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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 2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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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립 워커. 몽유병 환자, 수면보행증 환자.

수면중에 자리를 빠져나와서 무의식중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병── 수면장애중 하나다.

나중에 찾아봤을 때 그런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이조메 란이 입에 담았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단순한 환자 모임이 아닌 듯했다.

"우리 슬립 워커는 비밀리에 사람들의 잠을 지키는 활동을 해요. 일반적으론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람의 잠은 수수의 위협을 받고 있거든요."

"수수……"

"당신이 자면서 쓰러트린 거예요. 수면의 수에 짐승 수 자로 수수睡獸."

"저기 란. 그렇게 한 번에 설명하면 안될 것 같은데? 사야 짱 굳어버렸는데."

"어차피 쉽사리 믿어주지도 않을 테니 가랑비처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단숨에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좀 거칠지 않을까."

"난생 처음 보는 당신에게 갑자기 키스하는 사람인걸요."

"그건 그래."

"잠깐!"

항의하는 사야였지만 란은 들은 체도 안 하며 말을 이었다.

"슬립 워커는 수수를 퇴치하는 게 목적이지만 개중에도 사람마다 잘 맞는 역할이 있어요. 당신의 소질은 아마 네버 슬리퍼. 꿈의 영향과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는 불면자는 그 수가 적은데, 수수와 싸울 때 중요한 전력이 돼요. 그러니 호카게 씨── 도와주시지 않을래요?"

"가, 갑자기 그래도 말이지."

"네, 물론."

사야가 거부하리라 예상했던 양, 란은 성급하게 끄덕였다.

"믿어 달라기엔 힘들겠죠. 설득에 시간을 쏟을 생각은 없어요. 내키면 여기로 와 주세요."

그러면서 건넨 것은 두꺼운 포인트 카드였다. '사카이모리 침구점'이라는 가게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멍하니 카드를 쳐다보는 와중에 히츠지가 말했다.

"이제 일어나주지 않을래? 이불을 못 접겠어."

"어, 응……"

시킨 대로 일어서고, 다리가 아파 휘청대는 사야 앞에서 히츠지는 익숙한 솜씨로 이불을 개서 안아들었다.

란은 사야에게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 하룻밤 자고 생각해 보세요. 무사히 잠들 수 있다면, 말이지만."

협박 같은 말을 남기고 아이조메 란은 돌아 나선다.

"내일은 다들 여기 있거든. 안녕~"

히츠지도 란을 따라 나가고, 옥상에는 사야 혼자만이 남겨졌다.

"뭐냐고……"

미묘한 굴욕감을 느끼며 뻗대고 선 옥상에 종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 샌가 6교시가 끝나 있었다.

다음날 방과 후, 사야는 포인트 카드에 적힌 침구 점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어제는 결국 잠들 수 없었다. 분하게도 아이조메 란의 말 대로였다. 사야의 불면은 변함없었고, 히츠지 옆에서 맛본 깊은 잠은커녕 선잠까지도 갈 수 없었다.

도와주면, 편안한 잠을 자게 해줄 수 있다── 란이 한 말만 들으면 신빙성이 없었지만 히츠지가 함께 있다면 또 달랐다.

슬립 워커니 수수니 하는 수상한 이야기는 둘째 치고 저 감미로운 잠만큼은 진실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야는 적혀 있는 주소를 향해 간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결과 사카이모리 침구점은 실존하는 모양이었다. 미리 전화를 걸어봤지만 자동 응답은커녕 뚜르르 소리만 이어졌다. 주소만 믿고 지도 어플을 켠 채 걷다 보니 점차 인기척이 적은 구역에 들어섰다.

"진짜 여기 맞나……?"

태반이 문을 닫은 어두컴컴한 상점가를 지나자 창고만 늘어선 무미건조한 곳을 배경으로 이따금 커다란 트럭이 보도를 긁을 듯 달려간다. 흐린 날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점점 불안해진다.

──나 괜찮으려나. 별로 안 괜찮지. 아니, 어라? 어제 그 얘기 뭐지? 슬립 워커? 그런……설정인가?

롤플레잉 놀이를 하는 걸까…… 연극 같이? 그런 거면 알아서 했으면 좋겠는데, 난 별로 안 땡기고. 이 불면증을 어떻게 해결 안 하면 아무 것도 못 하고. 협력…… 협력이라면 뭘 해야 하는 걸까. 정말로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걸까. 그 선배, 아무 말이나 한 거였으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래도 키스한 건 큰일이지. 약점을 잡혔어…….

침울하게 생각에 빠져 걷던 사야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주위 건물과 썩 다를 것 없는 지붕이 검은 커다란 창고가 보였다. 지도에 나오는 목적지는 아무래도 여기인 모양이다. 출입구는 셔터가 닫혀 있었고, 건물 앞 주차장은 금 간 콘크리트 사이로 잡초가 자라 있었다. 셔터 옆에 작은 문이 있는데 '사카이모리 침구점'이라고 덤덤한 간판이 걸려 있다.

문에 다가가 안을 엿본다. 문에 유리창이 달려 있지만 안이 어두워서 잘 안 보였다.

인터폰도 없어서 한동안 고민한 다음 노크했다.

대답은 없었다. 안에서 누가 움직이는 기척도 없다.

시험 삼아 손잡이를 돌려보자──열려버렸다.

"실례합니다~……"

떠듬떠듬 말을 던지며 안에 들어간다.

"저기요오……?"

문 안쪽은 짧은 통로였다. 철제 록커와 말라죽은 화분, 먼지를 뒤집어 쓴 석유난로가 벽 쪽에 붙어 있다. 통로 왼편에 있는  미닫이 문은 출입구 쪽과 이어져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 불 켤 스위치가 없나 벽 쪽을 자세히 쳐다보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야!"

생각지도 못한 부름에 펄쩍 뛴다. 뒤를 보자 문가에 콘파루 히츠지가 서 있었다. 사야의 얼굴을 보자마자 히츠지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우와, 얼굴이 왜 이래!"

"뭐어!?"

순수한 매도에 울컥하는 사야. 히츠지는 익숙하게 팔을 뻗어 통로의 불을 켠다.

조명 아래에서 가만히 사야를 들여다보곤 말한다.

"다크서클이 엄청난데. 잘 못 잤어?"

"어제 내 얘길 듣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계속 못 잤다니까!"

"나랑 잤을 때는 좀 더 깔끔했었잖아."

천연덕스럽게 말 한 히츠지는 사야보다 먼저 안에 들어간다. 둘의 뒤에서 문이 닫혔다.

"와 줘서 기뻐. 너 같은 아이를 합류시키고 싶어도 대부분 안 믿어주거든."

"딱히 믿은 게……"

히츠지가 어느 틈에 꺼낸 열쇠로 다른 입구를 열었다.

"도와줘. 이 문 무겁거든."

"어. 응."

시키는 대로 손을 뻗어 무거운 문을 둘이서 끌어당긴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히츠지는 시커먼 데로 들어가더니 또 불을 켰다.

높은 조명에 매달린 조명이 가까운 데서부터 순서대로 켜진다.

그곳은 그야말로 침구 시장, 아니면 테마파크 같았다. 거대한 창고에 일정 간격으로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인 침대나 이불, 해먹이 그득히 늘어서 있었다.

히츠지는 사야 앞에 서서 침구 사이를 걸어간다.

"어때? 이런 거 처음 보지."

어쩐지 자랑하듯 말하는 히츠지.

"아닌데."

"뭐? 어디서 봤어?"

"이케아* 침구 매장."

그 대답에 히츠지는 김이 빠졌다는 듯 입술을 빼쪽인다.

"사야는 귀엽지가 않아."

"미안하게 됐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침구에 사야도 엄청난 규모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그 끝까지 가자 눈앞에 매트리스나 이불 등이 포장 그대로 놓인 선반이 천장까지 벽처럼 쌓인 게 보였다.

미궁에 들어온 느낌을 받으며 선반 사이의 통로를 걸어가다 보니 갑자기 트인 공간이 나왔다. 사방이 거대한 선반에 둘러싸인 중앙에 침대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엔 독서 등이나 만화, 학교 교과서 등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소파 세트 테이블에는 과자 봉지와 머그컵. 한 구석에는 싱크대와 가스렌지, 그리고 냉장고와 식기 선반이 갖춰진 부분이 있었다.

"화장실은 저기야."

히츠지는 오른 편 선반 끄트머리를 가리킨 다음 커피 테이블 위의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소파에 가방을 던지고 싱크대에서 컵을 설거지한다.

"사야는 물 좀 끓여 줄래?"

"엥."

"다른 애들 올 때까지 차나 마시면서 기다리려고. 커피도 괜찮고."

"……알겠어."

가스레인지 위의 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을 켠다. 테이블 위의 바구니엔 찻잎 캔과 인스턴트커피가 모여 있었다.

"마시고 싶은 거 아무 거나 골라."

그 말을 듣고 카모마일을 골랐다. 잠이 잘 온다는 허브티다. 집에서는 아무리 마셔봤자 효과가 없었지만.

주전자에서 삐 소리가 나서* 티포트에 티백을 넣고 물을 붓는다. 히츠지는 나무로 만든 과자 쟁반에 전병을 올려 왔다.

"'미왕 쌀 과자*'?"

"달콤 짭짜름해서 어디든 잘 어울리거든."

차를 따르자 허브 향이 올라온다. 히츠지의 머그컵은 금색에 양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야의 컵은 손님용인지 깔끔한 흰색. 이건 정말 IKEA에서 싸게 파는 걸 본 것 같다.

소파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침묵에 버티지 못한 사야가 물었다.

"여긴 뭐야."

"우리 침실. 업무용으로도 쓰이고."

"업무면, 슬립 워커…… 랬었나."

"맞아. 돈을 받을 때도 있으니까 진짜 일이야."

그 말을 들은 사야는 놀랐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본다. 확실히 창고 건물을 비롯해서 롤플레잉이라기엔 너무 거창하다.

"그럼, 진짜구나. 그, 수수나, 그런 거."

"그럼."

"그, 그래."

"불안한 표정이야."

히츠지가 놀리듯 말했다. 순간적으로 받아칠까 싶었지만 상황을 받아들이질 못해서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고개를 숙인 사야를 향해 히츠지가 아까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갔다.

"다들 모이면 설명해 줄게. 걱정하지 마."

설탕옷이 얹힌 전병을 하릴없이 먹고 있자니 곧 창고 저 멀리에서 타박타박 걸음소리가 다가왔다.

곧 선반 미로 사이에서 소녀가 튀어나왔다. 안경을 끼고 얌전해 보이는, 사복을 입은 소녀였다.

"아~ 죄송해요 늦었……어, 아직 둘 뿐이네?"

"당황할 것 없어, 점장."

히츠지가 말했다.

"콘파루 씨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어? 이 분은?"

"아, 안녕하세요……"

"얜 사야 짱. 나이트키스트고, 신입 후보."

"아,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사카이모리 미도리라고 해요."

소녀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인다.

"미도리 짱은 있지, 이 침구점 후계자야. 그래서 점장."

──점장, 이라.

뒤따른 것은 뭔가가 콘크리트 위로 미끄러지는 좌악 소리였다.

미끄러져 들어온 건 포니테일 소녀였다. 사야나 히츠지와는 다른 고등학교 교복에 파카를 덧입었다. 발꿈치에 바퀴가 달린 힐리스*를 신었다는 사실에 사야는 조금 놀랐다. 초등학생 때 유행했던 걸 고등학생이 돼서도 신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안뇽~. 어, 신입?"

"응, 맞아. 사야, 얘는──"

"토키시마 카에뎀다. 안뇽안뇽."

자기소개 직후에 아이조메 란이 다른 통로 쪽에서 가만히 들어왔다.

"다 모였네요."

"와!"

사야를 포함한 넷이 흠칫거리는 걸 본 체 만 체, 란은 깔끔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을 둘러싼 이들의 분위기에 사야도 알아챘다. 이 팀의 보스는 란이다.





IKEA(이케아): 북유럽 조립식 가구 판매점. 뭔가 크고 뭔가 많다.


주전자에서 삐 소리가 나서: 안에서 물이 끓으면 삐 소리가 나는 주전자. 정식 명칭을 모른다.


미왕 쌀과자: 일본 전병 유키노야도(雪の宿)랑 똑같은 맛.


힐리스: 뒤꿈치에 바퀴 달린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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