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 26. 13:19

4


오늘은 바람 한 점 없이 깔끔하게 갠 날씨다. 햇빛은 따스하고 또 보드랍다. 잠깐이라면 누워도 살이 안 타고 춥지도 않을 것이다. 즉 낮잠 자기 딱 좋은 날.

그렇게 축복받은 날씨에, 옥상 주변을 빙 둘러싼 철조망 곁에서 콘파루 히츠지가 자고 있었다.

얼굴이 그늘에, 다리가 햇빛을 받는 자리에 누워 있다. 밑에 깐 것은 얇은 이불. 머리를 얹은 베개에서 폭신폭신한 머리칼이 흘러넘친다.

"……찾았다."

혼잣말을 내뱉고 흠칫 해선 주위를 둘러본다. 수수는 그 흔적조차 없다. 대체 뭐였을지 신경은 쓰이지만 지금의 사야는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옥상을 가로질러 자고 있는 콘파루 히츠지에게 다가간다. 자기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였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빨려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꼭 한 숨만 더 자라고 유혹하는 아침 이불 같은. 혹은 기분 좋게 폭신폭신한 비밀의 침대 같은. 더 이상 착각 따위가 아니다. 흡인력은 점차 강해진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생각의 흐름이 점점 끊기고, 저 옆에 눕고 싶다는 욕구만이 머릿속을 잠식한다…….

아, 역시.

이거다. 난 여기에 당한 거다.

역시 이 녀석이어야만 한다. 이 녀석이라면 나를 잠에 데려가줄 수 있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잠이 다가온다. 지금의 사야가 무엇보다 원하는, 편안한 잠이──.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

깜짝 놀라 돌아보자 짧은 머리 학생이 서 있었다. 교복 가슴팍의 학년 배지 색깔이 3학년임을 가르쳐준다. 사야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연다.

"누구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사건에 사야는 굳어버렸다. 흐릿한 머리로 순간적인 임기응변은 불가능한 것이다.

저기, 그러니까, 따위의 뜻 없는 소리를 사야가 답답했는지 3학년이 성큼성큼 걸어오나 싶더니 사야와 콘파루 히츠지 사이를 막아섰다.

"나가 줘."

"어, 아니."

"지금 수업중이잖아. 빨리."

그건 그 쪽도 마찬가지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너무 졸려 반박하기조차 귀찮았다. 꼬여가는 혀를 채찍질해가며 사야가 말했다.

"찾고 있었어요…… 걔를."

"왜."

"그…… 쟤랑 같이, 자고 싶어서."

다리가 멋대로 움직였다. 몸이 휘청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뭐? 너── 잠깐."

3학년은 말리려고 한 모양이지만 사야는 거의 듣지 못했다. 누운 콘파루 히츠지는 그야말로 졸음의 블랙홀이었다. 두 발, 세 발, 거리를 좁히는 순간에 잠이 왈칵 덮쳐온다.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가 큰 아가리를 벌린 양, 수마가 사야를 단숨에 잡아채선 끌고 간다.

──역시, 이 녀석이었어……!

콘파루 히츠지 옆에 쓰러지는 사야의 머릿속에 떠오른 느낌은 정답에 도달한 만족감과도 비슷했다.

이불 구석에 무릎을 꿇고 눕기도 전에 사야의 의식은 이미 어둠에 빨려 들어갔다.




병원 복도는 너무 복잡했고, 벽 쪽에 늘어선 가죽 포장 벤치엔 많은 사람이 앉아 순서를 기다린다. 그 사이를 가르듯 나서지만 나를 보려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벽에 붙은 덕지덕지 붙은 전염병 예방 포스터엔 악몽에서 깨면 반드시 뜨거운 커피로 양치하라고 적혀 있었다. 커피 자판기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고, 아이들이 입을 헹군 커피를 옆에 붙은 세면대에 뱉어낸다.

진찰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 옷을 입은 애인이 고개를 내민다.

'다음 분' 애인이 그렇게 말 하곤 날 알아본다.

"어머, 늦게 왔네."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끌어안고 평소처럼 키스한다. 입을 뗀 애인이 꾸짖듯 말했다.

"커피 맛이 안 나는걸."

"태어나서 한 번도 마신 적이 없거든."

"그러면 위험해. 저기 좀 봐봐."

애인이 내 뒤를 가리킨다. 돌아보자 그렇게 많던 환자는 한 명도 없고, 다리가 수없이 달린 수수가 긴 복도에서 다가오는 중이었다.

"네 잠에 끌려 온 거야. 물러서 있어. 내가 해치울 테니까."

"괜찮아. 나도 저 정도는 해치울 수 있어."

덜걱덜걱 다리를 움직이며 들이닥치는 수수 앞에 노란 컬러콘을 놓아 길을 막는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자 뜨거운 커피가 나왔고, 나는 종이컵 째로 수수에게 던졌다. 수수는 흐물대며 녹아서 바닥에 펼쳐졌다.

"어때?"

의기양양하게 돌아보자 애인은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그만 넋을 일고 만다. 콘파루 히츠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 누구야?"




"뭐어!?"

충격과 함께 깨어난 사야가 가장 처음 본 것은 위에 올라타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콘파루 히츠지의 얼굴이었다.

꿈속에서 느껴졌던 사랑이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처럼 희미해진다. 콘파루 히츠지는 표정 변화 없이 사야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갸웃한다. 사야는 기가 죽으며 말문을 연다.

"아, 안녕."

"안~녕?"

그렇게 답하는 콘파루 히츠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도 안 되는 사야는 쩔쩔 맸다.

"저기…… 일어나도 될까요."

"안녕히이 주무셨어욧."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얘 뭐야 무서워. 옆에서 아까 본 3학년이 사야의 시야에 끼어든다.

"호카게 사야 씨."

"네, 넷!"

어떻게 내 이름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쳐다보는데 어느 틈엔가 3학년의 손에 사야의 학생수첩이 들려 있었다.

"2학년 C반 13번 호카게 씨. 왜 여기 왔는지 가르쳐줄 수 있을까."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도 허락을 구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돌려주세요, 수첩."

"똑바로 대답하면 돌려줄게. 심문하는 거야."

"심문이라니."

콘파루 히츠지가 몸을 쭉 내밀어 얼굴을 들이댔다.

"사야라고 하는구나. 어디서 봤었나?"

"저번에, 양호실에서……"

잠시간 눈을 굴리다가 손뼉을 짝 치는 콘파루 히츠지.

"아! 그 때 그!"

"마, 맞아."

"그 갑자기 키스한 얘야!"

갑작스런 돌직구를 맞은 사야는 변명할 말 한마디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앗 앗, 그건, 그러니까."

"키스……? 무슨 얘기야?"

3학년이 수상쩍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운다.

"죄…… 죄송했습니다!!"

사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소리쳤다. 밑에 깔려 도망칠 수 없는 사야는 그 말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 많이 심한 불면증이었구나."

무릎을 꿇고 이유를 다 설명한 사야에게 3학년이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다라."

"네…… 어째선지 콘파루 씨가 곁에 있으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서."

"히츠지라고 불러. 나도 사야라고 부를게."

"앗, 그렇게 미국인처럼 거리를 좁힐 순 없는데."

약간 어이없어하는 사야를 향해 미소 지으며 히츠지는 말한다.

"키스했는데?"

"윽."

"미국인이라도 처음 본 사람한테는 키스 잘 안하죠."

"으윽."

"총 맞아도 할 말 없죠."

"재판 감이죠."

"그,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싱글싱글 웃는 히츠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사야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선수先手 콘파루, 동침."

히츠지가 갑자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응?"

"후수後手 호카게, 키스."

"큭."

히츠지는 장기 해설 흉내인지 뭔지 진지한 척 말을 잇는다.

"선수 콘파루, 낮잠. 후수 호카게, 요바이*."

"아, 아직 밤은 아닌데."

빈사 상태로 떠듬떠듬 반박 같지 않은 반박을 시도하는 사야를 보다 못했는지 3학년이 끼어들었다.

"콘파루 양, 그 쯤 해 두죠. 호카게 씨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꿈속에서 콘파루 양과 친했던 거죠?"

"아 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이해해요. 데이 랜드와 나이트 랜드 사이엔 그런 모순이 이따금 있으니까요."

"어……네?"

갑작스러운 뜻 모를 말에 당황한 사야에게, 이번엔 3학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것보다 몇 가지 자세히 물을 게 있어요. 호카게 씨,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요."

몸 상태는…… 좋았다. 아주 좋다. 잔 시간은 아주 잠깐일 텐데 머리속이 아주 맑다.

"굉장히 좋아요. 졸리지도 않고."

"불면은 얼마나 이어졌나요?"

"작년 가을부터 슬슬 시작하더니 완전히 못 자게 되고…… 그러니까, 이제 6개월쯤 지났으려나."

"6개월!"

"반년이나!? 우와, 그럼 힘들었겠다."

히츠지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렇게 불면상태가 이어지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사고 수준이 떨어졌을 텐데요. 그런데도 매일 학교에 왔었어요?"

"어찌어찌 걷고 말하기는 가능해서……. 수업은 못 따라가서 성적이 거의 바닥이었지만."

둘이 고개를 마주한다.

"얘, 네버 슬리퍼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콘파루 양, 실제로 동침을 했을 때 어땠어요?"

"완전하진 않지만 나이트 랜드에서 명석*활동 가능했던 것 같다. 수수를 쓰러트려서 깜짝 놀랐는걸."

"저기…… 무슨 얘기?"

둘은 사야에게 시선을 향한 다음 감정하듯 가만히 쳐다본다. 위축된 사야를 관찰하며 히츠지가 말했다.

"초대해 볼래?"

"괜찮겠어요? 콘파루 양 입장에서."

히츠지가 끄덕인다.

"알겠어요."

3학년은 이제껏 들고 있던 학생수첩을 사야에게 돌려주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아이조메 란. 콘파루 양과 마찬가지로 슬립 워커입니다."

"슬립…… 워커?"

아이조메 란이 당황하는 사야에게 말했다.

"당신에겐 소질이 있다고 봐요. 그것도 아마 희귀한 네버 슬리퍼의 재능이. 어때요, 저희를 도우면 편안한 잠을 제공해드릴 수 있을 텐데요."




이하 역주


요바이: 밤에 잠자리에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 성적 뉘앙스도 포함한다.


명석: 明晳. 판단력이 명확하다, 똑똑하다 등의 의미. 꿈속에서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아는 자각몽을 명석몽이라 부르기도 한다.

'번역 소설 > 동침 드리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  (0) 2019.02.07
05  (0) 2019.01.26
03  (0) 2019.01.26
02  (0) 2019.01.26
동침 드리머 01  (0) 2019.01.20
Posted by [ 편집됨 ]
,

03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 26. 13:17

03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던 양호 교사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 호카게 양."

"안녕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사야는 양호실 안을 둘러본다. 오늘은 안쪽에 있는 침대 커튼이 활짝 열린 채 아무도 자고 있지 않았다.

사야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양호 교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많이 힘들어 보이네. 역시 아직도 못 자겠어?"

"네……"

그 후로 이틀. 사야는 다시 불면 상태다.

아주 잠깐 사야에게 찾아왔던 잠이었지만 그 후론 무슨 수를 써도 재현되지 않더니, 결국 또 지금까지처럼 몽롱한 나날이 시작되고 말았다. 또 한 번 눈앞에서 안식을 빼앗긴 사야의 초조감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양호 교사가 시계를 흘긋 쳐다본다.

"오후엔 쉬다 갈래?"

"아, 아뇨. 저기, 여쭈고 싶은 게 있어서."

사야는 주저하며 말했다.

"저번에 왔을 때 모르는 애가 왔었어요. 뭔가, 폭신하고 긴 머리카락에, 저보다 아마 키가 작고──"

키를 표현하려고 두 손으로 애매한 모양을 만드는 사야. 그 손을 내리곤 점점 작아지는 소리로 말 했다.

"……아는 건 그게 거의 단데."

양호 교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폭신하고, 키가 작아? 다른 건?"

다른 건── 부드럽고, 해님처럼 좋은 냄새가 났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걸 말하긴 꺼려졌다.

"너무 잠깐이라……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걔가 왜?"

"제가 누워있던 침대에 쓰러지더니 잠을 자서. 누군지 물어보려고 한 건데…… 겨우 이걸로 어떻게 알겠어요. 죄송합니다."

발걸음을 돌리는 사야에게 양호 교사가 말했다.

"혹시 콘파루 양인가."

"콘파루?"

양호 교사는 뒤로 돈 사야에게 끄덕여 보였다.

"혹시 그러면 양호실에 온 게 더 희한하네. 호카게 양이랑 같은 2학년일 텐데, 어떤 의미론 너랑 정 반대라고 할 수 있겠네."

"정반대면…… 어떻게"

"콘파루 양은 있지── 언제, 어디서건 자고 있어."


언제, 어디서건.

수업중인 교실에서도, 점심시간 안뜰에서도, 방과 후 도서실에서도.

저 콘파루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굳이 보건실 침대를 쓸 것도 없이 학교 안의 온갖 곳에서 자는 모습을 보인다는 모양이다.

부럽다…….

양호실을 뒤로 한 사야는 정처 없이 학교에서 걷고 있었다. 문득 의식했을 땐 오후 수업이 시작된 지 10분 넘게 지난 상태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가고 있자니 옆에 있는 교실에서 수업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에 있는 불투명 유리 탓에 안이 어떤지는 잘 안 보인다. 어렴풋한 사람 모양과 흐릿한 말소리. 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수업을 받는 여학생들의 왁자지껄한 기척. 수족관 수조 앞을 지나는 기분이다. 여기 있다는 걸 들키자마자 몇십 개나 되는 눈이 슥 하고 자신을 향한다. 그런 생각을 했더니 서 있기 거북해졌다. 사야는 발소리를 죽이고 건물 안을 걸어다녔다.

이제 와서 자기 교실로 가기엔 내키지 않는다. 다음 쉬는 시간까지 어디서 시간을 죽이고── 아니, 난 애초에 뭘 하고 있던 거더라?

건물에서 구름다리로 나서자 안뜰이 눈에 들어온다. 물 없는 분수 가장자리는 앉기 딱 좋은 높이와 폭이라 낮잠 자긴 딱이겠지만 창문이란 창문에서 다 보인다. 지금은 수업중이니 교사한테 들키기라도 했다간 순식간에 학생지도실 행이리라.

아무도 안 앉은 분수를 쳐다보다 사야는 겨우 떠올렸다.

──맞아. 그 녀석을 찾고 있었다.

콘파루 히츠지라는 폭신거리는 여자를.

다시 불면에 고통 받게 된 요 이틀은 사야에게 가만히 생각할 시간이었다. 왜 그 때만 잠에 빠졌을까. 다른 상황과의 차이는 뭔가.

졸음에 흐릿한 머리로도 답은 명백했다. 콘파루 히츠지다. 그 녀석이 침대에 쓰러진 순간 갑자기 잠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자면 잘 수 있다는 뜻인가……? 어젯밤엔 그런 생각에 언니와 함께 자자고 해 봤다.

한 숨도 못 자고, 게다가 언니의 몸부림에 침대에서 밀려 떨어졌다.

그렇다는 건, 범위가 더더욱 좁혀진 셈이다.

사야는 몽롱하게 혼잣말을 했다.

"……그 녀석이어야만, 해."

언제 어디서건 잘 수 있다는 콘파루 히츠지가 지금은 어디서 자고 있을까.

교사에게 안 들킬만한 비밀 장소가 있는 걸까. 아니면 수업 중이니 얌전히 자기 책상에서 자고 있을까. 그러면 사야가 이러고 있는 건 완전히 헛수고인 셈이지만 그래도 찾아다니는 게 마음이 편했다.

구름다리를 지나 옆 건물 입구로 들어간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에 들어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진 그 순간, 사야의 눈에 기묘한 것이 보였다.

건반악기의 건반이 얇고 길게 늘어나선 그대로 다리가 돼 걸어 다니는 듯한, 생물인지 기계인지 모를 것이 계단을 소리도 없이 올라간다.

"응?"

눈을 깜빡댄 다음 다시 보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각일까?

확실히 수면부족이 오래 지속되면 눈의 착각이 늘어나거나 환각에 시달린다지만 사야의 마모된 마음속에서 뭔가가 걸렸다.

방금 그거, 낯이 익어…….

아니, 그럴 수가 있나? 저런 걸 어디서 봤지?

게임? 영상? 만화? 영화? 박물관?

그게 아니면…… 꿈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한 순간 기억이 확 되살아났다.

맞아! 봤어! 난 저걸 꿈속에서 봤어!

이틀 전. 보건실에서 꾼 잠시간의 꿈. 일어나기 직전에 보였던, 옆에 달린 수많은 다리──.

자기도 모르게 사야의 발이 계단으로 향했다. 아까 그 녀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한 순간이었지만 그건 분명 계단을 올라갔다──.

기억의 안개 속에서 한 이름이 떠오른다.

"……수수다."

그 녀석은 그렇게 불렀었다. 수수. 뭔진 모르겠지만.

수수의 뒤를 따라 사야는 계단을 올랐다. 어둡고 조용한 2층 복도, 계단 옆 과학실은 안 쓰이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자 또 보였다. 3층에서 더 위를 향해, 수많은 다리를 달그락달그락 움직이며 걸어가는 모습이 실내의 어둠과 창밖에서 비쳐드는 빛의 명암차 사이에 한 순간 나타났다 사라졌다.

뒤를 쫓아 계단을 다 오르자 옥상과 이어진 문이 있었다. 불투명 유리 저편은 밝다. 손잡이를 잡고 돌려 보니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간다.

사야는 그곳에서 콘파루 히츠지를 찾아냈다.

'번역 소설 > 동침 드리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  (0) 2019.02.07
05  (0) 2019.01.26
04  (0) 2019.01.26
02  (0) 2019.01.26
동침 드리머 01  (0) 2019.01.20
Posted by [ 편집됨 ]
,

02

번역 소설/동침 드리머 2019. 1. 26. 13:16

02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뭘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로 도보 20분 거리를 거의 달리다시피 해서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순간 거실에서 나온 세 살 연상의 언니 아야와 마주쳤다.

"으아."

갓 목욕했는지 머리에 수건을 감고 막대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던 아야가 사야의 기세에 뒷걸음질 쳤다.

"무슨 일이야……"

사야는 여전히 헐떡대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걱정스레 동생을 살피던 아야의 눈썹이 뭔가를 알아챈 듯 올라갔다.

"안 졸려?"

"어……어떻게."

"요즘 들어 처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길래. 놀란 고양이 같네. 무슨 일 있었어?"

"있었다면……있었는데."

그렇게 말 하다 머뭇거린다. 아까 한 경험을 남에게 설명할 단어를, 사야는 모른다.

"왜 그래?"

"뭐랄까…… 악몽을 꾼 것……같은."

"아, 잔거구나?"

"엇, 음…… 아주 잠깐……?"

"오, 잘 됐네. 안색이 좀 좋아. 평소에 너무 안 좋긴 했지만."

"시끄러."

"얼레, 너 가방은?"

듣고 나서 알았다. 빈손이다. 교실에 둔 채로 와 버렸다.

"깜빡했어……"

"뭐 하는 거람. 학교 갈래? 차 태워줄까?"

"아니. 잠깐만 쉴래."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가 계단을 오른다.

"세수는 하고 자~"

"알았어."

계단 밑에서 들리는 언니의 말에 대충 대답하고 2층 방에 들어갔다.

문을 닫고 침대에 쓰러진다. 머리맡에는 어렸을 때부터 함꼐 해 온 인형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작게나마 숙면용 부적인 셈이다. 자기 냄새가 나는 잠자리에 누워 사야는 긴장을 풀었다.

새삼스럽지만, 뭐였을까.

어떻게 된 걸까, 나.

좋아, 진정하자. 하나씩 정리하자.

다행히 지금은 머릿속이 깔끔하다. 그야말로 최근엔 겪어보지도 못했을 만큼 맑다. 그 이유를 들자면, 그래. 잤기 때문이다.

잠들었다. 진짜냐. 짱이다.

앞으로 영영 불면에 시달리다 쇠약사할 줄 알았는데.

잠든 것이다.

앗싸.

"아~~~~, 다행이다."

사야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시 잠들 수 있게 됐으니 망가져가던 인생을 되살릴 수 있다. 학교 공부도, 인간관계도, 지금부터 열심히 만회 해야하지만 그쯤은 장기 불면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다행이다. OK. 이건 완전히 좋은 소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식은?

꿈속에서 모르는 사람을 애인이라고 생각하다가 깨선 있는 힘껏 키스했단 사실은,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

사야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범죄잖아……"

처벌 여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성추행 사건 정도는 되겠지.

"없었던 일이 되진 않으려나…… 안 되려나…… 알고 있었던 걸까…… 알고 있었겠지~ 아무리 봐도……"

그 사실이 밝혀지면 앞으로 사야의 입장이 상당히 힘들어지진 않을까.

"그 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애인이었단 말이지……"

꿈속에선 그렇게 확실했던 애정이 일어나서 10초쯤 지나자 급속도로 사라진 것도 충격이었다. 그 탓에 아직도 상실감의 흔적 같은 게 가슴 안쪽에 들어앉아 있다. 아무 근거도 없는, 필요 없는 상실감인데.

키스했을 때 맛본, 사랑하고 사랑받는 확신은 살아온 17년 인생에서 처음 느낀 것이었다.

무의식중에 손끝으로 입술을 쓰다듬은 걸 깨달은 사야는 어색한 마음에 손을 내렸다.

"아~ 진짜~ 모르겠다~"

베개를 끌어안은 사야는 힘없이 끙끙댔다.

"진짜 아무 것도 모르겠어~……"

아니아니, 됐어, 이제 됐다. 이제 고민해봤자 변할 게 없다.

분명한 건 다시 잘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일단 자자. 아까처럼 자서 체력을 회복하자. 어려운 생각은 그 후에 하면 된다. 실제로 벌써 이토록 졸리다.

사야는 눈을 감고 잠이 잘 드는 자세를 잡곤 천천히 숨을 쉬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

한참 있다 사야는 눈을 떴다.

"…………어?"

잠이 안 든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전혀 잠들 수 없었다.


'번역 소설 > 동침 드리머'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  (0) 2019.02.07
05  (0) 2019.01.26
04  (0) 2019.01.26
03  (0) 2019.01.26
동침 드리머 01  (0) 2019.01.20
Posted by [ 편집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