다. 어느 샌가 황금 권갑이 손에 달려 있었다.

"먼저 갈게, 사야!"

히츠지는 그 말을 남기고 수수에게 날아갔다. 등짝에 내려앉더니 엄청난 기세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데이랜드와의 차이에 깜짝 놀랐다. 히츠지는 이렇게 화끈한 애였던 건가…….

다음엔 미도리 차례지 싶어서 눈치를 보니 미도리가 말한다.

"가요, 호카게 씨. 전 베드 메이커라서 기본적으로는 엄호 대기하거든요."

듣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란이 이번에는 활을 위로 겨누더니 수수가 아니라 진행방향에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레슨 5예요 호카게 씨. 어찌 됐건 상상력이 달하는 한, 무자비하게, 엉망진창으로 박살내 주세요."

박살낸다…… 박살낸다……?

난 낯선 쪽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무언가.

어찌어찌 나온 건 이상하게 생긴 성게라고 해야 할 지 가시 달린 별사탕이라 해야 할 지모를 것이었다.

"그게 뭔가요?"

미도리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뭘까……"

내 당황을 뒤로 한 별사탕이 수수를 향해 떨어진다. 어떻게 될지 지켜봤더니 수수 근처에서 모조리 폭발하길래 몸을 뒤로 제낀다. 잔뜩 달린 수수 다리 몇 개가 날아가더니 자세가 크게 흔들린다.

히츠지가 주먹을 치켜들고 항의하는 외침을 날린다.

"위험하게~!"

"미안!"

많이 다친 듯 보였지만 수수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반쯤 박살나고, 조각들을 흩뿌리면서도 한결같이 앞으로만 나아간다.

거기에 갑자기 큰 그림자가 생긴다.

위를 보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동시에 얇고 긴 게 보였다. 땅울림과 함께 박힌 그것은 나선을 그리며 솟구친 석탑이었다. 수수는 진로를 바꿀 틈도 없이 갑작스레 생겨난 첨탑에 부딪친다.

아래쪽에서 부러진 첨탑은 엄청난 양의 돌을 위에서 쏟아 붓는다. 수수의 다리가 하나하나 부서지고, 몸통에 모래 위에 쓰러진다.

다른 셋과 동시에 나도 서둘러 물러난다. 끝없이 쏟아지는 돌이 수수를 생매장한다.

이윽고 붕괴가 멈추자 조용해졌다. 수수를 깔아뭉갠 돌무더기 꼭대기에 란이 살며시 착지했다.

"후우. 다들 괜찮아?"

뜬 채로 다가간 나도 돌산 위에 내려앉는다.

"대단하다. 저 탑 아이조메 선배가 아까 쏜 화살이죠?"

"호카게 씨 흉내를 내 본 거야."

란의 말이 끝나자 카에데가 내려왔다.

"짭이네."

"그쯤 뭐 어때."

"상상력이 빈곤해서 좋을 거 없다고 그런 건 리더잖아."

미도리와 히츠지가 내려오니 다시금 다섯이 됐다.

"히츠지. 이제 나한테 붙었던 녀석은 퇴치했다고 봐도 돼?"

"아니. 수수 안에 핵같은 게 있는데 그걸 부숴야 해."

"핵?"

"봐 봐."

히츠지가 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돌산에 내리찍었다. 돌이 산산조각나자 밑에 깔린 수수가 드러난다. 그 순간 몸부림치려는 몸통에 히츠지의 손이 엄청난 속도로 박혔다.

팔꿈치까지 박혔다 빠진 손에는 연하늘색 계란 같은 게 들려 있었다.

수수의 몸에 부슬부슬 무너지기 시작했다. 겉이 차츰차츰 모래처럼 잘아지더니 땅과 분간이 힘들어진다.

히츠지가 주먹을 쥐었다. 작은 손 안에서 수수의 핵이 건조한 소리와 함께 깨졌다.

동시에 어디선가 종소리 같은 중저음이 퍼졌다.

이게 뭐야──? 내가 말했지만 점차 커지는 소리에 묻혔다. 이윽고 공기 자체가 드드득 떨리더니 지면의 모래가 끓어오르듯 솟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알람에 눈이 뜨였다. 사야를 둘러싼 넷도 꾸물꾸물 움직인다. 히츠지는 처음 누운 자리에서 180도 돌아서 오른다리를 사야 가슴 위에 척하니 얹어뒀다. 

이래서 갑갑했나──. 사야가 발목을 잡아 치우자 히츠지가 항의하듯 앓는 소리를 낸다.

"하~지~마~"

"내가 할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잠버릇이 별로였다. 개중에도 란은 온 몸을 뒤튼 데다 침대에서 떨어진 상태였다.

미도리가 침대 위를 기어가더니 알람시계를 껐다. 누웠을 땐 알람시계 제일 가까이 있었는데 자면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반대편에서 잔 모양이다.

"음~~~~, 잘 잤다!"

카에데는 기지개를 켜더니 벌떡 일어나 침대를 나섰다. 목을 뚝뚝 꺾으며 화장실에 걸어간다.

사야도 뒤따라 침대가로 기어가 다리를 내민다. 맨발에 닿는 바닥이 서늘하다. 일어서려다 휘청거렸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어두워진다.

"……어쿠쿠쿠"

"괜찮아요? 힘들었죠."

침대 가에서 안경을 끼던 미도리가 말했다.

"힘들었다기 보단…… 뭔가 어찔했어."

"저혈당이에요. 뇌가 엄청 열심히 활동해서 당분이 부족한 거거든요. 커피 끓일 테니까 단 것좀 먹고 잠깐 쉬죠."

곧 온 창고에 커피 향이 퍼지자 못 일어나던 히츠지나 란도 겨우 일어났다. 머리와 옷이 약간 흐트러진 다섯 명은 다시금 소파에 앉았다.

초콜릿과 함께 진한 커피를 받았다. 안 그래도 블랙커피를 못 마시는데다 카페인이 들어간 걸 한동안 피하던 사야였지만 입에 머금은 초콜릿이 뜨거운 커피에 녹아가는 감촉을 즐기고 있자니 지친 뇌에 당분이 들어차는 느낌이 났다.

"이제 호카게 씨도 슬립 워커네요."

란이 말했다.

"같이 한다고는 아직 한 마디도 안 했을 텐데요."

"다시 물어볼 필요도 없을 줄 알았는데. 한 잠 자고 깬 기분은 어떤가요?"

사야는 침묵했다. 기분은 좋았다── 요 반 년간 느껴본 적도 없는, 더없이 상쾌한 기상. 아니, 어쩌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잔 중에 가장 기분 좋게 깬 걸지도 모른다. 겨우 3시간 잤는데 8시간 꽉 채워 잔 듯 머릿속이 상쾌했다.

"분명 호카게 씨에게 쾌적한 수면을 약속한 기억이 나는데요."

"……기억나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하지만 이제 저한테 기생한 수수는 쓰러트린 거죠? 그럼 더 이상 제가 뭘 할 필요가──"

"당연히 강요할 생각은 아니예요. 앞으로는 평범하게 잘 수 있을 거예요. 혼자서도요."

사야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 란이 미소 짓는다.

"하지만, 오늘처럼 기분 좋은 잠은 같이 슬립 워크 하지 않으면 맛볼 수 없을 거예요."

"…………"

"모처럼 이렇게 만났으니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천천히 생각해 주세요."

사야는 말문이 막히고, 카에데가 말한다.

"이야~ 그건 그렇고 히츠지찌 사야찌가 그런 사이였을 줄이야."

미도리도 끄덕인다.

"그렇죠, 약간 놀랐어요."

"허?"

"허? 는 무슨. 완전 애인이더니. 자기 전엔 전혀 몰랐는데."

그 순간 사야의 뇌리에 꿈속에서 히츠지와 나눈 대화가 단숨에 떠오른다.

"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일어서는 사야. 자기도 모르게 히츠지를 쳐다본다. 히츠지는 말없이 사야를 마주보며 눈을 마주친 채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

"아, 아냐. 아니라고."

"뭐가 아닌데 사야찌."

"그건 꿈! 꿈속에서만 그래!"

"뭐어? 키스 했었잖아."

"안 했…… 했지만 이마잖아! 무효지!"

"꿈속이니까 무효? 너무하지 않아요?"

누가 봐도 미도리의 말투는 놀리는 것이었지만 사야는 그걸 지적할 여유조차 없었다. 란은 싱글싱글 웃으며 듣기만 하고, 히츠지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긴 커녕 사야의 반응에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 난 몰라! 갈 거야!"

사야는 일어나서 가방을 들었다.

"마음이 정해지면 또 와 주세요."

미도리가 말 한다.

"사야는 어차피…… 올텐데."

히츠지는 말하면서 하품한다.

다 안다는 말투에 울컥한 사야는 침실을 뒤로하고 창고 출구를 향해 잰걸음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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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립 워커는 꿈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특수능력자예요."

홍차와 차과자가 다 돌아간 후에 란이 단언했다.

"모든 사람의 꿈은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곳을 한 세계로서 왕래할 수 있어요. 집합적 무의식 속을 돌아다닌다고 해도 되겠네요."

"집합적 무의식──"

사야도 어디서 들어봤다. 모든 인간은 무의식 하에 이어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전 세계의 신화나 상징에 공통분모가 있는 것이다, 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보통 사람은 꿈속에서 의지를 잃어요. 의식 수준이 올라왔을 때도 상황을 꿈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지 기억이나 감정에 지배당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죠. 하지만 이따금 꿈속에서 자아를 지키는 사람이 있어요."

"사야는 꿈속에서 자기가 꿈꾸고 있다는 걸 자각해본 적 없어?"

히츠지가 묻는다.

"있었……을걸. 바로 깼지만."

"자기가 꿈을 꾼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지한 상태로 수면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아요. 하지만 적절한 훈련만 하면 꿈속에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차차 늘어나죠. 무제한적인 명석활동도 가능해져요."

란은 말을 이었다.

"이렇게 꿈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면 그곳엔 광대한 꿈의 세계가 펼쳐져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보리진*은 드림 타임이라고 불렀어요. 저희는 꿈 속 세계를 '나이트 랜드', 깨어 있는 세계를 '데이 랜드'라는 이름으로 구별해요."

"나이트 랜드 안에선 뭐든 할 수 있어~"

소파 위에 양반다리로 앉은 토키시마 카에데가 전병을 우득우득 먹으며 끼어들었다.

"명석몽이라는 말 알아? 꿈을 꾼다는 걸 안 사람은 꿈을 통제 할 수 있게 돼.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캐릭터를 나오게 하거나 자기를 변신시킬 수도 있어. 완전 자유. 엄청 재밌어."

"도를 지나치면 통제가 안 되기 때문에 명석을 잃을 때도 있지만요."

사카이모리 카에데가 홍차 컵을 후후 불며 말했다.

"기왕 뭐든 할 수 있으면 케이크건 뭐건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미각은 재현하기가 많이 힘들어요. 나이트 랜드에 갈 때마다 도전하는데 어쩐지 감촉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티슈를 먹는 느낌이라……"

"점장은 기합이 안 들어간 거야."

"안 그래요오. 있는 힘껏 시도해도 맛이 없는 게 너무너무 분한데……"

미도리가 카에데에게 불만스런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우리는 케이크 무한리필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 게 아니예요. 슬립 워커에겐 다해야 할 사명이 있어요."

란이 말했다.

"그게, 수수를 쓰러트리는 거?"

사야의 물음에 란이 끄덕인다.

"맞아요. 나이트 랜드에는 수수──'샌드 비스트'로 알려진 존재가 도사리고 있어요."

"샌드 비스트? 모래…… 야수?"

"예전엔 샌드맨이라고 불렸어요. 독일 민담에 나오는 잠의 정령요. 사람 눈에 모래를 뿌려서 잠에 들게 하는……"

"스나카케바바*같단 말이지."

히츠지가 끼어들었다.

"스나카케바바는 그냥 모래만 뿌리는 걸 텐데……. 수수는 샌드맨이라고 부르기엔 그 행동에 지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샌드 비스트라고 부르게 된 모양이예요."

비스트──. 사야가 본 그것도 명백하게 인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야수와도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이름은 뭐든 상관없는데, 수수는 대체 뭐야?"

"인간에게 뿌리를 뻗고 잠을 침식하면서 나이트 랜드에 곰팡이처럼 퍼져가는 것이예요── 자율몽, 정신기생체라고도 부름직하죠."

"잠을 침식한다…… 내 불면증도 그건가."

"네. 당신은 아마 수수 알레르기가 있는 걸 거예요. 주위에 수수가 있으면 잠이 다가 올 수 없어서 불면에 시달리게 되는."

"고양이 알레르기인데 그걸 모르고 고양이를 키웠다─ 뭐 그런 거지."

카에데의 비유에 란이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고양이는 수수보다 훨씬 귀여워요."

"엥, 그 얘기?"

"뭐 상관없어요. 어쨌건 수수에게 기생당한 사람은 나이트 랜드에 정신이 묶이게 되고, 이윽고 자아가 없는 상태로 데이 랜드에 수수를 퍼트리는 보균자가 돼요. 내버려두면 수많은 사람에게 기생해서 나이트 랜드를 침식하기 때문에 조기에 감염을 막아야만 해요."

"나도 그 보균자가 되기 직전일까?"

사야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저었다.

"호카게 씨는 다른 루트를 향했다고 봐요. 수수 알레르기 때문에 나이트 랜드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수수에게 기생당한 채로 심신이 깎여선── 이르건 늦건 죽었을 거예요."

사야에게 있어선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대번에 납득이 갔다.

──'잠 못 자서 죽은 사람은 없다'는 개뿔. 거짓말쟁이! 진짜 죽잖아!

"저기, 괜찮으세요?"

사야의 안색이 심하게 파래졌는지 미도리가 걱정스레 살펴본다.

"어, 응…… 고마워."

"반년이나 버티다니 대단해! 나였으면 사흘 만에 죽었을거야."

"너무 빠르잖아. 최소한 1주일은 버티라고."

카에데가 히츠지에게 태클을 건다.

"힘들었죠, 호카게 씨.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당신 같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슬립 워커가 있는 거니까요!"

란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다.

"그러니까 다시 소개할게. 여기 있는 넷이 이 마을의 슬립 워커. 내가 리더인 아이조메 란."

란은 소파에 앉은 이들을 가리키며 순서대로 소개했다.

"콘파루 양은 '블랭킷'. 옆에서 자기만 하면 누구든 순식간에 재워버리는 취침사."

"취침사──?"

"내가 자면 주위 사람도 자 버려. 수업 중에 깜빡 잠들었다가 일어났더니 교실 애들이 전멸했을 때도 있었어."

"뭐어……? 선생님이 안 깨웠어?"

"선생님도 잠들었었어.."

그래서 교실이 아니라 양호실이나 옥상에서 잔 거구나──. 사야의 의문이 하나 풀렸다. 이해됨과 동시에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콘파루 씨랑 같이 있으면 잠드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누구든, 다 그래. 왜?"

"어……"

질문을 들은 사야는 혼란에 빠졌다.

──왜지. 아니, 왜 나만 그렇다고 생각했을까.

"사야만 잠드는 게 아니면, 안 돼?"

히츠지는 살피듯 사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냥."

당황한 사야에게 란은 소개를 이어갔다.

"토키시마 양은 '필로 파이터'. 나이트 랜드의 전투에 능한 슬립 워커예요."

"저, 전투?"

"맞아~. 수수는 꽤 공격적이거든. 방심하면 우리가 당해. 아무래도 난 남들보다 꿈을 조작해서 잘 싸우나봐. 사야찌한테도 가르쳐 줄게. "

카에데는 구김 없이 웃었다.

"미도리는 '베드 메이커'. 침구 쪽은 다 취급하는 기재 담당 이예요. 수면 환경을 조절하는 한 편 슬립 워크 중에도 우리 편의를 봐 주죠."

"저, 저기, 꿈속에서 뭔가 이상해지면 말 해 주세요. 어떻게 해 볼수 있을 거예요."

미도리는 소극적으로 말 한 다음 고개를 꼬빡 숙였다.

일제히 모이는 넷의 시선에 사야는 거북함을 느끼고 소파 위에서 몸을 틀었다.

"저기…… 이게 다야? 넷 뿐?"

"맞아. 네가 들어오면 다섯이 되지."

란이 테이블 너머에서 쭉 다가온다.

"어제도 말 했지만 네게는 '네버 슬리퍼'의 소질이 있어. 꿈속에 들어가도 꿈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잠을 잃은 자. '나이트키스트'── 수수에게 침식당한 희생자 중엔 이따금 그런 식으로 특수능력이 생겨나는 사람이 있거든."

"……나한테 뭘 시키게?"

기가 꺾인 사야에게 카에데가 태연히 말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일이야. 나이트랜드에 다이브 해서 인간에게 기생한 수수를 해치운다. 정의의 아군!"

그렇게 간단한 걸까……? 당황하는 사야를 향해 란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말했다.

"그럼 일단 같이 잘까요."

"뭐?"

"뭘 할래도 일단은 호카게 씨한테 기생한 수수를 없애야지."

"아니 그건 그런데, 같이 잔다니, 그게 무슨……?"

"말 안 했던가. 슬립 워커는 동침으로 꿈을 공유할 수 있어. 너도 이미 해 봤잖아?"






이하 주석


에보리진: Aborigine 유럽인의 이주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살았던 최초의 종족.


스나카케바바: 일본 괴담 속 요괴. 사람에게 모래를 뿌려(혹은 그런 소리를 내서) 겁을 먹게 하는 요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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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 26. 13:19

5


슬립 워커. 몽유병 환자, 수면보행증 환자.

수면중에 자리를 빠져나와서 무의식중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병── 수면장애중 하나다.

나중에 찾아봤을 때 그런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이조메 란이 입에 담았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단순한 환자 모임이 아닌 듯했다.

"우리 슬립 워커는 비밀리에 사람들의 잠을 지키는 활동을 해요. 일반적으론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람의 잠은 수수의 위협을 받고 있거든요."

"수수……"

"당신이 자면서 쓰러트린 거예요. 수면의 수에 짐승 수 자로 수수睡獸."

"저기 란. 그렇게 한 번에 설명하면 안될 것 같은데? 사야 짱 굳어버렸는데."

"어차피 쉽사리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 가랑비처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단숨에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좀 거칠지 않을까."

"난생 처음 보는 당신에게 갑자기 키스하는 사람인걸요."

"그건 그래."

"잠깐!"

항의하는 사야였지만 란은 들은 체도 안 하며 말을 이었다.

"슬립 워커는 수수를 퇴치하는 게 목적이지만 개중에도 사람마다 잘 맞는 역할이 있어요. 당신의 소질은 아마 네버 슬리퍼. 꿈의 영향과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는 불면자는 그 수가 적은데, 수수와 싸울 때 중요한 전력이 돼요. 그러니 호카게 씨── 도와주시지 않을래요?"

"가, 갑자기 그래도 말이지."

"네, 물론."

사야가 거부하리라 예상했던 양, 란은 성급하게 끄덕였다.

"믿어 달라기엔 힘들겠죠. 설득에 시간을 쏟을 생각은 없어요. 내키면 여기로 와 주세요."

그러면서 건넨 것은 두꺼운 포인트 카드였다. '사카이모리 침구점'이라는 가게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멍하니 카드를 쳐다보는 와중에 히츠지가 말했다.

"이제 일어나주지 않을래? 이불을 못 접겠어."

"어, 응……"

시킨 대로 일어서고, 다리가 아파 휘청대는 사야 앞에서 히츠지는 익숙한 솜씨로 이불을 개서 안아들었다.

란은 사야에게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 하룻밤 자고 생각해 보세요. 무사히 잠들 수 있다면, 말이지만."

협박 같은 말을 남기고 아이조메 란은 돌아 나선다.

"내일은 다들 여기 있거든. 안녕~"

히츠지도 란을 따라 나가고, 옥상에는 사야 혼자만이 남겨졌다.

"뭐냐고……"

미묘한 굴욕감을 느끼며 뻗대고 선 옥상에 종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 샌가 6교시가 끝나 있었다.

다음날 방과 후, 사야는 포인트 카드에 적힌 침구 점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어제는 결국 잠들 수 없었다. 분하게도 아이조메 란의 말 대로였다. 사야의 불면은 변함없었고, 히츠지 옆에서 맛본 깊은 잠은커녕 선잠까지도 갈 수 없었다.

도와주면, 편안한 잠을 자게 해줄 수 있다── 란이 한 말만 들으면 신빙성이 없었지만 히츠지가 함께 있다면 또 달랐다.

슬립 워커니 수수니 하는 수상한 이야기는 둘째 치고 저 감미로운 잠만큼은 진실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야는 적혀 있는 주소를 향해 간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 사카이모리 침구점은 실존하는 모양이었다. 미리 전화를 걸어봤지만 자동 응답은커녕 뚜르르 소리만 이어졌다. 주소만 믿고 지도 어플을 켠 채 걷다 보니 점차 인기척이 적은 구역에 들어섰다.

"진짜 여기 맞나……?"

태반이 문을 닫은 어두컴컴한 상점가를 지나자 창고만 늘어선 무미건조한 곳을 배경으로 이따금 커다란 트럭이 보도를 긁을 듯 달려간다. 흐린 날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점점 불안해진다.

──나 괜찮으려나. 별로 안 괜찮지. 아니, 어라? 어제 그 얘기 뭐지? 슬립 워커? 그런……설정인가?

롤플레잉 놀이를 하는 걸까…… 연극 같이? 그런 거면 알아서 했으면 좋겠는데, 난 별로 안 땡기고. 이 불면증을 어떻게 해결 안 하면 아무 것도 못 하고. 협력…… 협력이라면 뭘 해야 하는 걸까. 정말로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걸까. 그 선배, 아무 말이나 한 거였으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래도 키스한 건 큰일이지. 약점을 잡혔어…….

침울하게 생각에 빠져 걷던 사야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주위 건물과 썩 다를 것 없는 지붕이 검은 커다란 창고가 보였다. 지도에 나오는 목적지는 아무래도 여기인 모양이다. 출입구는 셔터가 닫혀 있었고, 건물 앞 주차장은 금 간 콘크리트 사이로 잡초가 자라 있었다. 셔터 옆에 작은 문이 있는데 '사카이모리 침구점'이라고 덤덤한 간판이 걸려 있다.

문에 다가가 안을 엿본다. 문에 유리창이 달려 있지만 안이 어두워서 잘 안 보였다.

인터폰도 없어서 한동안 고민한 다음 노크했다.

대답은 없었다. 안에서 누가 움직이는 기척도 없다.

시험 삼아 손잡이를 돌려보자──열려버렸다.

"실례합니다~……"

떠듬떠듬 말을 던지며 안에 들어간다.

"저기요오……?"

문 안쪽은 짧은 통로였다. 철제 록커와 말라죽은 화분, 먼지를 뒤집어 쓴 석유난로가 벽 쪽에 붙어 있다. 통로 왼편에 있는  미닫이 문은 출입구 쪽과 이어져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 불 켤 스위치가 없나 벽 쪽을 자세히 쳐다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야!"

생각지도 못한 부름에 펄쩍 뛴다. 뒤를 보자 문가에 콘파루 히츠지가 서 있었다. 사야의 얼굴을 보자마자 히츠지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우와, 얼굴이 왜 이래!"

"뭐어!?"

순수한 매도에 울컥하는 사야. 히츠지는 익숙하게 팔을 뻗어 통로의 불을 켠다.

조명 아래에서 가만히 사야를 들여다보곤 말한다.

"다크서클이 엄청난데. 잘 못 잤어?"

"어제 내 얘길 듣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계속 못 잤다니까!"

"나랑 잤을 때는 좀 더 깔끔했었잖아."

천연덕스럽게 말 한 히츠지는 사야보다 먼저 안에 들어간다. 둘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와 줘서 기뻐. 너 같은 아이를 합류시키고 싶어도 대부분 안 믿어주거든."

"딱히 믿은 게……"

히츠지가 어느 틈에 꺼낸 열쇠로 다른 입구를 열었다.

"도와줘. 이 문 무겁거든."

"어. 응."

시키는 대로 손을 뻗어 무거운 문을 둘이서 끌어당긴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히츠지는 시커먼 데로 들어가더니 또 불을 켰다.

높은 조명에 매달린 조명이 가까운 데서부터 순서대로 켜진다.

그곳은 그야말로 침구 시장, 아니면 테마파크 같았다. 거대한 창고에 일정 간격으로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인 침대나 이불, 해먹이 그득히 늘어서 있었다.

히츠지는 사야 앞에 서서 침구 사이를 걸어간다.

"어때? 이런 거 처음 보지."

어쩐지 자랑하듯 말하는 히츠지.

"아닌데."

"뭐? 어디서 봤어?"

"이케아* 침구 매장."

그 대답에 히츠지는 김이 빠졌다는 듯 입술을 빼쪽인다.

"사야는 귀엽지가 않아."

"미안하게 됐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침구에 사야도 엄청난 규모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그 끝까지 가자 눈앞에 매트리스나 이불 등이 포장 그대로 놓인 선반이 천장까지 벽처럼 쌓인 게 보였다.

미궁에 들어온 느낌을 받으며 선반 사이의 통로를 걸어가다 보니 갑자기 트인 공간이 나왔다. 사방이 거대한 선반에 둘러싸인 중앙에 침대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엔 독서 등이나 만화, 학교 교과서 등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소파 세트 테이블에는 과자 봉지와 머그컵. 한 구석에는 싱크대와 가스렌지, 그리고 냉장고와 식기 선반이 갖춰진 부분이 있었다.

"화장실은 저기야."

히츠지는 오른 편 선반 끄트머리를 가리킨 다음 커피 테이블 위의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소파에 가방을 던지고 싱크대에서 컵을 설거지한다.

"사야는 물 좀 끓여 줄래?"

"엥."

"다른 애들 올 때까지 차나 마시면서 기다리려고. 커피도 괜찮고."

"……알겠어."

가스레인지 위의 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을 켠다. 테이블 위의 바구니엔 찻잎 캔과 인스턴트커피가 모여 있었다.

"마시고 싶은 거 아무 거나 골라."

그 말을 듣고 카모마일을 골랐다. 잠이 잘 온다는 허브티다. 집에서는 아무리 마셔봤자 효과가 없었지만.

주전자에서 삐 소리가 나서* 티포트에 티백을 넣고 물을 붓는다. 히츠지는 나무로 만든 과자 쟁반에 전병을 올려 왔다.

"'미왕 쌀 과자*'?"

"달콤 짭짜름해서 어디든 잘 어울리거든."

차를 따르자 허브 향이 올라온다. 히츠지의 머그컵은 금색에 양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야의 컵은 손님용인지 깔끔한 흰색. 이건 정말 IKEA에서 싸게 파는 걸 본 것 같다.

소파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침묵에 버티지 못한 사야가 물었다.

"여긴 뭐야."

"우리 침실. 업무용으로도 쓰이고."

"업무면, 슬립 워커…… 랬었나."

"맞아. 돈을 받을 때도 있으니까 진짜 일이야."

그 말을 들은 사야는 놀랐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본다. 확실히 창고 건물을 비롯해서 롤플레잉이라기엔 너무 거창하다.

"그럼, 진짜구나. 그, 수수나, 그런 거."

"그럼."

"그, 그래."

"불안한 표정이야."

히츠지가 놀리듯 말했다. 순간적으로 받아칠까 싶었지만 상황을 받아들이질 못해서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고개를 숙인 사야를 향해 히츠지가 아까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갔다.

"다들 모이면 설명해 줄게. 걱정하지 마."

설탕옷이 얹힌 전병을 하릴없이 먹고 있자니 곧 창고 저 멀리에서 타박타박 걸음소리가 다가왔다.

곧 선반 미로 사이에서 소녀가 튀어나왔다. 안경을 끼고 얌전해 보이는, 사복을 입은 소녀였다.

"아~ 죄송해요 늦었……어, 아직 둘 뿐이네?"

"당황할 것 없어, 점장."

히츠지가 말했다.

"콘파루 씨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어? 이 분은?"

"아, 안녕하세요……"

"얜 사야 짱. 나이트키스트고, 신입 후보."

"아,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사카이모리 미도리라고 해요."

소녀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인다.

"미도리 짱은 있지, 이 침구점 후계자야. 그래서 점장."

──점장, 이라.

뒤따른 것은 뭔가가 콘크리트 위로 미끄러지는 좌악 소리였다.

미끄러져 들어온 건 포니테일 소녀였다. 사야나 히츠지와는 다른 고등학교 교복에 파카를 덧입었다. 발꿈치에 바퀴가 달린 힐리스*를 신었다는 사실에 사야는 조금 놀랐다. 초등학생 때 유행했던 걸 고등학생이 돼서도 신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안뇽~. 어, 신입?"

"응, 맞아. 사야, 얘는──"

"토키시마 카에뎀다. 안뇽안뇽."

자기소개 직후에 아이조메 란이 다른 통로 쪽에서 가만히 들어왔다.

"다 모였네요."

"와!"

사야를 포함한 넷이 흠칫거리는 걸 본 체 만 체, 란은 깔끔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을 둘러싼 이들의 분위기에 사야도 알아챘다. 이 팀의 보스는 란이다.





IKEA(이케아): 북유럽 조립식 가구 판매점. 뭔가 크고 뭔가 많다.


주전자에서 삐 소리가 나서: 안에서 물이 끓으면 삐 소리가 나는 주전자. 정식 명칭을 모른다.


미왕 쌀과자: 일본 전병 유키노야도(雪の宿)랑 똑같은 맛.


힐리스: 뒤꿈치에 바퀴 달린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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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 26. 13:19

4


오늘은 바람 한 점 없이 깔끔하게 갠 날씨다. 햇빛은 따스하고 또 보드랍다. 잠깐이라면 누워도 살이 안 타고 춥지도 않을 것이다. 즉 낮잠 자기 딱 좋은 날.

그렇게 축복받은 날씨에, 옥상 주변을 빙 둘러싼 철조망 곁에서 콘파루 히츠지가 자고 있었다.

얼굴이 그늘에, 다리가 햇빛을 받는 자리에 누워 있다. 밑에 깐 것은 얇은 이불. 머리를 얹은 베개에서 폭신폭신한 머리칼이 흘러넘친다.

"……찾았다."

혼잣말을 내뱉고 흠칫 해선 주위를 둘러본다. 수수는 그 흔적조차 없다. 대체 뭐였을지 신경은 쓰이지만 지금의 사야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옥상을 가로질러 자고 있는 콘파루 히츠지에게 다가간다. 자기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빨려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꼭 한 숨만 더 자라고 유혹하는 아침 이불 같은. 혹은 기분 좋게 폭신폭신한 비밀의 침대 같은. 더 이상 착각 따위가 아니다. 흡인력은 점차 강해진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생각의 흐름이 점점 끊기고, 저 옆에 눕고 싶다는 욕구만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아, 역시.

이거다. 난 여기에 당한 거다.

역시 이 녀석이어야만 한다. 이 녀석이라면 나를 잠에 데려가줄 수 있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잠이 다가온다. 지금의 사야가 무엇보다 원하는, 편안한 잠이──.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

깜짝 놀라 돌아보자 짧은 머리 학생이 서 있었다. 교복 가슴팍의 학년 배지 색깔이 3학년임을 가르쳐준다. 사야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연다.

"누구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사건에 사야는 굳어버렸다. 흐릿한 머리로 순간적인 임기응변은 불가능한 것이다.

저기, 그러니까, 따위의 뜻 없는 소리를 사야가 답답했는지 3학년이 성큼성큼 걸어오나 싶더니 사야와 콘파루 히츠지 사이를 막아섰다.

"나가 줘."

"어, 아니."

"지금 수업중이잖아. 빨리."

그건 그 쪽도 마찬가지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너무 졸려 반박하기조차 귀찮았다. 꼬여가는 혀를 채찍질해가며 사야가 말했다.

"찾고 있었어요…… 걔를."

"왜."

"그…… 쟤랑 같이, 자고 싶어서."

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몸이 휘청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뭐? 너── 잠깐."

3학년은 말리려고 한 모양이지만 사야는 거의 듣지 못했다. 누운 콘파루 히츠지는 그야말로 졸음의 블랙홀이었다. 두 발, 세 발, 거리를 좁히는 순간에 잠이 왈칵 덮쳐온다.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가 큰 아가리를 벌린 양, 수마가 사야를 단숨에 잡아채선 끌고 간다.

──역시, 이 녀석이었어……!

콘파루 히츠지 옆에 쓰러지는 사야의 머릿속에 떠오른 느낌은 정답에 도달한 만족감과도 비슷했다.

이불 구석에 무릎을 꿇고 눕기도 전에 사야의 의식은 이미 어둠에 빨려 들어갔다.




병원 복도는 너무 복잡했고, 벽 쪽에 늘어선 가죽 포장 벤치엔 많은 사람이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그 사이를 가르듯 나서지만 나를 보려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벽에 붙은 덕지덕지 붙은 전염병 예방 포스터엔 악몽에서 깨면 반드시 뜨거운 커피로 양치하라고 적혀 있었다. 커피 자판기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고, 아이들이 입을 헹군 커피를 옆에 붙은 세면대에 뱉어낸다.

진찰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 옷을 입은 애인이 고개를 내민다.

'다음 분' 애인이 그렇게 말 하곤 날 알아본다.

"어머, 늦게 왔네."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끌어안고 평소처럼 키스한다. 입을 뗀 애인이 꾸짖듯 말했다.

"커피 맛이 안 나는걸."

"태어나서 한 번도 마신 적이 없거든."

"그러면 위험해. 저기 좀 봐봐."

애인이 내 뒤를 가리킨다. 돌아보자 그렇게 많던 환자는 한 명도 없고, 다리가 수없이 달린 수수가 긴 복도에서 다가오는 중이었다.

"네 잠에 끌려 온 거야. 물러서 있어. 내가 해치울 테니까."

"괜찮아. 나도 저 정도는 해치울 수 있어."

덜걱덜걱 다리를 움직이며 들이닥치는 수수 앞에 노란 컬러콘을 놓아 길을 막는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자 뜨거운 커피가 나왔고, 나는 종이컵 째로 수수에게 던졌다. 수수는 흐물대며 녹아서 바닥에 펼쳐졌다.

"어때?"

의기양양하게 돌아보자 애인은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그만 넋을 일고 만다. 콘파루 히츠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 누구야?"




"뭐어!?"

충격과 함께 깨어난 사야가 가장 처음 본 것은 위에 올라타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콘파루 히츠지의 얼굴이었다.

꿈속에서 느껴졌던 사랑이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처럼 희미해진다. 콘파루 히츠지는 표정 변화 없이 사야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갸웃한다. 사야는 기가 죽으며 말문을 연다.

"아, 안녕."

"안~녕?"

그렇게 답하는 콘파루 히츠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도 안 되는 사야는 쩔쩔 맸다.

"저기…… 일어나도 될까요."

"안녕히이 주무셨어욧."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얘 뭐야 무서워. 옆에서 아까 본 3학년이 사야의 시야에 끼어든다.

"호카게 사야 씨."

"네, 넷!"

어떻게 내 이름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쳐다보는데 어느 틈엔가 3학년의 손에 사야의 학생수첩이 들려 있었다.

"2학년 C반 13번 호카게 씨. 왜 여기 왔는지 가르쳐줄 수 있을까."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도 허락을 구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돌려주세요, 수첩."

"똑바로 대답하면 돌려줄게. 심문하는 거야."

"심문이라니."

콘파루 히츠지가 몸을 쭉 내밀어 얼굴을 들이댔다.

"사야라고 하는구나. 어디서 봤었나?"

"저번에, 양호실에서……"

잠시간 눈을 굴리다가 손뼉을 짝 치는 콘파루 히츠지.

"아! 그 때 그!"

"마, 맞아."

"그 갑자기 키스한 얘야!"

갑작스런 돌직구를 맞은 사야는 변명할 말 한마디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앗 앗, 그건, 그러니까."

"키스……? 무슨 얘기야?"

3학년이 수상쩍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다.

"죄…… 죄송했습니다!!"

사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소리쳤다. 밑에 깔려 도망칠 수 없는 사야는 그 말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 많이 심한 불면증이었구나."

무릎을 꿇고 이유를 다 설명한 사야에게 3학년이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다라."

"네…… 어째선지 콘파루 씨가 곁에 있으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서."

"히츠지라고 불러. 나도 사야라고 부를게."

"앗, 그렇게 미국인처럼 거리를 좁힐 순 없는데."

약간 어이없어하는 사야를 향해 미소 지으며 히츠지는 말한다.

"키스했는데?"

"윽."

"미국인이라도 처음 본 사람한테는 키스 잘 안하죠."

"으윽."

"총 맞아도 할 말 없죠."

"재판 감이죠."

"그,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싱글싱글 웃는 히츠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사야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선수先手 콘파루, 동침."

히츠지가 갑자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응?"

"후수後手 호카게, 키스."

"큭."

히츠지는 장기 해설 흉내인지 뭔지 진지한 척 말을 잇는다.

"선수 콘파루, 낮잠. 후수 호카게, 요바이*."

"아, 아직 밤은 아닌데."

빈사 상태로 떠듬떠듬 반박 같지 않은 반박을 시도하는 사야를 보다 못했는지 3학년이 끼어들었다.

"콘파루 양, 그 쯤 해 두죠. 호카게 씨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꿈속에서 콘파루 양과 친했던 거죠?"

"아 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이해해요. 데이 랜드와 나이트 랜드 사이엔 그런 모순이 이따금 있으니까요."

"어……네?"

갑작스러운 뜻 모를 말에 당황한 사야에게, 이번엔 3학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것보다 몇 가지 자세히 물을 게 있어요. 호카게 씨,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요."

몸 상태는…… 좋았다. 아주 좋다. 잔 시간은 아주 잠깐일 텐데 머리속이 아주 맑다.

"굉장히 좋아요. 졸리지도 않고."

"불면은 얼마나 이어졌나요?"

"작년 가을부터 슬슬 시작하더니 완전히 못 자게 되고…… 그러니까, 이제 6개월쯤 지났으려나."

"6개월!"

"반년이나!? 우와, 그럼 힘들었겠다."

히츠지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렇게 불면상태가 이어지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사고 수준이 떨어졌을 텐데요. 그런데도 매일 학교에 왔었어요?"

"어찌어찌 걷고 말하기는 가능해서……. 수업은 못 따라가서 성적이 거의 바닥이었지만."

둘이 고개를 마주한다.

"얘, 네버 슬리퍼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콘파루 양, 실제로 동침을 했을 때 어땠어요?"

"완전하진 않지만 나이트 랜드에서 명석*활동 가능했던 것 같다. 수수를 쓰러트려서 깜짝 놀랐는걸."

"저기…… 무슨 얘기?"

둘은 사야에게 시선을 향한 다음 감정하듯 가만히 쳐다본다. 위축된 사야를 관찰하며 히츠지가 말했다.

"초대해 볼래?"

"괜찮겠어요? 콘파루 양 입장에서."

히츠지가 끄덕인다.

"알겠어요."

3학년은 이제껏 들고 있던 학생수첩을 사야에게 돌려주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아이조메 란. 콘파루 양과 마찬가지로 슬립 워커입니다."

"슬립…… 워커?"

아이조메 란이 당황하는 사야에게 말했다.

"당신에겐 소질이 있다고 봐요. 그것도 아마 희귀한 네버 슬리퍼의 재능이. 어때요, 저희를 도우면 편안한 잠을 제공해드릴 수 있을 텐데요."




이하 역주


요바이: 밤에 잠자리에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 성적 뉘앙스도 포함한다.


명석: 明晳. 판단력이 명확하다, 똑똑하다 등의 의미. 꿈속에서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아는 자각몽을 명석몽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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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침 드리머 01  (0) 201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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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 26. 13:17

03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던 양호 교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 호카게 양."

"안녕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사야는 양호실 안을 둘러본다. 오늘은 안쪽에 있는 침대 커튼이 활짝 열린 채 아무도 자고 있지 않았다.

사야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양호 교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많이 힘들어 보이네. 역시 아직도 못 자겠어?"

"네……"

그 후로 이틀. 사야는 다시 불면 상태다.

아주 잠깐 사야에게 찾아왔던 잠이었지만 그 후론 무슨 수를 써도 재현되지 않더니, 결국 또 지금까지처럼 몽롱한 나날이 시작되고 말았다. 또 한 번 눈앞에서 안식을 빼앗긴 사야의 초조감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양호 교사가 시계를 흘긋 쳐다본다.

"오후엔 쉬다 갈래?"

"아, 아뇨. 저기, 여쭈고 싶은 게 있어서."

사야는 주저하며 말했다.

"저번에 왔을 때 모르는 애가 왔었어요. 뭔가, 폭신하고 긴 머리카락에, 저보다 아마 키가 작고──"

키를 표현하려고 두 손으로 애매한 모양을 만드는 사야. 그 손을 내리곤 점점 작아지는 소리로 말 했다.

"……아는 건 그게 거의 단데."

양호 교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폭신하고, 키가 작아? 다른 건?"

다른 건── 부드럽고, 해님처럼 좋은 냄새가 났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걸 말하긴 꺼려졌다.

"너무 잠깐이라……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걔가 왜?"

"제가 누워있던 침대에 쓰러지더니 잠을 자서. 누군지 물어보려고 한 건데…… 겨우 이걸로 어떻게 알겠어요. 죄송합니다."

발걸음을 돌리는 사야에게 양호 교사가 말했다.

"혹시 콘파루 양인가."

"콘파루?"

양호 교사는 뒤로 돈 사야에게 끄덕여 보였다.

"혹시 그러면 양호실에 온 게 더 희한하네. 호카게 양이랑 같은 2학년일 텐데, 어떤 의미론 너랑 정 반대라고 할 수 있겠네."

"정반대면…… 어떻게"

"콘파루 양은 있지── 언제, 어디서건 자고 있어."


언제, 어디서건.

수업중인 교실에서도, 점심시간 안뜰에서도, 방과 후 도서실에서도.

저 콘파루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굳이 보건실 침대를 쓸 것도 없이 학교 안의 온갖 곳에서 자는 모습을 보인다는 모양이다.

부럽다…….

양호실을 뒤로 한 사야는 정처 없이 학교에서 걷고 있었다. 문득 의식했을 땐 오후 수업이 시작된 지 10분 넘게 지난 상태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가고 있자니 옆에 있는 교실에서 수업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에 있는 불투명 유리 탓에 안이 어떤지는 잘 안 보인다. 어렴풋한 사람 모양과 흐릿한 말소리. 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수업을 받는 여학생들의 왁자지껄한 기척. 수족관 수조 앞을 지나는 기분이다. 여기 있다는 걸 들키자마자 몇십 개나 되는 눈이 슥 하고 자신을 향한다. 그런 생각을 했더니 서 있기 거북해졌다. 사야는 발소리를 죽이고 건물 안을 걸어다녔다.

이제 와서 자기 교실로 가기엔 내키지 않는다. 다음 쉬는 시간까지 어디서 시간을 죽이고── 아니, 난 애초에 뭘 하고 있던 거더라?

건물에서 구름다리로 나서자 안뜰이 눈에 들어온다. 물 없는 분수 가장자리는 앉기 딱 좋은 높이와 폭이라 낮잠 자긴 딱이겠지만 창문이란 창문에서 다 보인다. 지금은 수업중이니 교사한테 들키기라도 했다간 순식간에 학생지도실 행이리라.

아무도 안 앉은 분수를 쳐다보다 사야는 겨우 떠올렸다.

──맞아. 그 녀석을 찾고 있었다.

콘파루 히츠지라는 폭신거리는 여자를.

다시 불면에 고통 받게 된 요 이틀은 사야에게 가만히 생각할 시간이었다. 왜 그 때만 잠에 빠졌을까. 다른 상황과의 차이는 뭔가.

졸음에 흐릿한 머리로도 답은 명백했다. 콘파루 히츠지다. 그 녀석이 침대에 쓰러진 순간 갑자기 잠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자면 잘 수 있다는 뜻인가……? 어젯밤엔 그런 생각에 언니와 함께 자자고 해 봤다.

한 숨도 못 자고, 게다가 언니의 몸부림에 침대에서 밀려 떨어졌다.

그렇다는 건, 범위가 더더욱 좁혀진 셈이다.

사야는 몽롱하게 혼잣말을 했다.

"……그 녀석이어야만, 해."

언제 어디서건 잘 수 있다는 콘파루 히츠지가 지금은 어디서 자고 있을까.

교사에게 안 들킬만한 비밀 장소가 있는 걸까. 아니면 수업 중이니 얌전히 자기 책상에서 자고 있을까. 그러면 사야가 이러고 있는 건 완전히 헛수고인 셈이지만 그래도 찾아다니는 게 마음이 편했다.

구름다리를 지나 옆 건물 입구로 들어간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에 들어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진 그 순간, 사야의 눈에 기묘한 것이 보였다.

건반악기의 건반이 얇고 길게 늘어나선 그대로 다리가 돼 걸어 다니는 듯한, 생물인지 기계인지 모를 것이 계단을 소리도 없이 올라간다.

"응?"

눈을 깜빡댄 다음 다시 보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각일까?

확실히 수면부족이 오래 지속되면 눈의 착각이 늘어나거나 환각에 시달린다지만 사야의 마모된 마음속에서 뭔가가 걸렸다.

방금 그거, 낯이 익어…….

아니, 그럴 수가 있나? 저런 걸 어디서 봤지?

게임? 영상? 만화? 영화? 박물관?

그게 아니면…… 꿈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한 순간 기억이 확 되살아났다.

맞아! 봤어! 난 저걸 꿈속에서 봤어!

이틀 전. 보건실에서 꾼 잠시간의 꿈. 일어나기 직전에 보였던, 옆에 달린 수많은 다리──.

자기도 모르게 사야의 발이 계단으로 향했다. 아까 그 녀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한 순간이었지만 그건 분명 계단을 올라갔다──.

기억의 안개 속에서 한 이름이 떠오른다.

"……수수다."

그 녀석은 그렇게 불렀었다. 수수. 뭔진 모르겠지만.

수수의 뒤를 따라 사야는 계단을 올랐다. 어둡고 조용한 2층 복도, 계단 옆 과학실은 안 쓰이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자 또 보였다. 3층에서 더 위를 향해, 수많은 다리를 달그락달그락 움직이며 걸어가는 모습이 실내의 어둠과 창밖에서 비쳐드는 빛의 명암차 사이에 한 순간 나타났다 사라졌다.

뒤를 쫓아 계단을 다 오르자 옥상과 이어진 문이 있었다. 불투명 유리 저편은 밝다. 손잡이를 잡고 돌려 보니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간다.

사야는 그곳에서 콘파루 히츠지를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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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침 드리머 01  (0) 201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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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침 드리머 - 미야자와 이오리 저



1


화창한 오후 햇볕에 따스해진 교실을 지배하는 것은 정년이 코앞인 여교사가 주절주절 흘려내는 주문 같은 현대문학 구절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배가 부른 여고생들의 뇌엔 혈액이 충분히 가 닿지 않았다. 제일 뒤 책상에서 보면 여기저기서 꾸벅꾸벅 방아를 찧어대는 머리가 보기 싫어도 눈에 들어온다.

보기만 해도 졸음이 몰려오는 광경이지만, 호카게 사야는 잠에 빠지지 않았다.

교실 제일 뒷자리에다 창가 자리다. 원래는 수업중의 꿀잠이 보장되는 위치겠지.

하지만 그것은 잠들 수 있는 사람한테나 해당되는 얘기다.

사야는 턱을 괴고 멍하니 칠판을 쳐다본다. 잠을 자진 않았지만 머릿속은 더없이 멍한 것이었다. 눈은 그저 멍하니 뜨여있을 뿐. 귀에서 들어오는 교사의 목소리도 배경음 역할 이상이 되지 못한다.

"……호카게. 호카게!"

이름을 불린다는 걸 겨우 알아챈 사야는 눈을 깜빡였다. 쳐다보니 교사가 자신을 노려본다.

"잠 좀 깼니?"

"……안 잤는데요."

쉰 소리로 사야가 대답한다.

"그럼 다음 문장을 처음부터 읽어 봐."

다음 문장이래도 지금까지 읽어온 곳이 어디인지조차 감이 안 잡힌다. 교과서 페이지를 하릴없이 뒤적인 후에 사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모르겠어요. 어디예요."

교사는 진절머리가 나는 양 한숨을 쉬었다.

"아니 됐어."

다른 학생이 불리고 교과서를 읽어낸다.

"'밤에 잘 때 불을 끄지 않으면 잘 수 없다는 사람이 많다는 모양이지만 나는 어두우면 되려 숨이 막히어 잘 수가 없다.'……"

사야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책상에 떨어뜨린다.

요 근래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 반 애들이 보는 앞에서 못난 모습을 보이는 어색함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고, 자기만 두고 나가는 진도에 굉장한 초조감을 느낀다.

하지만 어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호카게 사야는 잘 수가 없다.

밤, 낮, 집도, 학교도.

언제건, 어디서건, 뭘 해도.

졸리지 않은 거라면 괜찮은 편이다. 머리가 맑으면 남이 자는 시간도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하지만 사야의 경우 졸음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게 깨지 않는 것이다.

졸린데 잠이 안 든다. 최악이다.

생각나는 방법은 전부 시도했다. 잘 먹고 잔다. 몸이 따끈해지게 목욕 하고 잔다. 스트레칭 하고 잔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운동 하고 잔다. 이불을 바꿨다. 베개도 바꿨다. 자는 곳을 바꿨다. 아침점심저녁 시간대도 바꿔 봤다. 숙면용 최면 음성까지 써 봤다. 수면 클리닉에서 카운슬링도 받아 봤다. 수면유도제까지 먹어 봤다.

아무 것도 효과가 없었다.

무조건 자고 싶다, 사야는 한 순간이라도 의식을 잃고 싶다는 절실한 욕구를 안은 채 며칠 째고 할 것 없이 몽롱하게 깨 있다.

덕분에 성적이 최하위라 학교건 집이건 거북하다. 눈 밑에는 진한 다크서클이 생겨서 없어질 생각을 안 하고, 미간의 주름 탓에 눈매가 사납다. 늘 짜증이 나 있어서 누가 말을 걸어도 제대로 대답도 못 하는지라 반 친구들이 피하게 돼 버렸다. 옆에서 보면 끽해봐야 멍청한 유사 양아치쯤 되겠지.

마침내 종소리가 수업의 끝을 알렸다.

교사가 나가고, 교실에 학생들의 요란함이 들어찬다. 아무도 사야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다음은 6교시 수학, 그것만 끝나면 집에 갈 수 있는데──.

──여기 있을 의미가 있긴 한 걸까.

1학년까진 썩 싫어하지 않았던 수학이지만 지금 상태로 논리적인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어렵다. 실제로 불면 상태가 되고서부터 수학 수업은 가만히 앉아서 의미 불명의 수식을 구경하는 시간으로 전락한 상태다. 굳이 따지자면 다른 수업도 대체로 그렇지만.

사야는 의자를 빼고 일어섰다.

휘청대며 교실을 나서는 사야를 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음 수업을 빼먹어도 곤란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야는 일찍부터 아무도 불면이라는 고민을 썩 심각하게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 당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조만간 잘 수 있을 거야, 그런 무책임한 발림 말을 듣는 건 그나마 나은 편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고 잔소리를 들을 때조차 있었다. 하지만 주위가 몰라준다고 분노할 단계조차, 사야는 넘어선 상태다.

자고 싶다. 그저, 오직 자고 싶다.

잘 수 없다면 적어도 눕고 싶다.

쉬는 시간의 요란스런 복도를 휘청휘청 걸어간 사야는 불안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1층은 어두컴컴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양호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상을 마주하고 있던 양호 교사가 고개를 들었다.

"호카게 양."

"좀 쉬고 가도 될까요."

"혹시, 아직도 안 자 져?"

"하나도……"

양호 교사는 일어나서 커튼으로 나뉜 침대 쪽으로 사야를 데려 갔다.

"자 이 침대에 누워.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좋겠는데."

사야는 중얼중얼 감사인사를 내뱉고 두 개 있는 침대중 한 쪽에 앉아 실내화를 벗고 이불 속에 들어갔다.

"언제든지 와도 돼."

그리 말하며 양호 교사는 침대쪽 형광등을 끈 후 자기 자리에 갔다.

양호 교사는 이 학교에서 사야의 불면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몇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든 와도 된다는 말은 고마웠지만 사야는 양호실에 드나들기를 최대한 자제했다. 이처럼 양호실에 와 봤자 어차피 잘 수 없는 것이다.

눈을 감는다.

이불의 따스함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쉰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

잘 수 없다.

뒤척인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의식 위에 올라선다. 칙, 칙, 칙, 칙,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초침 숫자를 세 본다.

1, 2, 3, 4……,

……………………,

565, 566, 567……,

커튼 저편에서 양호 교사는 뭔가를 쓰던 손을 멈췄다. 등받이가 삐걱인다. 기지개를 켠 듯 한 기척. 후우 하고 내쉬는, 숨 소리인지 목소리인지 모를 소리.

의자 바퀴를 움직이며 양호 교사가 일어섰다.

또각 또각 힐을 울리며 멀어지고, 양호실 미닫이문이 밀려서 열렸다 다시 꼭 닫혔다.

발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져간다.

아무 인기척도 없는 양호실이 고요해진다.

역시, 잘 수 없다.

위를 보고 눈을 떴다.

불이 꺼진 어슴푸레한 천장을 보고 있자니 점점 괴로움이 커졌다.

이 흐릿한 괴로움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걸까.

혹시 평생 이런 걸까.

잠들 수 없다는 고민을 얘기하면 곧잘 듣는 위로가 있다.

말하길, '잠 못 자서 죽은 사람은 없다'.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나지만 사야는 일단 직접 찾아 봤다. 정말로 잠을 못 자서 죽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실제로는 있었다. 치명적 가족성 불면증이라는 병으로, 완전히 불면 상태가 된 후 2년 정도가 지나면 죽는다는 사례가 발견 됐다. 하지만 이건 상당히 희귀한 경우인데다 유전병이었다. 부모님에게 여쭤 봤지만 친가 외가 가릴 것 없이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몇 년째 잠을 안 잔다는 이야기는 여러 개 보였지만 정보의 출처가 의심스런 광고 사이트거나 해외 뉴스 번역인지라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파악을 할 수 없었다.

한 편으로, 사람을 못 자게 만드는 고문이 많은 나라에서 실용화 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나치가 개발한 단면斷眠법, 미국 CIA가 중동에서 효과적으로 쓴 180시간 단면, 중국 당국이 위그루족 구류자*에게 행한 15분 간격 수면 중단…… 이런 문헌에서는 희생자의 심신에 이상이 생겨났다고 적혀 있었다.

희생자를 동정하면서도 사야는 생각했다── 그럼, 지금의 나는, 24시간 고문당하는 것과 다름없는 게 아닐까.

나도 이상이 생겨날까.

아니 이미, 이상한 게 아닐까…….

겨우 잠을 못 잔다는 사실만으로 인생이 좌우되는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흐릿한 생각 한켠에서 부글부글 분노를 끓이는데, 복도 쪽에서 또 발소리가 다가왔다.

양호 교사가 돌아온 줄 알았지만 소리가 다르다. 구두 굽이 아니라 평평한 실내화 소리. 교사가 아니라 사야와 같은 학생인 모양이다.

타박타박 복도를 걸어 온 누군가가 노크도 없이 양호실 문을 드르륵 열었다. 양호 교사가 없는 게 보였는지 순간 걸음을 멈췄지만 나가지 않고 그대로 들어온다.

"흐아암."

얼빠진 듯 한 소녀의 하품 소리가 들렸다.

"……하흐. 졸려졸려."

혼잣말 소리가 다가오나 싶더니 갑자기 커튼이 걷혔다.

"헤."

깜짝 놀라야겠지만 얼빠진 반응밖에 할 수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데 목소리의 주인이 몸을 던졌다.

"……으아?"

이불 위에 어쩐지 포근한 녀석이 엎드려 있었다.

곱슬 기를 띠고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이 마이 등에 펼쳐져 있었다. 사야보다 몸집이 작고, 두 다리 위에 몸을 얹었는데도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얘 뭐야."

그만 혼잣말이 나왔다. 웬종일 졸려서 언동이 제멋대로기에 생각한 게 그대로 입으로 나오는 경향이 있다.

"저기, 잠깐만."

"응~? 음냐음."

나른하게 머리가 움직이고,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이 들여다보인다. 눈은 감고, 입가가 어쩐지 미소짓는 듯 보였다.

"저기. 야. 뭐야."

좀 거친 말투로 부르자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세요."

"어? 뭐라고?"

자세히 들으려고 고개를 가져다 댄 사야의 귀에 속삭임이 흘러들어 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어찔, 시야가 흔들린다.

머릿속에 소용돌이가 생겨난 듯 한 느낌이었다.

두개골 안을 그득히 채운 졸음 웅덩이에 갑작스런 흐름이 생겨났다. 마치 물이 가득 찬 댐이 갑작스레 터진 듯, 혹은 욕조 마개를 뺀 듯.

"어, 어, 어."

혼란에 빠질 여유조차 없었다. 의식이 졸음의 탁류에 내던져지고, 시커먼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 간ㄷ다.

"뭐야, 싫어, 무서워──"

갑작스런 감각에 공포가 복받쳤지만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순식간에 의식이 어둠에 먹혀들어간다.

──아, 이건.

잊고 있었다.

사야는 이것을, 알고 있다.

오랜 만에 느끼는 이 느낌──.

잠/이/다.






고향을 나서고 오랜 만에 보는 길을 걷고 있자니 여기저기에 노란 컬러콘*이 세워진 게 거슬렸다. 몇 번이고 발에 채이니 짜증이 나서 이게 뭐냐고 지나가던 사람에게 묻자, 그 사람이 혀를 차며 나를 노려본다.

"허구헌 날 그런 소리나 하니까 넌 글러먹은 거야. 무슨 속셈으로 돌아왔는지 이해가 안 되네."

그렇게 쏘아내곤 혀를 차며 떠나간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울고 말았다.

저 사람 말이 맞다. 역시 돌아와선 안 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야."

같이 걷던 애인은 그리 말하고 까치발로 내 뺨의 눈물을 닦아 준다.

"수수가 나오니까. 여기 있는 건 전부 묘야."

그 말을 듣고 보니 컬러콘에는 전부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곧 올 거야. 준비 됐어?"

수수를 쓰러트리는 방법이라면 잘 알고 있으니 나는 끄덕인다. 애인은 만족스레 웃고 내게 키스하려 한다. 그 뒤에서 옆구리에 나란히 달린 여러 다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수수다! 나는 녀석을 가리키고 경고하려고 입을 연다──.






"헉……"

갑자기 의식이 돌아온 사야는 눈을 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한동안 파악이 안 된다.

어슴푸레한 양호실 천장을 멍하니 올려보는 동안에 조금씩 이해가 따라붙는다.

"……잤, 어?"

잤다. 게다가 꿈까지 꿨다.

대체 며칠 만일까.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고 포기했던 잠이 다시금 사야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잤어. 잠들었어."

옆을 보자 애인이 어느 샌가 사야 곁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무사한 걸 확인 한 사야는 한숨을 폭 쉰다.

"다행이다…… 안 늦었어."

수수에게 공격을 받았다면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숨소리를 색색 내는 편안한 표정을 바라보자니 사랑스러움과 안도가 솟구쳤다.

사야는 애인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고, 살짝 열린 입술에 살며시 키스했다.

부드러운 감촉과 달콤한 향기에 취한다.

아, 맞아. 이 느낌이야.

…………………….

"……어?"

이 느낌?

이 느낌이 뭐지?

사야는 눈을 깜빡이고선 방금 키스한 애인을 다시금 쳐다봤다.

보드라운 곱슬머리에,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소녀.

"…………어"

어어~~~~엇!?

사야는 침대 위에서 펄쩍 뛴다.

이, 이거 누구야!?

애인? 왜? 꿈속에선 완전히 그렇게 생각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느껴졌는데, 냉정히 생각해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패닉에 빠져 굳어 있는데 '애인'이 눈을 떴다.

"웅……"

엎드려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멍한 시선으로 사야를 본다. 어두침침한 곳에서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나 보였다. 사람의 모양을 한 짐승이 그 곳에 있는 느낌에 사야는 자기도 모르게 침대 위에서 물러나려 했다.

뒤에 짚으려 한 손이 허공을 가르고, 사야는 그대로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오아, 따."

등을 부딪혀 숨이 막힌 사야를 침대 위의 연인이 들여다본다.

"──괜찮아?"

사야는 대답할 수 없다. 땡그라니 뜬 눈으로 올려다볼 뿐이다. 아까 느낀 만족감이 무서웠다. 모르는 사람을, 하필이면 애인이라고 생각한 게 더할 나위 없이 무섭다.

"저기."

'애인'이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뭔가를 알아챈 듯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오른 손을 들어 입술을 만지고, 고개를 갸웃── 다시금 사야를 쳐다봤다.

"너, 방그──"

"미, 미안."

사야는 말을 끊듯 소리를 지르고 발을 미끄러트리면서 일어섰다.

"앗, 잠깐만!"

부름을 무시하고 등을 돌려 커튼을 걷고 침대에서 멀어진다. 발버둥 치듯 다리를 움직여 실내를 가로지르고, 힘차게 문을 열고 밖에 나갔다.

이미 방과 후였다. 희미하게 남은 저녁놀이 간신히 물들이는 복도를 달리고, 신발장에서 발 신발에 마구잡이로 구겨 넣은 사야는 학교에서 도망쳤다.




구류: 죄인을 경찰서, 유치장 등에 가두어두는 일.


컬러콘: 도로 위에 설치되는 원뿔형 구조물로 공사중 등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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