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엽식물이 돼서 백합 커플의 꽁냥꽁냥 생활을 지켜보는 이야기 (미카미 테렌 저)
◆초등학생 편
내 이름은 우에다 하나, 어디에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 굳이 특징을 꼽으라면 남들보다 조금 소녀들의 연애── 백합물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점이려나!
평소와 다름없는 겨울 귀갓길, 오늘은 소소하게 기쁜 일이 있었다.
조금 일찍 학교가 끝나서 걷고 있었는데 손을 꼭 잡고 집에 가는 초등학생 둘을 목격한 것이다.
하~ 귀엽다아, 초등학생 백합……. 신성해…….
빨간 란도셀이 뿅뿅 흔들린다.
따스하게 뒷모습을 지켜보며 멋대로 망상한다.
쟤들, 분명 초등학생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같이 놀다가, 중학생쯤 되서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생 때 사귀기 시작하고 최종적으로는 시부야구에서 골인하겠지.
아니, 쟤들이 어른이 됐을 때면 분명 법제도 발전해서 여자끼리 결혼하는 게 당연한 사회가 돼 있을 것에 틀림없다.
아니, 틀림 없다니. 남한테 맞길 게 아니지.
그러기 위해선 내가 국회의원이 돼서 조금이라도 이 나라를 친백합적으로 만들기 위해 매진해야지. 우에다 하나는 그런 목표로 고위 공무원이 되려 합니다.
안심하렴 초등학생 백합커플. 백합의 미래는 밝단다. 내가 너희를 지켜줄게!
그런 생각을 하며 초등학생 커플을 지켜보며 걷던 나는 길가에 '위험! 절대 출입 금지!' 간판 옆의 떡하니 열린 맨홀에 떨어져 죽었다. 향년 17세다.
국회의원이 되려던 꿈은 여기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죽었을 나는 문득 깨어났다.
뭐지, 뭔가 이상하다. 왜 나는 의식이 있는 거지. 떨어지는 순간의 공포 영상도 아직 머릿속에 꼭꼭 들러붙어 있는데.
시야는 희미하다. 여긴 무슨 방 같은 걸까. 내 방은 아니지만 낯이 익은 것 같았다.
침대에 누워있지도 않은 모양이다. 온 몸의 감각이 굉장히 애매하다. 상당한 중상을 입었던 걸까.
응……?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 여자아이다.
여자아이는 침대에 풀썩 쓰러지곤 훌쩍훌쩍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 언니……"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죄여 오는 느낌이었다.
뭔가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갑작스런 졸음이 덮쳐왔다. 도저히 깨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나중에 깼을 때, 저 작은 여자아이가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바라며.
꿈 속에서 나는 우는 소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난 백합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직접 여자애를 이래저래 하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없다. 보고 있는 게 좋은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여자아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었다. 절대 꺼림칙한 게 아니라 순수하게, 어떻게든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울고 있는 여자 아이를 보면 나도 슬펐다. 끝없이 마음이 가라앉는다.
적어도 여자 아이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대신해주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아이는 나를 올려보고 "언니"라고 말했다.
──언니.
촉촉한 눈에 내 얼굴이 비친 건 그 때였다.
나는 모든 걸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떴다.
이번엔 아까보다 선명하게 기억이 돌아왔다.
여기는 우에다 하나의 동생── 우에다 아오이의 방이다.
어쩐지 낯익다 싶었다. 옆 방이잖아. 하지만 그건 그렇고 왜 내 방이 아니라 아오이네 방에 있는 걸까.
답은 금세 밝혀졌다. 아니, 눈 앞에 전신거울이 있었기에 그것을 통해 명확해졌다.
나/는/관/엽/식/물/이/돼/있/었/다.
……응.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지만, 사실이다. 나는 관엽식물이 돼서 아오이짱네 방에 떡하니 놓여있는 것이다.
이 바로크 벤자민은 아오이짱 생일에 내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선물한 것이다. 꽃이 아니라 관엽식물을 준 건 초등학생적으로 괜찮을까 싶었지만 아오이짱 본인이 '오래 가는 게 좋아'라고 했기에 이걸로 한 것이다. 이파리가 웨이브 진 게 귀엽다고 기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내가 관엽식물이…….
온 몸의 감각이 애매한 것도 이해가 간다. 관엽식물이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주위를 볼 수 있는 걸까. 관엽식물인데.
혹시나 아직 인간의 기능이 남아 있는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한참 용을 써봤지만 역시 뿌리가 쑥 뽑혀나와서 걸을 수는 없었다. 소프트 호러기도 하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난다. 아무래도 소리나 진동도 느껴지는 모양이다. 토마토같은 건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며 키우면 달아진다고 하니 대충 그런 거겠지. 잘 모르지만.
문이 열렸다. 노크를 안 해서 깜짝 놀랐지만 들어온 건 아오이짱이었다. 자기 방에 들어오는 데 일부러 노크를 할 리가 없지.
그 뒤에 보이는 엄마는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아짱, 억지로 학교에 안 가도 돼. 한동안 좀 쉬렴."
"응."
아오이짱은 빨개진 얼굴로 대답하곤 느릿하게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엄마가 포카리 스웨트랑 과자를 머리맡에 뒀다.
"조금씩이라도 먹어보렴, 아주 조금이라도 돼"
"……응"
아까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오이짱의 이마를 쓰다듬고 엄마가 방에서 나갔다.
아오이짱은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오이짱은 옛날부터 소풍 전날에 열이 나는 애였다. 아마 스트레스같은 것 때문이겠지만, 요즘 들어 스트레스를 느낄 만한 뭔가가 있던 걸까.
떠올리려고 머리를 쓰다 금방 깨달았다.
혹시…… 내가 맨홀에 빠진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
"언니……"
긍정하듯 아오이짱이 울먹인다.
그만 등골이(없지만) 오싹해져버렸다.
그, 그렇구나…… 아오이짱은 아직 초등학교 5학년인데 사고로 언니를 잃은 거였지…….
아, 안쓰러워! 아오이짱 안쓰러워!
그래서 학교도 쉬고, 달뜬 채 흐느끼는 거구나…….
으윽,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오이…….
언니가 초등학생 백합 커플에 정신이 팔려서 망상의 날개를 펼치지만 않았어도…….
틀렸다,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다.
지금 언니가 해 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방 안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산소를 내뱉는 것 뿐이다. 나는 힘차게 심호흡했다.
습-하 습-하, 전 테니스부의 폐활량을 보여주는데 아오이짱이 벌떡 일어났다.
"아 맞다, 물, 줘야지"
방에 놓인 물뿌리개를 들고 아장아장 이쪽으로 온다.
아오이짱은 눈이 크고 생김새가 반듯한 미소녀다. 엄마를 닮아서 굳이 따지자면 애교형(상당히 배려한 표현) 이었던 나지만, 아빠를 닮은 아오이짱은 크면 미인이 되겠지.
소심하고 낯을 가리고, 내 뒤를 언니 언니 하며 졸졸 쫓아다니던 동생이 마음아파하는데 아무 것도 못 해주면서 뭐가 언니야─.
나는 팔에 젖먹던 힘까지 쏟았다. 흐으으읍.
적어도 저 작은 몸을 안아, 안아줘야 한다. 끄으윽.
틀렸다. 이파리 하나도 흔들릴 낌새가 없다.
이럴 거였으면 아오이짱한테 식충식물 파리지옥을 선물할 걸 그랬다. 눈 앞에서 이파리를 움직이면 어떻게 뜻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오이짱이 울음을 터트리고 내가 꺾여나갈 확률도 급상승하지만.
아오이짱은 나(라기보단 관엽식물)을 가만히 쳐다본다. 지금 이 기회에 목소리를 내 보지만 바로크 벤자민의 이파리엔 소리를 낼 기관이 없었다.
물뿌리개를 타고 물이 뿌려진다. 어쩐지 몸이 서늘해진다. 샤워를 하는 듯한 기분이지만 동시에 맛좋은 물을 꿀꺽꿀꺽 삼키는 느낌도 들었다. 묘하게 기분이 좋다.
헉…… 나 지금 혹시 알몸인 거 아냐…….
관엽식물이 되긴 했지만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인 동생이 알몸인 나한테 물을 끼얹는거 아냐……?
비도덕적인 느낌이 들 것 같다.
"있지, 언니"
철렁! 했다.
혹시 아오이는 내가 관엽식물이 된 걸 알아챘나──!?
"언니가 죽고 나서부터, 매일 외로워……"
그럴 리가 없었다. 아오이는 그저 독백하는 것 뿐이다.
윽, 미안해…….
"왜 죽은 거야, 언니……"
언니가 초등학생 백합에 정신을 팔지만 않았어도…….
"늘 밝고, 재밌고, 미인이고, 멋졌던…… 언니가 없어서, 나, 외톨이가 되버릴 거야……"
엥, 그거 누구 얘기야? 나? 나?
혹시 자매간 금단의 백합 커플 루트가 있었던 거야? 젠장~! 아까운 짓을 했다~! 조금만 더 빨리 손을 댔으면~!
아냐. 나는 당사자가 되는 것보다 지켜보는 게 좋아. 아니 아니지,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이상한 사건이 연이어서 나도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든 아오이짱이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건가! 지켜보기만 하는 건 괴로워!
아오이의 울음에 덩달아 나도 울 것 같다.
그 때, 초인종 소리가 띵동 울렸다.
아오이는 못 듣고 내게 물을 주고 있었지만 방 문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났다.
엄마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오이, 친구가 프린트 주러 왔는데 잠깐 얼굴 좀 볼래?"
"……지금, 물 주는데."
"치하루 짱이 와 줬단다."
"……"
아오이짱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자 엄마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잠시만 기다리렴" 하고선 방에서 나갔다.
"치짱" 아오이가 말했다.
곧 나타난 건 조금 키가 크고 란도셀을 맨 여자 아이였다.
치짱, 나츠메 치하루짱은 우리의 소꿉친구다. 집이 가까운 것도 한 몫 해서 셋이서 허구헌날 같이 놀았다.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던 치하루짱은 곧잘 나한테 도전하고, 혼자 떨어지기 싫은 아오이짱이 쫓아오다 넘어지는 게 일상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주말에도 부활동에 열중하고서부턴 시간을 많이 내지 못했지만 우리 셋은 꼭 자매 같았다.
"자, 프린트"
"응"
치하루짱은 무뚝뚝하게 란도셀에서 꺼낸 프린트를 내밀고 아오이짱이 우울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서로간에 무슨 얘기를 해야 할 지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생일이 석 달 빠른 언니, 치하루짱이었다.
"벌써 일 주일째 안 오는데, 몸은 괜찮아?"
"아직 열이 좀 있으려나"
"그럼 누워있어야지"
치하루짱이 침대를 가리키지만 관엽식물(나) 옆에 털썩 앉은 아오이짱은 "응"하곤 또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오이가 없으면, 학교, 재미없어"
"……"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와 봐"
아오이짱이 우울한 표정을 짓자 치하루 짱도 표정이 굳었다.
이해해, 이해하고 말고. 나는 치하루짱 네 마음이 손금 보듯 훤하다.
치하루짱은 분명 아오이짱을 위로해주러 온 거다.
하지만 그럴듯 한 경험도 없으니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만 무뚝뚝하게 말을 던져버리는 거다.
나는 치하루짱을 응원한다.
힘내라. 힘내라 치하루짱. 보는 것밖에 못하는 내 몫까지. 초등학생에겐 부담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아오이"
하지만 마음이 꺾였는지 치하루짱까지 고개를 숙여버렸다.
바로 옆에 있는데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런 치하루가 당황하고 답답해하는 건 보기 힘들다.
그 때 문득 생각이 든 듯 치하루짱이 나를 가리켰다.
"저 관엽식물, 하나짱이 준 거야?"
"응."
맞습니다. 지금 저는 굳이 따지자면 하나짱이 아니라 쿠사짱이지만요. (일본어로 하나는 꽃, 쿠사는 풀; 역주)
"이파리 빙글빙글 도는 거, 귀엽네"
"그치"
치하루짱이 이파리를 쿡쿡 찌르자 아오이짱도 따라했다.
"뭔가 하나짱이랑 닮은것도 같아"
"아…… 그러게"
분명 나는 곱슬머리라 머리카락이 꼬이는 날이 많다. 몇 번 스트레이트 매직을 해 봤지만 금세 풀리는 거랑 가격이 장난 아니라서 그냥 포기하고 짧게 하고 다니지만.
하지만 날 닮았다고 바로크 벤자민을 준 건 아니다. 그렇게까지 자기애가 격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닮았지, 언니랑"
그렇게 말한 아오이짱은 쿡쿡 작게 웃었다.
오, 오오……!
치하루 짱은 아오이짱 바로 옆에 앉아서 손을 내밀었다.
"저기, 내가 물 줘 봐도 돼?"
"응. 언니도 아마 기뻐할 거야."
벌써 완전 언니처럼 대하지만, 사실 그 자체라서 할 말이 없다.
이번엔 치하루가 물을 끼얹었다. 차가워서 기분이 좋다. 그만 허리가 휘고(없지만) 소리를 흘릴 것 같다. 이 녀석들 열 일곱 살 언니의 몸을 희롱하면서 싱글벙글하잖아. 이 얼마나 음란한 초등학교 5학년이냐.
물뿌리개를 들어올린 치하루는 조금 주저한 다음 마음을 굳힌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아오이 짱의 손을 잡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나 있지, 기운이 나는 마법, 알아"
설마 하는 나.
그건 예전에,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치하루 짱이 아스팔트에서 무릎을 거창하게 긁어먹고 피를 콸콸 흘리며 울었을 때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해 준 그게 아닐까.
기억하고 있었냐, 치하루짱.
……그러면, 이 다음에 기다리는 건.
아오이 짱은 강아지처럼 순수한 눈으로 갸웃했다.
"……그런 게, 있어?"
"응. 다른 사람한테는 못 해주지만 아오이한테는 해 줄수 있는 거야. 해 줄까?"
"응."
"……그럼, 눈 감고 있어"
아오이 짱은 상대를 굳게 믿는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그에 비해 치하루 짱은 진지하게 고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에잇, 머리를 움직인다.
치하루 짱이 아오이 짱의 이마에 쪽 하고 입술을 갖다 댄 것이다.
초등학생 백합이다…….
아오이는 깜짝 놀라서 이마를 양손으로 가린다. 그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키스한 치하루짱도 눈을 돌리고 뺨을 붉게 물들였다.
신성하다.
마치 서로의 영원함을 맹세하듯, 치하루짱은 용기 내어 말했다.
"있잖아, 괜찮아 아오이. 나는 계속 아오이 곁에 있어 줄거야."
"……치짱, 그건."
순수한 눈빛을 받은 치하루 짱은 당황하면서도.
"딱히, 이상한 게 아니라…… 그, 왜, 아오이는 낯을 가리니까, 아는 사람이 옆에 없으면 금방 울잖아?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짱 몫까지 있잖아
……아오이 곁에, 있을테니까……"
엄청 멋지다. 안기고싶어.
그런 사랑의 고백 같은 말에, 아오이짱은 한동안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코 어색한 침묵이 아니라.
"아 미안 아오이, 열나는데 이상한 소리 해서."
"아냐, 기뻐"
음울했던 아오이짱의 얼굴에 웃음이 살며시 핀다.
그건 구름 틈새로 비치는 빛 같았다.
아오이짱은 수줍어하면서도 두 손으로 치하루짱의 손을 꼭 잡았다.
"치짱, 계속, 계속 같이 있어줘. 치짱까지 없어져버리는 건, 싫어."
"당연하지. 아오이를 혼자 두면 언제 아파질 지도 모르는데. 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고마워, 치짱……"
두 사람은 한동안 손을 맞잡고 있었다.
아오이짱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지만 치하루짱은 내내 부끄러워 보였다.
집에 갈 때도 치하루짱만은 꼭 남자애처럼 부끄러워 하며 갔다.
하~.
이 감정이 애정인지 우정인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치하루짱은 아오이짱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보인다.
하지만 몰랐었다. 치하루짱이 아오이 짱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전혀 눈치도 못 챘다.
저 또래 애들은 언니들을 동경하는 법이니, 따져보면 내가 신경 쓰이는 게 정석일텐데……. 나는 어디까지나 방관자…….
아니아니, 잘 된 거지. 그렇기 때문에 아오이가 기운을 차린 거다. 자기가 외톨이가 아닌 걸, 말 만이 아니라 직접 느낀 거다. 그건 모두 치하루짱 덕분이다.
내가 말하기도 뭣하지만 언제까지고 없는 사람한테 묶여있지 말고 앞을 향해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국회의원을 향한 길은 막혀버렸지만, 이건 어쩌면 나쁘지 않은 제 2의 인생(식물생?)일지도 모른다.
나도 앞으로 관엽식물로서 아오이짱의 생활을 눈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지켜봐줄게.
이 특등석에서, 초등학생 백합을 듬뿍 말야!
아오이 짱은 다음 날부터 학교에 가기 시작했다.
아직 이따금 먼 곳을 보며 외로운 표정을 지을 때는 있지만 열은 많이 내려간 모양이다.
잘 됐구나 잘 됐어.
또 내가 없어서 그런지 아오이짱과 치하루짱은 방에서 노는 일이 잦아졌다. 아오이 짱은 밖에서 하는 놀이에 익숙하지 않아서 치하루 짱이 맞춰주는 거겠지. 착하다. 신성하다.
내가 없어지고서 2주쯤 지난 어느 날.
오늘은 둘이서 수공예다. 실로 복주머니를 만드는 모양이다.
"아오이는 이런 거 잘 하네……"
"그런가"
"나는 꿰고 기우고 하는 건, 영 안 돼. 뭔가 바늘같은 게 무서워."
뒤로 벌러덩 눕는 치하루짱. 그 마음 안단다. 나도 재봉 숙제는 거의 엄마가 해줬었다.
그런 한 편 아오이짱은 묵묵히 바늘을 움직인다.
아오이짱은 이렇게 담담하게 하는 작업을 좋아한다. 엄마가 읽던 잡지에 따라온 십자말 퍼즐을 풀거나, 게임 레벨 올리기만 하는 등등.
쪼끄만 초등학생이 아기자기한 작업에 몰두하는 걸 보면 어쩐지 귀여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내가 장난을 치면 "진짜~"하고 화를 낸다. 저는 글러먹은 언니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치하루 짱도 질리기 시작했는지.
"저기 아오이. 다른 거 하자"
"그래, 뭐 할래?"
"음~"
작업이 한 단계 끝난 모양이다. 재봉상자에 정리하는 아오이짱과, 마찬가지로 정리를 끝낸 치하루짱은 끙끙 고민했다.
"아오이는"
"응"
"반에 좋아하는 남자애 없어?"
"에엣"
갑작스레 화제가 바뀌자 아오이짱이 놀라서 부드러운 검은 머리를 파들파들 흔들었다.
"없어 없어, 난 아직 그런 거 이르단 말야, 없어"
"당황하면 의심스럽단 말이지"
그렇지.
"없다니까 없다니까"
아오이 짱은 찍어누르듯 되풀이했다.
"사이 좋은 남자 애도 없고, 얘기한 적도 없어"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없어"
끄덕했다.
왜 갑자기 이런 걸 묻는지, 아오이 짱은 모르는지 조금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뭐 말하는 걸 보아하니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 즈음에서 질문공세가 끝나자 아오이 짱은 일어섰다.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으-이"
아오이 짱이 가자 마자.
치하루 짱은 맥이 풀린 듯 푸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치하루 짱의 뺨이 조금 붉다.
급하게 실내를 둘러보던 치하루 짱의 시선은 이윽고 내 앞에서 멈췄다.
"하나짱…… 나, 이상한 걸까."
뭐가 말이니, 고민하는 소녀야.
이 내가 잎맥 구석구석까지 들어줄게.
"뭔가 나, 요즘 이상해. 하나짱이 없어지고서부터, 외로워서 우는 아오이를 보면, 가슴이 꾹- 조이는 느낌이 나거든"
응응.
그건 한 마디로 사랑이란다.
"아오이가 다른 반에서 체육 할 때 이상하게 안절부절 하게 돼서, 지금 뭐하는 걸까, 하고, 아오이 괜찮을까, 하고, 그런 생각만 계속 들어"
알겠다. 그건 사랑이야.
초등학생 백합 커플의 탄생을 나는 축복하고 싶다.
치하루 짱은 분한 듯 이를 악 물었다.
"……정말로 하나 짱이 살아있었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왜"
미, 미안해. 얼빠진 생각을 하던 머리에 찬물을 맞은 기분이다.
아니 진짜로 초등학생 백합 커플에 넋이 나가서 미안해요…….
"하아, 어떻게 된 걸까…… 풀죽은 아오이를 보고 있기 힘들어서, 앞으로도 계속 울고 슬퍼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그래서……"
치하루 짱은 자기 안의 말을 찾아 꺼내는 모양이다.
"나, 어쩌면 아오이를……"
꿀꺽. 군침을 삼키면서 치하루 짱이 다음에 할 말을 기다린다.
아오이 짱은 천장을 올려보며 툭 내뱉었다.
"동생, 처럼…… 여기는 걸까"
나는 내가 관엽식물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엎어질 뻔했다.
그렇구나, 동생 처럼, 말이지…….
하지만 소녀는 납득 했는지 천천히 표정을 굳혀갔다.
"그렇구나…… 없어진 하나 짱 몫까지 내가 언니가 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아오이가 걱정된 거야…… 그래, 맞아 그렇구나! 나 알겠어 하나 짱, 고마워!"
구김 없이 웃으며 이파리를 검지로 쿡 찔렀다.
아니, 너, 언니는 동생 이마에 키스같은 거 안 할텐데…….
그런 소리를 하면 치하루 짱의 거기에 그거 한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그 땐 나도 당황해서 달리 어떻게 할 지 생각이 안 났던거야.
그렇게 잠깐의 참회가 끝나고, 나갔던 아오이 짱이 돌아왔다.
"나 왔어~. 치짱 어디 전화 했었어? 말소리가 들리던데."
""아, 하나 짱한테 고민 상담 좀 했어."
"응, 언니?"
아오이 짱도 힐끗 관엽식물을 본다. 이 방에서 하나 짱은 아무래도 이 관엽식물인 모양이다. 언젠가 애인이 생겼을 때 '언니예요'하고 소개하진 않을지 긴장된다.
치하루 짱은 아오이 짱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해 하는 아오이 짱은 얌전히 치하루 짱에게 등을 기댔다.
"나 있지, 아오이를 친동생이라고 생각해"
"으, 응…… 그래?"
아오이 짱의 머리를 꼭 안으며 치하루 짱이 다시금 말했다.
"그러니까 아오이도 힘든 일이나, 안좋은 일이 생기면 뭐든지 나한테 얘기해. 하나 짱 몫까지 내가 노력할게."
"응……"
하지만 아오이 짱은 그런 치하루 짱의 뺨에 손을 댔다.
"……그치만 그건 치하루 짱도 똑같다?"
아오이는 미소지으며 뒤를 돌아 치하루 짱의 앞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치짱도 언니가 없어져서 엄청 외로운 거 알고 있어. 그러니까, 우린 똑같아. 나도 언니 대신이 될 게."
"그건."
치하루 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딱히, 아오이가 해 줄만한 건……"
"적어도 바느질이라면 내가 잘 하잖아."
책상 위에 널부러진 치하루 짱의 준비물 주머니를 열었다. 치하루 짱은 '윽' 하는 표정을 지은 다음 작게 웃었다.
"뭐, 확실히 그렇긴 하네. 그럼 둘이서 하나 짱 몫을 나눌까, 아오이 언니"
"응, 나 열심히 할게 치하루 언니."
둘은 웃으면서 고양이 자매처럼 서로 몸을 기댄다.
연애감정은 없었지만(솔직히 치하루 짱이 좀 수상하긴 하다) 어쩐지 굉장히 신성한 모습이다.
나는 그만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모습을 훔쳐볼 수 있는 것도 모두 내가 죽은 덕분이다. 고마워 우에다 하나. 네 죽음은 두 소녀의 인연을 굳건하게 만들기 위한 접착제였던 거구나……. 우에다 하나, 너는 그걸 위해 태어났던 거구나…….
올 겨울은 오래 갔다.
관엽식물이 죽지 않게 늘 난방을 켜 주시는 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열심히 공기를 깨끗하게 만들겠습니다.
올 겨울에 아오이 짱이 아프면 꼭 치하루 짱이 병문안 와 줬다.
"미안해 치짱"
"정말이지 아오이는 진짜 약하네. 프린트는 책상 위에 놔 둘게."
"고마워……"
목도리를 풀고 란도셀을 놔 둔 치하루 짱은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벌써 몇 번이고 이마뽀뽀 했는데 아직도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침대에 누운 아오이 짱에게 다가간다.
그 손을 꼭 잡고.
"……그리고, 또 마법"
"응"
땀으로 촉촉한 아오이 짱의 이마에 작은 입술을 갖다 댄다.
그 광경의 아름다움에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린다. 관엽식물이 돼서 행복하다.
"금방, 나을거야"
"에헤헤…… 고마워……"
히쭉 웃는 아오이 짱을 보고 치하루 짱이 입술을 내민 채 붉어졌다.
헤어질 때 한 번 더 이마에 키스했다.
쪽 하고 촉촉한 소리가 났다.
아오이 짱은 귀찮게 만들어 신경 쓰이는 표정으로.
"치짱이 아프면 내가 마법 걸어줄게."
"앗, 그건 됐어. ……부끄럽게"
눈을 깜빡깜빡 하는 아오이 짱.
"부끄러운 거 한 거야?"
"앗,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닌데!"
자기 무덤을 판 치하루 짱은 순간 당황했다.
아오이 짱은 이불을 입가까지 덮었다.
"이거, 부끄러운 거구나…… 역시, 친구라도 안 하는 거지……"
"아냐아냐, 해. 완전, 막, 누구하고든."
날아드는 시선에 치하루 짱은 눈을 피했다.
"뭐, 그렇게는, 안하려나"
관자놀이에서 땀이 도르륵 흐른다. 누가 아픈 사람인지 모를 안색이다.
커흠 하고 헛기침을 한 치하루 짱은 가만히 아오이 짱을 쳐다본다.
"안 해. 나도, 이런 걸 하는 건 아오이 뿐이야."
아오이 짱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렇구나. 뭔가 기쁘다. 진짜 있지, 조금 나아진 것 같아. 치 짱의 입술 부드러워서 기분 좋아."
굉장히 대담한 얘기를 들은 치하루 짱은 살짝 몸을 돌렸다.
"기분 좋다니, 너……"
"응?"
아오이 짱은 물음표를 띄웠다. 자기가 이상한 얘기를 했다는 자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것이 정신 연령의 차이……!
치하루 짱은 아오이 짱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밖에서 그런 얘기 막 하고 다니지 마. 부끄러우나까."
"응, 둘 만의 비밀이네."
"그래, 비밀이야. 약속 잘 지키면 또 해 줄게."
"아픈 게 기다려지면 어떡하지"
"얘도……"
장난스레 웃는 아오이 짱의 머리를 쿡 찌른 치하루 짱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그 다음 아오이 짱은 한 달에 한 번은 아프고, 그 때마다 병문안 온 치하루 짱이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 밀월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너무나 신성한 광경에 윤회전생의 이치를 넘어 해탈할 뻔했지만, 앞으로도 아오이 짱을 지켜보겠다는 강철같은 정신력으로 버텼다. 나만의 백합실을 두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6학년이 되고, 아오이 짱의 슬픔도 모래사장에 쓴 글씨가 파도에 씻기듯 떠나간 건가, 싶던 무렵.
치하루 짱은 웬일로 또 다른 여자애를 데려왔다.
얘가 또 길쪽한 속눈썹에 눈망울이 큰 청순한 미소녀 아가씨라는 느낌이라 나는 조금 가슴이 뛰어버렸다.
한 방에 속성이 다른 세 미소녀가 모인 이 상황. 미소녀가 뿜는 빛에 광합성이 잘된다야…….
"아, 이게 그 바로크 벤자민이예요?"
미소녀의 얼굴이 가까이서 나를 본다. 히익, 미소녀가 뱉는 이산화탄소다. 남김없이 전분질로 바꿔야 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응, 언니가 준 관엽식물인데 언니랑 닮았어."
"그렇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미즈하라 이즈미예요. 아오이랑 같은 반이고, 친한 사이예요."
아 예의가 참 바르시네요.
우에다 하나예요. 맨홀에 떨어져서 관엽식물 바로크 벤자민중입니다.
옆에서 하루 짱이 깜짝 놀랐다.
"대단하다 이즈미, 꼭 어른처럼 인사하네."
"어머니가 늘 예의 바르게 인사 하라고 하셔서요."
이즈미 짱은 고귀하게 미소지었다. 얘 진짜 초등학교 6학년인가. 로리콘이 만들어 낸 상상 속의 로리 아가씨 아닌가.
다행히 실존 인물인 듯, 세 사람은 란도셀에서 제각기 공부할 걸 꺼냈다.
초등학생 치고 발육이 좋은 치하루 짱과, 초등학생이면서 행동거지가 차분한 이즈미 짱 사이에 들자 우리 아오이가 얼마나 평범한 초등학생인 지가 보인다. 평범한 아오이 짱 귀여워.
"언니, 이즈미 짱은 우리랑 같은 학원에 다니고, 그리고 우리 반에서 제일 예뻐. 남자한테도 여자한테도 인기 있고, 아는 게 엄청 많아, 대단해."
생글생글 자랑스레 말하는 아오이 짱에게 이즈미 짱은 곤란한 듯 미소지었다.
"아니, 제일인지는……"
치하루 짱은 고개를 돌리며 붉은 얼굴로 중얼댔다.
너 아오이한테 완전 반했지. 내 눈은 못 속인다.
"아오이 양도 저번에 학원에서……"
"앗, 안, 안돼!"
아오이 짱의 이즈미 짱의 입을 막으려고 몸을 쭉 내밀었다.
"저번에 무슨 일 있었어?"
"그렇다니까요. 학원 남자애 한테 편지를 받았거든요. 그쵸~"
"치하루한테 절대 얘기 안 한다고 했으면서~!"
"저는 언니한테 얘기한 것 뿐이예요. 안심하세요 언니, 아오이 양은 매일 더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어요, 하고."
이즈미 짱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구나, 아오이……. 나도 뭔가 좀 충격 받았다.
너 벌써 남자한테 고백받을 정도로……. 내 인생에서도 그런 경험은 무엇 하나 없었는데……. 요즘 애들 참 조숙하네…….
그리고 나만큼 충격을 받은 건 당연히 치하루 짱이다.
"진짜냐…… 아오이, 너, 너어……"
"그냥 '다음에 같이 놀자' 한 것 뿐인데"
"여자애들 사이에선 아오이 양이 남자들한테 인기 제일 많다고 하던걸요."
"거짓말~!"
"나 남자들이랑만 피구 했었는데 아무 것도 몰랐어……"
"그야 아오이 양 귀엽잖아요. 그쵸~"
"그런 거 진짜 아니라니까~!"
이즈미 짱이 아오이 짱을 끌어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꼭 개 다루는 듯했다.
"학교에선 치하루 언니가 있어서 다들 피하는 거예요."
이즈미 짱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치하루 짱에게 날렸다. 치하루 짱은 이즈미 짱의 품에서 아오이 짱을 빼앗았다.
"당연하지. 난 하나 짱 대신에 아오이를 지킬 의무가 있어."
"나도 치하루 짱의 언니인데~"
아오이 짱의 비명은 묵살당했다.
치하루 짱은 아오이 짱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을 마주쳤다.
"왜 숨긴 거야, 아오이."
꼭 바람 피우다 걸린 현장 같다.
아오이 짱은 오들오들 떨면서.
"그, 그치만…… 부끄러웠단 말야……"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치하루 짱은 더없이 진지한 눈이다.
그 압력에 위축된 아오이는 도망칠 곳을 찾듯 주위를 둘러보곤.
"저, 저기, 나! 엄마가 주스 내 줄테니까 도와달래서, 밑에 다녀올게!"
손길에서 도망치듯 아오이 짱은 자리를 비웠다.
우리 동생은 겁쟁이입니다.
하아~ 치하루 짱은 책상에 업드렸다.
"역시 나도 학원 갈까~ …… 그래도~, 공부 하기 귀찮은데……"
"친구가 느는 건 좋은 일이예요."
지금까지도 생글생글 웃는 이즈미 짱을 흘끗 보며 치하루 짱은 앓았다.
"있잖아, 이즈미가 나를 봤을 때 역시 너무 감싸?"
"상당히. 저도 학원에서 겨우 말해봤구요. 하지만 자기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하는 얘는 치하루 양만 그런 게 아닐 걸요? 우리 반에도 꽤 있어요."
"그치만 그건 아오이를 위한 일이 아니지."
"그건…… 모르겠지만요"
이즈미 짱도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들 어른같은 얘길 하네…….
우리 아오이가 평균연령을 낮추는 느낌이다.
치하루 짱은 책상에 기대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오이는 몸이 약해서 금방 열 나고 아파. 요즘엔 별로 안 그러지만, 그래도 그 녀석, 열이 나도 아무한테도 얘기 안한단 말이지. 혼자 조용하다가 집에 가면 털썩 쓰러지는 거야. 왜 숨겼냐고 물어도, '부끄러워서'라잖아."
"보건실에 가는 것도 다들 주목하니까요."
"그치만 그럴 때 있잖아, 하나 짱이 있을 떈 대단했어. 척 보기만 해도 '아파질 것 같으니까 집에서 놀자', '오늘 학교에서 아오이가 아플 지도 모르니까 잘 봐주지 않을래?' 같은 소릴 하면, 진짜 그렇게 되는 거야. 하나 짱, 아오이에 대해선 뭐든지 다 알았어."
"멋진 언니였네요."
아뇨 그건 그냥 나잇값이라고 해야 하나, 경험치라고 해야 하나……. 똑같은 걸 초등학생한테 요구하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쩐지 나와의 추억이 굉장히 미화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하나 짱 대신이 돼 줘야 하는데……. 나는 아오이를 잘 몰라서 있지, 그래서 아무 때나 그 녀석을 지키려 드는 것 같아. 언제 아플지 불안해서."
"치하루 양의 마음, 이해가 가요."
초등학생 답지 않은 맞장구를 치는 이즈미 짱은 그런 치하루 짱에게 웃어보였다.
"치하루 양은, 아오이 양이 굉장히 소중한가보네요."
"모르겠어. 만약 그렇다면 아오이를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한단 말이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해요. 모두 다. 저."
이즈미 짱은 보살처럼 끄덕여보였다.
"치하루 양은 아오이 양을 좋아하는 거네요."
뭣!? 너무 돌직구 아냐!?
이 초등학교 6학년 뭐야…… 핵탄두 같은 거냐…….
치하루도 넋을 일었다.
"좋, 좋아한다고……"
"물론 친구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좋아하는 거요!"
"엑!?"
실화냐. 단언했다.
얼굴을 붉히는 치하루 짱과 대조적으로 이즈미 짱은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이 나이에 여자끼리 하는 연애를 이토록 순수하게 받아들이다니……. 이즈미 짱은 설마…… 내 동족!?
아무리 그래도 평범한 소녀의 정신인 치하루 짱은 거부감을 드러냈다.
"내가 아오이를 좋아한다니…… 그건 이상한 거잖아, 여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즈미."
"과연 정말 그럴까요? 치하루 양은 정말로 더없이 남자에 가까운 사고방식이지만, 하지만 여자끼리 연애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것 없어요."
슬쩍 칼같은 소리 하네, 이즈미 짱.
하지만 치하루 짱은 의지하듯 이즈미 짱을 보고.
"……그런, 거야?"
"네, 그럼요, 물론이죠. 여자들끼리 연애하는 걸 다룬 책을 '백합'이라고 하는데요, 세상엔 백합 책이 수없이 많아요. 아, 괜찮으시면 이거 한 번 읽어 보세요, 자 여기요."
그리고 이즈미 짱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소설이다. 마리미떼였다. 왜 그걸 늘 들고 다니는 거지.
이즈미 짱의 기세에 눌려선 치하루 짱이 받아 들었다.
"으, 응…… 이렇게 글자만 있는 책은 처음이지만, 고마워."
"꼭 감상을 들려 주세요. 저 오래 전부터 치하루 양은 그런 자질이 있을 것 같아서 건네줄 기회를 노렸거든요."
"무슨 소리야…… 영문을 모르겠어……"
초등학생 영재 교육이 시작되려 한다……!
"그런 게 아니라, 난 아오이를 여동생으로만 생각한다니까."
에~ 정말로~?
"에~ 정말인가요~?"
나와 이즈미 짱이 겹쳤다.
"뭐야 그 말투. 그 눈, 그 입."
이즈미 짱의 뺨을 당기는 치하루 짱. "하이아여~"라며 당하는 이즈미 짱은 즐거워 보였다.
그러던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치하루 짱이 열자 쟁반을 든 아오이 짱이 들어왔다. 컵 세 개와, 초코 과자가 얹혀 있다.
"늦어서 미안~"
아오이 짱은 애초에 왜 도망쳤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표정이었다. 쟁반으로 주스 이렇게 많이 옮기는 나 대단하지! 같은 표정이다.
"괜찮아, 이 쪽도 금방 얘기 끝났어."
치하루 짱은 뒤를 돌아 이즈미 짱을 보고 눈을 치켜 떴다.
"너, 혹시 가능성 얘기같은 거래도 절대로 아오이한테 얘기하지 마. 아오이가 놀랄 거니까."
"그건 앞으로 치하루 양이 어떻게 하냐에 달렸겠죠"
"뭐어……"
노려보는 치하루 짱을 보고 아오이 짱이 당황했다. 당황하는 아오이 짱 귀여워.
"아까 드린 책 잘 읽어 봐 주세요. 그러면 아무 말 안 할게요."
"너어…… 알았어, 볼 게, 제대로 본다니까."
"무, 무슨 얘기야?"
"……"
날아오는 시선에 아오이는 살짝 뒤로 밀렸다.
치하루 짱이 먼저 눈을 돌렸다.
"비밀."
"……비밀이야?"
"비밀이야 비밀. 그런 표정 짓지 마. 정말이지, 아오이도 편지 얘기 아무 말 안했으니까 쌤쌤이야."
뾰로통하게 말을 던지지만 그 뺨이 붉게 물든 것을 나와 이즈미 짱은 분명히 목격했다.
거기서 아오이 짱은 뭔가를 느낀 듯 말을 그쳤다.
어쩐지 기뻐보이는 웃음.
"그렇구나, 치하루 짱도 부끄러운 게 있구나."
"너어──"
치하루 짱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아냐! 하나도 안 부끄럽다고!"
그 다음 아오이 짱이 아픈 건 5월이었다. 월 1회 페이스다.
병문안 온 건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
꼼꼼하게 난로까지 켜 진 방에서 이즈미 짱이 프린트를 책상 위에 얹었다.
치하루 짱은 어째선지 불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 혼자 가도 된다고 했는데 왜 이즈미도 오는 거야."
"그건 제가 신뢰 받는 반장이라서 그렇겠죠. 선생님도 잘 부탁한다고 했었구요."
"평소엔 내가 갖다 준다고. 집도 가깝고. 너네 집은 반대쪽이잖아."
"그치만 전 아오이 양이 좋은걸요. 그쵸~"
아오이 짱이 빨간 얼굴로 그치~ 하고 웃더니 콜록콜록 기침 했다. 그리고 걱정스레 두 사람을 보고.
"나는, 치 짱이랑 이즈미 짱이 와 줘서 굉장히 기뻐."
두 사람의 사이가 썩 좋아보이지 않아서 불안한 거겠지.
이즈미 짱이 질책하듯 치하루 짱을 봤다. 치하루 짱은 윽 소리를 냈다.
"있잖아…… 나도……"
"뭐가?"
"……아무 것도 아냐."
치하루 짱은 불퉁한 채 일어섰다.
"나 먼저 갈게. 꼭 누워 있어, 아오이."
"앗, 치 짱"
문이 쾅 닫힌다.
이즈미 짱은 실수했다는 표정이다.
"어쨰, 안될 짓은 해버린 걸까요."
분명 치하루 짱에게 아오이 짱 병문안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걸 방해받으니 삐져 버린 거고.
그런 면은 아직 초등학생이구나, 하는 느낌이라 나는 흐뭇하지만 남겨진 아오이 짱은 풀이 죽었다.
"저기, 죄송해요"
사정은 잘 모르면서도 이즈미 짱은 고개를 숙였다.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분위기 파악 못 해서 미안해요. 저도 가 볼게요."
"아냐, 이즈미 짱은 잘못 없어. 아마 치 짱도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겠지. 미안해, 또 와 줘."
"네, 감사합니다. 또 올게요."
이즈미 짱도 어색하게 돌아갔다.
하흐, 하고 아오이 짱은 침대 위를 굴렀다.
"무슨 일일까, 치 짱……"
초등학생이지만 소녀심은 복잡하단 거지.
하지만 이즈미 짱이 돌아간 후였다. 집에 갔을 치하루 짱이 다시 돌아왔다.
"아, 치 짱."
"아깐 미안."
아오이 짱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치하루 짱이 사과했다.
"뭔가, 갑자기 확 열받았었어. 전부 내 잘못이야. 때려도 돼."
"아냐, 그런 거 못 해."
치하루 짱은 굳은 표정으로 아오이 짱의 손을 잡고 자기 뺨을 짝 때렸다.
"내일 이즈미 한테도 사과할거야."
사과 할 줄 아는 치하루 짱은 착한 아이.
"잘 모르겠어. 왜 그래, 치 짱. 배 아팠어?"
"……아냐. 그냥, 뭔가…… 그 녀석이 이상한 책을 빌려줘서 그래."
억울해 보이지도,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은 치하루 짱의 얼굴은 붉었다.
말 없이, 아오이 짱은 그런 치하루 짱을 멍하니 쳐다본다.
한참동안 방에선 시곗바늘 소리만 난다.
"마법."
아오이 짱이 툭 내뱉었다.
"오늘은, 안 해?"
"……"
치하루 짱은 아오이 짱의 뺨에 손을 댔다.
하지만, 거기서 멈췄다.
더없이 긴장한 표정의 치하루 짱은 아오이 짱의 눈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본 걸지도 모른다.
예전에 병문안 왔을 때와 지금의 치하루 짱, 뭐가 다른 걸까.
백합 교육을 받기 전후다.
치하루 짱의 입술이 떨린다.
"……할게, 마법. 눈, 감고 있어."
"응"
아오이 짱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눈을 감았다.
치하루 짱은 숨도 쉬지 않고 천천히 얼굴을 가져다 댄다. 그건 이마가 아니라, 조금 더 아래 쪽…….
쪽 하는 가벼운 소리를 내며 치하루 짱은 아오이 짱의 입술에 키스했다.
────소리 없는 절규가 내 입에서 터져나왔달까 나는 애초에 입이 없었다.
아…… 하는 소리를 낸 건 아오이 짱.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쳐다봤다.
치하루 짱이 부끄러움을 버티지 못한 듯, 먼저 눈을 돌렸다.
"…… 이것도, 마법?"
"이건."
치하루 짱의 말이 막힌다.
꼭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마법이야, 이것도."
"그렇구나."
"이마에 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아."
"그치만 입에 하면 옮지 않을까나."
"아오이는 감기같은 게 아니라 마음의 문제니까."
"그렇구나……"
치하루 짱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아오이 짱은 미안한 듯 웃었다.
"미안해, 늘 민폐 끼쳐서. 나, 똑부러지는 사람이 될게. 치 짱이 걱정 안해도 되게, 강해질게."
"아니, 아오이는 지금 그대로도……"
"노력할게."
"……응, 힘 내."
오늘의 마법은 한 번이었고, 치하루 짱은 끝까지 뺨을 핑크색으로 물들인 채 방을 나섰다.
마치 멈춰 있던 심장을 움직이듯.
혼자가 된 아오이 짱은 후우 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마법…… 인거지?"
답을 물어도 방엔 더 이상 아무도 없다.
머뭇거리듯 살짝 입술을 쓰다듬고.
"……뭔가, 엄청 두근두근 했을, 지도……"
저 꼬맹이같은 아오이 짱에게도 오늘의 마법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 모양이다.
아니, 나도 두근두근 했다……. 둘 만의 세계를 엿봐버렸다…….
초등학생들이── 게다가 그 중 하나는 친동생이── 뽀뽀하는 장면을 이렇게 가까이서 훔쳐볼 수 있다니……. 굉장히 나쁜 짓을 한 기분이다.
관엽식물이 되지 않았더라면 평생 볼 기회가 없었으리라.
아오이 짱은 뜨거운 한숨을 내뱉고, 한동안 잠이 안 오는 듯 뒤척였지만, 다음날은 건강해져서 학교에 갔다.
다음 날, 교실에서 마주한 아오이 짱과 치하루 짱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 화분에 뿌리내린 나는 상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이즈미 짱은 이따금 놀러 와서 둘 사이를 휘저었다.
치하루 짱과는 가끔 말싸움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 또래 애들답게 금방 화해하고, 지금에 와서는──.
"……야, 다음 권은 대체 언제 가져올거야."
"아, 미안해요. 오늘도 깜빡했어요~"
"일부러 그런거지. 일부러 레이니 블루에서 멈춘 거지 이즈미. 어엉."
"치하루 양에게도 이 조바심을 느꼈으면 해서요."
눈도 깜짝 안하고 혀를 내미는 이즈미 짱을 보고 치하루 짱은 "정말이지……" 라며 앓는다.
주고받는 건 늘 아오이 짱 방이고, 아오이 짱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행해졌다. 꼭 남편이 없을 때 불륜을 저지르는 유부녀 백합…….
다음 권으로 읽어나가는 게 기쁜지 이즈미 짱은 신이 나서 치하루 짱의 팔을 잡아 끈다.
"그래도, 어떤가요? 재미있죠? 두근거리지 않아요?"
치하루 짱은 진절머리 난 듯 이즈미 짱의 손을 뿌리치며.
"백합이란 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멋진 선배에게 끌리는 마음은 어쩐지 이해 돼. 하지만 그런 게 딱히 연애감정은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는 치하루 짱의 귀가 빨갛게 물든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첫뽀뽀까지 해놓고 무슨 소리니 얘는!
그 사실은 몰랐겠지만 재미있게 본다는 사실은 이해 했는지 이즈미 짱은 장난꾸러기 고양이처럼 웃었다.
"치하루 짱이 마음에 들어해서 기뻐요. 그럼 여기 다음 권이요."
"있으면서 그래!"
가방에서 꺼낸 책을 잡아 채듯 받아 든다.
"그건 그렇고 몇 권이나 되는 거야……"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거의 다."
이렇게 치하루 짱은 초등학교 6학년 1년간 마리미떼를 전부 독파했다.
마지막 부분쯤 되자 '협박당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하고 혼자 변명하면서도 책을 빌릴 때 기뻐보이기도 했고.
다른 친구가 놀러 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오이 짱과 치하루 짱과 이즈미 짱, 셋의 관계는 더없이 특별한 것으로 보였다.
입술에 건 '마법'은 딱 한 번 뿐이었지만, 그 이후로도 열이 날 때마다 치하루 짱은 아오이 짱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아오이 짱이 크고, 어른이 되고, 튼튼해질수록 그 빈도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건 분명 좋은 일이리라.
자라가는 어린 백합 봉오리를 보고 즐기듯, 나는 걔들을 지켜본다.
이렇게 행복한 광경을 보기 위해 관엽식물로 태어난 거다…….
그리고 셋은 조금씩 어른이 된다.
이야기는 다음 막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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