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편
"어서 오세요."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는 한 미소녀.
긴 흑발을 뒤로 넘긴 그녀가 모던한 웨이트레스 복을 입고 취하는 행동거지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장식처럼 분위기 좋은 카페에 화려함을 더했다.
녹색을 기본으로 한 유니폼은 가게 어디든 잘 녹아들어서 찾아 온 손님들의 눈에 잠시간 청량감을 준다.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관엽식물로서는 도저히 비견할 수 없는 진정한 빛이다.
라고 카운터 위에 얌전히 놓인 화분의 저는 생각합니다.
안녕하세요, 꺾꽂이 된 바로크 벤자민 3호, 우에다 하나입니다.
드디어 서드 비전을 각성했습니다.
여기는 엄마네 동생, 우에다 스미레 이모의 카페. 그 이름도 '바로크 벤자민'이다.
가게 이름이 바로크 벤자민인데 내가 올 때까지 바로크 벤자민이 없었다니, 스미레 씨의 적당한 성격이 드러난다…….
"이야, 좋은 알바생 잡아 왔네 우에다 양."
앗 앗, 예쁜 언니가 나한테 물을, 물을 끼얹어. 앗 앗.
"그치. 절대 손 대면 안 돼."
"그러지 말자,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을 꼬실까 봐. 눈보신만 시켜주는 거지. 그치 아오이 짱~"
손님의 농담에 "에헤헤……" 하고 접대성 웃음을 띄우는 아오이.
고등학생이 되고서부터 아오이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수공예품 재료를 살 돈이나, 고등학교엔 수예부가 없어서 방과후에 남는 시간을 유익하게 쓰기 위해서 등등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새로운 일에 매진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리라.
처음엔 패밀리 레스토랑 홀에서 일하려고 했지만, 어디선가 얘기를 듣고 온 스미레 씨가 아오이를 잡아간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나, 드디어 아오이도 일에 익숙해지고 카페의 포인트로 배치된 나도 이렇게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바꾸고 있다는 거다.
"그건 둘째치고 아오이 짱이 오고서부터 한량들이 점점 더 많이 모이네. 자판기 불빛에 모이는 나방같아."
스미레 씨는 가시 돋친 미인이고, 조금 말투가 신랄하다. 상관은 없지만 아직 독신이다.
"누가 나방이야."
문을 열고 들어온 비즈니스 슈트 차림의 여자가 인상을 쓴다.
앗, 안돼, 심지어 앉기도 전에 나한테 물을. 뿌리가 안 썩게 다들 조금씩만 주니까 안달나게 만드는 것 같아서…….
……후~ 위험했어.
차례를 바꿔가며 언니들이 물을 주는 이 쾌락의 헤븐에 빨려들어갈 뻔했어…….
카페 바로크 벤자민에 자리한 나는 그야말로 이 가게의 주인공……!? 줄곧 구석에서 광합성만 해 왔었는데 갑자기 스포트 라이트를 받아서 당황할 따름입니다.
스미레 씨는 전자담배를 물고 눈만 굴려서 시선을 돌렸다.
"너 말이야 너."
"전부 다 아오이 짱 보러 온다는 건 착각이야. 난 여기서 남은 작업 하려고 들른 것 뿐이니까."
그렇게 툭툭대던 여자도, 아오이가 주문을 받으러 가자.
"어서 오세요, 주문 하시겠어요?"
"음~ 어쩔까. 저기, 아오이가 추천하는 거 있어?"
"추천이요? 음, 저번에 마신 블렌드 커피가 맛있었어요."
"응, 그럼 그걸로 줘. 후훗, 고마워 아오이 짱."
이렇게 헤롱헤롱하게 변한다.
스미레 씨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쓴다.
"서비스 비 확 뻥튀기 해버릴까보다."
"아하하…… 블렌드 하나 해 주세요."
"오냐."
그리고 이건 아마 아오이가 모르는 거겠지만.
스미레 씨는 나를 백합충으로 만든 스승 같은 사람이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즈음에 카페가 생기고, 아오이를 키우느라 바쁘던 엄마는 나를 스미레 이모 네에 맡길 때가 있어서.
그럴 때 심심하면 보라고 준 책이나 만화가, 아주 완전 그냥 대놓고 백합이었던 거다.
스파르타식 백합 교육을 받은 나는 훌륭한 백합충이 됐지만, 이모는 물론 한 술 더 뜬다.
이모가 아직 독신인 건 불특정 다수의 여성 파트너가 있어서 그런 거고, 마흔이 넘어서도 세련된 미모인 것도 젊은 여자들을 꼬시기 위해 이를 갈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해서 스미레 씨네 카페에 모이는 손님들도 동성애에 관용적인 사람이 많다. 나도 자주 왔다. 심지어 아오이한테 선물해 준 관엽식물도 이 가게 이름에서 따 온거다. 여기가 백합충의 아지트다.
세상 물정 모르는 강아지같은 아오이가 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상당히 조마조마했지만 역시나 스미레 씨네 친구. 상식 있는 어른들만 와서 나는 안심했다. 무엇보다 스미레 씨가 상식인이기도 하고.
"자, 블렌드. 성희롱 하면 머리 위에다 부어 버려, 아오이 짱."
"안 해요……"
……말투는, 좀 거칠지만.
"아오이 짱, 홀은 됐으니까 설거지 좀 해 줄래?"
"네, 알겠습니다."
에~ 하고 야유가 일어나는 손님들을 스미레 씨가 째려본다.
"불만 있으면 주문 해 한량들아."
여기는 글러먹은 백합충(어른)들 집합소다…….
고등학생이 된 아오이는 행동거지도 침착해져서 완전히 얌전한 우등색 포지션에 들어갔다. 허리를 곧게 펴고 걷는 모습은 그야말로 백합 꽃.
겨우 1, 2년만에 상당히 많이 변했다. 역시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는, 봉오리가 피어나는 듯한 변화는 더할 나위 없이 꽂힌다…….
하지만 그건 그저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 아니라 아오이가 매일 노력해온 결과로서의 성장이다.
새 블레이저를 입은 아오이를 봤을 때 부끄럽지만 살짝 눈물이 글썽 했으니까. 아침 이슬 같은 의미로.
저 아오이 짱이 이렇게 크다니 어머.
게다가 나와 같은 고등학교. 이 언니 가슴이 찡하단다…….
아오이 만이 아니다.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도 마찬가지다. 이 셋은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짜고 맞춘 게 아니라 각자가 고른 결과가 너무나 아름답다. 오졌다.
세컨드 비전으로 보면 이즈미 짱이 매일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치하루 짱은 한동안 못 봤다. 얼마나 컸을지 기대된다.
물론──.
중학교때 결심한 그 약속이 어떻게 될 지도 정말로 기대된다.
그리고, 그 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니, 빠른 건 아닌가.
1년이나 참아왔으니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두 달이 지나서 내일은 6월 말일.
기본적으로 일정 없는 날과 정기 휴일인 수요일을 제외하면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오이는, 머리를 묶고 깨끗한 유니폼을 입고 가게에 서 있었다.
딸랑딸랑 하고 문이 열린다.
"어서 오세요──"
반사적으로 미소지으며 쳐다 본 아오이가 본 것은──.
"욥"
"와, 유니폼 예쁘네요."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이다!
내가 제일 신나버렸다. 면목이 없다.
하지만 키가 크고 머리를 짧게 자른 치하루 짱은 꼭 모델 같았다. 정말로 예쁜 사람은 숏 컷도 어울린다는 말이 있는데, 치하루가 그야말로 그 자체였다. 가느다란 눈과 산뜻한 외모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미인이었다.
얘가 나를 좋아했던 건가…….
어, 진짜? 정말로? 내가 죽기 전에 한 망상이 아니라? 얘가 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줄 강공이었다고? 뭐야 그거, 내 안의 수가 막 쏟아져 나오려고 하는데.
나 엄청 아까운 짓을 저질러버린 게 아닐까……. 처음으로 맨홀에 떨어져 죽은 걸 후회한다. 오늘 밤은 술로 잊을테다.
그리고 이즈미 짱 또한 이지적이고 청초한 미소녀의 오라를 뿌린다. 척 봐도 곱게 자라 보이는데다 외모도 썩 예쁘다. 열 명이 있으면 아홉 명은 돌아볼 만큼 귀엽다.
외모는 완전히 소녀소녀한 수 그 자체지만, 그 정체는 얘도 마찬가지로 더없이 공이다. 아니 오히려 이 쪽이 진짜 공이다.
그건 그렇고 이 무슨 미소녀와 미소녀의 조합인가. 내 백합뇌는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이 나란히 걷기만 해도 7주는 백합망상이 터질것 같다.
그런 둘이 같이 오자, 스미레 씨도 그만 졸려 보이던 눈을 뜨고 허리를 폈다. 미소녀 앞에서 폼을 재려는 건 슬픈 여자의 습성일지도 모르겠다.
아오이는 낯익은 이들을 보고 기쁜 듯 눈을 반짝였다.
"치 짱, 이즈미 짱, 와 줬구나."
"오늘은 부활동 안하는 날이라, 겸사겸사. 네가 알바 시작했다길래 걱정도 되고 해서."
"접시는 몇 개나 깼나요? 아, 손님한테 몇 번 물을 쏟았나요?"
"한 번도 안 했어!"
짐짓 화난 체 하던 아오이는 금세 자연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럼 원하시는 데 앉아 주세요."
"네~" 이즈미 짱이 신나게 손을 들고, 둘은 안 쪽의 테이블 석에 앉았다.
아아, 저 셋이 같이 있는 광경은 좋은걸.
아니, 혹시 초등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나? 우와, 진짜냐~. 눈물 날 것 같아.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럼 전 블렌드 주세요."
"난…… 오렌지 주스."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얘들아."
아오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치하루의 손등을 이즈미 짱이 탁 소리 나게 손톱으로 때렸다.
"너무 응시 하잖아요, 치하루 양."
"미, 미안. 그래도 뭔가, 신선해서. ……그리고, 유니폼도 귀엽고."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는 치하루 짱. 좋아하는 아이의 유니폼을 보고 가슴 뛰는 치하루 짱도 너무너무 귀엽다.
"뭐, 귀여운 건 이해가 가지만요……."
"알바 열심히 하고 있었구나, 아오이."
"아오이 양은 예전부터 성실했으니까요."
이즈미 짱은 먼 눈길로 미소지었다.
"계속 노력했어요, 아오이 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올곧아서, 멋있어요."
치하루 짱도 힘차게 끄덕인다.
"……그렇지, 응."
"아, 저 나중애 유니폼 입은 아오이 양 찍을 거예요."
"뭐야 치사하게 나도 줘."
"그러죠. 한 장에 이천엔 부터예요."
"비싸!?"
둘이 사이 좋게 이야기 하는 중에 쟁반을 든 아오이가 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블렌드 커피와 오렌지 주스입니다."
"응, 땡큐……. 근데 뭔가 아오이가 존댓말 하니까 기분이 묘한데."
아오이도 웃었다.
"나도 그래 치 짱."
"……어"
눈을 피하는 치하루 짱의 얼굴이 빨갛다.
얼버무리려는 듯 이즈미 짱이 하하하 웃었다.
"아, 그럼 우린 적당히 있다 갈 테니까 아오이 양도 열심히 해요. 손님이 많은 것 같진 않지만 여긴 공부 해도 되는 곳인가요?"
"마스터한테 물어보고 올게."
아오이 짱은 금방 돌아왔다.
"둘이라면 몇 시간씩 있어도 된다는데. 귀여운 여자 애가 가게에 있으면 바이부스(분위기; 역주)가 초절정 좋아진다면서"
"초절정……?"
"바이부스?"
스미레 씨는 맑은 미소로 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 사람은 역시 우리 이모야.
"고맙게 허락까지 해주시고."
"그래, 알바 열심히 해 아오이."
"응. 둘 다 편히 있어."
작게 손을 흔든 아오이는 일하러 가려다가.
"아, 그치만 둘 다 나만 너무 보면 안 돼. ……부끄럽단 말야"
부끄럼을 얼버무리듯 주의 주는 아오이에게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은 '네에~' 하고 기운차게 손을 들고는 일하는 모습을 응시했다.
의외로 척척 움직여서 위기감이 없다. 그러고 보면 수공예 할 때의 아오이는 이런 느낌이었지.
치하루, 이즈미 둘은 정말로 아오이를 보러 온 것 뿐인지 유니폼을 입은 아오이를 감상하며 오늘 숙제를 시작했다.
이래저래 하는 사이에 시간이 늦어지고, 별 일 없이 하루가 끝나려 했다.
아르바이트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가는 셋의 뒷모습을 봤을 때, 난 이대로 성불 해도 후회 없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안 되겠다.
이 셋의 연애가 어떤 끝을 낼지 볼 때까지는 아오이네 집과 이즈미네 집, 카페 바로크 벤자민에 동시에 불이 나도 죽을 수 없다!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은 그 후로도 이따금 카페에 들렀다.
둘이 간과할 수 없는 현장을 마주친 건 3개월 후. 여름 방학이 끝나고 아오이의 일이 궤도에 올랐을 때였다.
이 날은 금요일, 다음 날이 휴일인 것도 있어서 오래 있던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은 저녁 7시 넘어서 불온한 손님이 모이는 걸 보았다.
퇴근하고 온 언니들이 "나 힘들어 아오이 짱~"하며 여고생에게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네 네, 고생하셨어요 사토 씨, 타카하시 씨." 라며 미소짓는 아오이 짱을 보고 언니들은 "아~ 미소녀 여고생의 미소에 치유된다~"며 낯빛이 되살아난다.
좀비에 가까운 그녀들을 상대하는 아오이 짱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가만 있지 못 한 건 이즈미 짱이었다.
"뭐, 뭔가요 저 사람들…… 글러먹은 어른 전시회인가요!?"
"아오이 짱은 사랑받으니까 말이지."
스미레 씨가 "자" 하고 주문한 쿠키를 테이블 위에 두러 왔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건 치하루 짱. 한 편 이즈미 짱은 매서운 눈으로 스미레 씨를 쳐다봤다.
"마스터, 여긴 뭐하는 가겐가요…… 고양이 카페도 아니고." (일본어로 수受를 뜻하는 네코에는 고양이라는 의미도 있다 ;역주)
"공攻들이 모인다고? 저 녀석들은 그냥 글러먹은 녀석들인데, 너 얘기 참 재밌게 하네."
"재미 없어요. 설마 아오이 양한테 이상한 짓을 시킬 셈은 아니겠죠……"
이즈미 짱은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당장이라도 스미레 씨의 손을 물어뜯을 기세다.
한 편, 그런 청소년의 어린 정열을 앞에 둔 스미레 씨는 완전히 즐기고 있었다. 아 역시 이 사람도 글러먹은 어른이다.
"우린 자유 연애 주의를 표방하거든."
"아동 매춘으로 고소해서 가게를 통째로 날려버릴 거예요."
"얘도 참 무섭긴. 농담이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아오이한테 손 못 대게 할 거니까 안심 해. 아오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나도 어떻게 못 해주겠지만."
"그, 그게…… 무슨 말이예요. 따, 딱히, 저희랑 아무 상관도……"
조금 누그러진 이즈미 짱을 보고 스미레 씨가 웃었다.
"보시는 대로 우리 손님들 얼굴만큼은 괜찮거든. 내용물은 똥쓰레기 민달팽이지만. 아오이는 예전부터 연상이 좋아하는 타입이었잖아. 아오이 본인도 연상한테 동경은 좀 있는 모양이고."
"그런 건."
"……확실히."
끄덕인 건 치하루 짱이었다.
"아오이는 한창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 하나 짱을 잃었잖아. 그럴 수도 있겠어."
"그, 그건……"
이즈미 짱은 경악하곤 일하는 아오이를 봤다.
아오이는 퇴근한 OL같은 여자들과 친숙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건 아오이의 평소 모습이었지만 이즈미 짱의 눈에는 다른 게 보이는 모양이다.
"크으윽"
"이즈미, 그래도 전에 아오이가 누굴 좋아하건 상관 없다고 했었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예요 치하루 양! 상대는 어른이예요 어른! 아오이 양이 엉망진창으로 당해서 흠집이 나면 어떡해요!"
"그렇게 위험한 사람들로는 안 보이는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돼요!"
스미레 씨는 히죽히죽 웃는다.
"뭐 손님으로 오는 거면 언제든 환영이야. 그럼 편히 쉬다 가."
불길한 웃음을 남긴 스미레 씨가 떠나갔다.
이즈미 짱은 바들바들 떨었다.
저 이즈미 짱을 여기까지 몰아넣을 줄이야, 역시 나이는 괜히 먹은 게 아닌가…….
"……어떡할래요 치하루 양."
치하루 짱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난 딱히 상관 없는데."
"괜찮겠어요? 아오이 양의 어른의 익숙한 손놀림에 놀아나다가 고등학교 자퇴하고 밤거리로 사라져도 괜찮아요?"
"비약이 너무 심하잖아. 그럴 리가 있냐."
"흐~~~응. 냉정하시네요 치하루 양. 알겠어요, 좋아요, 저 혼자 여기 와서 아오이 양한테 마구마구 들이댈 테니까."
치하루 짱도 그 말은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들이댄다니, 너, 그건"
이즈미 짱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치만, 싫단 말이예요. 아오이 양이 제가 모르는 사람이랑 사귀는 건."
그걸 본 치하루 짱은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이즈미, 그럼 너……"
"네?"
이즈미 짱의 되물음에 치하루 짱은 입을 손으로 가렸다.
"……아무것도, 아냐."
"뭔데요."
"응, 알았어. 나도 아오이가 밤거리로 사라지는 건 싫으니까."
말하자 마자 이즈미 짱은 노트를 펼쳤다.
딱딱딱하고 샤프 심을 꺼내면서.
"그럼 시간대를 정하죠. 치하루 양이 부활동 안하는 날이랑, 제가 학생회 안 가는 날을 조정 해야겠네요."
"……어쩌다 한가한 날에 오면 안 되냐……"
헬쓱해진 치하루 짱이 끙끙댔다.
그렇게 해서 바쁜 여고생 둘은 열심히 카페에 오기 시작했다.
……스미레 씨는 이걸 노린 걸까.
"어서 오세요. 아, 이즈미 짱."
"안녕하세요, 오늘도 괜찮죠?"
"그럼 그럼. 늘 앉던 데 비어 있어."
이즈미 짱이 스미레 씨에게 도발당한지 1주일이 지났다.
역시 매일 다니는 건 어려웠던 모양이지만 지난 주만 세 번이나 왔으니 대단한 노릇이다.
아오이는 요즘 기분이 좋다.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안쪽 자리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는 이즈미 짱에게 커피를 내 가는 아오이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당연히 그걸 보는 이즈미 짱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입가의 미소는 숨길 수가 없었다.
아주 완전히 커플 상태다.
못 보는 동안 사랑이 커 간다지만 그 말대로인지, 지금의 둘은 그저 같은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무조건 행복한 모양이다. 결혼 하면 되지 않겠냐, 싶다.
집에 올 때마다 키스하던 때보다 친밀해 보이는 건 왜일까.
둘 다 마음이 커서 서로가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둘도 없는 사람인지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즈미 짱의 목적도 달성된 게 아닐까.
이즈미 짱은 '어중간한 마음으로 아오이에게 손을 뻗치기 싫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즈미 짱은 어른들이 아오이를 놀리는 걸 보고 질투 한다. 중학생 때는 없던 감정이다.
그러면 이즈미 짱이 더는 욕망에 휩쓸려서 아오이를 상처입히지도 않을 거고.
남은 건 이즈미 짱이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 문젠데…….
그건 그렇고 저렇게 행복 오라를 뿜어내면 당연히 스미레 씨도 알아 챈다.
카운터에서 컵을 닦던 스미레 씨는 돌아온 아오이에게 물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 친구?"
"네?"
아오이가 눈을 깜빡였다.
"이즈미 짱이 왜요?"
"사귀는 거 아냐?"
"네에!?"
놀란 아오이의 목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진다. 손님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고, 아오이는 "죄, 죄송해요"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변명한다.
"아, 아니예요. 저랑 이즈미 짱은 옛날부터 사이 좋은 친구고……. 아주 소중한 친구지만, 그런 건, 하나도……"
말 하면서도 아오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아마 수없이 키스했던 기억이 났던 거겠지.
지금도 이즈미 짱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 보곤, 뺨을 덮었다.
"……저, 왜 이렇게……"
라고 작게 혼잣말 했다.
"그래? 내 감도 아직 멀었네."
스미레 씨는 후훗 웃었다.
"쟤, 엄청 인기 많을 것 같던데 아오이 짱도 질투하는 거 아냐?"
"죄, 죄송해요, 그런 건 잘 몰라요. 이즈미 짱 인기 많을 것 같아요?"
대놓고 묻는 아오이의 말에 스미레 씨는 쿡쿡 웃었다.
"그야 저렇게 예쁘고 예의 바르잖아. 게다가 쟨 화사하니까 분명 남자보다 여자들이 좋아할 타입이야. 어디서 계속 고백 받는 건 아니려나. 같은 고등학교지?"
"그런, 데요……"
아오이는 멍한 눈으로 이즈미 짱을 쳐다본다.
"이즈미 짱은, 그런 얘기, 안 해줘서."
"내가 학생이었으면 저런 얠 좋아했을 지도 모르겠다."
"네? 스미레 씨가요?"
"그럼."
창가에서 책을 읽는 이즈미 짱은 그것 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혹시 연상을 동경하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여자 아이가 본다면 단숨에 사랑에 빠져버릴 정도로.
아오이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입술을 만졌다.
"……왜, 생각도 안 했을까."
당황한 듯 아오이는 중얼댔다.
그 표정은 여태껏 지어온 적 없는 것이었다.
붉은 뺨과 흔들리는 눈이 무엇보다 아오이의 마음을 나타내 주는 듯했다.
"……"
드디어,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서야, 라고 해야 할까.
아오이는 자기 마음과 마주하기 위한 여권을 얻은 것일 지도 모른다.
가슴에 따끔한 아픔을 느낀 아오이는, 가만히 이즈미 짱의 옆모습을 쳐다 본다.
분명, 자기 말고 다른 사람과 같이 걷고, 손을 잡고, 웃고, 그리고 키스하는 광경을 상상하고.
그리고.
'그건, 싫은데.'
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오이는 그런 자신에게 당황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즈미 짱 또한 아오이의 태도가 조금 바뀐 걸 느꼈다.
방에서 나한테 얘기해 준 것이다.
"……제가 뭔가, 한 걸까요?"
이즈미 짱은 전혀 자각이 없는 모양이다.
"눈도 안 맞춰 주고, 주문 받으러 올 때도 바로 가 버리고, 학교에서도 피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걸까요……"
하나 하나 짚어갈수록 이즈미 짱은 축축 쳐진다.
"진심인 걸까요……"
지금은 아직 굉장히 불안해 보이지만.
하지만 괜찮아 이즈미 짱.
대답은 조금씩 이즈미 짱의 바람에 다가가고 있으니까.
계속 어린 아이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어른이 되는 날이 온다.
계단을 오른 그 너머에 있는 건, 결코 아름답기만 한 풍경이 아니다.
질투심. 독점욕. 그런 자신의 추악한 마음을 훤히 드러낸 무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곳에선 절대 혼자가 아니다.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건 멋진 버진 로드가 되니까.
그 순간은 코 앞까지 닥쳐 있다.
계절은 가을을 넘어 겨울에 다가섰다.
그런 어느 날 치하루 짱이 웬일로 부활동 친구를 데리고 왔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아 넷이야. 좀 시끄러울 지도 몰라 미안."
"에~ 우리 안 시끄러운데"
"와 이 가게 뭔가 분위기 좋다~. 천장에 나무 보이는 거 멋지지 않아?"
"아~ 나 엄청 목말라~ 치하루가 쏴 줘라~"
"……벌써부터 시끄럽네…… 미안."
치하루 짱이 고개를 숙이자 아오이는 "괜찮아요" 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이즈미 짱이 없어서 안쪽 테이블로 안내해 주고, 주문을 받아서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치하루 짱이 친구를 데려오는 건 처음이라 어쩐지 신기하다.
"치 짱, 부활동 할 땐 저런 느낌이구나."
소음 삼인방을 돌보는 치하루 짱은 꼭 네 자매의 맏딸같다.
어른스러운 건 알았지만 또래 애들이랑 비교하면 굉장히 침착하네~. 똑같이 어른스러운 이즈미 짱이랑 얘기하는 것 밖에 못 봤으니까, 나도.
아오이가 부활동 회의를 하는 테이블이 신경 쓰이는지 묘하게 힐끔대자.
"진심?"
"네?"
스미레 씨가 신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오이 짱이 짝사랑 하는 사람이지?"
"네? 아니예요, 치 짱은 소꿉친구고, 소중한 친구예요."
이즈미 짱 때와는 달리 아오이는 미소지을 여유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럼 다행이네. 지금은 아직 자기 마음을 모르는 모양인데, 조만간 쟤 고백받을 거야. 옆에 앉은 쟤한테."
아오이는 그만 굳어버렸다.
"엑?"
나도 깜짝 놀랐다. 확실히 듣고 보니 옆자리 애는 묘하게 몸을 자주 친다든가, 치하루 짱의 거리가 가까운데…….
스미레 씨는 전자 담배를 틱틱 흔들며.
"저렇게 멋있으니 어쩔 수 있나. 같이 있으면 다들 좋아할 거야. 저 또래 애들한테는 그런 사람이야. 예쁘단 건 참 좋은 일이야."
스미레 씨는 얼굴을 따졌다.
꼭 얼굴만 칭찬하는 것 같기에 아오이가 감쌌다.
"치 짱은 확실히 멋지긴 하지만 실은 엄청 다정하고, 부활동도 온 힘을 다하고…… 마음이 예쁜 거예요."
"그렇구나. 아오이 짱은 쟬 잘 아나 보네."
아오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중학생이 되고서 같이 놀러 다니지도 않았고. 고등학교에서도 전 치 짱을 늘 멀리서 보기만 했어요.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런데도 아오이는 기쁜 듯 표정이 풀어졌다.
"치 짱은 달릴 때 굉장히 예뻐서 방과후에 자주 봤었어요. 중학교 대회도 부끄럽다고 언제 하는지 안 가르쳐줬는데 혼자 보러 간 적도 있고……. 치 짱은 저한테 특별한 사람이예요."
몰랐다.
아오이가 치 짱을 그렇게 여겼을 줄이야.
멀리서 친구들이랑 웃는 치하루 짱은 예전에 보여줬던, 늘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아주 당당한 한 여자로 보였다.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고, 조금은 자기가 좋아진 걸까, 치하루 짱. 그러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오이에게 있어서는 저 멀리 있는 존재인 모양이었다.
쳐다 보는 아오이의 눈엔 동경의 빛이 어렸다.
그렇구나.
아오이는 내내 저런 눈으로 치하루 짱을 쫓아갔던 거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계속.
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서로를 배려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치만, 전 치 짱의 비밀을 얘기해 버려서……. 참을 수 없어서."
"비밀?"
스미레 씨가 그렇게 묻자 아오이의 얼굴이 붉어져간다.
초등학교 때는 잘 몰랐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 떠올리는 첫 키스의 기억. 그건 분명 가슴 속에 담은 보석과도 같이.
"소중한, 추억, 이예요."
"그래."
스미레 씨는 웃으며 아오이의 등을 쓸었다.
"첫사랑 이었구나."
아오이는 대답하지 않고 부끄러워 하기만 했다.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 말이 가시덩굴처럼 아오이를 죄였다.
몸부림 칠 때마다 달콤한 아픔이 마음에 흐를 만큼.
드디어 겨울이 왔다.
파자마 차림으로 관엽식물(나) 앞에 앉은 아오이 짱은 마음이 넘쳐흐를 것 같아보였다.
"나 지금까지 엄청 대단한 사람들이랑 같이 있던 거야. 하나도 몰랐어. 나 너무 둔하네."
아오이는 곤란한 듯 미소지었다.
"둘한테 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건, 무리인데."
그렇지 않아, 아오이.
아오이도 둘에게 지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야.
나는 전할 수 없다.
이 말을 전할 수 없다.
둘이 얼마나 아오이를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지.
나는 아는데. 5년동안 계속 지켜봤는데.
아오이는 처음으로 깨달은 첫사랑에 놀라, 두 사람이 자기와 안 어울린다는 생각에 포기하려고 한다.
인간 관계에 서툰 아오이가 지금까지 처럼 친구로 지내지 못 한다면.
세 사람의 관계는 여기서 없어지는 걸까.
치하루 짱도 이즈미 짱도, 어디서 좋은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과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걸까.
언젠가 아오이도 멋진 사람을 만나고, 다시 새 사랑을 하고.
그렇게 결혼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걸까.
그것도 정답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셋의 마음을 지켜봐 온 내 고집이다.
난 셋이 확실히 답을 냈으면 한다.
가장 좋은 미래를 고를 수 있게, 아오이의 등을 밀어주고 싶다.
그 결과 아오이가 어떤 선택을 하건 그 사랑을 이뤄주고 싶다.
그 날 밤, 나는 꿈을 꿨다.
"어, 여긴……?"
낯 익은 방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여긴 예전 내 방이다.
방 중간엔 사시 사철 코타츠가 놓여 있고, 침대가 있고, 책상이 있고, 그리고 벽이 없었다. 사방이 영문 모를 하얀 공간과 이어져 있다. 모래사장 한 군데만 잔디가 자란 양 영 불편하다.
"꿈인가…… 꿈 꾸는 건 처음일지도."
코타츠에 발을 밀어넣고 깨달았다.
어!? 몸이 있어!
죽어서 크질 않았으니 당연히 고등학생의 몸이다. 죽었을 때처럼 교복을 입은 상태였다.
오오~, 이거 오랜만이네. 일어 서서 팔을 휙휙 돌린다. 관엽식물이 된지 어언 5년. 나는 오랜만에 동물로 돌아온 것이다.
"어……"
응?
돌아 보자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언, 니?"
그건 초등학생인 아오이였다.
"얼레, 아오이 너 쪼그만하네?"
아오이는 깜짝 놀라 내게로 달려왔다.
이런 이런.
"언니, 언니!"
"응석꾸러기네, 아오이."
"계속, 꿈에 한 번도 안 나왔잖아 언니. 드디어 만났어."
"어 그랬나. 이야 미안함다."
질책하는 듯한 눈빛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뭘까, 영혼이 식물에 붙잡혀 있는 건가……? 무섭게.
"그러지 말고 거기 앉아."
"응……"
아오이도 코타츠에 다릴 넣고 내 옆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쪼그만 아오이로 눈 보신을 하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아오이, 무슨 고민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네."
"어? 그, 그런가."
"그럼. 언니는 뭐든 다 알아. 아오이를 계속 지켜봐 왔는걸."
"에헤헤……"
힘 없이 웃던 아오이는 금세 고개를 숙였다.
"있지 언니."
"응."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몰라."
"응."
"근데, 그 사람은 대단해. 나 계속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는데……. 아직, 발끝만큼도 쫓아가질 못해서……"
"응."
"이런데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민폐겠지……. 엄청 인기 많은 사람인데. 세상엔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잔뜩 있으니까……."
"아오이는 누가 좋아?"
"그건…"
"뭐 어때, 오랜 만에 봤잖아. 자매 토크 하자. 자 말 해 봐."
"……이즈미 짱이랑 치하루 짱."
"둘이구나. 아오이는 욕심쟁이네."
"둘 다 좋아하는 건, 이상, 하지……한……"
"그 둘의 어디가 좋아?"
아오이는 더더욱 고개를 숙이고.
하지만 뺨은 따스한 색으로 물들였다.
"이즈미 짱의 머리카락이 좋아."
"응."
"치 짱의 냄새가 좋아."
"응."
"부드러운 이즈미 짱의 손가락이 좋아."
"응."
"치 짱이 웃을 때가 좋아."
"응."
하나 하나 맞장구 치며 아오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둘 다 아오이를 아주 좋아해."
"그럴, 까……?"
"그럼. 괜찮아. 언니는 뭐든 다 알아. 걔넨 꼭 네 고백을 받아 줄거야. 내 콜렉션 다 걸 수도 있어."
이게 꿈이라도 상관 없다.
모처럼 아오이를 만났으니까, 나는 아오이에게 모든 걸 말해주고 싶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관엽식물이 된 걸지도 모른다.
모에모에 시츄에이션을 만끽하는 게 아니라, 아오이의 행복을 이끌어주기 위해, 말이다.
"둘 중 누구를 골라도 꼭 행복해질 거야. 그 아이들이 아오이를 행복하게 해주고, 아오이가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거야."
아오이는 불안한 듯 나를 쳐다봤다.
"……나, 언니가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 언니가 없으면,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겠어……."
초등학생 그대로인 아오이는 매달리듯 둥근 눈에 내 미소를 비춘다.
"둘 다 착해서 고백하면 사귀어 줄 지도 모르지만…… 그치만 마음 한 켠에서 민폐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 무서워. 가슴 안 쪽이 꽉 죄여와서, 머리가 어질어질 해. 또 열이 나서, 둘이 걱정하게 만들고, 아프면 가게도 못 가게 되니까……. 나, 언니가 있어줬으면 좋겠어. 언니는 절대 날 혼자 두지 않으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오이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는다.
"언니는 이제 끝."
"에……"
"아오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건 치하루 짱이랑 이즈미 짱이야."
아오이는 검은 머리를 흔들며 내 소매를 붙잡는다.
"싫어, 그런 거, 겨우 만났는데."
"미안, 그래도 깨면 난 없을 거야. 화분에 뿌리 내린 식물이 아니니까, 아오이는 똑바로 걸어가야지."
"계속 외로웠어."
"아니지."
나는 웃으며 아오이의 코 끝을 눌렀다.
아오이는 "응?" 하며 고개를 든다.
"넌, 아니잖아."
"난……"
"즐거웠을 거야. 저렇게 멋진 친구가 있었으니까. 있잖아, 없어진 사람을 품진 마. 곁에 있는 사람을 떠올리면. 앞으로 찾아 올 밝은 미래를 믿고 나아갈 수 있다, 아닐까? "
치하루 짱은 썩 자주 우리 집엔 안 왔지만, 늘 아오이를 걱정해줬다. 학교에선 늘 만났다. 이즈미 짱은 언제든 아오이 곁에 서 있었다. 이즈미 짱도 아오이 덕에 고민을 덜어냈다.
그런 일들을 없었던 셈 쳐선 안 된다.
아오이는 줄곧 행복했다.
"내 말이 안 믿기지?"
"으응, 그렇지 않아. 언니를, 믿을게."
믿는다, 는 말이 너무나 아름답게 퍼져서 아, 아오이는 정말 착한 아이로 커 줬구나 싶었다. 모두 다 아빠, 엄마 그리고 친구들 덕분이다.
늘 곁에서 아오이의 슬픔을 같이 받아 줬는걸.
"언니……"
"사랑한다, 아오이."
"나도 사랑해, 계속 사랑해, 영원히 기억할거야."
아오이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쥐었다.
그 따스함은 내겐 벌써 잊혀져 가던 것이다.
누군가의 온기는 이렇게 기분 좋은 거구나.
"응, 고마워. 나도 잊지 않을게 아오이."
그 때 나는 떠올렸다.
죽기 직전에 본 것. 손을 잡고 걷던 초등학생 커플.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믿는 듯한 웃음을.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난──.
계속 그 아이들을──.
문득 보자 아오이는 고등학생이 돼 있었다.
키는 나랑 비슷했고.
나이도, 이젠 같다.
"알겠지, 아오이?"
"언니, 고마워…… 나 확실히, 확실히 말 할게."
"응, "
줄곧 안아 주고 싶었다, 아오이를 꼭 안아줄 수 있어서 나도 정말로 행복했다.
이제 남은 건 젋은 친구들한테 맡겨 볼까요.
"행복하렴, 아오이."
의식을 놓고서부터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만약 아오이가 누군가를 고르면, 남은 누군가한테 내가 가 줄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오이는 애인을 얻는 대신 친구를 잃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건 분명, 괴로운 선택이리라.
셋 중 누구든 우는 건 보고 싶지 않다.
그래도, 결말을 내긴 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백합 커플의 꽁냥꽁냥 생활을 지켜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 때 내 의식이 떠올랐다.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 아오이는 누군가와 전화하는 중이었다.
여자 아이를 불러 내는 모양이다.
희한하게도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잤는데 어째선지 아직도 아주 졸리다.
자기가 고백할 사람을 기다리는 아오이는 팽팽한 실 처럼.
하지만 어쩐지 굉장히 아름다웠다.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는 이런 마음일까, 하면서.
마지막까지 아오이를 지켜보겠다고 결심한 나는, 그 순간을 아오이와 함께 기다렸다.
그리고, 이전에 소녀였던 아이가 왔다.
아오이의 마지막 선택은──.
"저기, 미안해, 갑자기 불러 내서."
"웃지 말고 들어 주세요."
"……좋아, 해요."
"옛날부터, 아주 아주 옛날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요."
"당신이 곁에 있는 게 너무 기쁘고, 당신과 함께 있는시간이 좋고, 당신이 해주는 말이 좋고, 당신이 웃는 모습이 좋아요."
"미움받는 게 무서워서 계속 말 못했는데. 그치만 힘을 준 사람이 있어서……. 그러니까, 분명히 말 할게요. 용기 낼게요."
"앞으로 또 셀 수 없이 아프고, 쓰러지고, 민폐를 끼칠 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래도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저 수공예에 공을 들여서, 액세서리나 마크도 만들줄 알고, 바느질도 잘 하고…… 그리고, 저한테, 키스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랑 ■■■ 짱이 사이 좋게 지내는 게 싫으니까……"
"저 내내 어린애 같아서, 이런 마음을 깨닫는데 몇 년이나 걸렸지만, 그치만, 드디어 '좋아한다'는 마음을 알게 돼서."
"저 만을 봐 주세요."
"사랑해요."
"저랑 사귀어 주세요."
"저야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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